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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06화 (106/131)

106. 그 약조, 지킬 때가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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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겨울의 심술에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새벽녘부터 내린 눈이 대궐 지붕에 소복이 쌓였다.

이른 아침부터 대궐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었다. 발목까지 잠기는 눈길을 뚫고 입궐하는 대신들의 표정은 두 갈래로 엇갈렸다.

무에 속셈이 있는 듯 웃음을 숨기는 자와 불편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

그 표정의 차이는 대전에 들어설 때 더욱 극명해졌다.

어좌가 있는 대전의 단상을 중심으로 대신들은 양옆으로 갈라섰다.

한쪽은 안동 김씨 일문을 주축으로 한 외척의 세력이었고, 다른 한쪽은 세자빈 조 씨를 등에 업은 풍양 조씨 일문이었다.

마주 선 대신들 간에 차가운 기운이 오고 갔다.

“세자저하 납시오.”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한 공기 속으로 영의 출현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대전의 문이 열리고 검은 곤룡포를 입은 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 사이를 묵묵히 지나친 영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세자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부원군 김조순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 늦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김조순의 목소리에 들어찬 서릿발 같은 기운이 대전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기이한 이야기라뇨?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소이까?”그와 마주 서 있던 조만영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자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 저리 나오는 것일까?

조만영의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조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십수 년 전, 이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홍경래를 기억하십니까?”“나라의 큰 변이었으니, 여기 모인 사람 중에 그때의 황망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외다. 헌데, 갑자기 그자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어젯밤, 이 늙은이의 귀에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궁에, 그것도 다름 아닌 세자저하의 곁에, 바로 그 홍경래의 자손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어허, 부원군 대감. 어찌 그리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외다. 나 역시도 어찌 이리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감히 저하께 여쭙고 싶사옵니다.”김조순이 고개를 돌려 영을 올려다보았다.

“저하, 소신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이 궁에 역적의 자식이 활개 칠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김조순은 추궁하듯 물었다.

그러나 영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누구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대감에게 전한 자가 뉘란 말이오?”보다 못한 조만영이 다시 나섰다.

세자빈의 아비이자 이번에 새로이 한성부판윤이 된 조만영이 왕세자를 대신하여 눈빛을 세웠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질 않소.”“허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외까?”“역적의 자식이 궁을 활보하였소. 그것도 다름 아닌 세자저하의 바로 곁을 지키던 환관의 신분으로 말이오.”“억지도 정도껏 하시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졌소이다.”“대체 그자가 뉘란 말이오?”“환관…… 홍라온이요.”김조순의 말에 대전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대전을 지키고 섰던 환관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환관 홍라온.

그 자가 역적의 자식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라온을 아는 환관들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알고 있고, 기억하는 라온은 역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언제나 사심 없이 다른 이의 고민을 들어주던 사람.

세자저하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단 한 번도 다른 이를 내려다본 적 없었던 사람.

누구에게나 온전히 제 마음을 보여주던 사람.

그런 사람이 역적의 자식이라니?

도저히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 동요하지 않는 환관들과는 달리 대신들은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확실한 것입니까?”조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몇 번이나 확인한 일이오. 이미 그에 관한 내용을 의금부에 전달하였으니, 곧 진상을 들을 수 있을 것이오.”“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대체 그런 자가 어찌 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조만영이 묻자 기다렸다는 듯 김조순이 대답했다.

“동조자가 있었소.”“동조자라뇨?”“전 상선 한상운과 판내시부사 박두용이 그자의 후원인을 자청하였다고 하오.”“이런. 그게 정말입니까?”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물음에 김조순이 확고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역적의 자식이, 그것도 계집이 환관이 될 수 있을 리 없질 않소.”“지, 지금 뭐라고 하셨소이까? 계, 계집이라 하였소?”“네. 계집이요. 그자, 알고 보니 계집이었소.”쿵!

순간, 소리 없는 벼락이 대전 곳곳에 내리쳤다.

애써 무심함을 가장하던 환관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놀라고 황망한 것은 환관들만이 아니었다.

대신들은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어허, 계집이라니. 감히 계집이 내관이 되다니. 어찌 이런 일이…….”“이 나라 종묘사직이 어찌 되려고 그런 무도한 일이 일어났단 말입니까?”“환관이 되기 위해서는 신체검사 철저히 한다고 들었는데. 허면, 신체검사와 시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단 말이외까?”“어허, 이 궁 어딘가에 그런 자들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지금 당장 전 상선 한상운과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을 잡아들여야 합니다. 허고, 시술을 맡았던 자 역시 잡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분노에 찬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김조순이 고개를 저었다.

“잡으러 갔을 때는 이미 눈치를 채고 도망친 다음이었소.”“어허, 이런 일이. 궁궐의 법도가 어찌 이리 허술하단 말입니까? 어허.”김씨 일문들 사이에서 연신 혀 차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때는 지금이라는 듯, 안동김씨 일문들이 하나둘 왕세자의 앞으로 나섰다.

“저하, 지금 당장 그 홍라온이라는 자를 잡아들이소서.”“도망간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과 전 상선 한상운은 물론, 홍라온의 신체검사와 시술을 맡았던 엄공 역시 잡아들여야 합니다.”“그뿐이 아닙니다. 지금도 궁 안 어딘가에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활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궁의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그때였다.

김조순이 영의 바로 앞에서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세자저하, 그 홍라온이라는 환관은 지금 어디에 있사옵니까? 그자를 궁으로 들여보냈던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옵니까? 그들이 어떤 흑심을 품고 저하께 접근하였는지…… 저하께서는 혹여 아시옵니까?”모두의 시선이 영에게로 향했다.

동궁전의 내관 홍라온은 영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홍라온을 궁으로 들인 자들 역시 모두 영의 사람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김조순의 물음은 결국, 영을 겨냥한 것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나 궁내에 좋지 않은 기류가 있는 것은 분명하오.”그의 말에 웅성거리던 대전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왕세자가 스스로 역모의 움직임이 있었다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외척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반대로 풍양조씨 쪽 대신들의 얼굴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았다.

영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의심은 있을 뿐 정확한 물증은 없소. 잡았다는 범인들조차 중도에 사라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사라졌다고 들었소.”“압송 중인 죄인을 도와준 자들이 있다는 것 역시 역모의 조짐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김조순이 항변하듯 소리쳤다.

영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원군 대감의 의견 또한 일리가 있소. 하여 묻겠소.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소?”김조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든 진상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조사단을 꾸리고 병사를 풀어 궁 안팎을 모두 조사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여야 할 것입니다.”“옳은 말이오. 그리고?”“이번 일을 진행함에 있어 결백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지는 사항이옵니다. 하여, 조사단을 저희 쪽에서 꾸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순간, 조만영이 눈에 불을 켜고 끼어들었다.

“아니 될 말입니다. 이번 일을 조사할 때 최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공정함입니다. 부원군께서 단독으로 조사단을 꾸리면, 형평성이 무너질 것이고, 형평성이 사라지면 공정함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김조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조만영을 향해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궁 안에 역적이 있소. 세자저하의 곁에 있던 자도 연루되었소. 자칫 큰일이 될 수도 있었단 말이오. 상황이 이런 판국에 누굴 믿을 수 있겠소?”“그래서요? 부원군 대감의 사람들은 옥수처럼 맑기만 합니까? 대감의 말씀은 대감의 사람이 아닌 자들은 모두 부정하고, 역모와 관련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소이다.”“그럼, 누굴 믿을 수 있단 말이오?”“내 생각에는 누굴 믿을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그게 무슨 말이오?”“역모를 의심하는 말들은 많지만 정작 증거도 증인도 없으니…… 허허, 만약, 홍라온이라는 자를 비롯한 몇 사람이 음모를 꾸며 역모를 가장하듯 연기를 한 것이라면 어찌 되겠소?”“불민한 일을 직접 목도한 자들이 수십 명에 이르오. 그런 사람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오?”“그 사람들조차 정확한 진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몇몇 사람의 말만을 들은 것뿐이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조만영의 말에 김조순 일파의 젊은 중신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부원군 대감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입니까?”“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외다.”김조순과 조만영으로 시작된 언쟁은 어느덧 다른 대신들까지 합세하여 대전을 어지럽게 하였다.

그때였다.

내내 지켜보던 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대신들의 입이 일순간에 다물렸다.

“이번 일은 진위를 떠나 궁의 법도와 질서를 어지럽힌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하오. 그런 뜻에서 몇 가지 결단을 내릴까 하오.”대신들을 한 사람씩 찬찬히 훑어본 그가 한마디씩 뱉듯이 말을 이었다.

“첫째, 달아난 자들을 추적하여 잡으시오. 그들을 잡아야 비로소 이 일의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오. 발이 잰 추격자들을 뽑아 홍라온을 비롯한 도망자들을 반드시 잡아야 할 것이오.”“…….”“둘째, 조사대를 꾸리시오. 조사대는 부원군 김조순 대감과 한성판윤 조만영 대감이 상의하여 뽑도록 하시오. 조사대는 궁 안팎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를 모조리 잡아들여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시오. 이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명을 마친 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숙인 대신들 사이로 희비가 엇갈렸다.

김조순을 비롯한 김씨 일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세자저하의 명은 그들이 말한 내용 거의 전부를 받아들인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반해 풍양조씨 일가의 얼굴엔 암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어찌하여 저하께서는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셨단 말인가. 정말로 자신의 사람들이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치실 생각이시란 말인가? 어렵구나. 어려워.’이 일로 말미암아 거침없이 나아가던 영의 행보가 더뎌질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국정의 기조를 저들에게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 내린 결정은 누가 보더라도 부원 김조순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정말로 길을 잃어버리신 것입니까?’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조만영의 눈빛이 어둡게 물들었다.

*  *  *

대전을 나선 영의 어깨 위로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잿빛 하늘을 우두커니 올려다보던 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 잘 가고 있는 것이냐?”새벽부터 가늘게 내리기 시작하던 눈발이 제법 굵어졌다.

율이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아침 무렵에 도성 밖으로 떠났다 하였다.

어디쯤 갔으려나.

이리 눈발이 매서워질 줄 알았으면 좀 더 든든히 입혀 보낼 것을…….

대신들 앞에서는 추적대를 꾸려 반드시 잡아오라 하였지만, 정작 대전을 나온 이후로는 라온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럼에도 추적대 운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 함께 간 벗을 믿기 때문이었다. 병연이라면…… 그의 실력이라면 추적대를 보기 좋게 따돌릴 수 있으리라.

“눈이 그치면 좋으련만.”이 눈발을 헤치고 달려가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저하…….”문득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연이 하얀 눈을 밟으며 걸어왔다.

영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하연이 영과 보조를 맞추며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가 벌써 빈궁의 귀에까지 들어갔소?”“가장 비밀이 많은 곳도 궁이지만, 비밀이 존재할 수 없는 곳 또한 궁이 아니겠습니까?”“그렇구려.”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온데, 저하. 신첩이 들은 이야기가 참이옵니까? 그 사람, 정말로 역적의 자손이었사옵니까?”“역적의 자손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소?”영의 물음에 하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연의 눈에 확고한 의지를 담은 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내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하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첩이 어리석었습니다.”“…….”“제 아비와 식솔들이 저하의 편이 될 것이옵니다. 미흡한 힘이나마 저하께 도움이 된다면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설혹 그 와중에 조금의 탈이 생겨도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는 저하의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고맙소.”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 곁을 하연이 말없이 걸었다.

발아래로 사박거리는 눈의 촉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후원으로 들어섰다. 이내 하얗게 눈 쌓인 영화당의 지붕이 들어왔다. 그 앞으로 얇게 살얼음이 낀 부용정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 문득 세자빈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시오?”덩달아 걸음을 멈춘 영이 하연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부용정 앞에 서 있는 노인이 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영과 노인을 번갈아 보던 하연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신첩은 이만 가보겠사옵니다.”“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좋겠소.”짧은 산책을 끝낸 하연이 조용히 물러갔다.

잠시 후, 홀로 남은 영의 곁으로 노인이 다가섰다.

“저하.”영은 자신을 향해 깊게 머리를 조아리는 노인을 노기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정약용의 주름진 얼굴에 깊은 시름이 깃들었다.

그는 부용정을 바라보고 있는 영의 뒷모습을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세자빈이 자리를 피한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저하.”영을 부르는 정약용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한참이나 부용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영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정약용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선생은 그 아이가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들었소.”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정약용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정약용은 차가운 눈밭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영의 시선은 여전히 차고 시렸다.

“어찌하여 내게 복숭아를 가져오란 말을 하였소? 그 아이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생이 어찌하여 그 아이를 내 곁에 두려 한 것이오? 설마…… 나를 농락하기 위함이었소?” “아닙니다.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은 다만…….”“다만…… 무엇이오?”“그 아이를 살리기 위함이었사옵니다. 사랑하는 손녀를 살리기 위한 할아비의 마지막 방법이었습니다.”“살리기 위함이었다?”마음속의 심화를 다스리기 위해 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그 아이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역적의 자손인 라온이 가장 피해야 할 사람 중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왕세자인 영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약용이 영과 라온을 이어주려 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

정약용을 향한 영의 눈매가 매서웠다.

그때, 진심을 담은 정약용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아비가 역모를 저지르는 순간, 세상은 이미 그 아이의 적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진작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죽이려 드니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설사 산다 하여도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인생일 뿐입니다.”“그래서 나와 그 아이를 억지인연으로 묶으려 했단 말이오?”“억지인연이 아닙니다. 저하께서 라온이, 그 아이와 함께 제 앞에 선 순간, 소신에겐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로 묶인 듯 보였습니다.”“운명?”“그 아이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늘이 맺어준 운명. 그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사옵니다.”“그게 무슨 뜻이오?”“그 아이가 살 방법은 오직 저하뿐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모는 세상보다 더 높은 분에게서 정(情)을 얻는 방법뿐이라 생각했습니다.”“정? 어찌하여 정이오?”“세상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그 마음 중에서도 가장 깊고 무거운 것이 정이라 생각하였습니다.”“정이라…….”“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가 그렇듯, 연모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연인이 그러하듯……. 세상에 정보다 더 짙고 무거운 것은 없다 생각하였습니다. 하여, 그 아이에게 세자저하의 정을 얻게 하였습니다. 아니, 저하께서 스스로 그 아이에게 정을 주시길 원하였습니다.”“…….”정약용의 생각이 옳았다.

세상에 가장 무섭고, 가장 강력한 올가미.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고 정이었다.

그는 이미 홍라온이라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올무에 걸려들었다. 그것은 라온이 만든 것도, 그렇다고 정약용이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 스스로 원하여 만든 덫이었다.

정이라는 이름의 덫.

정약용의 판단은 옳았다.

결국, 영은 라온을 위협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바로 천하의 주인뿐이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려든 것 같았다.

모든 일에 빈틈이 없다 자신했는데, 이런 틈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안타까웠다.

좀 더 빨리 라온에 대해 알았더라면 저리 떠나보내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이 시린 눈밭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선생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소.”아니,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신이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그만 일어나시오.”“저하…….”“날이 차갑소. 차가운 바닥에 오래 있다가 선생의 일신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그 녀석이 내내 쫓아다니며 내게 잔소리할 거요.”“저하께서 그깟 녀석의 잔소리를 무서워하십니까?”“내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그 아이의 잔소리가 무섭소.”영의 말에 정약용이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저도 라온이가 잔소리를 할 때면 심장이 오그라듭니다.”“하하하, 역시.”맹랑한 녀석. 천하의 다산 선생마저도 꼼짝을 못하게 만들었구나.

영은 쓸쓸히 웃으며 후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정약용이 따랐다.

“저하.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알고 있소. 저들은 어떻게든 이것을 빌미로 나를 압박하려 들 것이오.”“그들에게는 좋은 빌미거리가 되었으니까요.”“상관하지 않소. 저들이 일으키는 바람쯤이야 가벼이 넘길 수가 있소. 다만…….”“…….”“이 일로 나를 지탱하던 기반이 흔들렸소. 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깨지고, 분열이 생길 것이오.”그것을 이용해서 저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저들은 이번 일을 기회로 과거 아바마마께 했던 일을 내게도 하려 할지도 모른다.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하고, 반역자들로부터 왕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시 병권을 장악하고 왕실을 자신의 허수아비로 만들려 하겠지. 그러나…… 어림없다.

그리 순순히 당해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었다.

영의 눈매가 단호해졌다. 그는 걸음을 세우고 정약용을 돌아보았다.

“선생.”“말씀하시옵소서.”“저들은 이번 일이 나의 약점이 되리라 생각할 것이오. 허나, 나는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으려 하오.”“저하시라면 충분히 그리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옵니다.”“선생의 도움이 필요하오.”“도움이라시면?”“기억하오? 일전에 내가 내린 관직을 거부하며 선생이 나와 했던 약조 말이오.”“…….”“그 약조, 지킬 때가 되었소.”“……!”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깨 위로 차가운 눈이 내려앉았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은 매서웠다.

그러나 마주 보는 두 개의 시선.

그 속에 담긴 믿음과 신뢰라는 뜨거운 기운이 차가운 공기를 밀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정약용이 묵직한 침묵을 깨트렸다.

그는 영을 향해 허리를 깊게 조아렸다.

“신(臣) 정약용, 세자저하의 명을 받자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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