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나는 너를 연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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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3
“……화초저하.”그리운 이름이 라온의 입을 타고 새어나왔다.
복면에 가려진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저는 저하…….”미안하다 말하고 싶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로 인해 저하의 계획이 모두 헝클어지게 되었습니다.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저하를 속이고 되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말을 하기 위해 라온이 막 입을 열 때였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다.”영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주위를 살피던 그는 서둘러 라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싸우는 자들에게서 들려오던 소란스런 마찰음이 배는 더 커졌다.
돌연, 병연이 무서운 기세로 박만충에게 달려들었던 까닭이다.
그로 말미암은 큰 소란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병연에게로 쏠렸다.
싸우는 와중에도 라온의 동태를 살피던 병연은 이쪽의 상황을 눈치챘다. 어떻게든 라온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엿보던 그는 일부러 박만충에게 달려들었다.
벗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 준 기회.
영은 그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영은 라온을 담장 너머로 넘겼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그녀를 말 위에 태웠다.
잠시 후, 최 씨와 단희까지 차례로 담장 너머로 넘긴 영은 자신 역시 담을 타 넘었다.
박만충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라온과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죄인들이 사라졌다. 죄인들을 찾아라!”뒤늦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죄인보다 그대의 목숨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군.”병연이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기세가 좀 전보다 훨씬 거칠게 변했다.
순간, 박만충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지금까지는 힘을 아끼고 있었던가?”박만충의 물음에 병연은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옳게 짚었다.
상대의 수중에 떨어진 라온이 혹여나 다치게 될까봐 지금까지 제대로 날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싸워 볼까?”“질긴 놈.”박만충이 이를 으득 갈며 허공으로 박차 올랐다.
병연 역시 마음 놓고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맞부딪친 두 개의 검이 허공에 푸른 불꽃을 만들었다. 치열한 불꽃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 * *
목멱산 자락의 작은 초가에 은밀한 그림자들이 스며들었다.
영과 라온, 그리고 최 씨와 단희였다.
바깥에서 보기엔 허름한 초가였지만, 내부는 안락하고 깨끗했다.
“그 아일, 여기에 눕히시오.”방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영은 이부자리부터 폈다.
잔뜩 주눅이 든 최 씨가 서둘러 단희를 그 위에 눕혔다.
공포와 두려움에 덜덜 떨던 단희는 허물어지듯 이불 위로 쓰러졌다.
“고맙습니다.”어머니와 동생을 돌아보며 라온이 말했다.
그러나 영은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던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하…….”“너와의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뤄야겠다. 그전에…….”영은 최 씨에게 눈빛을 보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소.”“하문하십시오.”영이 이 나라의 왕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최 씨는 차마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아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소?”영은 자식의 추측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이 맞는다면 라온은 처음부터 제 아비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겠지. 하여, 감히 말도 없이 궁을 떠나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영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최 씨가 입을 열었다.
“저 어린것들에게 집안의 숨은 내력을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은 저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영문을 숨긴 채 그저 도망만 다녔습니다. 그러니 저 아이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최 씨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더욱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세자저하, 부디 저 아이를 용서하여 주십시오.”“…….”“우리 라온이, 국법을 어기고 감히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긴 했으나 그 모든 것이 못난 어미 탓입니다. 살기 위해 저 아이에게 거짓 사내 노릇을 하라고 강요하였지요. 싫다고 하는 어린 것에게 억지로 사내 옷을 입히고, 사내로 살라고 윽박질렀습니다.”고개를 숙인 최 씨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온에 대한 미안함이, 어미가 되어 어린 자식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여린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죄를 지었다면 제가 지은 것입니다. 우리 라온인 아무 죄도 없습니다. 오늘의 일, 저 아이에겐 청천벽력이었을 겁니다. 미안하다, 라온아. 정말 미안하다.”라온을 아픈 눈으로 응시하던 최 씨가 다시 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하, 그러니 저를 벌하시고 제발 우리 라온이는 용서하여 주십시오.”“그만 일어나시오.”영은 간절히 애원하는 최 씨의 손을 잡았다.
“죄를 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오.”“하오나 저하, 어찌…….”“내 저 아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겠소.”영은 긴 한숨을 쉬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잠시 나와 걷겠느냐?”말과 함께 영은 방을 나섰다.
그의 뒤를 라온이 따랐다.
* * *
어느새 희붐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의 마지막 귀퉁이를 잡고 있는 푸른 장막 속을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을 얼마나 견뎠을까?
영이 입을 열었다.
“언제 알게 되었느냐?”아비에 대해 어찌 알게 된 것이더냐?
조금은 아픈 물음.
그러나 라온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얼마 전, 할아버지께 듣게 되었습니다.”“다산 선생께서?”“네.”“세자빈을 들일 때였느냐?”그때부터였다.
라온의 행동이 예전과 달라졌을 때가.
“머리가 복잡하여 할아버지께 여쭈러 갔었습니다. 제가 어찌해야 옳은 것인지. 할아버지라면 제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무엇을?”“제가…… 감히 환관으로서도 저하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새벽빛이 쓸쓸하게 웃는 라온을 비추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파 보여 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미련한 녀석. 그런 일이 있으면 내게 말을 했어야지. 어찌하여 내게 숨겼더냐? 네게 나는 무엇이냐? 네 눈에는 내가 그리 미덥지 못해 보이더냐? 하여, 말도 없이 그리 떠나려 하였느냐?”“……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제가 저하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하의 어깨에 제 짐까지 올려놓고 싶지 않습니다.
대답하는 라온의 목소리에 습윤한 물기가 들어찼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영이 다가왔다.
“최선? 지금 최선이라 하였느냐?”“저하…….”“네가 떠난다 하여 모든 일이 해결될 거로 생각했느냐? 그리 떠나버리면 나는…… 너를 그리 보내고 내가 온전히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냐?”“…….”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동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그 검은 눈동자에 담긴 노기 섞인 아련한 슬픔이 선명하게 라온에게 다가왔다.
라온의 눈에 어룽어룽 눈물이 맺혔다.
순간, 영은 그녀의 작은 몸을 제 품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나를 믿으라 하지 않았느냐? 네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느냐. 네가 사내이든 여인이든, 그 무엇이든 나는 상관없다. 네가 역적의 자식이라 하여도…… 하여, 내 목에 칼을 들이민다고 해도 나는 너를 연모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제가 뭐라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나를 이리 만들어 놓고. 감히…… 감히…… 내 명도 없이 나를 떠나려 했단 말이냐?”“…….”“이젠 너 없이 난 살 수가 없다. 아직…… 아직도 모르겠느냐?”“하지만 제가 저하의 곁에 있으면 저하께서 꿈꾸시는 세상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내가 진실로 만들고 싶은 세상에선 언제나 너와 내가 함께 있었다. 너 혼자도 아니고, 나 혼자도 아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너를 만난 후부터…….
너를 알게 된 그때부터…….
내 꿈은, 내 소망은, 나의 간절한 염원은…… 너와 함께 있어야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네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저하.”영의 마음이, 그의 깊은 연모에 마음이 아렸다.
애써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문 라온은 조심스레 영의 품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찌합니까?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역적의 자손이 세자저하의 곁을 지켰다고 생각할 겁니다. 세자께서 역심을 품은 자들과 어떤 모의를 했다고 저하를 핍박하고 몰아붙일지도 모릅니다.”“상관없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어찌하여 그런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저들은 어떤 구실을 만들어내서라도 나를 압박했겠지.”한숨을 쉬며 영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굳이 애써 짜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훤히 보였다.
그들은 라온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녀를 나의 허점이라 생각하고 집요하게 파고들려 하겠지.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괴로운 사람은 라온이겠지.
가장 상처 입는 사람도 라온이 될 것이다.
라온이 역적의 자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라온이 나의 약점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비정한 승냥이 같은 자들은 내 앞에서 너를 처참하게 괴롭히려 하겠지. 그것이 나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으니, 분명 그럴 것이다.
“라온아…….”라온을 부르는 영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너무 깊고 짙어 라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영이 라온을 돌아보았다.
산마루에 비스듬히 고개 내민 햇살이 그의 눈동자에 노르스름하게 걸려 있었다.
그 빛깔이 연못에 일어난 파문처럼 잔잔하게 출렁거렸다.
“너는 당분간 내 곁을 떠나 있어야겠구나.”영의 말에 라온은 얼음 칼로 가슴이 찔리고 베인 듯 시리고 따끔거렸다. 아무리 영이 원한다고 하여도 떠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떠나라는 말이 이리도 아픈 말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래도 웃어야지.
행여 서러운 모습일랑은 보이지 말아야지.
라온은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아주 잠시만 떠나 있으면 될 것이다. 네가 없는 동안 너를 위협하고 너를 적대시하는 모든 것을 치워버릴 것이다.”영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며 의지를 다졌다.
“어떻게 말입니까?”“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너는 그저 마음 편히 나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저하…….”제가 어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어떤 고초를 당할지 뻔히 알고 있는데, 어찌 마음 편히 당신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게 다 생각이 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이번 일로 내 사람이라 믿었던 자 중에 간자를 추려 냈으니. 나름의 소득도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라온아 잠시만 떠나 있어라.”말을 마친 영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병연이 두 사람의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병연아.”“말해.”“이 녀석을 부탁한다.”영의 말에 병연이 다가왔다.
소매 끝으로 검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듯 병연은 심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다.”그의 대답에 안심한 듯 영은 라온을 응시했다.
“곧 데리러 가마.”“네.”“몸조심해야 한다.”“제 걱정은 마십시오. 튼튼한 거 빼면 아무것도 없는 저입니다. 그러는 저하야말로 몸조심하셔야 합니다.”“그래.”“일이 아무리 많아도 잠은 꼭 주무셔야 합니다.”“알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수라 거르시면 안 됩니다. 제 당부, 잊지 않으셨죠?”“그래.”“환관들이 내오는 탕약이랑 차도 식지 않도록 그때그때 드십시오.”“녀석…….”길게 당부를 늘어놓는 라온을 영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들어차는 물기 때문인지, 자꾸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행여, 눈가에 맺힌 물기를 들킬세라 영은 괜스레 손을 들어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지막까지 잔소리구나. 너야말로 이제부터 더는 거짓 사내 노릇 하지 마라.”“네.”“고운 옷 입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네.”대답하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라온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애꿎은 땅만 파고 있던 발끝으로 문득 뜨거운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영은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보내기 싫다. 이대로 그림자처럼 제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영은 애써 라온의 눈물을 외면했다.
“그럼…… 나는 이만 환궁해야겠구나.”더 지체했다가는 영영 보내기 싫어질 것 같아 그는 서둘러 발길을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세우고 병연을 돌아보았다.
“잠시만 부탁하는 것이다. 아주…… 잠시만이다.”당부하듯, 그리고 다짐하듯 말을 마친 그는 검푸른 새벽안개를 향해 걸어갔다.
“저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가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기어이 저하의 어깨에 저의 짐마저 얹어놓고 말았습니다.
홀로 무거운 짐 짊어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홀로 가시밭길 걷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저하,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곧 다시 돌아와 제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저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꼭 저를 데리러 오십시오.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물기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엔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영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 *
이른 아침.
회색빛 하늘이 머리 위로 무겁게 깔렸다.
“눈이 이리 잦은 걸 보니 올해는 풍년이겠구나.”시린 눈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보던 윤성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기루를 나선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다.
어젯밤에 마신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기루 특유의 냄새와 끈적한 공기에 숨통이 막혔다. 하여, 도망치듯 그곳을 나섰다.
그리고 걸었다.
처음부터 어디를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걸음은 아니었다.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에 그저 발걸음만 옮길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윤성의 발길이 멈춘 곳은 수표교 근처의 담뱃가게 앞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윤성의 입가에 쓸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 다리가 미쳤는가 보구나. 어쩌자고 이곳에 온 것일까? 하필이면 이곳에…….”라온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었다.
금방이라도 저 안에서 제 동생과 향낭을 팔던 라온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라온의 잔상을 떨쳐내기 위해 윤성은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담배 드릴까요?”담뱃가게 안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요 없소.”“그럼…… 혹여, 삼놈이를 찾아온 겁니까?”긴 곰방대로 담배를 빠끔 대며 묻는 구 노인의 물음에 윤성은 걸음을 멈췄다.
삼놈이.
라온이 이곳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녀를 삼놈이라 불렀다고 했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참으로 서글픈 이름이었다.
여인이었으나 여인으로 살지 못하고, 항상 사내들과 함께 있으나 진정으로 사내에게 다가갈 수 없는 기구한 운명.
이름도 잃어버리고, 타고난 여인의 본능마저 잃어버리고, 마음까지 버려야 살 수 있었던 삶이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윤성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며 구 노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힐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던 구 영감이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선비님, 근심이 있어 보이십니다.”“그리 보이오?”“선비님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그렇소?”윤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이 안 나십니까? 어제도 오셨었고, 그제도 이리로 발길 하셨지요.”“어제와 그제라면…….”정신없이 술에 취해 있었던 날들이었다.
술에 취해 버릇처럼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윤성의 씁쓸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토록 아파했는데, 취해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몸부림쳤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인가.
의식이 흐릿할 때마저도 여전히 라온을 찾았단 말인가.
“연모 때문입니까?”“어찌 그리 생각하는 것이오?”“젊은 사내들이 이곳을 찾는 연유라면 뻔하지요. 열이면 열, 모두 애끓는 연모 때문이지요. 삼놈이가 있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을요.”“삼놈이가 그리 신통하오?”“말해 무엇합니까? 그 아이라면 해결하지 못하는 고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선비님,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습니다.”“뭐가 늦었단 말이오?”“삼놈이는 지금 궁에 들어가고 없습니다. 그 녀석이 있었을 땐, 이 담뱃가게도 이리 한적하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고민을 상담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지요.”“그 정도였소?”“네.”“궁금하구려. 그 사람은…… 어찌 그리 다른 이의 고민을 그리 잘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오?”“글쎄요.”구 영감은 곰방대를 깊게 빨았다.
후, 내뿜는 숨결에 하얀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마,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심정이 이해하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요?”“…….”“진정으로 그 사람을 걱정했으니, 고민의 해결책도 쉽게 보였던 것이겠지요.”“진심으로 그 사람을 걱정했다…… 그 사람이 되어 생각했다…….”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윤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고민 상담을 그리 잘한다니, 한번 그 사람에게 내 고민도 물어봐야겠소. 그 사람이라면…… 어쩌면 내 고민도 해결해 줄지 모르겠구려.”“그 아이라면 틀림없이 선비님의 고민도 해결해 줄 겁니다.”“그렇소?”“네. 이 늙은이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윤성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더 기다릴 것이 무어겠소. 내 당장 그 사람을 만나봐야겠소.”말과 함께 윤성이 걸음을 옮겼다.
“허허허. 궁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봅니다. 혹, 라온이 그 녀석을 보거든 제 안부도 좀 전해주십시오.”“그리하겠소.”휘청휘청 걷던 윤성이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뒤를 돌아보았다.
긴 곰방대를 연신 빨며 뻐끔뻐끔 연기를 뿜어내는 노인.
그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생각해보면 라온이 이 마을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도, 삼놈이라 불리며 고민 상담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어 환관으로 궁에 들어가게 된 것도 노인 덕이 아니던가.
“고맙소.”윤성이 문득 구 영감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노인의 속내와 속사정이 어떻든…… 덕분에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살아서 자신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고마웠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껴본 적 없었건만, 이상하게 그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과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윤성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술이 깬 것일까?
아니면 담뱃가게 노인의 말에 어지럽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정리된 것일까?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만나야겠다.”홍라온을…… 그 사람을 만나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그리 자주 만났어도 한 번도 자신의 속마음을 진심으로 털어놓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 것이 되라고 고집하고, 강요하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물어봐야지.
어쩌면 그 사람이 방법을 알려줄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찌해야 이 마음을 덮을 수 있을지…… 물어봐야겠다.
근래 들어 처음으로 맑은 눈빛을 한 윤성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