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04화 (104/131)

104. 너무도 그리워 차라리 서글픈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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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30

부원군 대감댁의 높은 담벼락 너머로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 술을 가져오너라.”바닥을 드러낸 술병을 흔들던 윤성이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칠복이 밖에 없는 게냐? 술 가져오란 말 안 들리는 것이야?”기어이 윤성이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어린 시절부터 윤성과 함께 자라왔던 몸종 칠복이 울상을 한 채 다가왔다.

“아이구, 왜 이러십니까요. 벌써 많이 취하지 않으셨습니까요.”“달빛이 고와 그런다. 저 고운 달빛을 안주 삼아 한잔 더 하고 싶구나. 그러니 어서 술 가져와라.”“달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십니까요?”먹구름에 가려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칠복은 답답한 듯 제 가슴을 쾅쾅 쳐댔다. 그러다 이내 결심했다는 듯 단호히 소리쳤다.

“더는 술 못 드립니다요.”“어허, 이놈. 네가 정녕 혼쭐이 나고 싶은 게냐?”“부원군 대감께서 참의영감께 절대 술 내어드리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습니다요.”“그래?”엄명이라는 말이 통한 것일까? 윤성의 기세가 잠시 잠잠해졌다.

칠복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윤성이 휘청거리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십니까요?”“할아버님께 간다.”“부원군 대감께는 왜요?”“이제는 술도 못 마시게 하시니. 따져보련다. 어찌 내게 이러시는지.”“아이고, 참의영감이야말로 소인한테 왜 이러십니까요. 아이고, 이러다 이 칠복이 제명에 못 죽을 것입니다요.”칠복이 숫제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며 윤성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못 들은 척 윤성은 사랑채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사랑채 앞에 선 윤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하하.”사랑채 안에선 연신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늘 일문의 모임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웃음소리라…….

윤성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세자저하께서 대리 청정한 이후로 일문의 모임에서 들려오는 건 답답한 한숨과 비분한 외침소리뿐이었다.

그런데 웃음이라.

가늘게 여민 눈으로 사랑채를 노려보던 윤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때마침 술잔을 받던 김조순이 못마땅한 눈으로 윤성을 쏘아보았다.

“여긴 무슨 일이더냐?”“칠복이 놈이 할아버님의 엄명이라며 술을 못 내주겠다고 하질 뭡니까?”“…….”윤성이 김조순의 앞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난데없는 침입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어찌 그런 표정들입니까? 뭡니까? 내가 불편한 겁니까?”“……못난 놈.”마뜩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김조순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이만 파해야겠소.”그 말에 술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부원군 대감, 술 잘 마시었습니다.”“곧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사람들이 물러가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긴 침묵을 깨며 김조순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술에 절어 살 것이냐?”“이리 사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요.”다른 이가 남기고 간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으며 윤성이 말했다.

“너는 타고난 그릇이 다른 녀석이다. 다른 녀석들이야 기껏해야 좋은 자리나 하나 얻어 볼까 하여 저리 굴지만. 너는 그들의 위에 군림해야 할 사람이 아니더냐? 이 할아비를 언제까지 실망 시킬 참이더냐?”김조순의 지청구에 윤성이 아픈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십시오.”“뭐라?”“저는…… 삶의 목표를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못난 놈.”김조순이 쯧쯧 혀를 찼다.

술잔을 말끔하게 비운 윤성이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게야?”“칠복이 놈이 할아버지께서 술도 못 마시게 한다 하여 따지러 왔더니, 괜한 잔소리만 배불리 먹었습니다. 술이 깰까 두려워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윤성은 김조순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휘청거리는 윤성의 등 뒤로 김조순의 목소리가 들어와 박혔다.

“그 계집이 그리 중요하더냐?”막 문을 열려던 윤성이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그는 방문을 잡은 채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내가 언제까지 눈뜬장님일 줄 알았더냐?”“무슨 말씀이냐고 물었습니다.”“네가 갑자기 우리 일문의 일에 앞장서고, 다시 모든 일을 그만둔 것이 그 계집 때문이더냐?”“그 계집이라뇨?”“홍라온. 감히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된 맹랑한 계집.”“……!”“큰 뜻을 품으라 하였더니, 고작 계집 따위를 가슴에 담아? 천하를 호령하라 하였더니, 고작 계집 하나 어쩌지 못해 그 모양이더냐? 그래서야 어찌 세상을 발아래 둘 수 있겠느냐?”“……그런 것이 아닙니다.”“그런 것이 아니면 지금의 네 꼴은 어찌 설명하겠느냐?”“이건…… 이건…….”“버려라. 잊어라. 갖지 못할 바엔 차라리 부숴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계집이란 하룻밤 품는 존재이지, 그리 애달파할 존재는 결코 아니다. 사람이란 네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그 교훈을 잊어버리게 되면 너는 크게 될 수 없을 것이다.”김조순의 말에 윤성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렇지요. 할아버지께서는 언제나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윤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킨 윤성이 김조순을 돌아보았다.

“청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을 저는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그게 무엇이냐?”“지금까지 제 인생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요.”“뭐라?”“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욕심만 많은 못난 사내였습니다.”윤성의 자조적인 말에 김조순은 주름진 미간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그 역시도 그 계집으로 인해 깨달은 것이더냐?”“…….”“그 계집이 고얀 것을 알려주었구나.”“고마운 것을 알려주었지요.”“그래?”윤성을 보던 김조순이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

술이 떨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김조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침 잘 되었구나. 내 손자가 받은 귀한 가르침의 값을 오늘 밤 치르게 되었으니.”문을 열던 윤성이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곧 알게 될 거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네게 가르침을 준 대가가 뭔지, 그 계집도 똑똑히 알게 될 게야.”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김조순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윤성은 불안한 시선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  *  *

백운회의 회합이 열린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

영은 부산한 몸짓으로 네 평 남짓한 작은 방을 서성거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율아.”“네, 저하.”“너는 알고 있었느냐?”라온에 대한 물음이었다. 영은 율에게 그녀의 숨은 내력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 물은 것이다.

주군의 느닷없는 물음에도 율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인도 미처 알지 못했나이다.”율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잠시 바라지창 너머를 응시하던 영은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눈매를 가늘게 여민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녀석은…… 알고 있었다.”그동안 미심쩍었던 병연의 행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뭔가 마음에 품은 것이 있는 듯한 병연의 비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그때였다.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낮은 음성과 함께 병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영의 앞에 선 그의 어깨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거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먼 곳에서 예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영은 숨을 고르는 병연을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왜? 왜 숨겼던 것이냐?”“지켜줘야 할 비밀이라 생각했어. 그리고…… 대업을 앞둔 저하께 녀석의 일을 말할 순 없었다.”“뭐?”“저하와 백운회는 그 녀석과 함께할 수가 없질 않아. 하여, 그 비밀…… 영원히 지켜주려 생각했다.”“헌데, 어찌하여 못 지킨 것이냐?”영의 물음에 병연은 손에 쥐고 있던 붉은 조약돌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내가 거느린 아이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골라 뽑아 녀석의 집 주위를 지키게 했다. 그런데 오늘 밤, 모두 당했다.”수하에게서 붉은 조약돌을 받자마자 병연은 급히 라온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텅 빈 집이었다.

방바닥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다.

라온의 가족도, 라온도. 그리고…… 자신의 맹세도.

영은 탁자 위에 올려진 붉은 조약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홍라온의 식솔을 지키고 있었더냐?”병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그리 자주 궁을 비운 것이로군.”“그런데 오늘 갑작스러운 습격이 있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일이 꼬여버린 거군.”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병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걱정 마라. 내 실수로 생긴 일이니 내가 해결할 것이다.”말을 마친 병연이 서둘러 돌아섰다.

“잠깐.”바쁘게 방을 나서는 병연을 멈춰 세운 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율아, 너도 함께 가거라.”“하오나 저하, 소인은 저하를 곁을…….”“내 언젠가 말하지 않았더냐. 그 아이를 지키는 것이 날 지키는 것이다.”영의 단호한 말에 잠시 침묵하던 율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한율, 저하의 명을 받자옵니다.”병연과 율의 그림자가 영의 앞에서 멀어져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내가 할 일을 해볼까?”낮게 중얼거리며 영은 바쁘게 방을 나섰다.

“아주 긴 밤이 되겠구나, 라온아.”

*  *  *

어두운 밤.

라온과 최 씨, 그리고 단희가 굴비처럼 오랏줄 하나에 묶인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서두르지 않고.”말을 탄 채 그들의 뒤를 따르던 박만충이 매섭게 호통쳤다.

세 사람을 끌고 가던 무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서둘러라.”“빨리 걷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그러나 깊은 어둠 속이라.

최 씨의 걸음이 느려졌다. 무사 하나가 강제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서슬에 맨 뒤에서 따라오던 단희가 쓰러지고 말았다.

한번 쓰러진 단희는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허약한 몸.

연이은 사건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최 씨가 두 손을 모은 채 간청했다.

“여식의 몸이 허약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배려해주십시오.”그 간절한 애원에 무사의 태도가 주춤해졌다.

그때, 박만충이 최 씨에게 다가왔다.

“배려?”말 위에 앉은 채 최 씨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아직 네년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로구나.”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만충은 돌연 검을 뽑았다. 서슬이 퍼런 검날은 곧장 단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안 돼!”놀란 최씨가 본능적으로 단희를 감싸 안았다.

스치듯 지나간 검날에 최 씨의 어깨가 길게 베였다.

“어머니! 단희야!”라온의 외침이 캄캄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서둘러 피를 흘리는 어미에게로 달려들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라온은 어머니의 상처를 살피며 박만충을 노려보았다.

간신히 살기를 누그러뜨린 박만충이 이번에는 라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냐?”피를 본 박만충의 눈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먹잇감을 앞에 둔 성난 날짐승의 눈빛. 가을 뱀처럼 잔뜩 독이 오른 시선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라온은 죽일 듯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돌변한 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얼마 전까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던 박만충의 얼굴에는 살기와 비열함만이 남아 있었다.

저것이 저자의 본연의 모습일 터.

“라온아,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아.”최 씨가 낮은 목소리로 라온을 말렸다.

비록 피는 많이 흘렸지만, 다행히 살갗만 조금 베인 것이라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단희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애처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라온이 박만충에게 소리쳤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러는 것이오?”“몰라 묻는 것이냐? 이 나라와 종묘사직을 염려하는 것이다.”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거짓말.

박만충을 향한 라온의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를 비웃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박만충이 추궁하듯 물었다.

“그러는 너는 무슨 속셈이냐? 세자저하의 곁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누가 너를 궁으로 보냈느냐?”“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소. 누구도 나를 궁으로 보낸 사람은 없소.”박만충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지금은 그리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의금부에 가는 순간, 태도를 바꾸는 게 좋을 거다. 없는 죄도 자복하게 하는 곳이 의금부니까.”박만충의 잔인한 말에 라온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뒤따라오는 어머니와 단희를 생각하면 그리 험악한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라온은 무거운 걸음을 다시 옮겼다.

같은 줄에 매여 있는 어머니와 단희의 무게가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다.

힘들고 버거운 인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줄에 담겼다.

언제나 이랬다.

삶은 고통이었고, 무심한 하늘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칠 때마다 이리 무참히 짓밟혔다.

백성이란…… 백성의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라 하지만…… 너무 버거웠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겨웠다.

하지만 잔인한 현실보다 더 라온을 아프게 한 것은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영의 눈빛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굳은 표정과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많이 실망하셨겠지. 무척 아프셨을 거야.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흔들리던 영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눈빛이 묻고 있었다.

정말이냐? 저들의 말이 사실이냐? 정말로 네가 날 속였느냐?

진실로 복수를 위해, 아비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날 죽이기 위해 궁으로 왔느냐?

소리 없는 물음에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꽁꽁 감춰둔 비밀은 이제 의심에 의심을 덧붙여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될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이실직고할 것을.

할아버지께 아비에 대해 들었을 때,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저하께 털어놓을 것을. 아니, 아니. 차라리 그 말을 들었을 때,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곧장 떠날 것을.

때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바보 같은 홍라온.

미련한 홍라온.

이 와중에도 화초저하의 얼굴만 떠올리는 어리석은 홍라온.

하지만 영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염려가 그녀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나 때문에, 내 서러운 운명 때문에, 감히 용서받지 못할 역적의 자식을 곁에 둔 이유로 저하께서 고초를 겪으시면 어쩌지? 결국은 내가 그분을 곤란하게 만들었구나.’라온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온통 먹구름만 가득했다. 별빛조차 없는 밤하늘은 한없이 어두웠고 한없이 암울했다.

그 광경이 제 앞에 펼쳐진 미래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지 않을까?

“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느냐?”어느새 말에서 내린 박만충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라온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댄 그가 비웃음 서린 눈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왜? 내가 네 생각을 읽는 것 같아서 신기하냐? 신기하게 생각할 것 없다. 너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많이 접해서 아는 것뿐이니.”구석까지 몰린 사람을.

벼랑 끝에 몰려 절박해진 사람들을.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을 내몰았을 때의 희열을.

지금 당장이라도 그 희열을 맛보고 싶어 손끝이 떨렸다.

그러나 애써 본능을 잠재운 박만충은 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라.”“네.”무사들이 헝겊을 말아 세 여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라온은 독기 어린 눈으로 박만충을 노려보았다.

다시 말에 오른 박만충이 그녀에게 몸을 굽히며 속삭였다.

“그 표정, 참으로 보기 좋구나.”박만충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그렇게 어둠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멈춰라.”난데없는 목소리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  *  *

복면을 한 채 서 있는 두 명의 사내.

병연과 율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박만충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오셨군. 안 오면 어쩌나 불안해하던 참이었지.”혼잣말을 중얼거린 박만충이 큰소리로 외쳤다.

“역모를 꾸민 자들을 호송하는 중이다. 앞을 막아선다면 너희도 역모에 가담한 자들이라 생각하겠다.”박만충의 겁박에 병연과 율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그렇게 나오신다니 고맙소이다.”박만충이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역모의 무리들이다. 될 수 있으면 생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상관없다.”“네.”한목소리로 대답한 무사들은 무기를 뽑아들고 병연과 율을 압박해갔다.

캉! 카앙!

사방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수는 이쪽이 월등히 많으나, 실력은 병연과 율이 월등했다.

치열한 공방의 흐름은 금세 병연과 율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삽시간에 다섯이 쓰러지고, 남은 다섯도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남은 다섯의 무사들은 어떻게든 막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였다.

치열하게 검을 휘두르던 병연이 돌연 앞을 막아서고 있는 무사를 걷어차며 포위망을 뚫었다.

물 찬 제비처럼 허공으로 뛰어오른 그는 단숨에 라온의 앞으로 달려갔다.

홍라온.

그 녀석이 앞에 있었다.

‘김 형’ 하며 어여쁘게 눈웃음 짓는 녀석이 눈앞에 있었다.

녀석의 비밀은 이리 허무하게 깨져 버렸지만, 영원히 녀석을 지키겠다는 맹세만은…… 지켜내고 싶었다. 아니,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리라.

“어림없다.”말에서 뛰어내린 박만충이 병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치치칭! 치잉!

두 자루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만년서생으로 보았던 박만충의 실력은 결코 병연의 아래가 아니었다.

십수 차례 이어진 충돌은 결국 어느 쪽의 승리도 아니게 끝났다.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은 박만충은 숨을 헐떡거렸다.

“기세가 제법 좋았으나, 어림없소이다.”그는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과연 그럴까?”그때, 병연의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율이었다.

어느새 다른 무사들을 모두 쓰러트린 그가 병연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박만충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이자의 실력이 이 정도였던가?

“이제 상황이 달라진 듯하니, 순순히 그 사람들을 내놓는 게 어떤가?”율의 말에 박만충은 대소를 터트렸다.

“상황이 달라져? 과연, 상황이 달라지긴 했소이다.”그 웃음소리가 신호였던가.

좌우로 길게 이어진 담벼락 위로 횃불이 타오르더니, 매복한 수십 명의 사내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떻소? 그대의 말처럼 상황이 달라졌소.”“네놈이…….”박만충의 이죽거림에 병연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히죽히죽 웃던 박만충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상황이 이리 되었는데, 이제 어찌하시려오? 달리 묘책이라도 있으시오, 회주.”“……!”병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놈,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박만충은 큰소리로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그대가 뉘인지 몰라도, 역모에 가담한 것이 확실하니.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잡아 죄를 물을 것이오.”박만충이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수십 명의 무사들이 병연과 율을 향해 몰려들었다.

잠시 조용해졌던 골목길에 다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하나 같이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게다가 한차례 혈전을 치르고 달려왔던 터라. 병연과 율, 두 사람 모두 크게 지친 상황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주위를 촘촘히 감싼 무사들의 칼날에 포위되고 말았다.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

“이제 끝난 것 같구려?”병연의 복면을 벗겨 내는 순간, 모든 일이 끝이 날 것이다.

백운회의 회주가 역모에 가담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병연을 백운회의 회주로 앉힌 왕세자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

작은 균열이 끝내 견고한 둑을 허물어뜨리는 법이다.

박만충의 얼굴에 노골적인 웃음이 매달렸다.

그때였다.

핑! 피리리릿! 피픽!

캄캄한 하늘에서 느닷없는 화살비가 내렸다.

라온을 비롯한 최 씨와 단희의 오랏줄을 쥐고 있는 무사들의 어깨에 화살이 박혔다.

“헛!”“으앗!”짧은 단발마가 어두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누구냐!”박만충이 놀란 소리를 토해냈다.

숨어 있는 자가 더 있었던 건가?

모두의 시선이 쓰러진 무인들과 그들의 어깨에 박힌 화살로 향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병연과 율이 검을 휘둘렀다.

촘촘해 보였던 포위망이 흐트러졌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너! 너! 그리고 너! 거기 세 명은 저쪽 지붕으로 올라가라. 숨어 있는 놈을 잡아와!”박만충은 쉬지 않고 소리쳤다.

무사 중 일부가 박만충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혼란한 상황.

최 씨와 단희는 겁에 질려 떨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라온은 두려움에 몸을 떠는 어머니와 동생을 다독이며 구석진 곳으로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

스윽.

처마 아래에서 손이 나와 라온의 입을 가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라온은 작은 비명조차 흘리지 않았다.

입을 가린 손길의 온기가 낯설지 않았다.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손가락을 세웠다.

쉿. 조용히 해라.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사내의 까만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개의 시선이 허공중에 뒤엉켰다.

주위의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뚫어지게 사내를 응시하던 라온의 입에서 기어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화초저하.”그것은 너무도 그리워 차라리 서글픈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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