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잘하셨습니다, 화초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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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6
도성 근처의 숲 속에서 짙은 혈향이 피어올랐다.
캉! 카캉!
짙게 드리운 어둠 아래에서 사나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 치열하게 부딪치는 쇳소리가 밤공기를 날카롭게 베어냈다.
엉킨 실타래처럼 한데 얽혀 있던 그림자들이 허물어지고, 쪼개지고, 부서졌다.
비탈길을 구르는 진흙 뭉치처럼 무섭게 바스러지던 덩어리는 결국엔 하나만 남았다.
잠시 후.
고목에 등을 기댄 그림자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하아, 하아.”내뿜는 날숨에는 생과 사를 넘나들던 치열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이지러진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을 비추는 달빛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 서걱대는 바람이 이는 사내.
깊게 눌러쓴 삿갓 아래로 날렵한 턱선이 드러났다. 삿갓으로도 선연한 아름다움은 가려지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 차마 범접하기 어려운 사내의 곁으로 다급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회주님!”눈 덮인 수풀을 헤치며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으십니까?”걱정 어린 물음에 병연은 고개를 짧게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목에 기대있던 그가 수하들을 향해 몸을 바로 세웠다.
다음 순간.
“허억!”수하들의 입에서 날카로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달빛 아래 드러난 병연의 몸은 검붉은 핏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회주님…….”수하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병연이 담담히 말했다.
“걱정 마라. 내 피가 아니다.”병연은 검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수하들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 침착되어 있던 숲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베이고 찔린 시신들이 눈 덮인 숲을 붉게 물들였다.
그것은 눈밭을 가로질러 달려온 병연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마다 차가운 죽음이 족적처럼 깊이 새겨져 있었다.
시린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연이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어찌 되었느냐?”그의 물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수하가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 물리쳤습니다.”“우리 쪽의 피해는?”“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두 명이 다치긴 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수하의 대답에 병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의 피해치고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날카롭게 표정을 세웠다.
“배후는 알아냈나?”수하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상관없다. 살아남은 자들을 문초하면 될 것이니.”“회주님, 그것이…….”어쩐 일인지 수하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일이야?”“그것이…… 살아남은 자가 없습니다.”망설이던 수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뭐? 살아남은 자가 없어?”“잡힌 자들 모두 스스로 자결하였습니다.”순간, 병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배후를 알 수 없는 자들의 갑작스러운 습격.
잡힌 자들은 스스로 자결할 정도로 독한 놈들이다.
대체 누가? 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곧 실체를 드러냈다.
“회주님.”뒤늦게 숲을 가로질러온 수하가 숨을 헐떡이며 빠르게 다가왔다.
“회주님, 다급한 기별입니다.”“다급한 기별?”“오늘 밤, 백운회의 긴급회합이 소집되었습니다. 그리고…….”앞섶에 손을 넣었던 수하는 붉은 조약돌 하나를 병연에게 건넸다.
“이건……!”조약돌을 보는 순간, 병연의 눈에 푸른 불길이 일었다.
이 조약돌은 특별한 곳을 지키는 수하와 병연이 주고받던 암호였다.
이 붉은색은 최악의 상황을 뜻하는 신호.
붉은 조약돌과 백운회의 긴급회합.
그리고 때를 맞추듯 이어진 습격.
병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수하를 응시했다.
“뒤처리를 부탁하마.”짧게 명을 내린 병연은 숲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다급하게 달리는 그의 손에는 붉은 조약돌이 꼭 쥐어져 있었다.
* * *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노란 불꽃이 맥없이 일렁거렸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에 실내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미와 동생을 부르며 뛰어든 라온의 모습이, 그 애처로운 표정이 그대로 영의 망막에 가시처럼 박혔다.
“홍라온,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냐?”영의 잇새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낮은 중얼거림.
하지만 그 나직한 목소리는 라온에게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얼음을 뒤집어쓴 듯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등 뒤로 와 닿는 서늘한 시선에 전신이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라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둔중한 것에 머리를 맞은 듯한 표정의 영과 눈이 마주쳤다.
“저하…….”신음처럼 들려온 라온의 한 마디가 영의 심장을 후벼 팠다.
아니길 바랐건만.
라온이 아니길 그리도 바랐건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린 눈빛과 흐느끼는 목소리는 분명…… 라온이었다.
영은 허공을 잡쥔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꿈이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악몽.
하지만 눈뜨고 꾸는 꿈은 좀처럼 깨지 않았다. 아니, 되레 더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어이하여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가슴 속에 거친 돌풍이 일었다. 영은 으스러져라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영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의 텅 빈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쉼 없이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 눈 속에 금방이라도 와스스 무너질 듯 눈물 벽이 서 있었다. 그 서럽고 아픈 눈을 보는 순간 영은 심장이 잘려나간 듯 가슴에 격통이 느껴졌다.
심장의 고통을 떨쳐내기 위해 영은 단희와 최 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려움에 떠는 모녀의 모습.
그렇구나.
이제야 아귀가 맞지 않던 일들이 하나둘,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라온과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던 윤성의 단정이, 자신에게 라온이 독이 될 수 있다던 정약용의 걱정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것이었던가? 두 사람의 단정적인 태도와 말은 이런 상황을 가리켰던 것인가?
근래 들어 변한 라온의 행동.
세자빈을 들인 일 때문인 줄 알았다.
설사 내 곁자리에 네가 아닌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 가슴엔 오로지 너뿐이라 맹세하였음에도…… 그럼에도 라온의 눈동자에 맺힌 텅 빈 흐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연모가 부족하였던가.
나의 맹세가 아직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던가.
자책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전에 없이 느껴지던 라온과의 거리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 숨기는 듯한 느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있는 기분.
이것이었나?
역적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홍라온…… 너, 날 속이고 있었던 것이냐?
영은 굳어버린 시선으로 라온을 보았다.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해버렸다.
시간과 공기의 흐름이, 그리고 생각마저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여,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저 라온의 얼굴과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무슨 말이든 좋다.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인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지금의 이 상황은 모두 오해라고 말해다오.
저 입으로 어떤 변명을 해도 모두 믿을 것이다.
그것이 설사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온은 말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행여 무슨 말이라도 새어나올까 아랫입술을 왈칵 깨문 채 어둠에 잠겨 있는 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 담긴 것은 어떤 좌절과 어떤 원망, 어떤 걱정과 어떤 미안함이었다.
하지만 영이 원한 것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라온의 얼굴은 저리 아픈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영은 오롯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던 라온을 떠올렸다.
속엣것을 하나 숨김없이 드러내며 자신을 응시하던 모습.
티끌 한 점 없는 눈빛으로 수줍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 모습이 영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런 네가 어째서?
어째서 네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뇌성처럼 그의 머릿속을 쾅쾅 쳐댔다.
바로 그때였다.
“저하, 어찌하여 망설이는 것이옵니까? 그토록 찾던 역적의 핏줄이옵니다. 명만 내려주시옵소서. 소인이 저들을 심문할 것이옵니다.”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영의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잡혀 온 홍경래의 식솔.
그 와중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라온.
마치 광대패의 잘 짜인 놀이판을 구경하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 모든 것이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라온이다.
그녀 또한 이 잘 만들어진 판에 오른 광대인가?
아니면, 단순한 희생양?
영은 꿰뚫는 눈빛으로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새기듯 살폈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
누구냐?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그때, 그의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하, 요즘 가뭄을 핑계로 백성들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일고 있사옵니다. 분명 저들이 배후에 있을 것이옵니다. 저들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쳐 이 나라와 종묘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우직한 충언.
그러나 그 충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음모라는 이름의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영은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서생 박만충.
그의 입가에 남아 있는 희미한 미소의 흔적이 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대의 말이 무슨 뜻인가? 저들이 또다시 반란이라도 꿈꾼단 말인가?”“아뢰옵고 황공하오나, 소인 그리 판단하고 있사옵니다.”“어찌하여 그리 생각한 것인가?”“지금 저하의 앞에 있는 자의 얼굴을 잘 살펴보시옵소서. 그자…… 분명 동궁전에 있는 환관이 분명하옵니다.”박만충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렸다.
“동궁전의 환관?”“그러고 보니, 궁에서 저자를 본 적이 있소이다. 세자저하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자가 분명합니다.”“세상에, 이런 일이. 저자가 다름 아닌 홍경래의 자식이었단 말인가?여기저기서 라온을 알아보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만충이 말을 덧붙였다.
“역적의 핏줄이 궁에 있었사옵니다. 분명 어떤 사특한 속내를 품고 저하께 접근한 것이 틀림없사옵니다.”“아닙니다.”그때였다.
내내 침묵하고 있던 최 씨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여기 있는 이분,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뉘신데 저를 보고 어미라 합니까?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듯합니다.”어미의 말에 단희 역시 미친 듯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분은 정말 모르는 분입니다. 몇 번 도움을 받긴 했지만,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어떻게든 라온만은 살려보겠다는 듯 최 씨와 단희가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두 사람의 말을 믿는 이는 없었다.
“닥쳐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이냐?”박만충이 두 사람을 윽박질렀다.
최 씨와 단희의 입을 막은 박만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 이자는 바로 동궁전의 환관이옵니다. 저하께서 총애하시던 자가 역모의 주동자인 홍경래의 자손이었사옵니다. 이 사실은 절대 가벼이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역천의 음모를 품은 자들이 세자저하의 곁에 첩자를 심은 것이 틀림없사옵니다.”“세자저하의 곁에 첩자가?”“허면, 우리 행적이 모두 저들에게 드러난 것인가?”“몇 번의 습격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저자의 짓이란 말인가?”해일처럼 또다시 술렁거림이 일었다.
“조용!”내내 침묵하고 있던 영이 입을 열었다.
그는 꿰뚫는 시선으로 박만충을 응시했다.
“첩자라 하였느냐? 그대는 어찌 그리 단정 짓는 것이냐?”“소인이 증좌를 보여 드리겠습니다.”기다렸다는 듯 박만충이 앞으로 나섰다.
라온의 곁에 나란히 선 그가 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서린 사특한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의 미간이 한데로 모아졌다.
저자,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궁금해하는 찰나.
박만충이 돌연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무슨 짓이더냐?”영의 날카로운 음성이 곧장 박만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박만충은 대답을 하는 대신 파랗게 날이 선 칼로 라온의 앞섶을 잘라냈다.
“앗!”눈 깜짝할 사이, 두꺼운 광목으로 감싼 가슴이 드러났다.
당황한 라온은 서둘러 두 손을 들어 가슴을 감쌌다.
“보십시오. 이자는 사내가 아니라 계집입니다.”지켜보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놀란 소리를 뱉어냈다.
“여인? 정말 여인이란 말이오?”“어찌하여 여인이 궁의 내관이 되었단 말인가?”“어허! 이런 일이…….”박만충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영에게로 옮겼다.
“저하, 보다시피 이자는 계집입니다.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었사옵니다. 국법을 어기고 저하의 눈을 속여 환관이 된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던 것일까요?”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동시에 영의 두 눈에 핏발이 서렸다.
박만충의 말이 이어졌다.
“역적의 자식이…… 그것도 여인이 환관으로 위장하여 궁에 숨어들었습니다. 악착같이 세자저하의 눈에 들어 곁에 섰사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들키면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굳이 세자저하의 곁에 있으려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어느덧 경악과 고성으로 바뀌었다.
“역모!”박만충의 한 마디에 들썩이던 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가 라온을 손짓하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복수. 역모의 주동자로 죽은 아비의 복수를 위해 이자는 거짓 사내 노릇까지 하며 내관으로 변장한 것입니다. 오로지 세자저하의 곁으로 가기 위함이었지요. 복수가 아니었다면. 또 다른 역모를 꾸미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리도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짓을 하였겠습니까?”말을 끝낸 박만충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지핀 분노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라온과 그녀의 가족들을 향한 사내들의 눈에는 노한 기운이 가득했다.
“감히!”“역적의 자식으로 감히 목숨 부지하였으면 하늘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복수를 꿈꾼단 말인가?”“참으로 무서운 자들이로구나.”“자칫했으면 세자저하께서 큰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소? 생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하구려.”“당장 저 계집의 주리를 틀어야 합니다.”“사지를 찢고, 일벌백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감히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입니다.”사람들은 당장 라온과 최 씨, 그리고 단희를 찢어 죽여야 한다며 소리를 높였다.
그때였다.
“그만하라!”영이 손을 들어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술렁거림이 일순간에 멈췄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박만충의 말이 옳다. 이 일은 절대 가벼이 좌시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다.”잠시 말을 끊은 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윽고.
다시 날숨을 내뱉는 그의 입에서 드디어 명이 떨어졌다.
“죄인들을 의금부로 압송하라.”말을 마친 영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라온에겐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은 채 그는 걸음을 옮겼다.
“저하....”그 차가운 뒷모습을 향해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잘하셨습니다, 화초저하. 옳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리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바람이 일었다.
검은 그을음을 마신 듯 목이 따끔거렸다.
차갑게 등 돌리고 떠난 영의 뒷모습이 명치에 맺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라온의 발등으로 기어이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 * *
“죄인들을 압송하라!”라온과 그 가족들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만충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영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까? 과연 세자시로군요.”이쯤 하였으면 크게 동요할 줄 알았건만. 연모에 빠진 여느 사내들처럼 미련하게 제 여인을 감싸고 나설 줄 알았다.
그러나 세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연모하던 여인마저도 미련 없이 털어버린 것이다.
과연, 대단하신 분.
연치 어리다 조금은 만만히 보았더니, 잘못 생각했다.
세자께선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원군 대감, 아무래도 세자저하를 흔들어 보겠다는 대감의 뜻은 성사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일로 무결했던 세자께도 한 가지 흠결이 생겼군요.” 이 작은 틈이면 충분할 겁니다. 세자를 무너뜨리기엔…….
“하지만 왠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박만충의 입아귀가 음흉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