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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02화 (102/131)

102.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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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3

서쪽 하늘 끝으로 어둠이 몰려들었다.

오후부터 날린 진눈깨비에 바닥이 질척했다.

단희는 툇마루에 앉아 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누런 창호지 너머로 어머니의 부산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단희야. 밖에서 뭐하는 거니? 얼른 들어와 날 좀 도와다오.”“네, 어머니. 곧 들어가요.”점심 무렵, 천 서방 아저씨가 다녀갔다.

궁에 들어갔다가 라온을 만났다며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금일(今日).

서찰엔 딱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희는 알 수 있었다. 오늘 떠나게 되었으니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떠난다.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언제나 떠돌아다녔던 기억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런 단희에게 이곳은 특별했다.

그림자처럼 단희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오랜 지병을 치료하고, 평생 처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었다.

사람 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단희는 아련한 시선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손잡이의 까만 손때, 몇 겹이나 덧댄 창호지, 그리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쪽마루.

떠난다고 하니 왜 이리 섭섭한 것들이 많은지.

운종가를 오가며 보았던 수많은 풍경과 사람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막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점박이도 아른거렸고, 심지어는 근래 단희의 약을 올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마저도 아른거린다.

매일같이 단희의 향낭을 사러 와서는 이것저것 이유 없이 트집 잡는 사내. 어디 사는 뉘인지도 모르는 사내가 어쩌자고 생각나는 것일까?

어쩌면 사내가 보였던 희미한 미소 때문이려나? 에이, 말도 안 돼.

애써 제 마음에 돋아난 감정을 자른 단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제 떠나야 한다.

그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영영.

방 안으로 들어간 단희는 어머니를 도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워낙 빈궁했던 살림인지라, 짐을 싸보니, 작은 보따리 몇 개가 전부였다. 이제 라온만 오면 세 모녀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단희는 등잔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르스름한 불꽃이 위태롭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섭섭한 거야?”최 씨가 단희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에요.”애써 밝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찌 섭섭하지 않겠니. 병치레하느라 제대로 바깥나들이도 못하던 네가 아니더냐. 그런 네게 처음으로 동무가 생긴 것을 보았는데…….”“괜찮아요.”“하지만…….”“어머니. 전 정말 괜찮아요. 동무야 다른 곳에 가서 또 만들면 돼요. 언니는 절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궁에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제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단희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웃음을 보였다.

언니를 위한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고도 안쓰러워 최 씨는 어린 딸의 머리를 말없이 쓸어 넘겨주었다.

그 어렸던 것이 언제 이리 자랐을까? 힘들게 견뎌낸 세월만큼 아이들은 장한 모습으로 자라 있었다.

최 씨는 눈가에 잔주름을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라온이니?”최 씨가 반색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낯선 사내를 보는 순간, 최 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뉘십니까?”사내는 어느새 쪽마루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남루한 도포에 한쪽 끝이 찌그러진 갓을 쓴 허름한 입성.

최씨의 물음에 사내는 대답 대신 둘러보는 시선으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어딜 가시려는 참이었소이까?”“네?”“급히 짐을 꾸린 듯한데.”“뉘신데 그런 것을 묻습니까?”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내를 향해 최 씨가 경계의 빛을 내보였다.

“이런. 제 소개를 안 했군요. 나는 홍 내관이 보낸 사람이오.”“홍 내관이라면…… 우리 라온이가 보냈단 말입니까?”굳어졌던 최 씨의 얼굴이 금세 봄눈처럼 풀어졌다.

“어머니와 동생을 모셔오라 하더군요.”“아, 그렇군요. 우리 라온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마을 외곽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소.”“단희야, 서둘러라. 라온이가 기다리고 있다질 않니.”분주히 짐을 챙긴 최 씨가 단희를 재촉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어미의 재촉에도 단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잠시만요.”단희는 사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최 씨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머니, 뭔가가 이상해요.”“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다는 게야?”“언니가 낯선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처음 저 선비님이 우릴 보고 했던 말, 기억 안 나세요?”“우릴 보고 했던 말?”“어딜 가려고 했냐고 물었잖아요. 그런데 금세 말을 바꿔 우릴 데리러 왔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구나.”최 씨의 눈동자에 다시 경계심이 깃들었다. 그녀는 뒤뜰로 이어지는 문을 힐끔 돌아보았다. 여차하면 그곳으로 달리자는 눈빛을 단희에게 건넸다.

영특한 아이는 금세 어미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모녀가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내의 재촉이 이어졌다.

“뭐하시오? 이러다 날 새겠소.”“그보다, 외람되지만 선비님의 함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정말 라온이 보낸 사람이라면 이름 정도는 알 수 있으리라. 그 아이가 이리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집으로 보냈을 리 없었다.

최 씨의 물음에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사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조용히 데려가려 했는데.”그 순간, 사내가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최 씨는 본능적으로 단희와 함께 뒷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

사내의 얼굴이 최 씨의 가까이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내 최 씨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순식간에 정신을 잃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사내가 그대로 단희를 향해 다가왔다.

“얌전히 따라왔으면, 서로 편했을 것을. 네 덕분에 일이 번거로워졌구나.”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는 단희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앗!”짧은 비명과 함께 단희 역시 최 씨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여봐라.”부름이 있기 무섭게 한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것들을 데리고 먼저 가 있어라. 나는 마저 일을 끝내고 갈 것이니.”박만충은 입아귀를 비틀며 미소 지었다.

*  *  *

“어머니와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단 말입니까?”라온의 물음에 박만충이 미소를 지었다. 최 씨와 단희에게 보였던 바로 그 미소였다.

“세자저하의 명으로 줄곧 이곳을 살피고 있었지요.”“그랬습니까?”“불온한 자들의 움직임도 그래서 알 수 있었소.”“허면, 어딥니까? 우리 어머니와 단희,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온은 다급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절 따라오시지요.”박만충이 앞서 걸었다. 라온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이라. 사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라온은 박만충의 희미한 인영을 조족등 삼아 굽이진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넓은 길이 나오고 박만충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입니까? 이곳에…… 어머니와 단희가 있단 말입니까?”눈앞을 막고 있는 낡은 대문을 올려다보며 라온이 물었다.

“틀림없습니다.”박만충의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긴 어딥니까?”라온은 눈매를 가늘게 여민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운종가를 가로지른 것 같았는데.

운종가 골목이라면 제 손금 들여다보듯 훤했다.

하지만 이곳은 낯설었다. 한양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비밀회합에 사용되는 곳이지요.”“비밀회합이요?”“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이오.”박만충이 주춤하는 라온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라온은 맹독을 품은 뱀과 마주한 듯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 웃음,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윤성을 떠올렸다. 그러나 라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저 사람의 미소는 참의영감의 미소보다 몇 배는 더 불길하고 가식적이야. 하지만…… 분명 화초저하의 일을 돕는 사람이라 하였는데? 대체 어찌 된 것일까?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 상황.

라온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와 단희가 이곳에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을 떠올리자 더는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라온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삐거억.

오래된 나무문이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열렸다.

*  *  *

밤의 그림자가 중희당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밤늦도록 문서를 살피던 영은 중희당 안으로 들어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백운회의 전언을 가져온 자였다.

“찾았단 말이더냐?”영의 물음에 시립하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그러하옵니다.”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영은 읽고 있던 서책을 덮었다.

드디어 찾았다.

오랫동안 찾던 자들이 행방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는 보고였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영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하…….”때마침, 차를 내오던 최 내관이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시옵니까?”“잠시 다녀와야겠다.”“먼 곳이오니까?”“가까운 곳이다. 허나,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구나.”“채비하라 이르겠사옵니다.”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최 내관을 영이 붙잡았다.

“조용히 다녀올 것이다.”“저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다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차라리 날이 밝은 후에 걸음 하시는 것은 어떠하시온지요?”지난번, 잠행 나갔던 왕세자가 자객의 급습을 받은 이후 최 내관은 영의 신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괜찮다. 율이 나를 따를 것이다.”“저하…….”최 내관이 울상을 지었다.

“그보다, 최 내관.”어느새 변복한 영이 중희당을 나서다 문득 최 내관을 돌아보았다.

“네, 저하.”“오늘 종일토록 그 녀석이 보이질 않는구나.”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라온이 괘씸하면서도 궁금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건가?

사람을 보내볼까 생각도 했지만 괜한 조바심으로 녀석을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애써 참았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내일 얼굴 보면 혼쭐을 내야지.

다짐하던 영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이리 다짐해봐야 그 웃는 얼굴 한 번이면 푸스스 풀어질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홍 내관 말씀이시옵니까?”“그래.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내일도 동궁전에 발걸음 아니하면 경을 칠 거라 하라.”“……알겠사옵니다.”최 내관에게 으름장을 놓은 영은 소식을 전한 백운회의 선비와 율을 대동한 채 궁을 나섰다.

돈화문을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영의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영이 물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찾았느냐?”백운회의 선비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의심스러운 몇몇 무리를 관찰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듯싶사옵니다.”“그래? 이제라도 발견했다니 다행이군. 그들에게서 불온한 기운은 발견했느냐?”“이제 막 압송되어 온지라, 아직 제대로 심문하지 못하였습니다.”“그렇구나.”영은 밤길을 재촉했다.

뼈마디를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걱거렸다.

먹구름이 가득한 날이라, 그 흔한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영은 길게 날숨을 쉬었다. 하지만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답답한 기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  *

왕세자 영이 회합 장소에 발을 디딘 것은 자정이 지난 무렵이었다.

사방에 횃불을 밝힌 터라. 실내는 대낮처럼 환했다.

“오셨사옵니까.”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갓을 쓴 사내들이 좌우로 나뉘어 선 채, 허리를 숙였다.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간 영은 이 층 난간으로 향했다.

대낮처럼 밝혀진 실내에서 유일하게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곳.

영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의 모습이 그늘 뒤로 가려졌다.

그렇게 그늘 속에 앉은 채 영은 실내를 샅샅이 훑었다.

이내 삼십여 명의 사내들의 표정이 그의 눈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있는 그는 그들을 볼 수 있어도, 밝은 곳에 서 있는 자들은 그를 볼 수 없었다.

긴급하게 열린 회합이라 인원의 절반도 채 오지 못했다. 하지만 참석한 자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랫동안 추적했던 일이 오늘에야 결실을 보았으니, 저런 표정이 당연했다.

영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실내의 정중앙,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엔 두 사람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얼굴을 가리는 검은 두건까지 뒤집어쓴 모습.

문득 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인들인가?’입성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어찌하여 여인이 둘이나 된단 말이더냐? 그자의 자손이라곤 사내아이 하나가 전부가 아니더냐?”영이 물음에 곁에 서 있던 사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관군의 귀와 눈을 속이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린 듯합니다.”“그런가?”고개를 끄덕인 영이 낮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두건을 벗겨라.”여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이 벗겨졌다.

마침내 드러난 두 사람의 모습.

순간, 의자에 앉아 있던 영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저들이…… 그들이라고?”놀란 음성이 영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  *  *

“으음.”재갈 물린 입에서 갑갑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얼굴도 갑갑하긴 매한가지였다.

단희는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다.

살려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는 기이한 신음이 되어 입 안으로 옴쳐들었다.

박만충에게 잡혀 온 이후로 내내 이리 옴짝달싹 못하게 묶인 채 어딘가로 끌려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다.

대체 여긴 어디일까? 그리고 어머닌 어찌 되었을까?

불안함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사정인지 알기만 해도 좋으련만.

그때였다.

그녀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이 드디어 벗겨졌다.

노르스름한 붉은빛이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단희는 시린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흐릿한 시야로 조금씩 주위가 들어왔다.

제일 먼저 사방을 밝히고 있는 촛불이 아른거렸다. 자신이 있는 곳은 긴 장방형의 넓은 공간이었다.

스무 걸음은 족히 걸어도 될 만큼 커다란 공간.

그 공간에 수십 명의 사람이 양옆으로 도열해 서 있었다.

어림잡아 서른 명 남짓.

대체 저 사람들은 누굴까? 그리고 우리는 왜 여기 있는 걸까?

“재갈을…… 풀어주어라.”낮지만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사내들이 단희와 어머니 최 씨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벗겨 냈다.

단희는 사뭇 당돌한 눈빛으로 주위를 쏘아 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죄 없는 사람을 이리 잡아 결박하는 것이 어느 나라 법이랍니까?”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엄숙하거나 노한 표정으로 그녀와 최 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더러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의 사람도 있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리 험악하게 군단 말이오?”단희가 다시 물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따져 묻는 모습에 제법 당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역적의 자식이 어찌 그리 당당한가?”등 뒤로 사나운 음성이 다가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단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당신은……!”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집으로 찾아와 라온이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 바로 그 사람.

박만충.

그런데 어찌 된 이유에선지 박만충은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모녀를 기절시킬 땐 그리고 비열하게 웃던 사람이 지금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본 듯 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변화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그게 무슨 말이요? 역적의 자손이라뇨? 무얼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요?”“못 믿겠으면 네 어미에게 물어보아라.”박만충의 말에 단희는 곁에 있는 최 씨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니지요? 저 사람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지요?”“단희야…….”최 씨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도 도망치고 싶었던 운명이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원했던 남편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 것이 어찌 죄란 말인가?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죄라 하였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남편에겐 역적이란 허울이 덧씌워졌고, 그들의 자식들에겐 역적의 자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졌다.

역적의 자식은 참형 되는 것이 당연했다.

반역의 죄는 삼족이 멸하는 무거운 중죄였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일평생 노비로 살아가야 하는 잔인한 운명. 그 처참한 운명에 라온과 단희를 내몰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도망 다녔건만.

결국은 이렇게 잡히고 말았다.

최 씨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떤 운명이 자신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구한 목숨, 더 살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탄스러운 것은 어린 여식의 삶마저도 이리 허무하게 짓밟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아이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아비가 뉘인지도 모른 채 살아온 아이입니다. 죄가 있다면 지아비를 말리지 못했던 저의 죄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어린 것은 용서하십시오. 이 아이의 몫까지 제가 모든 벌을 받을 것이니, 제발 이 어린 것은…….”최 씨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지아비가 왕에게 칼을 겨누었다. 감히 하늘과 같은 주상에게 반역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저는 지아비를 말리지 못한 죄가 있을지 모르나, 이 아이는 다릅니다. 이 아이는 아비조차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반역의 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역모의 상(狀)이다. 반역의 씨는 피를 타고 이어지니……. 어찌 아비를 모른다 하여 죄가 되지 않겠는가?”박만충의 잔인한 음성이 떨어졌다.

수긍하는 듯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들이…… 홍경래의 식솔이 분명하더냐?”“맞사옵니다. 저들이 역적 홍경래의 처와 그 여식이옵니다.”“……고개를 들어라.”“세자저하의 명이시다. 역적의 식솔들은 어서 고개를 들라.”단희와 최 씨의 머리가 천천히 위로 들려졌다.

이윽고 어두운 그늘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잠시 후.

그 사내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단희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당, 당신은…….”단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언니와 함께 담뱃가게를 찾았던 분.

함께 향낭을 팔던 분.

언니를 위해 고운 옷 한 벌 지어 달라 다정히 부탁하셨던 분.

그런데 이분이 뉘시라고? 세자저하?

단희의 심장이 바닥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놀란 마음에 단희는 황급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때, 미세하게 떨리는 영의 음성이 단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들이…… 틀림없느냐?”라온과 유난히 닮은 저 얼굴.

저 아이가 정말 그토록 찾았던 그 사람의 자식이란 말이더냐?

“홍경래. 저들이 분명 그의 혈육이 맞느냔 말이다.”이내 비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틀림없사옵니다. 저하.”눈앞이 캄캄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움켜쥐고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영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어쩌면 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인의 얼굴이라면 워낙에 분별하지 못하는 내가 아니던가.

단희처럼 생긴 저 아이도. 라온이의 여동생처럼 생긴 저 아이도 어쩌면 비슷하게 닮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이 틀림없어. 그런 것이…….

찰나, 그의 단정(斷定)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허공을 뒤흔들었다.

“어머니! 단희야!”놀란 외침과 함께 두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로 한 사람이 달려들었다.

“너는…….”목소리를 듣는 순간 영은 칼에 찔린 듯 심장에 심한 격통을 느꼈다.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최 씨와 단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저 얼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착각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저 모습.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 것이냐?

궁에 있어야 할 네가, 자선당에 있어야 할 네가 어찌하여…….

“홍라온,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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