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화초저하도 괜찮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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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9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집 안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을 베어내며 최 씨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불안하게 흔들리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며 라온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에요.”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찌하여 어머니가 그리도 악착같이 관원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다녔는지를.
혹시나 정체가 발각될까 두려워 딸자식에게 거짓 사내 노릇까지 시킨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걱정 말아요, 어머니.
라온은 안심시키듯 맞잡은 어머니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냥 일이 그리 되었어요. 그러니 어머니…… 우리 떠나도 되겠지요?”라온의 얼굴에 서늘한 바람이 엿보였다.
“그래. 그러자.”최 씨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설명되고 이해가 되었다.
여식의 마음에 생긴 생채기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곳을 떠난다 하여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단희 너도 괜찮겠니? 미안하구나. 이제 간신히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을 텐데.”“괜찮아요, 언니. 마침 치료도 더는 안 받아도 된대요. 그저 공기 좋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자면 문제없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언니한테 부탁하려 했는데. 어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가자고 말예요.”단희의 속 깊은 대답에 라온은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다.”명치께가 뻐근하게 아려왔다.
라온은 궁궐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초저하도 괜찮으시죠?
* * *
미틈달(11월).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
발목을 어루만지는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느껴졌다.
“생강과 대추를 우려낸 차입니다. 드십시오.”라온은 다담상을 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문서에 시선을 박은 영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하, 차 마실 시각입니다.”“알았느니. 이것들만 마저 끝내면 된다.”“그럼 차가 식는단 말입니다.”“식은 차가 마시기는 더 좋은 법이다.”“효능은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따뜻할 때 드십시오.”“알았다.”“저하, 말로만 알았다, 하시지 마시고…….”“다 끝나간다.”“저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하 알아서 하십시오. 저도 이제는 모르겠습니다.”불퉁한 목소리에 그제야 영이 고개를 들어 라온을 바라보았다.
“화났느냐?”“따뜻할 때 마셔야 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말씀드렸습니다. 단 한 번을 제때 마시지 않으시니.”“알았다. 마신다. 마시면 될 것이 아니냐.”“하루에 세 번, 시간 맞춰 마시면 손발이 따뜻해지고 불면증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발 권하면 그때그때 마셔주십시오.”“알았다고 하질 않느냐. 그 녀석, 참. 날이 갈수록 잔소리가 느는구나. 일이 산적해 그런 것을 갖고서.”“그 일 말입니다. 줄이시면 안 됩니까?”“너도 보다시피 해야 할 일이…….”“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저하께서는 사서 고생이라고 하셨습니다.”“사서 고생?”“네. 아랫사람을 시켜도 될 일도 저하께서 일일이 꼼꼼하게 살피신다고요. 아무래도 일에 중독되신 것 같다 하셨습니다.”“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냐?”“네. 그러니 그 나쁜 버릇은 고치십시오. 저하께서 직접 가려 뽑으신 저하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하의 사람들을 믿으십시오.”“내 사람들을 믿는다. 믿고 있다.”“그리 믿으신다면, 보여주십시오.”“오냐. 내 어찌 보여주랴?”“오늘 하루, 아니…… 이제부터는 사흘에 하루씩은 푹 쉬십시오.”“사흘에 한 번?”“네. 사흘에 한 번은 아무 일도 안 하고, 그 어떤 근심도 없이 그냥 푹 쉬시는 겁니다. 그리하실 수 있으십니까?”“글쎄.”“역시, 저하께서는 저하의 사람들을 못 믿으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믿는다. 허나, 사흘에 하루는 너무 자주 쉬는 것 같단 말이다.”“저하!”“내 고려해 보마.”“고려만 하지 마시고 저와 약조하십시오. 사흘이 힘이 드시면 나흘에 한 번씩은 어떻습니까?”“열흘에 한 번 쉬도록 하마.”“나흘에 한 번 쉬십시오.”“이레에 한 번.”“닷새에 한 번, 더는 저도 물러나지 못합니다.”“무어냐? 나와 거래를 하자는 것이냐?”“충언하는 겁니다.”“내가 싫다고 한다면?”“저도 저하 곁에서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두 눈 벌겋게 뜨고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라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늉을 했다.
영의 입에서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았다. 네 말대로 닷새에 한 번은 쉬마.”“약조하셨습니다.”“약조하였다.”“제가 안 본다고 하여 그 약조 어기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이 궁궐 안에 내관의 눈과 귀가 없는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 행여 약조 어겼다간 당장에 네게 전해질 터. 네가 안 본다고 하여도 약조 어기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마라.”“하시는 김에 하나 더 약조하십시오.”“이번엔 뭐냐?”“내관들이 올리는 차도 그때그때 따뜻할 때 드시겠다고 말입니다.”“오냐, 그것도 약조하마.”“하루에 한 번은 운동 삼아 후원을 거닐겠다고 약조하십시오.”“그러마.”“무슨 일이 있어도 수라 물리는 일, 없겠노라고 약조하여 주십시오.”“그래.”“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밤새 서책 읽으시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약조하십시오.”“오냐, 하마. 또? 또 무얼 약조할까?”“홀로 잠들지 마십시오.”“알았느니. 그건 내가 나서서 약조를 받아내고 싶은 것이었다.”“아프면 아프시다 소리 내어 말하십시오. 뭐든 참지 않으시겠다고 저와 약조하여 주십시오.”“그래. 약조한다.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약조하마. 대신…….”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영이 돌연 라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거센 완력에 휩쓸린 라온은 그대로 영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
“이리 약조해 주었는데, 아무것도 없느냐?”“네?”“내가 이리 약조하면 넌 내게 무얼 해 줄 것이냐?”“무얼 해드리면 되겠습니까?”“원하는 건 뭐든 해줄 것이냐?”“원하는 무엇이든 약조하셨으니. 이번 한 번만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이번 한 번만이라. 어째 내가 많이 밑지는 장사 같구나.”“싫으시면 관두십시오.”냉큼 품을 벗어나는 라온을 영이 서둘러 양팔로 가뒀다.
“어찌 이리 급해? 밑지는 것 같다고 했지, 싫다고 한 적 없다.”“그렇습니까? 그럼 말씀하십시오.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우선 내가 원하는 것은 말이다…….”지그시 눈을 감은 영이 라온의 입술을 탐했다.
“이리 원하는 것을 들어드리니, 저하께서도 약조 지키셔야 합니다.”그 어떤 상황이 되어도 말입니다.
뒷말을 꿀꺽 삼킨 채 라온은 순순히 영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붉은 그녀의 입술은 그렇게 그에게 점령당한 채 오래도록 풀려나지 못했다.
* * *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경소리가 자선당의 어둠을 뒤흔들었다.
대들보에서 내내 미동도 않은 채 누워 있던 병연이 나비처럼 사뿐하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인경을 알리는 종소리.
누군가에겐 통행을 금지하는 소리였지만, 요 그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연에겐 임무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들려왔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든 라온을 한번 훑어보고는 자선당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채 한 걸음 떼기 전.
“김 형.”잠든 줄 알았던 라온이 그를 불렀다.
“오늘도 나가십니까?”“안 잤어?”“잘 겁니다.”“그럼 자.”병연은 방 밖으로 발을 디뎠다.
“김 형.”그러나 어느 틈엔가 다가온 라온에게 옷자락을 잡히고 말았다.
“왜 그래?”조금은 별스런 행동에 병연은 제 옷자락을 잡고 있는 라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냥…….”병연의 심드렁한 시선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제 손에 고정되어 있자 라온이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늘도 새벽이나 되어야 돌아오십니까?”“아마도.”“김 형.”“왜?”“혹여 위험한 일을 하시는 건 아니시죠?”“……아니다.”조금 간격을 두고 병연이 대답했다.
라온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역시 거짓말을 못하는 분이시라니까.
“정말입니까?”“…….”이것 봐. 대답 못 하시잖아.
피식, 웃음을 짓던 라온이 병연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언젠가 병연이 라온에게 주었던 월하노인의 팔찌와 비슷한 모양의 팔찌였다.
“이게 뭐냐?”“수호부입니다.”“수호부?”“네. 김 형께서 주신 걸 보고 비슷하게 만들어보았습니다. 김 형의 무사평온을 비는 제 마음을 담았으니. 이 녀석이 김 형을 지켜줄 겁니다.”라온의 말에 병연은 팔찌와 라온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음에 안 드시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이런 장신구 차는 걸 싫어하십니까?”“싫어하진 않지만…….”“잘 됐습니다. 그럼…….”“좋아하지도 않는다.”“아, 그렇구나. 그래도 모처럼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는데.”속는 셈 치고 차 주십시오.
속마음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얼굴로 라온이 팔찌를 살짝 흔들었다.
조금은 조르는 듯한 그 표정에 병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성가신 녀석.”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마지못한 듯 라온의 손에 들려 있던 팔찌를 손목에 찼다.
“이리하면 되는 거냐?”“네.”라온의 표정이 단박에 부풀어 올랐다.
눈빛을 반짝거리며 병연의 손목에 차인 팔찌를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잘 어울립니다. 잊지 마십시오, 김 형. 그 녀석이 김 형을 지켜 줄 겁니다.”“성가시다.”불퉁한 말과는 달리 자선당을 나서는 병연의 얼굴에는 소년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건강히 지내십시오, 김 형.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병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라온이 텅 빈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반 시진 후.
동궁전 솟을대문 앞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라온이었다.
그녀는 아련한 시선으로 불 꺼진 영의 처소를 응시했다.
라온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그는 오늘 밤 일찌감치 침소에 들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구는 영을 떠올리던 라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화초저하만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났다.
행복해서…….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부풀고, 한없이 기뻐 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런 사람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시려 왔다.
눈 닿는 곳마다 그분과의 추억이 가득했다.
발길 머무는 곳마다 화초저하의 잔상이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
라온의 눈 속에 위태로운 눈물 벽이 들어찼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언제까지고 그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이리 떠나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가슴 아팠다.
그래도 여기서 더는 머물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있는 한 저하께서는 마음 편히 웃으실 수 없으실 거야.
라온은 알게 되었다.
자신의 존재가 화초저하에겐 큰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언젠가 그분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런 운명이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당신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어서…….
하필이면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아니야.”라온은 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질러 물기를 지웠다.
“더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아.”귀한 분을 만나게 해주었으니.
비록, 어쩔 수 없이 그분의 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분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하늘에 감사했다.
“이건…… 옳은 선택이야.”그리고 그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라온은 불 꺼진 영의 처소를 향해 절을 올렸다.
“잘 지내십시오, 화초저하. 저하 덕분에 저는 제가 소중해졌습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도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십시오. 아껴주십시오. 언제까지고 행복하십시오.”일평생 가져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행복을 가져보았다.
단 한 번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랑도 받아보았다.
그러니 남은 생은 그 추억만으로도 살 수 있으리라.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난 라온은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머물렀다간 영영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지.
마음을 다잡은 라온의 걸음이 동궁전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 * *
파루가 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서소문 밖. 인적이 드문 언덕으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틈엔가 궁을 나온 라온이었다.
영이 잠행을 나갈 때마다 사용했던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 비밀통로가 사실은 왕과 왕세자만이 아는 특별한 통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한낱 내관이 일국의 왕과 왕세자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걸었다는 것을 누군가 아는 날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누군가 알게 되었을 땐, 라온은 이미 한양을 떠난 후일 터.
라온은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날이 환하게 밝기 전에 도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어머니, 단희야.”라온은 숨이 차오른 목소리로 어머니와 단희를 부르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제 미리 기별해 두었으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어머니, 저 왔어요.”그런데 어쩐 일인지 집 안은 고요했다.
라온은 방문을 열며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급히 짐을 싼 흔적이 역력한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짐 보퉁이는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퉁이 옆에 사납게 찍혀 있는 발자국.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어머니! 단희야!”라온은 서둘러 어머니와 단희를 부르며 집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아무래도 늦은 것 같군.”등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낯설지 않은 얼굴. 어디서 봤더라?
고민하는 라온의 뇌리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윽고 라온의 입에서 사내를 부르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박 선비님?”“저를 기억하십니까?”“네. 기억합니다.”라온이 박 선비라 부른 사내.
언젠가 할아버지를 뵈러 가던 길에 동행했던 사람이었다. 박만충이라 하였던가?
그런데 박 선비님께서 우리 집엔 어찌 오신 것일까?
라온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박만충이 사정을 설명했다.
“저하께서 이곳을 은밀히 지켜보라 명하셨소.”“그러셨습니까?”역시 그랬구나.
영에 대한 고마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자상하시고 꼼꼼하신 분이시라. 이런 지시도 내리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 선비님. 혹시 제 어머니와 동생이 어디로 가셨는지 아십니까?”“실은…….”박만충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근래 이 집 주위로 불온한 자들이 종종 나타나 주의를 기울이던 참이었소.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불, 불온한 자들이라뇨?”라온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박만충이 라온을 잠시 보며 입을 열었다.
“모르고 계셨소? 홍 내관의 집안내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요.”“제…… 집안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역적의 집안이라는 것까지?
그것도 아니면 라온이 거짓 사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걸까?
박만충의 말에 라온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말아 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설마, 어머니와 단희에게 무슨 일이도 생긴 건 아니겠지?
“박 선비님, 혹시 우리 어머니와 단희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계십니까?”박만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은 가오.”“어딥니까? 어서 안내해 주십시오.”“위험할 수도 있소.”“상관없습니다.”지금 제 일신의 안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어떤 고초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알려주십시오.”라온의 간곡한 부탁에 박만충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회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안내해드리겠습니다.”“회 분들이라면…….”박만충의 입가에 긴 미소가 그려졌다.
“백운회, 세자저하를 위해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오. 저하께서 하시는 일을 은밀히 돕고 있지요.”세자저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
라온은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서 안내해 주십시오.”“위험할 수도 있소. 그러니 절대 내 주위를 떠나서는 아니 되오.”라온은 박만충의 뒤를 쫓아 어두운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걱정은 마시고, 서둘러 안내해주십시오”어머니, 아무 일도 없는 거지요?
단희야, 너 괜찮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