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떠나지 않고 떠나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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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들으셨소? 세자저하께서 전라좌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시었다고 하오.”“그곳이라면 이미 조만영이 암행어사로 한번 훑은 지역이 아니외까?”김조순의 사랑채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여앉아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또다시 암행어사라니요? 저하께선 참으로 혹독하신 분이십니다. 말로는 관리들의 비행을 발본색원하려 함이지만 실은 우리 안동 김씨 일문을 뿌리째 뽑아내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부원군 대감, 이대로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을 셈입니까?”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석에 자리하고 있는 부원군 김조순에게로 향했다.
분개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김조순은 동요하지 않는 얼굴을 한 채 담담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한 듯 누군가 가슴을 쳤다.
“참말로 이리 당하고만 있을 겝니까? 저하께서 우리 일문을 그야말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지난번엔 궁내의 법도로 우릴 압박하시더니, 이젠 암행어사까지 동원하고 있지 않습니까?”“어디 그뿐이오? 우리 사람들이 빠진 자리에는 빈궁마마의 집안인 풍양 조씨를 비롯한 세자저하의 사람들로 채우고 계시니……. 이러다 정말 이 나라의 국운마저 흔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과거시험은 또 어떻습니까? 인재를 고루 등용하신다는 명목 아래 음서제를 폐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음서제가 무엇입니까? 나라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주는 혜택이 아닙니까? 그리고 작금의 이 조선에서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이들은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음서제를 없애시다니요. 그분께선 우리 앞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암행어사 역시도 분명 우리 일문의 숨통을 죄기 위해 내려 보내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이러다 조정에 우리 사람들이 남아나질 않겠소이다. 부원군 대감, 설마 이대로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생각이겠지요?”따지듯 묻는 목소리에 김조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자저하의 행동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않소?”“네?”뜻밖의 대답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조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궁내의 법과 예를 따지는 것은 그동안 국사에 바빠 다들 번거로운 일을 피하다 보니 생긴 일이고, 음서제는 우리 일문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것이니 폐지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암행어사 일은 더더욱 그 지역 관리들에게 흠이 없으면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겠소?”생각지도 못한 김조순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헌데 일문의 수장이라는 이의 입에서 어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김조순을 응시했다.
“설마, 설마 부원군 대감께서는 세자저하께서 하시는 일들이 모두 옳으니 그저 지켜보고만 있자 말씀하시는 겁니까?”김조순이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세자저하께서 하시는 일에 빈틈이 없으니. 모르는 이의 눈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하려 함이오. 허나, 그분께서 쏜 화살의 촉이 우리 일문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그때 누군가 목청을 돋워 물었다.
“하여,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그보다 참의영감은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다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김조순을 응시했다.
짧은 시간 동안 힘의 추가 급격하게 왕세자 쪽으로 기울게 된 원인, 다름 아닌 예조참의 김윤성의 부재였다.
그가 일문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설 때에는 조금의 어려움은 있었어도 곤궁함은 없었다.
왕세자의 느닷없는 공격에도 언제나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내곤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윤성이 일문의 모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임에 빠지지 말라는 부원군의 엄중한 명도 윤성을 다시 불러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열의가 사라졌다.’라는 이상한 대답만 늘어놓았다.
세자와 맞서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사람이 열의가 사라졌다니.
“부원군 대감께선 참의가 저러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김조순이 고개를 저었다.
“내 핏줄이긴 하지만, 그 녀석의 속마음은 도무지 모르겠소.”“그렇다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군요.”일순,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지켜보던 김조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못난 녀석. 사람들을 이리도 휘저어 놓고, 이리 의지하게 하고선 손을 털어버리다니. 세자만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면, 이 모든 권력이 자신의 것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어찌 이리도 못나게 군단 말인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녀석이 갑자기 모든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물러난 이유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었는데…….’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윤성이 왕세자 영과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을 벌인 이유.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진정 윤성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김조순은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가질 수 없게 된 모양이군.’어쩌면 윤성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원군 대감. 앞으로 어찌해야겠습니까?”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김조순의 상념을 방해했다.
묻는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조차 얕잡아 보던 자들이 이젠 자신들의 목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다.
왕세자 영의 존재가 생각 이상으로 크고 위협적이었다.
김조순은 열려있는 바라지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희미한 구름 위로 유유자적 흘러가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달빛이 영의 눈빛만큼이나 시리고 차갑게 느껴졌다.
“정공으로 아니 되면, 비겁한 수작이라도 부려야겠지요.”“비겁한 수작이라 하시면…….”김조순의 입가에 비틀어진 미소가 드리워졌다.
“걱정 마시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적당한 수단을 마련해 놓았으니.”김조순의 확고한 대답에 사람들의 굳은 표정이 풀렸다.
그가 이리도 장담한다니 무언가 지금의 상황을 돌파할 기묘한 계책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부원군 대감이시다. 음모와 계략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일평생을 보낸 사람. 김조순이라면 남들이 찾지 못한 비책을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내 걱정과 근심을 무겁게 가라앉았던 자리에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어딘가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달무리를 삼켰다.
* * *
붉은 가을빛이 궁궐 안을 가득 채웠다.
저녁노을 끝으로 어스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딱!
차가운 바둑돌이 바둑판 위에 내려앉으며 고요하던 중희당의 공기를 흔들어 깨웠다.
견고하게 집을 짓고 있는 검은 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영이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늘었구나.”맞은편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윤성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저야 고작 바둑이 늘었을 뿐이지만 저하께서는 저하의 사람들을 늘리셨으니. 어느 쪽이 더 남는 장사인지 모르겠습니다.”“정치를 어찌 장사에 비견할 수 있겠느냐마는. 정치든, 장사든, 사람의 일이라. 결국은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겠지.”딱!
영이 내려놓은 흰색의 바둑돌이 검은 집을 짓는 윤성의 돌을 막았다.
“아닙니다, 저하.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윤성의 말에 영은 잠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찌 된 이유에선지 윤성의 얼굴에서 다시 예전의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가면과 같은 그 웃음이.
“한동안은 표정이 좋지 않더니.”“골치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이제는 사라졌고?”“귀찮게 느껴져서 벗어버렸습니다.”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이 김씨 일문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은밀한 경로를 통해 이미 전해 들은 탓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지금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하나, 어린 시절에는 함께 놀던 동무가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은 어인 일로 바둑을 두고 싶다 청했느냐?”영의 물음에 윤성이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패배를 시인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패배를 시인해?”윤성은 고개를 들고 영을 바라보았다.
“졌습니다. 수 싸움은 물론, 다른 싸움 역시 깨끗하게 졌습니다.”수 싸움이란 정치적인 대립을 뜻하는 것이리라.
얼마 전까지도 윤성은 영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다.
윤성의 지략이 영과 비견하여 모자란 것이 아닌지라. 승승장구하던 영조차도 윤성을 상대할 때면 번번이 당황하곤 했었다.
윤성은 영의 작은 빈틈도 놓치지 않았다.
최근엔 전라도 지역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를 뻔한 일도 있었다. 김씨 일문을 쳐내고 새로 들인 관리 중에 크게 부정을 저지른 자가 있었던 것이다.
김씨 일문에게 이야기가 들어간다면 난감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했다. 다행히 윤성이 중도에 빠진 덕분에 김씨 일문의 반응이 늦어 수월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바로 오늘 영이 직접 내려 보낸 암행어사가 일을 잘 마무리 지었노라 장계를 올렸다.
영은 궁금했다.
굶주린 짐승처럼 영을 향해 이를 드러내던 윤성이 돌연 정치판에서 물러났다.
대체 무엇이 그를 움직인 것일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정치와 더불어 언급한 다른 싸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헌데, 나와 다른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문득 영의 뇌리로 라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아직도 그 녀석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일까?
속내를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듯한 영의 시선을 외면하며 윤성은 하하 짧게 웃었다.
“그런 게 있었습니다.”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영의 물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저하.”영과 윤성,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공기를 뚫고 최 내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냐?”“빈궁마마 입시옵니다. 대비전으로 저녁 문안드리러 가실 시각이옵니다.”“시간이 벌써 그리되었구나.”말과 함께 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 못다 한 승부는 다음에 계속하도록 하자꾸나.”“언제든 불러만 주시옵소서.”고개를 숙이는 윤성을 향해 잠시 시선을 던지던 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돌층계를 내려서는 그를 세자빈 조 씨가 해사한 얼굴로 맞이했다. 이윽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동궁전을 나서는 세자 부부를 수십 명의 환관과 궁녀들이 뒤따랐다.
그 긴 행렬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줄곧 시선을 보내던 윤성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윤성이 영과 맞서는 일을 그만둔 이유.
바로 영과 나란히 걷고 있는 세자빈과 관련이 있었다.
말 많은 궁의 호사가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던 것이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지 않소?”“정말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어요.”그들의 말에 윤성은 쓰게 웃고 말았다.
궁 안 사람들의 눈에는 세자와 빈궁의 사이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눈은 속여도 자신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윤성은 알고 있었다.
왕세자와 빈궁의 관계가 평범한 부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사이가 좋다?
사이가 좋긴 하지. 하지만 그 사이가 부부 사이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영과 세자빈의 관계.
그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는 주군과 신하의 관계와 비슷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를 허용한 사이.
두 사람의 사이가 저리 다정해 보이는 것도 모두 나름 합의에 의한 완벽한 연기였다.
거짓은 거짓을 알아보는 법.
일평생을 거짓 웃음으로 살아왔기에 윤성은 단박에 두 사람의 거짓된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한 사이.
세자와 세자빈의 관계가 이처럼 얼토당토않아진 것이 한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다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윤성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 * *
왕세자의 혼례 다음날, 윤성은 라온을 찾아갔다.
“괜찮습니까?”그의 물음에 라온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네. 편합니다.”윤성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세자가 다른 여인과 혼례를 올렸다. 그런데 편하다? 아니, 해사하게 웃는 라온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자빈의 자리는 다름 아닌 라온의 자리여야 했다. 다른 여인에게 사랑하는 정인을 빼앗기고도 어찌 저리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리 거짓으로 행복한 표정 지을 필요 없단 말입니다.”“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편하고 행복합니다.”“어째서요?”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행복하단 말입니까?”여인의 몸으로 거짓 사내행세를 하고, 환관이 되어야 했다.
참으로 가혹한 운명.
그 저주받은 운명이 이젠 라온에게서 정인마저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행복하다 말하고 있었다.
윤성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하께서는 결국 홍 내관에게서 등을 돌린 것입니다. 밉지 않습니까? 원망스럽지 않습니까?”“그분께서 절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라온이 말을 이었다.
“이처럼 그분의 곁을 지킬 수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그것은 윤성이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단단한 믿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가 저리도 굳건할 수 있단 말인가.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배워왔다.
언제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돌아서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을 향한 라온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세자의 등 뒤에서 그를 지켜볼 수 없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아니, 전보다 더 깊이 연모하고 있었다.
그 지독한 연모가, 그 견고한 신의가 윤성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모든 것들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때부터였다.
윤성이 일문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된 것은.
라온의 진심을 보고,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알게 되자, 의욕이 사라졌다.
모든 일이 시시해지고, 아무 일도 하기 싫어졌다.
그녀의 마음에 조금의 빈틈만 있었어도 윤성은 끝까지 영과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맞설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윤성은 영을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라온에 대한 그의 마음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세자빈을 대하는 영의 태도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세자빈을 향해 웃고 있었지만, 영의 시선은 줄곧 라온을 좇고 있었다.
라온의 얼굴을 살피고, 라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홍라온이라는 존재는 영의 뇌리와 그의 심장에 단단히 인(印)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하.”윤성은 돌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정말 저 두 사람에겐 이길 수가 없겠군. 하하하하.”긴 웃음 끝에 시린 슬픔이 스며들었다.
* * *
이른 아침.
돈화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한 무리의 젊은 사내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상열이, 자네는 어디로 갈 건가?”“당연히 집으로 가야지. 그러는 도 내관. 자네는 집에 안 가고 어딜 가려는 것인가?”“오랜만의 휴가가 아닌가. 따분한 집보다야…….”말끝을 흐린 도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전에 봐둔 기루가 있다네. 술맛도 좋고 기녀들의 인물도 제법 좋은 곳이지. 상열이, 같이 안 가겠는가?”“됐네.”상열의 대답에 실망한 도기는 제 곁에 있는 라온을 유혹했다.
“그럼 홍 내관은 어떠십니까? 그동안 홍 내관님 덕분에 주머니도 두둑해졌으니. 이참에 제가 거하게 한턱내겠습니다.”“저도 사양하겠습니다.”손사래를 치는 라온과 상열을 번갈아 보던 도기는 마른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오랜만의 휴가라.
소환 내시 몇몇과 라온은 언제나 걸치고 있던 환관복 대신 평범한 사대부 집안의 사내복으로 변복한 채 궁궐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거참, 사람들이 재미없게.”작게 투덜대던 도기가 먼저 걸음을 뗐다.
“그럼 난 이만. 홍월이가 나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서.”상열이 뒤이어 걸음을 옮겼다.
“그럼 홍 내관님. 모처럼의 휴가, 잘 보내고 오십시오.”그렇게 도기를 비롯한 상열과 소환 내시 몇 명이 자리를 뜨고 난 뒤, 홀로 남은 라온은 돈화문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녀오겠습니다.”보이지 않는 영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그녀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참말로 답답하단 말이시. 내가 뭔 죄여?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단 말이시.”구 노인의 담뱃가게 안으로 황금빛 아침 햇살이 길게 파고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담뱃가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난밤에 시전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천 서방과 그의 아내 안 씨와 한바탕 전쟁의 후일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한쪽 뺨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천 서방이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그 여편네가 이제는 미친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행패를 부릴 수가 없지. 이게 내가 그동안 참고 있으니께 내가 참나무로 보이는지. 내가 이번에는 안 참을 것이여. 내가 이번에는 기필코…….”“손을 꼭 잡아주십시오.”“그려. 손을 꼭 잡아줄 것…… 응? 뭔 헛소리여? 뉘여? 그 미친 여편네 손모가지를 잡으라고 말한 주둥이가 어느 주둥이여?”“이 주둥입니다.”그때 천 서방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 틈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죽일 듯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던 천 서방이 마치 봄을 맞은 새색시처럼 환한 표정이 되었다.
“뭣이여? 삼놈이 아닌가?”“삼놈이?”“우리 삼놈이가 왔단 말이야?”일순, 담뱃가게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천 서방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일제히 라온에게로 향했다.
“아이고, 진짜 삼놈이네.”“어머나, 이게 얼마만이야. 그나저나 우리 삼놈이는 그새 더 고와졌네.”“궁궐 물이 좋긴 좋은가 봐요. 사람이 아주 때깔이 달라졌어요.”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떠들썩한 환대에 라온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다들 잘 지내고 계셨어요?”“잘 지내긴. 우덜이 어떻게 잘 지내? 삼놈이가 없는디. 그나저나 삼놈이, 잘 왔어. 내 말 좀 들어봐. 그러니까 우리집 여편네가 말이시…….”천 서방이 막 하소연을 하려는 찰나, 라온이 그의 말을 잘라냈다.
“천 서방 아저씨랑 막손 아주머니랑 손을 잡으셨다면서요?”“우찌 안겨?”“여기 오는 길에 안 씨 아주머니를 뵈었어요.”“망할 여편네. 벌써 나불나불 주둥이질이구먼.”“주막에서 울고 계시던데요.”“울어? 그 여편네가? 눈에 뭐가 들어간 건 아니고?”“속상하시니 우신 거죠. 가보세요. 가셔서 잘못했다고 하세요.”“내가 뭐를 잘못했다고.”천 서방이 펄쩍 뛰었다.
“막손 아주머니 손, 잡으셨잖아요.”“내가 잡으려고 한 게 아니고, 어쩌다 우연히…….”“그래도 아저씨가 잘못한 거예요.”“암만 그래도 이번엔 나도 못 참아. 삼놈이도 눈이 있으면 이 얼굴 좀 보라니까. 멀쩡한 사내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든 여편네가 어디에 있단 말이여. 내 이놈의 여편네를 이참에 쫓아내고 말 것이여.”이를 으득 가는 천 서방을 보며 라온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천 씨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삼 년을 내리 앓으셨는데. 그 병수발 누가 하셨죠?”“누구긴 누구여? 그 망할 여편네지.”“예전에 아저씨가 말씀하셨잖아요. 자식도 못할 일을 아주머니가 해주셨다고. 일평생 고마워하며 살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라온의 말에 천 서방의 우락한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려. 그때 그 여편네 고생이 말이 아녔어. 노인네 병수발 든다고 그 추운 겨울에…… 내가 미친놈이여. 막손네가 아무리 엉덩이를 흔들어도 넘어가는 게 아닌데.”한바탕 후회를 흩뿌리던 천 서방은 부리나케 담뱃가게를 나갔다.
그 후에도 시전 상인들의 여러 가지 고민이 라온에게로 날아들었다.
“이 사람들아! 그만들 좀 하게나. 보아하니 오랜만에 쉬러 궁 밖으로 나온 사람인데. 좀 쉬게 냅둬.” 보다 못한 구 영감이 담뱃대로 벽을 탕탕 치며 한소리 했다.
“하지만 영감님, 삼놈이가 궁으로 다시 돌아가면 내 고민은 누구한테 풀어놓는단 말이오?”“내 말이. 그러니 궁에 돌아가기 전에…….”“저 사람들이. 삼놈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어머니랑 단희 데리고 집으로 가라. 여기 있다간 저 사람들 쓸데없는 말에 하루해가 저물게야.”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구 영감은 사람들을 쫓아내는 대신 라온과 단희, 그리고 최 씨를 가게에서 몰아냈다.
쫓아 나오려는 사람들을 구 영감이 막아준 덕분에 라온은 어머니와 단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머니.”“이제야 우리 딸 얼굴, 제대로 보는구나.”“네.”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라온의 눈가에 축축한 습기가 들어찼다.
“단희야, 잘 지내고 있었던 거야? 어머니도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시죠?”“우리야 언제나 괜찮지. 그러는 너야말로 어찌 이리 말랐어?”최 씨는 꼼꼼한 시선으로 여식을 살폈다.
“어디 아팠던 게야?”“아니요. 그냥…… 계절을 좀 탔나 봐요.”영의 혼례 이후, 좀처럼 식욕이 나지 않아 깨작거렸던 것이 어머니 눈에는 들어왔는가 보다.
라온은 애써 씩씩한 웃음을 보였다.
“무어, 힘든 일이라도 생긴 거니?”“힘든 일 없어요. 어머니, 제가 이래 봬도 정 7품의 상훤이거든요. 궁궐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보다 어머니랑 단희는 어찌 지낸 거예요? 가만있어봐. 우리 단희는 제법 아가씨가 다 되었네.”“언니도 참. 내 나이가 벌써 열여섯이에요.”“그래? 우리 단희가 벌써 그리되었구나. 우리 단희, 시집보내야겠네.”“언니도 참.”라온의 말에 어쩐 일인지 단희의 얼굴이 발그레 붉어졌다.
“어라? 뭐야? 혹시 너, 마음에 품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말도 안 돼요.”그냥 놀리려는 마음으로 물은 것인데 단희가 지나치게 정색했다.
“뭐야? 그렇게 정색을 하니까 더 수상한데?”“아니라니까요.”“그래?”“네.”“정말이지?”“정말, 정말이에요.”“그럼 다행이다.”“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언니의 뜬금없는 말에 단희가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라온은 여전히 얼굴 가득 웃음을 매단 채로 어머니와 단희를 번갈아 보았다.
“어머니.”“왜 그러니?”“뭔데요, 언니?”“우리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화초저하가 없는 곳으로, 그분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영원히…….
구름에 달빛 저무니
여윈 잠 서러워라.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리니
그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리니.
아린 꿈 눈물겨워 잠에서 깨어나니
서글픈 달밤이어라.
떠나지 않고 떠나가리니
그대, 그리워하지 않고 그리워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