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99화 (99/131)

99. 혼롓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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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운명은 치열하게 삶을 파고들었다.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졌다.

한양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들을 상대로 초간택이 치러졌다.

그리고 이레 후.

재간택이 치러지고 마지막 삼간택에서는 정해진 수순처럼 조만영의 여식인 조하연이 최종 간택되었다.

짙푸른 계절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

드디어 혼례일이 정해졌다.

동궁전 안팎은 새로운 안주인을 맞이하는 일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열매달 열닷새.

파루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왕세자께서 별궁으로 납시어 세자빈을 맞이하여 대궐로 돌아오는 친영 의식이 있는 날이었다.

들뜬 긴장감이 궁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자선당 솟을대문 앞에는 긴장감이 팽배한 궁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기운이 흘렀다.

“휴우.”자선당 담벼락 아래에 쪼그리고 앉은 장 내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문서 적(籍)이라.”그는 들고 있는 나무 막대기로 연신 한 글자를 바닥에 쓰고 있었다. 글씨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장 내관의 한숨도 깊어졌다.

“장 내관님.”대문을 나서던 라온이 장 내관을 발견하고는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또 왔습니까?”라온의 물음에 장 내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 내관이 바닥에 힘없이 쓰고 있는 글자는 문서 적. 하지만 속풀이를 하자면 위의 대나무 죽(竹)에 왼쪽의 글씨는 쟁기 뢰(?). 하지만 약자와 같으니 올 래(來)로.

옆의 글자까지 풀이하면 ‘스무하룻날, 대나무밭으로 오십시오.’란 뜻의 파자였다.

파자로 만들어진 연서는 매달 보름이면 장 내관에게 어김없이 전해지고는 했던 것일까?

대체 뉘일까?

궁금도 하지만 더럭 겁도 났던 터라. 장 내관의 근심은 깊어졌다.

“한번 나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그러다 덜컥 정분이라도 나면 어찌하오?”“정분이 나면 안 되는 것입니까?”“우리는 이미 주상전하의 사람입니다. 어찌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단 말이오. 그건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우리는 목숨이 붙어 있는 그저 모시는 분의 곁을 지키는 것에 만족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처지에 정분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물론이고…… 그 여인에게도 못 할 짓이지요.”“어째서요?”“내가 그러니까……, 홍 내관도 알다시피 온전한 사내 노릇이 불가능하지 않소.”“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질 않습니까?”“그건 그렇지만…….”“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맥없이 기다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여인에게 가장 못 할 짓입니다.”“그렇소?”“네. 차라리 매정하게 말하십시오. 그럼 그 여인도 마음을 추스를 겁니다.”“그럴까요?”“그럴 겁니다.”라온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바닥으로 내렸다.

장 내관이 수십 번 쓰고 지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장 내관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모시는 분의 곁을 지키는 일에 만족해야 하는 사람이라고요. 그러니 더더욱 단호하게 말씀하십시오. 이제는 그런 연서 보내지 말라고. 그리해봤자 상처밖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쓸쓸한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다급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 분 중에 홍 내관님이 뉘십니까?”어린 궁녀의 목소리에 라온과 장 내관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접니다만.”“어서 따라오십시오.”“저를요?”“네. 최고상궁 마마님께서 찾으십니다.”“무슨 일인지요?”“따라오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재촉하는 어린 궁녀를 따라 라온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최고상궁의 처소였다.

“세자저하께서 대례복(大禮服)을 착용하실 때 자네더러 수발을 들게 하라는 명일세.”훑는 시선으로 라온을 바라보던 최고상궁 안 씨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라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마 전, 최 내관께 청한 일이었다.

‘세자저하의 대례복은 제 손으로 입혀드리고 싶습니다.’그 말을 용케도 들어주신 모양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네.”말과 함께 안 상궁은 곁을 지키고 있는 상궁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대례복이 든 함이 들어왔다.

함을 열어 보이며 안 상궁의 설명이 이어졌다.

“잘 보게. 이것이 상의인 의(衣)일세. 중단을 입으신 후에 이 의를 입으셔야 하네. 이것은 하의의 상(裳)이네. 그 위에 허리띠인 대대(大帶)를 차고 폐슬(蔽膝)과 패(佩), 수(綬)를 장식하면 된다네. 어찌, 기억할 수 있겠는가?”“네. 의와 상을 입으시고, 대대인 허리띠를 차고, 그 위에 폐슬과, 패, 수를 장식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그렇다네. 마지막으로 이 붉은 버선과 붉은 신을 신으시면 된다네.”“알겠습니다.”“잘할 수 있겠는가?”“노력하겠습니다.”“노력만으로는 아니 되네. 행여 조금의 실수라도 있다간, 우리 모두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야.”“명심하겠습니다.”최고상궁의 처소를 나서는 라온의 곁으로 장 내관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오? 무슨 일로 최고상궁께서 홍 내관을 부른 게요?”갑작스러운 부름에 혹여 라온에게 일은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한 얼굴이었다.

“세자저하의 대례복 착용을 도우라 명하셨습니다.”“…….”장 내관의 안색이 하얗게 바래졌다.

“왜 그러십니까?”“언제였던가. 주상전하의 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세자셨던 시절, 그분의 책봉례 때였을 겁니다. 저하의 대례복 착용을 돕던 상궁이 있었지요.”“그렇습니까?”또 무슨 얘길 하시려고 이러실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 상궁이 저하의 허리띠를 너무 세게 조였지 뭡니까.”“그런데요?”뭔가 불길하다?

“그 일로 저하께서 불같이 노하셨고, 그 상궁은…….”“어찌 되었습니까?”“연못에 빠져 스스로 자결을 하였지요.”“…….”그깟 일로 자결이라니. 그런데…….

“설마, 그 상궁께서 자결한 연못이 자선당 연못은 아니겠지요?”“왜 아니겠소?”라온의 물음에 장 내관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째 궁에서 일어나는 작은 실수의 귀결은 이리 유혈낭자한 것인지. 게다가 자결했다 하면 자선당이니.

문패라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결의 명소, 자선당.

그보다…… 서둘러야겠다. 화초저하 기다리시겠네.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  *  *

사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궁을 가득 메웠다.

성문이 열리고 조정 대신들이 궁 안으로 들어섰다.

친영의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술렁거리는 긴장감은 동궁전의 처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의와 상, 대대와 폐슬, 수와 패, 그리고 버선까지. 완벽합니다.”대례복을 입은 영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의 모습이었다.

그 존귀함이 지나쳐 볼 때마다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라온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로 영을 바라보았다.

“…….”영은 대답이 없었다.

“아차차. 한 가지 잊고 있었네.”라온은 조금은 과장되게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중요한 것을 잊다니. 제 정신이 이렇습니다.”처소 안쪽으로 사라졌던 라온은 붉게 옻칠 된 커다란 나무함을 갖고 나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면류관을 꺼냈다.

앞뒤로 여덟 줄의 구슬을 늘어뜨린 면류관.

그녀는 그것을 영의 머리 위에 씌웠다. 자로 잰 듯 면류관은 영의 머리에 꼭 들어맞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무에 못마땅한 것인지, 영은 내내 찌푸린 얼굴이었다.

“화초저하, 좋은 날입니다. 어찌 표정이 그러십니까? 웃으십시오.”“네게는 이 날이 그리 좋은 날이냐? 정녕 그리 웃음이 난단 말이더냐?”“빈궁마마를 맞이하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닙니까. 오늘이 좋은 날이 아니면 어느 날이 좋은 날이겠습니까?”“…….”“여인이란 예민한 족속들이지요. 마음에서 우러나 기뻐하지 않으면 겉으로 아무리 웃고 있어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맙니다. 그러니 저하, 마음으로 기뻐하십시오.”“기뻐할 수가 없다. 나는…… 나는…… 라온아. 지금이라도 하지 마라 해라. 네가 하지 마라 하면 나는 아니 할 것이다.”영이 거센 힘으로 라온을 끌어당겼다.

일순간에 그의 품속에 안긴 라온은 서둘러 영을 밀쳐냈다.

“이러지 마십시오.”“라온아.”“아, 옷에 주름이 생기질 않았습니까? 정말 저하 때문에 못 살겠습니다. 아, 어쩌지? 최고상궁 마마님께서 조금도 실수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설마, 이것 때문에 자선당 연못을 찾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지금 그것이 중요하더냐?”영은 라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좀처럼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라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제게는 그것이 중요합니다.”“무슨 말이더냐?”“예전에 저하께서 말씀하셨지요? 저하께서는 저하의 본분이 있고 저는 저의 본분이 있는 것이라고. 저하께서 저하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이리 혼례를 올리는 것처럼,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저하를 보내드리는 것입니다.”“라온아…….”영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 문밖에서 최 내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하.”“무슨 일이냐?”“시간이 되었사옵니다.”“…….”“저하…….”“곧 나가실 것입니다.”보다 못한 라온이 영의 등을 떠밀었다.

“저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웃으십시오. 좋은 날이 아닙니까. 웃어야 합니다. 이렇게 활짝, 웃으십시오.”라온은 영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 화사한 웃음을 배웅 삼아 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탁.

문이 닫히고 난 뒤.

라온의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 이상하게도 습윤한 물기가 들어찼다.

벽에 기대 서 있던 라온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어찌하여 이런 기분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좋은 날인데, 분명 좋은 날인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정말 모르겠다.

*  *  *

해시(亥時).

멀리서 인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왁자하던 궁에 차분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친영의 의식을 마친 왕세자와 세자빈께서 동뢰연까지 마치고 합방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종일 긴장했던 탓일까?

온몸의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눈꺼풀은 무겁고 머릿속은 연신 빙빙 소용돌이쳤다.

자꾸만 한기가 느껴져 라온은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파고들었다.

피로가 밀려들었다. 온몸이 물속에 가라앉은 듯 무거웠다. 얼마나 피곤한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어찌 이리 힘든지 모르겠네.

어찌 이리 어깨가 시린 것인지…… 정말 모르겠네.

눈앞이 흐려졌다. 정신마저도 까무룩해져갔다.

한껏 웅크린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자니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어깨를 쓸어내렸다.

라온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김 형, 오셨습니까?”“…….”“요즘은 어찌 이리 자선당을 비우는 일이 많아지신 것입니까? 너무 늦지 않게 다니십시오. 걱정된단 말입니다.”“…….”“그런데…… 식사는 하신 겁니까?”“…….”“죄송합니다, 김 형. 오늘만 알아서 챙겨 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지금 꼼짝도 하기가 싫어서 말입니다.”“…….”“하하하, 오늘만 봐 주십시오. 오늘만…….”조금만 앓고 일어나겠습니다.

오늘만 지나면 내일 말짱해진 모습으로 벌떡 일어나겠습니다. 그러니 김 형…….

라온은 제 머리맡에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차마 뜰 수가 없었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그때,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이 가득 실린 물기 어린 음성. 병연의 것이 아니었다.

내내 감겨 있던 라온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윽고 열없이 벌어진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새어나왔다.

“화초저하…….”그 부름에 반응하듯 어둠 속에서 영이 팔을 내밀어 라온을 끌어당겼다.

“라온아…….”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울고 있을 줄 알았지. 이리 작은 어깨 옹송그린 채 홀로 떨고 있을 줄 알았지.

이리 울 거면서, 이리 홀로 아플 거면서, 나더러 가란 한 것이냐? 그리 고운 옷 챙겨 입히고 네게 등 돌리라 한 것이냐?

미련한 녀석.

보낸다고 발걸음 뗀 나도 바보였지만, 이리 아프면서도 웃으며 보낸 너도 참으로 미련하구나.

이리 미련한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리 곱고 어여쁜 사람을 어찌하면 좋을까?

“미안하다.”“뭐가 미안하단 말입니까?”“모든 것이 다 미안하다.”“이러지 마십시오. 지금쯤이며 빈궁마마와 합궁을 하셔야 할 분이 어찌 여기 계시는 것입니까?”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라온은 서둘러 영을 밀어냈다.

하지만 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툭툭툭.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그를 떨쳐내려 가슴팍에 제법 암팡진 주먹질도 해봤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으스러져라, 라온을 끌어안은 영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저하, 이러지 마십시오.”이러시면 겨우 다잡은 마음이 흔들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싫다.”영이 고개를 저었다.

놓지 않을 것이다. 놓을 수 없다. 또 너 혼자 울게 할 수 없단 말이다.

그는 마치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라온을 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저하…….”귓불에 닿은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의 아릿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 그리운 향기에 라온의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저하, 그만 돌아가십시오.”가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가십시오. 제발 가십시오.”아픕니다. 너무 아픕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애써 내리눌렀던 눈물이 기어이 와스스 깨지며 라온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늘님, 알고 있습니다.

제 눈앞에 있는 이분, 감히 제가 욕심내면 안 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히 저 같은 사람은 탐을 낼 엄두도 내서는 안 될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언젠가 제가 이분의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허락해 주십시오.

욕심을 내었다고 하여 벌을 받으라 하면 받겠습니다.

그러니 하늘님, 오늘 하루만 욕심내면 안 되겠습니까?

“싫다. 너를 두고 내가 어디에 가겠느냐?”“저하. 대체 저한테 어찌 이러십니까? 절 더러 어찌하라고 이러십니까?”영이 라온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네게 뭘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내 곁에 있으면 된다. 내가 눈 돌리면 그곳에 네가 있어야 한다. 네가 손을 뻗치는 그곳이 네가 있을 자리다. 내 숨결이 닿는 곳이 네가 머물러야 할 곳이다.”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손안에 가득 고였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녕 이러하시면…….”“이래야 한다. 이래야…… 내가 살 수 있어.”영의 입술이 라온을 향해 다가왔다.

아픈 울음을 베어 문 입술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하듯 다정하고 아늑한 숨결이 짭짤한 눈물과 함께 혀끝으로 스며들었다.

아팠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

서글펐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

사랑받고 사랑했던 기억들이 모두 한데로 녹아들었다.

그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며 영은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라온을 위로했다.

눈물에 흠뻑 젖은 라온의 눈두덩을 핥던 입술이 콧잔등에서 인중으로 인중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턱으로…… 그렇게 점차 아래로, 더 아래로 향했다.

밤새 울음소리와 함께 삼경(三更)을 알리는 소리가 먼 데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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