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그분은 그런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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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9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하연의 물음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네? 네.”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라온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조아리며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하연이 문지방을 넘어 처소 안으로 발을 디뎠다. 뒤따라 들어간 라온은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처소가 분명한데, 하연이 들어서는 순간 낯설고 어색한 공간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반대로 하연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료 위에 앉았다.
“내가 불편합니까?”“아닙니다.”“그렇군요. 하지만 나는 불편합니다.”“네?”“이리 홍 내관을 올려다보아야 하니 불편하군요.”하연의 말에 라온은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이제 괜찮으십니까?”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에 허둥대던 라온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런 라온을 하연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신지요?”침묵을 깨며 라온이 물었다.
“듣자하니 홍 내관이 다른 이의 고민을 그리 잘 해결해준다 하던데. 맞습니까?”“말씀 낮추십시오.”“아직 세자빈으로 책봉된 것도 아닙니다. 정 7품의 상훤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는 없지요.”생각보다 똑 부러지시는 분이시네.
“고민이 있어 오셨다 하셨습니까?”“네.”“어떤 고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글쎄요. 이건 고민이라도 하기보단, 궁금증이라고 해야겠군요.”“궁금증이요?”하연이 노을 같은 시선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어떤 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그녀가 알고 싶은 사람이 영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온을 찾은 하연의 선택은 여러모로 현명했다.
라온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하문하십시오.”라온과 하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맑은 눈동자와 깊은 시선이 서로의 속내를 읽어 내려갔다.
사실, 라온도 궁금하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곧 빈궁전의 주인이 될 분이라고 하는데, 어떤 생각을 가진 분이신지. 화초저하를 얼마나 보듬어 주실 수 있는 분인지. 그분의 곁을 따뜻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작금의 궁의 분위기는 내일을 예견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고 뒤숭숭했다.
세자저하께서 대리청정하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안동 김씨에게 밀려 뒷전으로 밀려났던 사람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 되었다. 홀대받던 사람들은 꿈과 희망을 부풀리고 있었고, 일순간에 가진 것을 빼앗긴 자들은 부활을 꿈꿨다.
정치와 야망이 한데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이런 와중에 빈궁전의 주인으로 낙점되신 분이셨다.
과연 어떤 마음을, 어떤 뜻을 품고 있는 분이실까?
혹, 생각보다 큰 야망을 품고 계신 분은 아닐까?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상념에 빠진 라온을 깨우듯 하연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조금은 엄격하고 더러는 고지식한 분이시죠. 그러나 누구보다 현명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그분이 평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이 나라와 백성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십니다.”“그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이 나라, 조선을 사랑하십니다.”“그분은 어떤 꿈을 꾸시는 분이십니까?”“힘없는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십니다.”“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이라면…….”“아이가 아이답게, 여인이 여인으로 살 수 있는 세상. 사람이 자신의 참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신다고 하셨습니다.”“참으로 아름다운 꿈이군요. 또한, 참으로 이루기 어려운…… 꿈이기도 하고요.”하연의 멍울 진 혼잣말에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이라면 꼭 그런 세상을 만들 겁니다. 기어이 그런 세상을 이루실 겁니다.”라온의 단호한 대답에 하연이 고개를 외로 틀며 물었다.
“어찌 그리 확신합니까?”“그분은 그런 분이시니까요.”약조한 것은 어떻게든 지키는 그런 분입니다.
하연이 입가를 길게 늘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그분께선 참으로 큰 날개를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라온은 그녀의 말간 웃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묻고 답하는 모습에 조금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기뻐했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우려하던 욕망도, 걱정하던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
이분이라면……, 저리 깊은 눈동자와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분이라면 부탁해도 좋으리라.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라온이 눈을 떴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문갑을 열어 작은 서책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하연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언가요?”“저하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어떤 색을 좋아하시는지, 어떤 음식을 가리시고 또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 때 기분이 나쁜 것인지…… 그런 것들을 적어 놓았습니다.”이 서책이 이리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된 걸 아신다면 청국의 소양공주께서 펄쩍 뛰시려나?
그 당당하고 거침없던 공주를 떠올리며 라온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분의 말속에 서린 냉기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그저 말뿐이십니다. 행여 화를 내신다고 하여도 크게 마음 상하지 마세요. 화내시는 속마음은 언제나 전전긍긍이신 분이시니까요.”“……그렇군요.”“손을 내미시면 잡아주십시오. 꿈자리 사나워 쉬이 잠들지 못하시니 행여 꿈길 어지러울 땐 곁을 지켜 주십시오. 아프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참고 인내하는 데 익숙해진 분이시니. 곁에서 잘 지켜보셔야 합니다.”“…….”서책과 라온을 번갈아 보던 하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하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책을 소중히 갈무리한 그녀가 라온을 돌아보았다.
“오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라온이 하연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사각 사각. 발소리가 멀어졌다.
처소 밖까지 마중 나온 라온은 멀어지는 하연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십시오. 내색하지 않으셔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분이시거든요. 그러니 외롭지 않게, 홀로 있게 하지 마십시오.”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라온의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 * *
“어찌,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자선당 대문 밖에서 하연을 기다리고 있던 윤 상궁이 물었다.
하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그러나 윤 상궁은 무에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어 따르기는 했사오나, 대비마마 아시는 날에는 고운 소리 못 들으실 것이옵니다. 한낱 환관에게 고민을 풀어놓으시다니요?”“마음이 답답하여 그리하였습니다.”“아무리 환관이라고 하여도 그 근원은 사내가 아닙니까? 사내가 여인의 마음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여인의 마음은 여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지요.”“그렇습니까?”하연이 하얗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윤 상궁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윤 상궁님.”“네.”“저 환관의 이름, 홍라온이라 하였습니까?”“네. 그렇습니다.”“언제 궁에 들어왔는지 아십니까?”“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그렇습니까?”“왜 그러시는지요?”“별일 아닙니다. 그저…….”다시 걸음을 떼며 하연은 혼잣말인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찌하여 세자저하께서 그토록 곁을 내어주지 않으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하연의 입가에 맺혀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 *
“대비전에서 연락이 왔구나. 내일 중으로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질 것이라 하는구나.”하연이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아비의 방문이 있었다.
조만영은 흐뭇한 시선으로 여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궁에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몸가짐을 더욱 신중히 해야 할 것이야.”“명심하겠습니다.”“가문의 미래가 네 양어깨에 달려 있다.”“네, 아버님.”“궁이란 세상 어느 곳보다 조심스러운 곳이지만, 그것도 네가 할 요량이다.”그때였다.
두 사람 사이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숙부님. 하연이 저 아이, 누구보다 신중하고 속 깊은 아이가 아닙니까? 총명하기는 또 어떻습니까? 저 아이를 데려가게 된 건 우리 세자저하의 복입니다, 복. 하하하하.”하연과 동갑인 사촌 조경태였다.
“어허.”조카의 말에 조만영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그 역시도 하연으로 인해 잃어버린 집안의 광영이 다시 찾아오리라 내심 기대한 터였다.
그러나 이리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엔 아직 시기상조.
하연이 세자빈으로 낙점되었다는 소식이 암암리에 번져나가자 김씨 일문의 견제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눈치 없는 목소리는 이어졌다.
“하연아, 나중에 빈궁전에 들어가서도 이 오라비를 잊으면 아니 된다. 내가 뉘더냐? 우리 풍양 조씨의 장손이 아니냐. 내가 너의 곁을 떡하니 지켜야지, 뉘가 있어 너를 지켜주겠느냐.”“오라버니, 그게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안동 김씨 일문이 하는 일을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있겠느냐? 안 그렇습니까, 숙부님.”“어허!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숙부님, 왜 그러십니까?”“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네가 누구의 앞날을 망치려 들어?”“하지만…….”“어허!”“송, 송구합니다.”“쯧쯧. 집안의 장손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언행이 가볍단 말이냐? 물러가라. 그리고 당분간 내 집에 발길 하지 마라.”“숙부님.”“어허, 물러가라는 말 아니 들리느냐?”서릿발 같은 조만영의 목소리에 밀려 경태가 방을 나갔다.
한심한 눈길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만영은 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의 말, 마음에 담지 말거라.”“네, 아버님.”“그럼 쉬어라. 앞으로 바빠질 게다.”“네.”아비와 사촌이 나간 방에는 어머니와 하연만이 남았다.
여식을 본 이후 내내 애잔한 눈빛을 하고 있던 홍 씨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괜찮으냐?”여식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어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다.
“괜찮습니다.”하연이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여식의 웃음에도 어미는 안심하지 못했다.
“연아…….”“어머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시니. 아녀자인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다만. 연아, 어미는 걱정되는구나. 듣자하니 세자저하의 성정이 차갑기 이를 데가 없으시다 하니. 매서운 궁궐에서 네가 어찌 살아가려고.”“생각보다 많이 다정하신 분이었습니다.”“정말이냐?”“네. 어머니.”“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나다. 그러니 혹시라도 싫으면 지금이라도 싫다고 하여라. 내, 네 아버지를 설득해 볼 것이야.”“하여, 세자빈이 아니 되면 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응?”“세자빈이 아니 된다 하여도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얼굴도 못 본 처음 만난 사내의 여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어미가 하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많은 사람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그곳보다는 편하지 않겠느냐?”“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가 되는 것은 궁이나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예요.”“연아.”“이 조선의 여인으로 태어난 순간, 보이지 않는 족쇄가 발목을 묶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아버렸습니다. 이왕 갇히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분을 선택하겠습니다.”하연이 고개를 돌려 제 어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전 그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작 두 번밖에 보지 못하였다 하지 않았니? 그조차도 냉대만 받았다고.”“그분께선 달리 품은 마음이 있어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 그분의 성품이 어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네가 어찌 그걸 알 수 있었단 말이냐?”홍 씨가 의문을 띄웠다.
여식의 성정일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진중한 성격이라, 좀처럼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은 도통 믿을 수 없었다.
“그분을 잘 아는 분을 만났습니다.”“세자저하를 잘 아는 분?”“네. 곁에서 그분을 보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그런 사람이 대체 뉘란 말이더냐?”“환관입니다. 그분에게서 세자저하께서 품은 큰 뜻과 성품에 대해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환관의 말이다. 평생 상전을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운명.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말거라. 칭찬하고 아부하는 것은 그들의 습성이니라.”“평범한 환관이었다면 저 또한 그리 생각하였을 것입니다.”“그 환관은 다르단 말이더냐?”“네. 달랐습니다. 그래서 알 수 있었습니다. 동감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자저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세자저하를 언급하는 하연의 눈동자가 햇살 비친 강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분께선 영영 절 아끼지 않으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분의 큰 뜻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의 뒷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도 만족할 수 있을 듯합니다.”
* * *
영의 처소에 다시 긴 발이 드리워졌다. 발을 사이에 두고 영과 하연이 마주 앉았다.
영은 찌푸린 시선으로 발 너머를 응시했다.
이리 냉대를 해도 저 여인은 물러서지 않는구나. 세자빈의 자리가 그리도 탐나는 것이냐?
영이 서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허튼 일에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으니…….
“할 일이 많으시옵니까?”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적셨다.
“많소.”지금 당장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곁에 라온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과 단둘이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그에겐 불편했다.
처소 안엔 또다시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긴 침묵을 깨며 하연의 단아한 목소리가 잠든 공기를 흔들었다.
“오늘 이리 찾아뵌 것은 세자저하께 청이 있어서이옵니다.”“……?”“저하께서 특별히 아끼는 공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게 그곳을 구경시켜 주지 않겠사옵니까?”영이 고개를 들어 발 너머를 응시했다.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그리고 목소리는 더 차가웠다.
“그곳은 다른 사람에게 보일 공간이 아니오.”“그렇군요.”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연의 미소가 짙어졌다. 조금도 낙심하지 않은 듯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홍라온이라 하였지요.”“……!”영의 시선이 다시 하연을 향했다.
어째서 저 여인이 라온을 입에 담는 것일까?
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발 너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내관은 그곳을 보았습니까?”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어냐? 감히 라온이를 들먹여 나를 흔들어 보려는 속셈이냐?
흔드는 대로 끌려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온의 존재 역시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내 개인적인 공간을 포함하여 내 모든 것은 공유하는 사람이오.”“그렇군요.”“더 할 말이 없다면 그만…….”물러가라, 말하려는 영의 말허리를 하연이 잘랐다.
“궁금하였습니다.”“…….”“저하께서 어떤 꿈을 꾸시는지. 왜 세자빈을 들이기 싫어하셨는지. 하여, 저하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사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저하께서 하시려는 일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무슨 이유로 그대가 나에 대해 알려고 하는지 모르겠소. 허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 곁에 누군가를 들일 생각이 없소.”“오늘 중으로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질 것이라 하옵니다.”“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 아니 된다고 하더라도 다음번엔 되겠지요. 그리고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틀림없이 빈궁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영은 일시 말문이 막혔다.
하연의 말은 근래 그를 괴롭히는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대비마마께서 저리 고집을 부리시니, 설사 궁의 법도를 바꾼다 할지라도 기필코 세자빈을 들이게 될 것이리라.
마음은 끊을 수 있어도 혈육에 대한 정은 끊기 어려움인가.
대비마마의 고집에 영도 조금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혹, 마음에 품은 분이라도 있으신지요?”“……있다면?”칼날처럼 싸늘한 대답에도 하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만약, 그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 저하 곁에 어울릴 수 없거나, 어울리길 원치 않는다면. 차라리 허울뿐일지라도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앉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일순, 영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허울.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이 두 글자에 담았다.
올곧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다시 파고들었다.
“세자저하께서 큰 뜻을 품고 날갯짓을 하려면 제대로 된 둥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둥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설사, 언젠가 때가 되어 새가 둥지를 떠나 넓은 세상으로 향하게 될지라도.
“불허 하오.”“어제 사촌 오라버니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세자빈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지요.”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직 간택령도 내리지 않았건만, 선물을 보내오는 자들로 대문이 닳을 지경입니다.”“역시…….”힘으로 힘을 견제한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힘은 결국 다른 힘을 제압할 뿐이지, 균형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하연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리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인 까닭이 궁금했던 것이다.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세자빈이 된다면, 그 집안의 풍경과 제 집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하연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발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녀의 눈빛은 영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결국, 누구를 들여도 같을 것이니, 당신을 허락해 달라는 말이오?”“바로 그런 말이옵니다.”“난 그대를 연모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오. 세자빈으로 내 곁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여도, 결코 그리워하지도 만나러 가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냉대를 알면서도 그걸 감수하겠단 말이오?”“세자저하께서 그리 원하시면 그리하셔도 서운해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어째서?”영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세자빈이 되고 싶소?”“저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하의 뜻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둥지를 저와 제 집안이 마련할 수 있겠다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그뿐이오? 그렇게 해서 그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오?”“제 가문의 미래입니다.”“어리석군. 세자빈이 되면 그대의 가문은 융성할지 모르겠으나, 그대는 한없이 외로울 것이오.”“상관없습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니까요.”“뭐라?”“저는 가문에 효도하는 것이 되고, 저하께서는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게 되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또한, 저하께서 품으신 뜻이 바로 저의 꿈이기도 하니까요.
“나와 거래를 하자는 뜻이오?”영의 물음에 조금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