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대가 홍 내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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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5
사잇문을 모두 걷어 올린 영의 처소 한가운데로 긴 발이 드리워졌다.
발의 오른편.
처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은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서안에 쌓인 문서를 살폈다.
굳게 다문 입술, 차가운 눈빛.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의 등 뒤에선 라온이 안절부절못한 채 연신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저하.”“아무 말 마라.”“하오나…….”라온은 발에 어룽 비치는 여인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정5품 부사직 조만영의 여식.
아직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지진 않았지만, 이미 세자빈으로 내부 확정된 분이라고 하셨다.
연노랑 당의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동궁전으로 걸음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조 대감의 여식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라는 대비전의 엄한 명과 함께였다.
하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영은 한 시진이 넘도록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라온이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영의 한 마디에 라온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동궁전은 다시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들려오는 것은 영의 서책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하.”발 저편에서 단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의 뒤편에 시립한 환관과 궁녀들은 물론이고, 발 저편에 머리를 조아린 궁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인에게로 향했다.
입가에 여린 미소를 떠올린 하연이 또박또박 선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날이 좋습니다. 잠시 짬을 내시어 후원이라도 거니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사뭇 당찬 제의라.
문서에 주석을 달던 영이 붓을 내려놓았다. 발 너머로 시선을 옮기는 그의 눈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말귀가 어두운 것이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섬뜩하게 날 선 말투.
그러나 하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얼굴로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이미 말했듯 나는 아직 빈궁을 들일 생각이 없소.”“…….”“그러니 그대를 맞이할 수도, 내 사람으로 허락할 수도 없소. 그러니 그만 물러가오. 나는 지금 이 자리가 많이 불편하오.”영의 차고 단호한 말에 곁을 지킨 라온은 물론이고, 다른 환관들의 낯빛마저 하얗게 변했다.
어쩌시려고 저러시나.
라온은 복잡한 표정으로 영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때 발 너머에서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편한 사이가 어디에 있겠나이까?”“뭐라?”“서로 살아온 환경과 방식이 다르니. 편한 것을 느끼는 마음도 각기 다르겠지요. 하오나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만나 천천히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혼인이라 들었사옵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천천히 하면 아니 되겠는지요?”“천천히?”“처음부터 욕심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저 차곡차곡 쌓을 것이옵니다. 저하를 한 번 뵈오면 한 번의 추억을 가슴에 쌓고, 두 번 뵈오면 두 번의 추억을 쌓을 것이옵니다.”앞에 놓인 차로 목을 축인 하연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쌓다 보면 불편함이 없어질 것이고, 그리 편해지다 보면 곁에 두고 싶지 않겠사옵니까? 저는 그리할 것이옵니다. 빗물에 옷이 젖듯…… 저는 저하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사옵니다.”“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그만 나가보오.”“……다음에 다시 오겠사옵니다.”고개를 숙이고 처소를 나서는 하연을 향해 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잡지 않으실까.
조금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하연은 무심히 닫히는 처소 문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녀의 곁으로 대비전의 윤 상궁이 다가왔다.
대비의 명으로 하연이 궁에 들어올 때마다 윤 상궁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문밖에서 처소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터라.
윤 상궁은 하연을 향한 세자저하의 차디찬 냉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민망한 얼굴로 하연을 위로했다.
“저하께서 워낙 차가운 성정을 지니신 분이라. 아가씨께서 이해하십시오. 하지만 항상 저리 얼음처럼 차가우신 것은 아니니…….”변명하는 윤 상궁을 향해 하연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듣던 것보다 좋으신 분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네? 좋으신 분이라고요?”두 번이나 박대를 당하고도 그런 말을 하는 하연을 윤 상궁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헌데…….”말간 미소를 머금은 하연이 불현듯 문 닫힌 영의 처소를 돌아보았다.
“이 혼사가 계속될 수 있을까요?”“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혹, 세자저하께서 완강히 거부하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러시는 것이옵니까? 그런 것이라면 심려 마십시오. 대비마마께서 이번엔 어떻게든 저하의 마음을 돌려놓을 것이라 하였사옵니다.”“그런 것이야 대비마마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요. 다만…….”“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시옵니까?” “저하께서 뉘 마음에 품은 여인이라도 있는 것입니까?”“네? 마음에 품은 여인이라니요?”윤 상궁이 머리채를 흔들었다.
“없사옵니다. 그런 여인이 있을 리 없사옵니다. 쇤네가 알기에는 그런 일은 절대 없사옵니다.”그 단호한 대답에 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이상하군요. 분명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는 듯한데…….”
* * *
여인의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영과 하연의 사이를 가렸던 발은 사라졌고, 환관과 궁녀들도 방 밖으로 물러났다.
처소 안에 남은 사람은 영과 라온, 단둘뿐이었다.
그러나 영은 문서에 주석 다는 일에만 열중할 뿐, 라온을 돌아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한동안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저하…….”라온이 무거운 침묵을 깨트렸다.
“아무 말도 마라.”“대체 왜 그러십니까?”“…….”“그분께 그리하지 마십시오.”“아무 말도 말라 하였다.”“하지만 벌써 두 번째입니다. 이러다가 또 대비마마께서 역정 내실 것입니다.”“…….”“어찌 이러십니까? 화초저하께선 지금 본분을 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화초저하는 이 나라의 세자가 아니십니까? 이는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리 하시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법으로 외척들을 압박하던 저하가 아니시옵니까? 그런 분께서 예법을 어기시려 하시면…….”탁!
내내 일에 집중하던 영이 기어이 붓을 내려놓았다.
무에 그리 화가 난 듯,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화가 났다.
라온을 등 뒤에 세워두고 다른 여인을 만나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이런 상황으로 일을 몰고 가는 왕실의 법도와 규범, 그리고…… 이런 아픈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제 본분을 지키는 라온의 고집에 화가 났다.
아니, 아니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영은 텅 빈 허공을 불끈 쥐었다.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잘난 법도와 규범에 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외척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예법이 이번엔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영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거리는 걸음으로 라온을 향해 다가섰다.
“왜 그러십니까?”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라온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서너 걸음 가기도 전에 등 뒤에 차가운 벽이 느껴졌다. 라온이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어느 틈엔가, 영의 팔로 만들어진 벽에 갇혀버린 라온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영이 되물었다.
“너야말로 어찌 이러는 것이냐?”“네?”“네가 지금 뉘를 걱정하는 것이야?”너는 어찌 이리 멀쩡한 얼굴이야?
나는 속이 끓어 미칠 것 같은데, 너는 어찌 이리 태연해?
“후회된다.”“무엇이 말입니까?”“그때 네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처음 너를 안던 그 밤에, 그 길로 궁으로 돌아와 이 보기 싫은 환관복부터 벗길 것을 그랬다. 예니 법도니, 그런 것일랑 상관없이 너를 당당한 내 여인으로 만들 것을 그랬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너를 여인으로…….”영의 말에 라온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뭐?”“그건 제가 싫습니다.”“어째서 싫다는 것이냐?”“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곁자리, 제가 싫습니다. 제가 사양할 것입니다.”“라온아.”“그리고…… 더는 제게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곧 혼인하실 분께서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게다가 귀한 아가씨를 뵐 때마다 박대하시니. 어쩌려고 그러시는…….”일순, 라온의 말문이 막혔다.
뚫어져라 라온을 노려보던 영이 제 입술로 라온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대로 녹아버릴 듯한 감미로운 입맞춤.
아스라이 젖어들어 일순간에 세상의 모든 근심이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이대로 영의 단단한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의 품속에서 애써 태연한 척했던 마음결을 풀어놓고 아이처럼 울음 자락이라도 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절대 그리해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지 마십시오.”라온은 거칠게 영을 밀쳐냈다.
아니, 밀쳐 내려 했다.
그러나 왁살스레 조여 오는 영의 손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영은 지척에서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라온아.”“네, 저하.”“너는 괜찮으냐? 너는 내가 혼인을 한다고 해도 괜찮으냐? 정녕 이 모든 것이 상관없는 것이냐?”“상관없습니다.”영의 물음에 라온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떨리는 눈빛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라고 어찌 속이 상하지 않겠는가.
저라고 어찌 제 사내의 곁자리를 태연한 얼굴로 다른 여인에게 내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해야 했다. 해야만 했다.
또한, 그러기에 태연한 척했다. 행여 울었다간, 영영 그 울음, 그칠 수 없을 것 같아 라온은 애써 웃고 또 웃었다.
속내를 들킬세라,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영의 손아귀에 얼굴마저 온전히 잡히고 말았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고 시선과 시선이 한데로 묶였다.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말 마라.”거친 행동과 달리 영의 목소리는 눅눅했다.
“또 한 번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다간, 너도 안 볼 것이다.”제법 매섭게 말끝을 매듭짓던 영이 서둘러 뒷말을 붙였다.
“……오늘만.”“하하하, 그건 뭡니까?”라온이 웃으며 영을 올려보았다.
놀리는 듯한 시선에 영이 그녀의 콧방울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맹랑한 녀석. 감히 비웃는 것이냐?”“그렇다고 하면 이번에도 아니 본다고 말씀하실 것입니까? 오늘만?”“……아니.”너를 안 보고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콱 막혀왔다. 주위에 공기가 사라진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영은 살기 위해 라온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영은 더욱 힘껏 라온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 목숨줄인 듯 잡고 절대 놓지 않았다.
그때였다.
토닥토닥.
다독이는 손길이 영의 등을 두드렸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하.”“…….”“제가 약조 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하와 잡은 손, 놓지 않겠다고 말입니다.”마음을 달래는 한 마디.
그제야 심화가 들끓던 심장이 조금씩 평온해졌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영은 라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그 약조 잊지 마라.”“네. 잊지 않겠습니다.”“절대 잊어선 안 된다.”“네.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저하의 손 놓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니 저하께서는 제 손 놓으셔도 됩니다.
그리하셔도…… 됩니다.
* * *
“하아, 어찌한다?”일을 끝내고 자선당으로 돌아온 라온은 턱을 괸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질 거라는 소문이 궁 안에 횡행했다.
덕분에 내시부의 일도 많아졌다.
온종일 빈궁전에 들일 집기를 손질했던 터라 팔다리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깟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고된 몸보다 불편한 마음이었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라온을 향한 영의 집착은 강도를 더해갔다.
병연에게 다른 곳에서 기거하라 하더니, 이제는 숫제 라온에게 처소를 자선당에서 동궁전으로 옮기라는 명까지 내렸다.
어디 그뿐일까?
대비마마의 명으로 찾아온 귀한 아가씨를 매번 박대하시니.
지켜보는 라온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가씨를 대하는 화초저하의 태도는 언제나 똑같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
어찌 그리 초지일관하시는지. 정말 못 말리겠다.
“어찌하면 좋을까?”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라온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제는 하연 아가씨가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분을 그리 박대하는 영의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또한 죄스러웠다.
좋은 분인 거 같은데.
기쁘고 죄스럽고, 미안하고 안심되는 마음이 한데로 뒤엉켰다.
그분은 세자저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분을 그리 박하게 대하시니.
앞으로 하연 아가씨를 어찌 대해야 할까?
천하의 화초저하께서도 이 일만큼은 다른 방법이 없으신 듯한데, 이 일을 어찌 해결해야 좋을까?
“휴…….”라온은 긴 날숨과 함께 한숨을 흘려보냈다.
바로 그때였다.
“안에 있습니까?”처소 밖에서 낮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밤에 대체 누구지?
“누구십니까?”문을 여는 라온의 앞으로 가느다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남의 고민을 잘 해결해 주는 환관이 있다고 들었어요.”“누구……!”달빛에 어리비치는 얼굴을 보는 순간, 라온은 심장이 쿵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했다.
눈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 다름 아닌 하연 아가씨였다.
“그대가 홍 내관입니까?”넋이 나간 듯 잠시 멍해진 라온을 향해 하연이 미소를 그렸다.
너무도 아름다워 차마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