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각자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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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2
병연은 정처 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구름 사이를 명멸하는 달빛이 그의 등을 보듬었다. 유백색의 달빛에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자선당을 나선 지 어느새 두 시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병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있을 뿐.
“휴…….”목을 꺾어 둥근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낙담한 라온의 얼굴을, 마음의 생채기로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 상처를 보듬어 줄 사람이 자신인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자선당에 머물 수 없었다.
뒤늦은 후회가 병연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는 척할 것을.
애초에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여, 어느 순간부터 너를 마음에 품었다고 라온에게 말을 할 것을 그랬다.
하지만…….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차마 부끄러워 하늘조차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하는 내게 그 녀석을 마음에 품을 자격이 있을까? 게다가 그 녀석이 바라본 곳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질 않은가.
그 올곧은 시선이 내내 향한 곳은 왕세자였다.
그래도 그 눈길 막아볼걸 그랬나?
세자에게로 가는 라온의 걸음을 한 번쯤 멈추게 했으면 저리 아프지 않았을까?
후회와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손끝이 시렸다.
여름이 지척이라. 더우면 더웠지 추위를 느낄 계절이 아니었건만. 마음 자락에 얼음송곳이라도 박힌 듯 한기가 느껴졌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버석거리는 감정들.
그것들을 떨쳐내려 병연은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기루의 오색등롱이 아른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병연은 그 오색등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회주, 어서 오시어요.”병연이 기루에 들어서자 소식을 전해 들은 여랑이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치맛자락에 숨겨진 발은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버선발이었다.
잠시 치마 끝에 시선을 던졌던 병연은 먼 데로 눈을 돌려 여랑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자신이 거둬 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술 한잔 하러 왔네.”“잘 오시었어요.”병연의 속내와는 달리 여랑은 그저 반갑고 좋았다.
그때 이후로 내내 걸음하지 않으셨던지라. 그 길로 발길 끊으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리라도 병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회주께서 술 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습니다. 곧 주안상 봐 들어갈 것이니. 안으로 드시어요.”한쪽 옆으로 비켜서며 여랑이 말했다.
병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마시고 싶네만.”“무언가 상념이 깊은 얼굴이어요. 이럴 때 홀로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독입지요. 쇤네가 모시겠…….”여랑의 말이 채 끝나기 직전.
“그럼 나와 함께 하면 되겠군.”두 사람의 뒤편에서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는 병연의 시야에 윤성의 무표정한 얼굴이 맺혔다.
단박에 병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윤성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달빛이 유난히 좋은 밤이라. 걷다 보니 예까지 걸음이 이르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리 우연히 만난 것도 쉽지 않은 인연인데. 오랜 지기와 함께 술잔 나누지 않겠습니까?”잠시 윤성과 여랑의 번갈아 보던 병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뭇거리던 여랑이 이내 물러갔다.
얼마 뒤, 조용한 누각으로 안내된 두 사람은 술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쪼르르.
술잔에 맑은 술이 떨어졌다.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윤성의 말에 병연이 표정 없는 얼굴로 되받아쳤다.
“너도 이젠 웃지 않는군.”“그런가요?”“언제나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웃고 있었지.”“그래서 벗었습니다.”“그런가?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쓰고 있던 웃음의 가면보다 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하군.”“…….”병연의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일순, 굳은 표정을 짓던 윤성은 마른 웃음으로 부담을 털어냈다.
그는 가득 채운 술잔을 병연에게 권했다.
“난고의 작은 칼은 예전보다 더 신랄해지셨군요.”독설이 심해졌다는 의미였다.
병연은 말없이 윤성이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그런데 난고,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없다.”일말의 망설임 없는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낮게 가라앉은 시선이 병연을 찬찬히 훑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윤성이 제 술잔에 입술을 담그며 말했다.
“여인 때문입니까?”“…….”속내를 꿰뚫어본 듯한 물음.
막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병연이 차게 식은 눈으로 윤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들고 있던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예기마저 술잔에 희석된 걸까.
한순간 날카롭게 벼려졌던 눈빛도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귓가에 윤성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동병상련이라 하지요. 실연한 자는 실연한 자를 알아보는 법.”“…….”“나 역시 그놈의 연모 때문에 제법 가슴앓이를 하였지요.”“그런가?”병연의 얼굴에 미소 한줄기가 스치듯 떠올랐다 사라졌다.
저 녀석도 사랑에 아파할 줄 안단 말인가?
무정하고 이기적인 녀석이라, 사랑이니 연모니 하는 사람의 감정 같은 건 영영 모른 채 사는 줄 알았더니.
병연은 들고 있던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혀끝을 구르는 술맛이 유난히 독하고 쓰게 느껴졌다.
“네. 너무 아파 생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였습니다.”“너 같은 녀석에게 그럴 가슴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그렇지요? 사실 저도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부정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하면 할수록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연모에 빠졌다는 것을요.”“그래?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어이없게도 뺏긴 듯합니다.”“……!”뺏겼다.
묘한 울림을 가진 한 마디가 병연의 가슴에 시리게 박혀 들었다.
“안 됐군.”진심 담긴 불퉁한 위로가 병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윤성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빼앗겼다고 하지 않았나?”“그 마음을 내게 다시 돌릴 것입니다.”“싫다고 해도 말이냐?”“내가 좋습니다.”“어리석은 놈. 연모하는 이가 네가 아닌 다른 사내를 좋다고 하는데. 굳이 그리해야 하는 거냐? 그 마음을 돌리겠다는 건, 억지로 너를 바라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냐? 그건 그 여인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아닙니다. 그 사람은 내 곁에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다른 사람의 마음이 모두 너와 같을 수는 없다. 너는 그리 생각해도 그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결국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연모도 영원한 것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어떤 이에겐 단 한 번의 연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것이다.”“네, 뭐 그런 것이 있다고 하죠. 하지만…….”잠시 말을 끊은 윤성이 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알싸한 향이 건조한 목을 적셨다.
윤성의 말이 이어졌다.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연모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연모도 있지요. 연모하는 여인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있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 더욱 말려야겠지요.”“그 여인을 네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핑계처럼 들릴 뿐이다.”“그렇습니까?”윤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요.”무표정한 시선으로 병연을 바라보던 윤성이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난고께서는 지금 마음에 품고 있는 연모를 말끔히 털어낼 수 있습니까?”“뭐?”“다른 사내에게 그 여인을 순순히 내어 줄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윤성의 물음에 병연은 일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있을까?
그리 쉽게 라온을 마음에서 털어낼 수 있을까?
놓고 싶지 않았다.
하여, 병연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술이 쓰군.”탁.
병연은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윤성이 버릇처럼 그의 술잔을 채웠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각자의 상념에 빠져 기울이는 술잔엔 교교한 달빛만이 아른거렸다.
* * *
병연은 푸른 새벽과 함께 자선당으로 돌아왔다.
잠든 라온을 깨우지 않기 위해 그는 최대한 인기척을 숨겼다.
하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병연은 자신이 부질없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선당의 검푸른 어둠 속, 라온이 잠기듯 앉아 있었다.
바닥에 펼쳐놓은 이부자리에는 누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내내 저 불편한 자세로 옹송그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병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라온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가 들어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도 안 잔 거야?”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병연이 물었다.
“아, 김 형!”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라온이 눈을 비비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야? 설마 밤새 이러고 있었던 거야?”“아닙니다. 저도 어딜 갔다가 좀 전에 들어왔습니다.”“어딜?”“머릿속이 어지러워 정리 좀 하고 왔습니다.” “무얼 정리해?”“뭐, 그런 것이 있습니다.”말하는 라온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해사한 웃음.
하지만 어쩐 일인지 병연의 가슴에 불안한 바람이 불었다. 무언가 정체를 알지 못하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훑었다.
“왜? 무슨 일이야?”재차 물었지만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김 형.”“왜?”“언제부터입니까?”“뭐가 언제부터야?”“제가 여인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아셨습니까?”“…….”“김 형, 보기보다 음흉하십니다. 혹시 저 모르게 저를 훔쳐보거나 그러지는 않으셨겠지요?”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병연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절대 그런 일 없다.”정색하는 그의 모습에 라온이 더욱 미간을 좁혔다.
“그리 정색하시니, 정말 수상한데요.”“수상하긴 뭐가 수상해?”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대들보로 걸음을 옮기는 병연을 보며 라온이 갑자기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농입니다, 농. 김 형, 무얼 그리 긴장하십니까? 어라? 그런데 그리 긴장하시는 걸 보니 설마? 진짜로…… 아얏!”다시 놀리는 그녀의 이마로 돌연 병연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라온이 울상을 지었다.
“김 형,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여인에게 주먹질도 마다치 않는 분이셨습니까?”“성가신 녀석. 토끼 같은 눈으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좀 자라.”불퉁한 지청구와 함께 병연은 대들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뒤쫓아 온 라온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밤이슬 밟고 돌아오신 김 형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만.”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라온을 병연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울상을 지으며 병연에게 항의하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 아무렇지 않아 도리어 불안할 정도였다.
괜한 노파심이었나?
병연은 전신을 휘감는 불안을 애써 잠재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너스레를 떨며 아픈 시늉하던 라온이 여상한 표정으로 대들보 위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병연을 불렀다.
“김 형.”“…….”“주무십니까?”“그래, 잔다. 그러니 말 걸지 마라.”“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잔다 하질 않아?”“이리 꼬박꼬박 대답하시면서 잔다고 우기십니까?”“잠꼬대다.”“그럼 잠꼬대로 대답해 주십시오.”“…….”“혹시 알고 계신 게 그것뿐입니까?”“뭐?”“김 형이 저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그것뿐입니까?”잠든 척 눈을 감고 있던 병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희붐한 새벽이 자선당 안쪽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푸른 새벽빛 사이로 라온의 얼굴이 보였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쉼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병연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소리야?”“제가 여인인 것 말고…… 저에 대해, 제 가족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은 없습니까?”“……그건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더냐?”혹시 알고 있는 것이야?
네가 뉘인지, 뉘의 자식인지 알게 된 거야?
불안함이 담긴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올려다보는 라온과 내려다보는 병연의 시선이 한데 만났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라온이 풀썩 웃음을 흘렸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오늘따라 잡생각이 많아 헛소리한 것뿐입니다.”라온은 대답을 얼버무리며 서둘러 자리에 누웠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는 라온을 병연은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녀석,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된 거야?
설마, 그럴 리가…….
만약 알게 되었다면 어찌 알게 된 것일까? 누군가 말해 준 것일까? 혹 세자저하께서……?
아니, 그럴 리 없다. 백운회의 눈과 귀는 자신이 가리고 있지 않았던가. 백운회의 눈과 귀가 가려졌으니 세자저하도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라온은 아직 자신의 처지에 대해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자저하와 얽힌 복잡한 관계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의문이 들었는지도 모르지.
그래, 그런 것이리라.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저 순진한 녀석의 얼굴이 근심과 고민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홍라온, 넌 그저 행복하게 웃으면 된다.
네 비밀은 내가 지켜줄 것이니.
넌 그저…… 행복에 겨워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대들보 아래로 보이는 라온을 향해 병연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기엔 너무 먼 거리.
하지만 그는 새근새근 잠든 라온의 머리를 어루만지듯 허공을 쓸어내렸다.
살랑, 살랑 흔들바람아.
우리 아가 머리맡에 머물러 다오.
어디든 갈 수 있는 흔들바람아.
우리 아가 잠이 들면 하늘 꽃밭으로 데려다 다오.
살랑, 살랑 흔들바람아.
내 님 곁에 머물러 다오.
서러운 붉은 돛, 외로운 노을 길, 홀로 떠나는 내님
아프지 마라, 서러워마라 속삭여다오.
언젠가 라온이 영온에게 불러주었던 자장가가 병연의 입속에서 작게 흘러나왔다.
푸른 공기를 쓰다듬는 그의 아련한 손짓은 황금빛 아침 햇살이 처소 안으로 밀려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