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함께 할 수 없다면 어찌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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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9
영이 대비전을 나선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나흘, 나흘이나 대비전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그는 결국 대비 김씨의 혼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어의가 대비의 안위를 살피는 동안 영은 무거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동궁전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라온을 곁으로 부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선당으로 가는 심부름을 자청한 장 내관의 입에서 엉뚱한 수다가 흘러나왔다.
“무엇이라고?”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던 영이 행동을 멈추고 장 내관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한겨울 북풍처럼 싸늘했다.
“네?”느닷없는 서릿발에 장 내관은 긴장했다.
그가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영의 안색을 살폈다.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연신 영을 훔쳐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장 내관의 면전까지 다가간 영이 다시 물었다.
“홍 내관에게 뭐라 했다 하였느냐?”“그,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였사옵니다.”“그 얘기 말고…….”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고개를 젓는 영의 모습에 장 내관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있는 듯 손가락을 펼쳤다.
“혹시 청소하는 법을 알려준 것 말이옵니까?”“어허!”이것도 아닌가? 그렇다면…….
“공주마마의 성은을 얻는 법?”“…….”영의 미간에 그려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이것도 아니라면…….
“혹시 세자빈……?”그제야 영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래. 그 이야기 말이다. 어찌 말했는지 소상히 말해 보거라.”“아, 그 이야기 말이옵니까? 그저 궁 안에 도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뿐이옵니다. 빈궁마마를 맞는 경사스러운 일이 생길 거라고…….”장 내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이 처소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대체 너, 무슨 얘길 어찌 들은 것이냐?
혹시 상처받은 것은 아니겠지?
영은 서둘러 동궁전 마당을 가로질렀다.
질주하는 영의 뒤로 호위무사들과 내관들, 그리고 십수 명 가량의 궁녀들이 길게 꼬리를 이었다.
우르르 몰려가는 번잡한 발걸음 소리.
영이 달리던 것을 멈췄다. 동시에 뒤따르던 그림자도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율아.”낮은 부름에 우익위 한율이 다가왔다.
“잠시 홀로 가야 할 곳이 있다.”나직한 한 마디에 율이 고개를 숙이며 묻는다.
“그곳으로 가시옵니까?”“그렇다.”영의 말에 율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영의 뒤를 따르던 환관과 궁녀들 앞을 막아섰다.
환관과 궁녀들은 말없이 시립했다.
율이 저리 서 있는 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세자저하의 명이 있었다는 뜻.
일상적인 일인지라 다들 말없이 물러났다.
번잡한 그림자들을 떼어낸 영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자선당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라온아, 너 혹시 오해하는 것은 아니지?
숨이 턱밑에 바싹 달라붙었다. 자선당으로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그 녀석, 지금 홀로 뭘하고 있는 것일까?
혼자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가는 어깨 떨며 홀로 외로워하지 않을까?
세자빈에 대한 소식을 들었으니, 분명 아프고 괴로우리라.
어서 빨리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를 안심시켜야 한다.
한달음에 자선당으로 달린 영이 힘차게 문을 열었다.
이윽고 영의 눈동자에 병연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 * *
저벅저벅 방으로 들어온 영은 다짜고짜 라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저하…….”“무슨 짓이냐?”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얼굴에 질책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 눈빛이 너무 아파 라온은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그러는 저하야말로 지금 뭐하는 것입니까?”“대체 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냐?”“왜 이리 화부터 내십니까?”“그럼 언제 화를 내야 하는 것이냐? 이런 꼴을 보고도 화내지 않으면 대체 어떤 꼴을 보고 화를 내라는 것이냐?”“저하, 설마 저와 김 형을 오해하시는 것입니까?”“나는 눈앞에 있는 사실만을 보고 말할 뿐이다.”“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저하도 알고 계시질 않습니까.”“그럼 무엇이냐? 무슨 연유로 네가 저 녀석의 품에 있는 것이야?”“그것이…….”“왜 대답을 바로 못 하는 것이더냐? 무에, 내게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그건 아닙니다. 그러는 세자저하야말로 어찌하여 제게 숨기는 것이 많습니까? 이것도 비밀, 저것도 비밀.”“네게 단 한 번도 비밀이 있었던 적 없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영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순간, 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홍라온, 나를 봐.”그 작은 외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잇새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영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나를 보라 하였다. 오직 나만 보라 하였다.”“싫습니다.”“어찌하여?”“알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한없이 바라보고, 곁에 있고 싶지만…… 그것은 제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전하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그래서? 그래서 날 보지도 않겠단 말이냐?”“어제의 약속처럼 전 언제까지고 저하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환관으로서 말이냐?”“…….”라온은 침묵했다.
영은 그녀의 고개 돌린 모습을 아픈 표정으로 지켜봤다.
“불허한다.”상처받은 날짐승의 울음처럼 음울한 목소리.
“이것이 옳습니다.”“내 이미 불허한다 말하였다.”라온이 영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세자저하와 저,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합니다.”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간신히 다독거린 심장이 또다시 저하를 찾을지도 모릅니다. 겨우 제가 있을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더는……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더는.
“어림없는 소리 마라.”라온이 물러난 만큼 영이 앞으로 다가섰다.
성큼 한 걸음 다가서면 라온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길 몇 걸음. 기어이 견디지 못한 영이 라온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순간, 그 손길을 병연이 막았다.
병연은 영과 라온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두 사람, 무슨 일이야?”“아무것도 아닙니다.”김 형은 내가 여인인 것을 모르고 있어.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인지라. 라온은 서둘러 변명했다.
“제가 화초저하께 투정을 부렸더니 화가 나신 듯합니다. 하하하, 예전엔 안 그랬는데…… 환관이 되니 이렇듯 강샘 하는 여인처럼 속 좁은 마음이 생깁니다.”애써 둘러대는 라온의 목소리를 자르며 영이 말했다.
“그리 둘러댈 것 없다. 저 녀석도 알고 있다.”라온의 눈이 커졌다.
“알고 있다니요?”“저 녀석도 네가 여인인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네?”병연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 형도 제가 여인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대체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 * *
자선당의 우거진 수풀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달빛 아래 서 있던 영이 바람을 좇아 시선을 돌렸다.
“조금 진정된 거야?”곁을 지키고 섰던 병연이 물었다.
대답 대신 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녀석,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어.”그는 불 켜진 자선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풍지 위로 오도카니 홀로 앉아 있는 라온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맥없이 축 늘어진 그림자와 영을 번갈아 보며 병연이 말했다.
“저하까지 나서서 저 녀석의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혼란스러울 것 없다. 그 아이에게 한 약속은 어떻게든 지킬 거니까.”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고, 라온에게 하는 맹세였다.
병연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찼다.
“그것이 저하의 마음대로 될까? 궁에는 엄연한 궁의 법도가 있는 법인데. 왕세자란 그리 멋대로 살 수 없는 자리잖아. 설사 왕이라 하여도 법도를 어길 수는 없는 것을. 빈궁을 들이는 것 또한 궁의 법도에 따라야 하는 거 아닌가?”“궁의 법도가 나의 의지를 거스른다면…… 나는 그 법도를 바꿀 것이다.”“하지만…….”“법도가 내 발에 족쇄를 채울 순 없어.”“예법으로 조정대신들을 공격하는 저하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군.”“나는 강한 왕이 될 거야. 고작 이런 일에 주저할 수는 없어.”“그것을 빌미로 저하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있겠지. 지금도 빈틈만을 노리고 있는데, 저하가 스스로 그들이 파고들 틈을 만들어 주는 셈이 되잖아? 뜻은 좋지만, 쉽지 않을 거야.”“내 여인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내겠지.”영은 문풍지에 그려지는 라온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홍라온, 너는 나만 믿으면 된다. 너만 나를 믿으면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어.”그것은 그의 의지였고 각오였다.
영은 그대로 자선당을 나섰다.
물끄러미 뒷모습을 지키고 있던 병연도 걸음을 옮겼다.
문득 대문 앞에서 처소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그는 그대로 대문 밖으로 나섰다.
“성가신 녀석.”이상하게도 심장 한구석에 바람이 깃든 듯 서걱댔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아서 그런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아릿한 고통에 병연은 미간을 찡그렸다.
다 털어낸 줄 알았더니…….
아직, 심장에 작은 앙금이 남은 모양이었다.
병연은 자선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린 가슴을 어찌해야 하나. 술이라도 마셔야 따뜻해지려나.
병연마저 떠난 자선당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홀로 남겨진 라온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묵직해 잠도 오지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간 그대로 딱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라온은 종종걸음으로 동궁전과 이웃한 전각으로 향했다.
그곳엔 세자저하의 빈객자격으로 궁궐에 머물게 된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라면 이 소란스런 마음을 정리해주실 것이다.
어찌해야 옳은 것인지, 내가 나갈 방향을 알려주실 거야.
* * *
전각의 담벼락을 따라 심어놓은 대나무가 바람결에 몸을 휘청거렸다.
단청도 그려지지 않은 소박한 전각의 마당 한쪽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못가에 둥근 달이 고스란히 비쳤다.
정약용은 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연못에 인 파문처럼 잔잔한 시선이 한없이 달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곁에 앉은 라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할아버지.”“네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되는구나.”“할아버지…….”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떨어졌다.
행여 들킬세라 라온은 얼른 소맷자락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그런 라온을 바라보는 정약용의 눈빛이 애잔했다.
“허허. 그 얼굴을 보니 처음 널 보았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그때도 넌 그런 얼굴이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얼굴로…….”도와달라고 했지. 살고 싶다고 했다.
“너는 어찌했으면 좋겠느냐?”“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좋고, 그분과 함께 있고 싶고,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허망한 꿈인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네 얼굴을 보니 이미 결론은 난 듯싶구나.”“…….”라온이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어찌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이리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리도 어리석고, 이리도 미련한 마음이라니.
“그분께서는 너무 높으신 분이다. 왕이란 만백성을 두루두루 사랑해야 하는 자리에 계시는 분이시지. 왕의 성심이 한 사람에게만 미치면 어찌 되겠느냐?”“…….”“외척이 득세하는 게 달리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왕은 가장 높되,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또 외로워야 한다. 누군가 그 마음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틀림없이 큰 화가 미치기 때문이다.”“그렇군요. 알겠습니다.”그분의 사랑을 받았고, 그분의 마음을 알았으며 진정한 사랑을 받았으니. 그걸로 족한 거야.
라온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스스로의 물음에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니 엉킨 실타래 같았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가 된 듯합니다.”조금은 홀가분해진 라온이 정약용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라온아.”“네. 할아버지.”“만약에 네가 그분과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어찌하겠느냐?”예상 밖의 물음에 잠시 흐려졌던 라온이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제가 일평생 환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온의 미소가 쓸쓸해진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여인이 아닌 채로 살아도 좋습니다. 그분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일평생 이런 모습이라도 좋습니다.”정약용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네?”“내관의 모습으로도 함께 할 수 없다면 어찌하겠느냐?”“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약용의 물음이 다시 이어졌다.
“너는 어찌하여 여인으로 살지 못하는지 그 연유를 알고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사내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