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너를 울린 녀석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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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6
깜짝 놀라는 라온을 돌아보며 장내관이 말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이미 많이 늦었지요.”수긍하듯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중의 법도로 보자면 세자비를 들일 시기가 한참이나 지난 것이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이리도 빨리, 느닷없이 닥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던 라온이 장 내관과 대비전을 번갈아 보며 다시 물었다.
“이번 일, 소조께서 명하신 일입니까?”“아닙니다. 어쩐 일인지 소조께서는 빈궁마마 들이는 일을 완강히 거부하고 계시지요. 해서, 지금 저리 대비전에서 대비마마와 대치하고 계시다 하오.”화초저하가 명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놓였다.
빈궁마마 들이는 일을 완강하게 거부한다는 이야기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황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바보처럼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심이 되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치한다고요?”“대비마마께선 어떻게든 빈궁마마를 맞이하시겠다고 하시고, 소조께서는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고 계시지요.”“…….”“하지만 이번에는 소조께서도 어찌하실 수 없을 것이외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인지라. 중궁전과 대비전에서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하지만 저하께서 저리 원하지 않으신다면, 어쩌면 이번에도 안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소조께서 원하시던 원하지 않으시던 이번에 어쩔 수 없이 빈궁마마를 맞이해야 할 겁니다.”“어째서 그리 해야 합니까?”“그것이 법도니까요. 소조께서 서둘러 빈궁마마를 맞이하여 아기씨를 보는 것이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지요.”“그렇군요.”라온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었다.
간밤의 단단한 맹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화초저하의 온전한 여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고작 하룻밤이라니.
라온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루는 너무 짧습니다. 조금만 더 허락해 주실 수 없으셨던 겁니까?
가슴에 가시가 돋아난 듯 시리고 아팠다. 격한 고통에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장 내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세자빈으로 내부 간택된 아가씨가 계시다고 하오.”“벌써…… 말입니까?”말하는 목소리로 쇠고 갈라졌다.
뭐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잖아. 그분께서는 너무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라. 언제까지고 나 혼자만의 정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으리라 예상했던 일이잖아.
하지만……하필이면 이리 좋은 날에…… 이리 아름다운 날에…….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꿈이다. 꿈이라고 생각하자.
하룻밤의 고운 꿈, 영영 깨고 싶지 않았던 신기루.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꿈이 아니었던가?
간밤의 일들이 갑자기 아득해졌다. 먼 과거의 일처럼 멀고 가물거렸다.
그때였다.
축 늘어진 라온의 어깨 위로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장 내관이 해맑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제가 다 이해합니다. 홍 내관의 마음을. 소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갑자기 빈궁마마를 들이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소?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시오. 소조께서 아무리 빈궁마마를 들이신다고 해도 그분의 곁을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아니겠소. 하하하하.”“그렇군요. 그분의 곁을 지키는 건 우리들이군요.” 그래, 그거면 됐다.
그분의 곁을 지킬 수만 있으면…… 그분 곁에 머물 수만 있으면 그걸로 족한 거야.
그분이 없는 세상엔 살 수가 없으니,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라온은 향낭 속에 곱게 갈무리한 꽃반지를 떠올렸다.
하룻밤이 지났으니 조금은 시들었겠지. 조금은 그 향도 옅어졌을 테고. 그렇게 하루, 또 하루, 시간이 흐르고 언젠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지.
그러니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아파해야겠다.
그때까지만…….
* * *
대비전의 공기가 아슬아슬하게 부풀어 올랐다.
서로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신경전.
뚫어져라, 왕세자를 바라보던 대비 김 씨는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하여, 지금 세자께서는 이 할미의 말을 거역하겠단 말입니까?”“송구하오나 할마마마, 소손은 아직 빈궁을 맞이할 생각이 없습니다.”“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도 아니 하겠단 말씀이오?”“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해 맞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어허, 세자!”“소손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그 일을 처리하는 데만도 마음이 벅찹니다. 이런 때에 빈궁이라뇨?”“그러니 더더욱 곁을 지킬 사람이 필요한 게지요. 모름지기 몸은 음식으로 보하고, 마음은 여인에게서 위안을 얻는 법입니다.”“할마마마.”“내 그동안 세자의 뜻을 따랐지만 더는 묵과 할 수 없겠습니다. 세자께서 그리 바쁘니 이 할미가 나서야지요. 왕실과 이 나라를 위해 이 할미가 발 벗고 나서려고 합니다.”“…….”대비의 옹고집에 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왈칵 쥐었다.
외척들을 겨우 한 걸음 떼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대비께선 또 다른 외척을 들이라 하고 있었다.
힘으로 힘을 견제하는 것.
그것이 정치라고 하였다. 그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해야 바른 왕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영이 생각하는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왕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설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왕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외척을 방패 삼아 또 다른 외척을 상대하는 그런 왕은 되고 싶지 않았다.
물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세자빈만은 들일 수 없다.
라온이 아닌 다른 이를 곁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약조하였다.
오직 홍라온만의 사내가 되겠다고.
오직 홍라온만이 그의 여인이 될 수 있다고…… 단단히 약조하였다.
그리 맹세한 것이 겨우 하룻밤이다.
고작 하룻밤의 보잘것없는 약조나 하자고 그리 오래도록 참고, 기대하고, 고백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키고 싶었다. 아니, 지켜낼 것이다.
영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할마마마께서 아무리 그리 하셔도 소손은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대비의 서늘한 시선이 영을 향했다.
하얗게 흰 서리가 내린 여인은 꿰뚫어보는 눈빛으로 한참 동안 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비 김 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습니까?”“있습니다.”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올곧은 대답이 들려왔다.
대비 김씨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굽니까?”설마, 이 얼음같은 손주의 마음을 녹인 여인이 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그것은…….”영이 대답을 망설였다.
당장에라도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간밤에 라온이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라 목구멍까지 떠오른 이름을 내리눌러야 했다.
대비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대강의 사정이 이해되었다. 아마도 세자가 마음에 둔 사람은 궁 안의 궁녀나 의녀일 것이다.
신분이 좋지 않으니, 세자빈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터.
그리하니 마음에 두고 있음에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음이지.
잠시 영을 바라보던 대비 김씨는 이내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틀며 말했다.
“…… 그 여인은 마음에만 담아 두세요.”“그럴 수는 없습니다.”“이번에는 이 할미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자리에서 일어난 대비 김씨는 불현듯 문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 앞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세자께선 마음을 결정할 때까지 이 문지방을 못 넘을 겁니다.”“할마마마!”“이 할미의 말을 따르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할미를 죽이고 가세요.”
* * *
계절은 빠른 속도로 여름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제법 더운 공기가 공기 중을 맴돌기 시작했다.
왕세자 영과 대비 김씨의 신경전이 벌어진 지 나흘.
대궐은 다시 살얼음판이 되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라온은 하루하루를 애써 견뎌내고 있었다.
하루가 이리 더디게 흐르는 것인지 예전엔 왜 미처 몰랐을까?
일과를 끝낸 라온은 터덜터덜 지친 걸음으로 자선당으로 향했다. 깊은 늪에 빠진 듯 몸이 무거웠다.
늦은 밤, 까맣게 불이 꺼진 자선당 앞에 다다르자 저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졌다.
들어가기 싫다.
텅 빈 자선당의 고요가, 서걱대는 외로움이 싫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곳 밖에는 지친 육신을 뉘일 곳이 없었다.
마지 못해 처소 안으로 들어간 라온은 불도 켜진 않은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세자와 대비마마의 신경전은 서서히 대비 쪽으로 추가 기울고 있었다.
며칠째 곡기를 끊은 채 영의 발목을 붙잡은 대비께서 오늘 저녁엔 기어이 혼절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타고 궐 안에 퍼져 나갔다.
결국은 대비의 뜻대로 될 거라는 게 궁 안의 여론이었다.
라온은 소맷자락에 손을 넣어 향낭을 꺼냈다.
조심스레 입구를 여니 누렇게 마르기 시작하는 꽃반지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행복으로 목이 메던 순간이 있었다.
영의 시야에 머물러 있을 때면 무에 대단한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순간, 물거품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모래알처럼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남은 것은 말라가는 이 꽃반지 하나뿐.
이 꽃이 사라지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자. 그게 옳은 일이야. 나는 고작 환관인걸. 나는 이 궁에 있는 백여 명의 환관 중 하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라온은 자꾸만 무너지는 심장을 다잡으며 알알하게 아려오는 코끝을 문질렀다.
“나는 홍라온이야. 즐겁게 살아야 하는 홍라온이 이런 모습이라니. 어울리지 않잖아.”자꾸만 가라앉는 자신을 다독이며 힘을 낼 때였다.
“그래. 힘을 내자. 웃는 거야. 이런 일……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잖아?”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쫓기듯 도망가고.
돌이켜보면 항상 어딘가로부터 도망치기만 하였던 것 같다.
이사를 거듭하고, 거짓 사내 노릇을 하고, 환관이 되고…….
상처받고, 잊혀지고, 외로워 울고…….
화초저하께서도 날 잊겠지?
“성가신 녀석.”대들보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리 심각한 거야?”순간, 라온은 고개를 위로 꺾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라온의 입에서 반가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김 형!”병연을 부르는 목소리가 채 허공에 번져나가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대들보 위에서 쑥 떨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야?”불쑥 다가온 온기.
정수리로 쏟아지는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하고 온화해서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김 형.”“위에서 지켜보니 가관이구나. 무슨 일인데, 그리 죽을상이야?”“언제 오신 겁니까?”울면 안 돼.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라온은 애써 씩씩하게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홍라온, 절대 울면 안 돼.
“또 언제 가십니까?”절대…… 울면 안 돼.
“제대로 질문을 하던가, 아니면 울던가…… 한 가지만 해.”“…….”“라온아.”“…….”“홍라온…….”“김 형.”갑자기 눈가가 어룽어룽 흐려졌다.
울면 안 되는데…… 울어서는 절대 안 되는데……. 울면…….
“김 형.”라온은 병연의 품속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시린 겨울 벌판에 발가벗겨진 채 바람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내 편이 나타난 것이다.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것만 같았다.
“홍라온.”일순간, 병연은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의 가슴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잠시 멍해졌던 병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울먹이는 라온의 등을 보듬듯이 두드렸다.
“무슨 일 있었어?”“흑흑…….”“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울어라.”이야기는 그다음에.
토닥토닥 토닥거리는 손짓이 라온을 위로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그친 라온을 내려다보며 병연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아닙니다.”“무슨 일이야?”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질문.
그렇다고 솔직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울적해서 그렇습니다.”“어찌하여 울적한 거야?”“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요. 갑자기 부모님 생각도 나고, 우리 단희도 보고 싶고, 그리고…….”“그리고 또……?”“…….”대답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병연이었다.
“세자빈 간택 이야기가 들리던데.”라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솔직한 눈동자. 이럴 땐 조금 영악해도 좋을 텐데.
병연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일 때문이야?”“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빈궁마마를 들이시는 일은 경사 중의 경사인데…… 그 일로 제가 어찌 마음이 울적해질 수 있겠습니까?”이내, 불퉁한 목소리가 라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거짓말도 못하는 놈이.”병연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라온을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많이 힘들 거다.”“……네?”“그러니 울고 싶을 땐 참지 말고 울어.”“…….”“괜히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두지 말고 울란 말이야.”“김 형.”대체 왜 이러십니까? 혹여 아시는 것입니까? 제가 화초저하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그분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찌 이리 제 마음을 잘 아시는 겁니까? 제가 여인이라는 것을…… 아시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그때였다.
조용하던 자선당 밖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윽고 닫혀 있던 처소 문이 밖으로 벌컥 열렸다.
밤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병연이 품속에 안겨 있는 라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홍라온.”“네.”여전히 병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라온이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너를 울린 녀석이 왔구나.”“네?”라온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턱까지 숨이 차오른 영이 마른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