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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93화 (93/131)

93. 방금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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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두웅.

거문고 선율이 푸른 파문을 일으켰다. 고요하게 잠긴 공기에 부드러운 생채기가 그려졌다.

길게 여운을 남기는 선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작은 털 뭉치 같은 감각이 뒷목을 간질였다.

영은 차분한 시선으로 두 번째 현을 퉁겼다.

두웅.

손끝과 어깨에 뭉쳐 있던 작은 전율이 파스스 전신으로 흩어졌다. 동공이 열리고, 입술이 벌어졌다.

“아!”라온의 입술 사이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광대가 줄을 타듯, 술대가 묘기를 부린다. 왼손이 괘를 누르며 장단을 맞췄다.

꼬리뼈에서 시작한 간지러움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발끝을 맴돌던 전율이 정수리에 둥근 원을 그렸다.

영이 한 음 한 음을 울릴 때마다 라온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그려졌다.

붉고, 노란 꽃밭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어딘가에서 밀려온 따뜻한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라온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농익은 늦봄의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눈을 현혹하던 봄날의 가락이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알싸한 열매를 맺었다.

현을 농현하는 손길이 빨라졌다.

허공으로 음의 파동이 울릴 때마다 라온은 크고 작은 전율을 느꼈다.

영이 타는 거문고 소리는 더는 거문고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에 담긴 그의 손길이 그녀의 전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훑고, 쓸고, 두드렸다.

음에 실려온 영의 마음이 그녀의 입술에 맺히고 코끝을 간질였다.

담담한 고백과 뜨거운 열정에 가슴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잔잔하게 강물이 흘러갔다.

강가에 앉은 두 사람은 사랑을 속삭였다.

라온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품에 안고, 귓가에 행복한 미래를 속삭인다. 그의 목소리에 마음에 뺏긴 라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락이 변했다.

잔잔하게 이어지던 음이 높고 낮게 출렁거렸다.

강물은 파도가 되어 봄을 몰아냈다.

만발한 꽃이 바닥에 떨어지고, 매서운 바람이 몰려들었다.

눅진한 가을빛이 숲을 덮더니, 이내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희고 순결한 눈꽃송이는 출렁이는 곡조와 함께 라온을 깊은 겨울 계곡으로 데려갔다.

뼈를 에는 듯한 추위에 라온은 몸을 옹송그렸다.

불현듯 거문고의 현이 작별을 고했다.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사랑이 차가운 얼굴로, 시린 눈빛으로 이별을 고했다.

길고도 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혼자 남은 외로움이 에이듯 밀려왔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걸음을 옮긴다.

강물을 거슬러, 사랑이 시작되었던 그곳으로…….

눈보라가 깊어졌다.

얼어붙은 다리가 쪼개지고 부서졌다.

쓰러져 울며 애원했다. 간절히 기도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헛된 메아리만이 귀를 희롱했다.

그녀의 가슴 위로 삭막한 모래가 흩날렸다.

눈물도 말라버렸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겨울이 끝났다.

메마른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렸다.

작은 물줄기는 내를 이뤘고, 이내 강이 되었다.

연분홍 꽃잎을 타고 그가 돌아왔다.

나무가 된 그녀를 어루만지며, 다시 사랑을 속삭였다.

이제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래도 대답했다. 가지를 흔들고, 나뭇잎을 찰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낙엽을 그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떨어트렸다.

이번엔 그녀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생각하는 지점에서, 사랑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부드럽고 격한 연주가 끝을 맺었다.

그러나 묵직한 현의 여운은 라온의 가슴을 늦도록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꿈꾸듯 아련한 속삭임이 끝이 났고,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이야기 역시 마지막을 고했다.

라온은 감은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며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곁에 있어도 언제나 그리운 사람, 그래서 자꾸만 눈물 나는 사내.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  *  *

“어찌 우는 것이냐?”라온의 눈물에 놀란 영이 거문고를 옆으로 밀어내며 다가왔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지그시 눌러주었다.

“저하…….”“슬펐느냐?”라온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슬프지 않았습니다.”슬펐다, 잔향처럼 남은 격통이 가슴이 아플 만큼.

또한, 슬프지 않았다. 영이 들려주었던 연주의 끝자락에 매달린 새로운 시작이 그녀의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듣기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듣기 나쁘다니요.

좋았습니다. 이리 아름다운 곡조가 오직 저만을 위한 것이기에 기뻤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영은 소중한 것을 품듯 라온을 꼭 끌어안았다.

라온 역시 그의 품속에 작은 얼굴을 온전히 묻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슨 생각인지 라온이 돌연 몸을 비틀어 그의 품속을 빠져나왔다.

일순, 귀한 것을 빼앗긴 영이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왜 그러느냐?”“생각해보니 셈을 제대로 치루지 못했습니다.”“셈?”라온이 손가락을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좋은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그에 맞는 값을 치러야 한다고 하셨지요.”“그래서?”“좋은 연주를 들려주셨으니 응당 값을 치러야지요.”“하여, 내게 돈이라도 주겠단 말이냐?”영이 흥미로운 기색을 얼굴에 드리웠다.

“내 연주에 얼마를 줄 테냐?”“얼마면 되겠습니까?”“이래 봬도 내 거문고 소리 한번 듣겠다는 사람을 세우면 궁에서부터 육조거리까지 세우고도 남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입에 발린 말이겠지만 칭송하는 입들도 여럿 있었…….”갑자기 빼앗긴 온기를 되찾으려 영이 제법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찰나.

나비가 내려앉듯 그의 입술 위로 라온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느닷없는 일격.

부질없는 말소리가 단숨에 사라졌다. 말이 사라진 텅 빈 공간으로 달콤한 숨결이 파고들었다.

영혼을 자극하는 깊은 입맞춤.

아릿한 전율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이것이면 되겠습니까?”“홍라온.”영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짧지만 강렬했던 입맞춤.

마주했던 입술을 떼어냈지만 두근대는 심장 소리는 여전했다.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구나.”“이 정도로 놀라시면 곤란합니다.”“무에, 더 놀라게 할 게 남았느냐?”이번엔 또 무엇일까?

영이 기대하는 시선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라온은 그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하…….”“말해봐라. 무엇이든 들어 줄 테니.”호기로운 영의 말끝으로 라온의 목소리가 꼬리처럼 달라붙었다.

“사랑받고 싶습니다.”“……!”“사랑하고 싶습니다.”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는 수줍은 고백.

영의 심장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두근대던 심장이 급기야 큰 북처럼 둥둥둥 머릿속을 울렸다.

이 여인을 어찌할까? 이 작고 소중한 여인을…… 이리 사랑스러운 여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당장에라도 라온을 안고 싶었다.

하지만…….

영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아니다.”“네?”조금은 단호한 거절에 라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지금은……아닙니까?” 예상치 못한 거부라.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팠다. 뒤늦게 부끄러움도 밀려들었다.

아, 괜한 말을 했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라온은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괜스레 바닥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주춤주춤 영에게서 물러나 앉았다.

영이 그녀의 앞으로 자줏빛 보퉁이 하나를 내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말씀하십시오.”“여기선 안 돼.”말과 함께 그가 라온을 훑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쓰고 있는 관모가, 입고 있는 녹색의 관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은 머뭇거리는 라온의 손에 자줏빛 보퉁이를 들려주었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밤하늘엔 잔별들이 가득했다.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보던 영은 마당에 놓인 반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를 배우던 그 시절처럼 뒤뚱뒤뚱, 되똥되똥.

그때는 참 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힘들었었는데…….

누각에 누워 하늘을 보며, 꿈을 키웠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그 꿈보다 더 깊은 것을 품게 되었다.

별들이 행적을 좇으며 상념에 빠져 있자니 굳게 닫혀 있던 폄우사의 문이 열렸다.

영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이윽고, 그의 눈에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능에색의 치마와 연한 진달래색 저고리를 입은 라온이……. 정수리에 꽁꽁 틀어 올린 상투를 풀고, 대신 곱게 땋은 머리를 한쪽 가슴 위로 가지런하게 내려트린 그 어여쁜 모습이 그의 시야에 맺혔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저리도 고운 여인을 답답한 관복 속에 묻어두고 있었구나.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마음이 한쪽이 흡족해졌다.

그녀가 댓돌 위에 놓인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총총걸음을 옮기는 그 모습에 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이제 나왔느냐?”라온에게 다가간 영이 손을 내밀었다.

“저하…….”라온의 얼굴에 뽀얀 수줍음이 피어올랐다.

이상하게도 부끄러웠다.

조금도 달라진 것은 없는데, 그저 입성 하나, 머리 모양 하나 달라졌을 뿐이데. 부끄럽고 수줍었다. 자신을 향해 내미는 영의 손길이 마냥 설레었다.

달아나듯 등 뒤로 가려진 그녀의 손을 영이 잡아당겼다.

커다란 손아귀에 갇힌 작은 손가락을 단단히 깍지 낀 영은 그녀를 폄우사 뒷마당으로 이끌었다.

“여긴 왜요?”라온은 의아한 얼굴로 영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화초저하의 행동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갑자기 여인의 옷을 내준 것도, 이 늦은 밤에 한적한 곳으로 가자 하시는 연유도 알 수 없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거문고 연주가 내 마음뿐만이 아니라 화초저하의 마음마저도 흔든 것일까?

궁금해하는 찰나.

폄우사 뒷마당의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앞에 선 영이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원래는 단옷날 보여주려 하였는데…….”라온의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굵은 나무에 그네가 매여 있었던 것이다.

“단희라 하였나. 네 동생.”“단희가 왜요?”“그 아이에게 너 입을 어여쁜 봄옷 한 벌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지.”언젠가 단희에게 옷감을 선물하며, 남는 옷감으로 언니 옷 한 벌 지어달라고 넌지시 부탁한 일이 있었다.

“완성해서 보내온 옷 속에 서신 하나가 들어 있더구나.”“서신이요?”“어릴 적부터 그네 한 번 타보는 것이 제 언니의 소원이었다고. 거짓 사내 노릇 하느라 여인네들 하는 것들일랑은 한 번도 못해 본 것이 제 언니라고.”“그 아이가 저하께 괜한 말을 하였습니다.”말은 그리했지만, 자꾸만 입 끝에 웃음이 물렸다.

하여, 이리 그네를 매신 것입니까?

영의 다정한 마음 씀씀이에 괜스레 눈가가 먹먹해 왔다. 그대로 두면 눈물이라도 날까 싶어 라온은 주먹을 들어 눈두덩을 쓱쓱 문질렀다.

금세 물기를 지운 라온이 영을 보며 말했다.

“타도 됩니까?”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너를 위한 것이니. 네가 타지 않으면 쓸쓸해할 것이다.”흔쾌한 대답에 라온이 그네에 올라섰다.

조심스레 발을 구르는 그녀의 등을 영이 밀어주었다.

달각, 달각, 달각.

다붓한 반동이 위로, 위로, 점점 하늘 위로 향했다.

하늘의 잔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길 반복했다. 늦봄의 향기가 코끝을 연신 간지럽혔다.

치맛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오므라들 때마다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불티가 되어 목구멍 위로 솟구쳤다.

내내 꾹꾹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꽃잎처럼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산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 오늘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다.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라온은 아이처럼 긴 웃음을 터트렸다.

밤하늘 위로 꺄르르르, 웃음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점점 가벼워졌다.

천진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도, 어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그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이게 다 화초저하 덕분이다. 화초저하 덕에…….

문득 고개를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던 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셨지?”그네를 구르던 무릎이 그대로 정지했다.

하늘이 점점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네가 멈춰 섰다.

“저하…….”그네가 멈추기 무섭게 라온은 영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평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두려워했던 적이 없었다. 아니, 두려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어린 동생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살아야 했기에 무언가를 두려워할 틈이 없었다.

그런 라온에게 두려운 것이 생겼다.

영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갑자기 그가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여, 두려웠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그가 영영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것이 정녕 하룻밤의 꿈인 것 같아서, 눈 한번 깜빡거리면 사라질 신기루인 것 같아 무서웠다.

라온은 어미 잃은 어린 것처럼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벌써 다 탄 것이냐?”어둠 속에서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꽉 막혔던 숨통이 그제야 뚫렸다.

라온은 단숨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어디 가셨던 것입니까?”“잠시 어딜 좀 다녀왔다.”영의 대답에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졌다.

좁쌀처럼 작아진 제 간덩이에 헛웃음마저 새어나와 라온은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왜 그러느냐?”덩달아 마주 앉으며 영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그저?”“그네를 너무 탔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저하께서 영영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습니다. 이 행복이 너무 실감 나지 않아 꿈인 줄로 알았습니다.

속내를 꾸역꾸역 삼킨 라온이 입가를 길게 늘이며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영이 문득 라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약지 손가락에 무언가가 끼워주었다.

“이게 뭡니까?”하얀 꽃 송아리로 만든 꽃반지.

눈송이처럼 희고 고운 반지에 눈이 시려 왔다.

“원래는 곱고 귀한 것을 끼워주고 싶었는데. 마음에 안 드느냐?”영은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곱습니다.”세상 그 어떤 보석으로 만든 것보다 아름다워 감히 손을 쥘 수도, 펼 수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원래는 좋은 날, 좋은 때를 골라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안겨주며 말하려 하였는데…….”잠시 숨을 고르던 영이 말을 이었다.

“홍라온.”“…….”“너와 평생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내가 꿈꾸는 세상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나만의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내가……너의 온전한 사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저하…….”

행복이 졸음처럼 밀려들었다.

가슴 뻐근한 고백에 라온의 심장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진 라온이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저는 영원히 저하의 사람일 것입니다.”라온의 대답에 영이 미간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그 답답한 환관복을 입고서 말이냐?”예전, 처음 꽃잠을 자던 그날도 영은 라온에게 내 여인이 되라 말하였다. 하지만 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갑한 곳에 갇힌 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차라리 환관일망정 항상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라온이 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습니다.”“내 마음이 편편치가 않아 그런다.”네가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아 겁이 난단 말이다.

“저하. 전 영원히 저하의 사람입니다.”제가 저하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아십니까?

한날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감히 원하는 것입니다.

환관일망정 당신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저하의 아침과 밤을 함께할 수 있도록…….

툭툭툭!

때마침 빗방울 소리가 폄우사의 지붕을 두드렸다.

“저하…… 비님이 옵니다.”라온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밤하늘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제법 길었던 봄 가뭄을 해소할 반가운 빗줄기였다.

라온은 온기를 품은 빗물에 제 마음을 실었다.

“이 비도 겨울이 되면 눈으로 변하겠지요. 때론 서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우박으로 변하기도 합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저하께서 만드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일평생을 저하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제 겉모습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제가 저하의 사람이고, 저하의 여인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원한다고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엄연히 달랐다.

여인의 모습으로 영의 곁에 있겠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의 발목에 족쇄를 다는 일이었다.

양반도 못 되는 천한 자신의 신분이 거침없어야 할 그의 걸음을 지체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를 궁지로 내몰게 될지도 모를 일.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영의 마음을 알고, 사랑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네 고집도 정말 대단하구나.”라온을 제 품에 끌어안는 영의 얼굴에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이 고집불통.

라온의 등 뒤로 둘린 영의 팔에 단단한 힘이 들어갔다.

*  *  *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와 같은 햇살, 같은 바람, 같은 공기였지만 라온에게는 확연히 달라진 햇살이었고, 바람이었고, 공기였다.

비가 그친 아침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했다.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벗 삼아 라온은 자선당을 나섰다.

오늘따라 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하지만 라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춰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이지?”대비전 담벼락 너머로 한 무리의 환관들과 나인들이 따개비처럼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호기심이 생긴 라온은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덩달아 담벼락 뒤에 바싹 붙은 채 곁에 있는 어린 환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비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아, 홍 내관님.”라온을 알아본 어린 내시가 고개를 숙였다.

“모르셨습니까? 지금 대비전에 소조께서 계십니다.”“아, 그렇습니까?”아침 문안 인사를 하러 들른 것이리라.

그런데 그게 어찌 되었다고 이리 구경을 하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홍 내관, 소문도 못 들었소?”장 내관이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소문이라뇨?”“허허허, 홍 내관. 소조께 관련된 일인데 아직 모른단 말입니까?”“저하와 관련된 일이라고요?”라온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던 장 내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궁전의 주인을 모신다고 합니다.”“그렇군요. 빈궁전의 주인을…….”문득 라온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무에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장 내관을 돌아보았다.

“방금 무어라고 하셨습니까?”“빈궁전의 주인을 들인다고 하였지요.”“빈궁전의 주인이라면…….”빈궁마마? 그렇다면 화초저하의……!

갑자기 귓속이 멍해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일순간에 세상 모든 것이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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