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혹시 저한테 죄지은 거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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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환관들은 분주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걸음이 궁 곳곳을 쓸며, 게으른 밤을 몰아냈다.
마침내 연회의 아침이 말간 얼굴을 드러냈다.
환관들의 발소리로 시작된 새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고 분주했다.
자경전에 거대한 차일이 쳐지고, 왕께서 자리하실 어탑이 마련되었다.
길고 짧은 호령 소리와 함께 들어선 시위군관들이 어탑 주위를 엄중히 경호했다. 궁의 병사들은 연회 시작 한 시진 전부터 자경전과 그 주위를 물샐틈없이 경비했다.
연회를 준비 과정과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다른지라.
팽팽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연회장의 규모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경전에 발을 들인 대신들은 그 장대한 광경에 잠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허허, 소조께서 꽤 공을 들이신 모양이구려.”영의정의 말에 좌의정 김성학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천한 기녀를 궁까지 불러들여 예행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연회를 위한 것이라 하는데, 얼마나 대단한 것을 준비하셨는지, 아주 기대가 큽니다.”얼마 전부터 왕세자께서 연회의 정재를 연습하기 위해 장악원의 여령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대가 크다는 좌의정의 목소리에는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
“어허, 좌의정. 어째 말씀이 험하시오. 좌의정께서는 무에 그리 못마땅한 것이오?”“영상께서는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기녀 따위가 출입하게 한답디까?”“연회를 위해서라고 하질 않소?”“그러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긴 가뭄에 백성들의 곤궁함이 극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고 있어요. 국사를 논하고 담론을 펼쳐도 부족할 판에 춤이라니요? 연회라니요? 게다가 연회 때문에 천한 것들을 궁에 들여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법도에 어긋나도 한참이나 어긋나는 것입니다.”“어허, 목소리가 너무 높소이다.”영의정이 김성학을 돌아보며 충고했다.
“얼마 전, 사옹원의 제조가 이 일을 문제 삼았다가 전라도로 유배된 사실을 모르고 있소이까?”“험험험.”영의정의 한 마디에 김성학의 기세가 움츠러들었다.
왕세자가 없는 자리에서는 이렇듯 큰소리 뻥뻥 쳤지만, 서릿발 같은 영의 기세에 많이 위축되어 있었던 터였다. 행여 누구 들었을세라 잔뜩 경계하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좌의정은 서둘러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 * *
“조정 대신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네.”두 사람의 주변에서 조용히 주안상을 나르던 라온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당연한 일 아니겠소?”인기척 없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장 내관이 아는 체를 해왔다.
“당연한 일이라니요?”“조선은 반상의 법도가 엄격한 나라지요. 양반과 상민이 한데 어울려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조선이라는 나라랍니다. 저기 계신 분들은 일평생 양반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분들이오. 그런 분들의 자부심이 이번에 세자저하 때문에 단단히 구겨졌지요.”“장악원의 여령들이 궁에 드나든 것뿐입니다. 고작 그런 일로 그분들의 자부심이 구겨졌단 말입니까?”그분들의 자부심은 종이로 만들었답니까?
“대궐이 어떤 곳입니까?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신성한 금지(禁地)가 아니오. 그런 신성한 곳을 하찮은 기녀들이 정재를 이유로 출입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격조가 떨어지게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겠소.”일장 연설하듯 말을 늘어놓던 장 내관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라고 높으신 분들께서 말씀하시더군요.”“그런 것이군요.”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어찌하여 높으신 조정 대신들께서 연신 불편한 헛기침을 하는 것인지.
신분과 권위, 엄격한 형식과 규율로 무장한 궁에 한낱 기녀들이 발걸음 한 것이 조정 대신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뜻이었다.
뼛속까지 사대부인 저들에겐 미천한 기녀들의 대궐 출입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세자께서 정재를 이유로 행하고 계셨으니, 얼마나 못마땅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핑계일지도 모른다.
미천한 기녀들의 출입이 궁의 법도를 흔든다며 불편한 헛기침을 흘리는 것도, 왕께서 거하시는 궁을 춤과 음악으로 어지럽힌다는 이야기도, 가뭄과 백성들을 돌볼 생각은 않고 여색에 빠져 있다는 소문도 모두 핑계일지 모른다.
그 모두가 세자저하와 그분께서 하시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공연한 트집을 잡는 것이 틀림없었다.
기녀들을 천하게 여기면서 어찌 백성을 귀하게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굶어 죽는 백성을 염려하는 대신들의 곳간엔 쌀이 넘쳐났다.
어쩌면 저들이 긍휼히 여기는 백성이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아닐까?
라온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연회에 참석하는 대신들은 하나같이 단단히 벼르는 표정이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하는 눈빛.
조금의 허점이라도 발견하면 굶주린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찢어발길 태세였다.
저런 자들을 화초저하께서 상대하셔야 한단 말이지.
라온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에 사람 없다고 하셨는데…….”“바르고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만…….”장 내관이 바지런히 손을 놀리며 말을 이었다.
“저분들의 눈에는 소, 돼지보다 못한 사람도 있는가 봅니다.”“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라온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엔 그런 취급을 받아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로요.”문득 장 내관이 고개를 들어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엔 전에 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홍 내관.”“네?”“제가 그래서 홍 내관을 좋아한답니다.”그의 웃음과 말이 전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장 내관의 모습을 한 다른 이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그 낯선 모습에 라온은 말없이 장 내관을 응시했다.
하지만 장 내관은 금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잰걸음으로 연회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 일 저 일에 대해 간섭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공주마마를 뫼시러 가볼까나?”해맑은 미소를 얼굴 가득 지은 채 장 내관은 라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손끝 야무진 나는 이만 물러갑니다.”손을 비비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허리춤에 꽂혀 있는 서적도 여전했다.
전과 겉표지가 다른 것을 보니, 라온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도기가 또 새로운 책을 만든 것이 분명했다.
저 당연하고도 평범한 장 내관의 모습이 어찌 이리 낯선 것일까?
“무얼 그리 보고 있는 것이냐?”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곁으로 영이 다가왔다.
짙은 감청색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환관이 줄줄이 열을 맞춰 따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대신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고개를 조아렸다.
유유자적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영의 모습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군림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과 위엄으로 사람 위에 군림하는 존재.
그것이 그녀가 연모하는 사내였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에 사람 없다지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 지금 눈앞에 있는 분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귀하고, 존귀한 분이시다. 그에 반해 난…….
문득 심장 어림에 아릿한 격통이 일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통증에 라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느냐?”그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고 영이 물었다.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동자에 걱정이 깃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닌데, 표정이 어찌 그래?”“그저…….”“그저?”“다들 내색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대수롭지 않은 존재는 없는 듯합니다.”속없이 웃기만 하던 장 내관에게서 얼핏 깊은 속내를 엿보았다.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장 내관 역시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거대한 궁궐의 작은 부속물 같았던 환관들과 궁녀들의 모습이 더는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것이냐?”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영이 라온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퉁겼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누구에게든 그 존재가 각인되는 순간, 그 사람은 소중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특히 너, 홍라온…….”“네?”“너는 이미 여기에 각인되었느니.”영이 제 심장을 가리켰다.
“저하....”“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연회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고백이 라온의 귓전을 간질였다.
라온의 두 볼이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자경전 마당을 가득 메웠다.
소조와 그를 따르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 *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장악원 악사들과 무희들이 자경전 뜨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의 자리에는 전에 없는 엄격한 규율과 장엄함이 가득했다. 그 느닷없는 엄격한 권위에 대신들은 연신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연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음악이 허공으로 메아리쳤다. 음악에 맞춰 여령들의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존귀한 존재를 맞이하는 우아한 춤에 대신들의 넋이 나갔다.
여령들이 궁에 드나드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여인들의 춤을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더러는 왕세자가 드디어 정치를 깨달은 모양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기녀들의 춤으로 신하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는 수군거림이 일었다.
그러는 사이 왕을 태운 연이 자경전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익선관과 붉은 곤룡포를 갖춘 임금께서 출차하시어 보좌에 올랐다.
잠시 후, 유천지곡이 울리고 세자께서 어탑 아래로 나아가 왕께 술잔을 올렸다. 동시에 대치사관이 왕세자 영이 직접 직은 치사를 읽어 내려갔다.
“이 아름다운 날을 맞이하여…….”왕의 공덕과 군신의 예법을 강조하는 치사가 허공 중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성의 맹약.
한순간, 치사에 귀를 기울이던 신료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갸웃 기울여졌다.
여령들의 현란한 춤과 악사들의 곡조에 맞춰 세자께서 왕께 술잔을 올리는 것은 예전부터 행해지던 예법이라. 별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대치사관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치사의 내용이 귀에 익은 것이 아니었다.
왕을 칭송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치사.
왕의 공덕을 크게 부풀리는 치사는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니 거슬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충성의 맹세라니!
자리에 앉아있던 김조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고, 윤성은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왕세자께서 준비한 것이 이것이었나?’윤성은 저도 모르는 사이, 발 한쪽이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왕세자의 치사가 계속되는 동안, 어탑 아래에서는 은밀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수십 명이 환관들이 보계 위에 자리하고 있는 신료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조용한 몸짓으로 대신들에게 다가간 환관들은 작은 서책 한 부씩을 건넸다.
느닷없이 서책을 건네받은 영의정이 제게 책을 건넨 최 내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홀기이옵니다.”“홀기?”“네. 연회의 순서를 적어놓았사오니, 읽어보시라는 소조의 명이십니다.”“소조께서 이것을 읽으라 하셨단 말인가? 무슨 일로?”“세자저하의 순서가 끝나면 좌우명부의 반수이신 영의정과 좌의정께서 전하께 술을 올리실 것이니. 준비하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최 내관의 말에 영의정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김조순을 돌아보았다.
그때, 이번에는 김조순의 곁으로 다가간 최 내관이 예의 홀기를 그에게 건넸다.
“영의정과 좌의정 대감께서 술을 올리신 다음엔 부원군 대감의 차례이옵니다.”공손히 홀기를 올리는 그 모습에 김조순이 입아귀를 가늘게 비틀었다.
“소조께서 제법 그럴듯한 것을 준비하셨구나.”김조순의 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곁을 지키고 있던 윤성의 잇새로 낮은 신음이 흘렸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었습니다.”화려한 춤과 음악으로 물 흐르듯 이어진 연회는 사실 차가운 칼 한 자루를 품고 있었다.
왕께서 보위에 오른 지 28년.
정치와 통치는 왕의 손을 떠나 조정 대신들과 외척들에게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특히나 부원군 김조순에게 그 힘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하라니.
비록 겉으로는 고개를 숙일지라도 왕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 교만했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김조순에겐 고개를 숙일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번 연회는 불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런 것을 어찌 미리 몰랐을까. 진작 알았다면 칭병을 핑계로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을 터.
기녀들이 궁을 출입하고, 왕세자가 그녀들과 매일 어울린다는 소리에 방심했던 탓이다. 하여, 홀기를 미리 나눠주지 않고 이제야 나눠준 왕세자의 숨은 저의를 미처 읽지 못한 것이다.
김조순은 눈을 감았다.
당했군.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엄격한 예로 무장한 연회를 멋대로 파하기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왕께서 세자가 올린 술을 마시자 음악 소리가 높아졌다. 동시에 여령들의 춤사위도 한층 흥겨워졌다.
흥이 겹되 요란하지 않았고, 차분하되 고요하지 않은 춤사위는 하늘 선녀들의 몸짓인 듯 아름다웠다. 작은 손짓 하나, 발동작 하나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높은 산호만세로 왕세자의 1작이 끝났다.
잠시 후, 영의정과 좌의정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더딘 걸음으로 진작탁 아래에 섰다.
연신 김조순의 눈치를 살피는 두 사람의 곁으로 머리에 꽃을 꽂은 두 명의 환관이 다가왔다.
빈 술잔이 건네졌다.
영의정은 술잔과 김조순을 번갈아 보았다.
주춤거리는 그를 재촉하듯 한 걸음 뒤에 선 환관들과 그보다 뒤에 서 있던 여령들이 일제히 왕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일순,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뻣뻣했던 영의정의 고개와 허리가 굽혀졌다.
형식과 예법으로 중무장한 노래와 여령들의 춤사위가 감히 굽혀진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영의정을 압박했다.
동시에 대치사관이 치사를 읽어 내려갔다. 왕세자 영이 직접 지은 글귀였다.
왕이 술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좌의정이 앞으로 나아가 술잔을 올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 충성을 맹약하는 술잔은 그 자리에 모인 조정 대신들에게 빠짐없이 돌아갔다.
* * *
“이렇게 된통 당할 줄은 몰랐소.”연회가 끝난 뒤, 대신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할 줄은…….”그때였다.
“왕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신하 된 자의 당연한 도리지요.”분노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윤성이었다.
좌의정이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쳤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오?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요? 방법이.”“잘못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그럼 참의께서는 이게 부당하지 않단 말하는 것이오?”“예법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것입니다.”윤성이 단호한 목소리로 좌의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법만을 놓고 따지자면 이번 연회는 조금도 잘못된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과거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하지 않았던 법도를 다시 세운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연회였다.
“그분께서 또다시 예를 들고 나오신 겁니다.”세자저하께선 예법을 무기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것입니다.
윤성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말에 대신들은 우왕좌왕했다.
작금의 조정에서 왕세자보다 예법에 해박한 자는 없었다. 그러니 저리 공격해와도 딱히 방어할 방도를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자저하의 행동을 따지고 들면 궁의 예법에 반기를 드는 셈이 되고, 이는 곧 양반의 법도와 규범을 입에 달고 살았던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다.
“차라리 백성을 방패 삼아 황당무계한 정책들을 내리시는 게 상대하기 편할 것 같소이다.”누군가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왕세자가 정치와 정책으로 일을 추진하였다면, 차라리 대응할 방법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법을 앞세운다면 앞으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를 들고 나온 것이지요. 정치로 논하면 빈틈이 없을 수 없으니까요.”세자저하는 지나칠 정도로 영특한 분이셨다.
그는 아직 길들이지 않은 야생말을 길들이듯 관료들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재갈을 물리고, 억지로 안장을 올린 야생마는 처음엔 심하게 반항하겠지만 결국엔 사람을 등에 태우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런 야생마처럼 그들 역시 종국에는 세자에게 길들여질 것이다.
또한, 세자는 이번 연회를 통해 대신들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명확히 알려주었다.
너희는 왕을 따르고 백성을 섬겨야 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소리 없는 일침이 그들의 목덜미를 죄어왔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조정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성을 향했다.
“방법이 없습니다.예를 무기 삼고, 효를 방패 삼은 분을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양반들의 권위와 이득을 지키기 위한 예법이 되레 그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참의도 뾰족한 수가 없단 말인가?”“어쩔 수 없이 긴긴 겨울을 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윤성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추운 겨울이 가면 따뜻한 봄이 오는 게 세상의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 * *
나흘 낮, 사흘 밤이 지나고, 왁자한 연회도 드디어 끝이 났다.
오랜만에 쉴 틈이 생긴 영은 라온과 함께 후원으로 향했다.
늦은 밤.
한동안 고즈넉하던 폄우사에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가 가득찼다.
“힘들지 않으십니까?”연회의 흥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인지, 라온의 얼굴은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너는 힘들지 않느냐?”“힘들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어찌 그리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그런 방식으로 신하들을 굴복시키다니.
그야말로 피 흘리지 않고 전쟁에서 이긴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강압하되 강압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의 싸움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그리 추켜세울 것 없다. 저들이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으니, 우선 행동으로라도 승복하게끔 해야 했던 것뿐이니까.”“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았을까요?”“고작 이 한 번으로 왕을 업수이 여기는 저들의 마음에 충성이라는 것이 생기겠느냐.”“그럼 어찌하려 하십니까?”“한 번이 아니 되면, 두 번 하면 될 것이고,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그것으로도 안 되면 될 때까지 할 것이다. 예의도, 관습도, 모두 습관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충성도 습관이지. 왕을 향한 충성이 습관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지금 당장은 신료들의 뻣뻣한 허리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만 말이다.”“네, 곧 저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그래, 그래야지.”영의 얼굴에 모처럼 흡족한 웃음이 만개했다.
처음 뗀 발걸음치고 나쁘지 않았다.
외척들과 신료들의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보았을 때는 꽉 막혀 있던 가슴 한구석이 뚫린 듯했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대신들의 허리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면, 비로소 이 나라를 바꿀 기반이 마련되리라.
바닥부터 바꿀 것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니, 모든 걸 뒤집어 새로운 것을 만들 것이다. 그러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영은 느른한 기분이 되어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은 그의 뇌리엔 연회의 춤과 노래가 가득했다.
그때였다.
마음이 통한 것일까?
그의 옆에서 조용히 차를 따르던 라온의 입속에서 연회에 쓰였던 노랫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영은 감고 있던 눈을 지그시 뜨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영은 가슴 언저리가 아려왔다.
그녀의 해사한 웃음이 그의 두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짙푸른 녹색 환관복에 갇혀 있는 여인이 한없이 가엾어 마음이 아팠다.
하늘 복숭앗빛을 닮은 고운 얼굴에 그려지는 말간 웃음.
새하얀 잇속으로 새어나오는 노랫소리는 천상의 가락인 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여,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그 노랫소리에 가락을 맞춰주고 싶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영은 폄우사 한구석에 세워둔 거문고를 무릎에 얹었다.
따당.
묵직한 현이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천진한 노랫소리에 맞춰 거문고가 낮은 울림을 터트렸다.
너무도 조용히 뒤따라오는 가락에 라온이 수줍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노래를 멈추진 않았다.
수줍은 노래와 묵직한 가락이 폄우사의 밤을 수놓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쉬울 정도로 짧은 노래가 끝이 났다.
라온은 영의 무릎에 놓인 거문고를 바라보았다.
“그건 지난번에 소양공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거문고가 아닙니까.”“그래.”“그때 소양공주께서 한 곡조만 연주해 달라 청하실 때는 그리도 사양하시더니.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네 노랫소리가 하 어여뻐 나도 모르게 이리 되었다.”영의 칭찬에 민망해진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머리를 반짝 치켜들었다.
“그거 아십니까?”“무얼?”“제 노랫소리보다 저하의 거문고 소리가 더욱 듣기 좋았습니다.”“그랬더냐?”“네.”“허면, 한 곡조 더 타주랴?”“들려달라고 하면 들려주시겠습니까?”“네가 원한다고 하는데, 내가 무얼 못하겠느냐?”“…….”영의 말에 라온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어찌 그리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쳐다보는 것이냐?”“혹시 저한테 죄 지은 거 있으십니까?”“갑자기 웬 엉뚱한 소리야?”“본디 사내들은 뭔가 죄 지은 것이 있으면 여인에게 인심을 베푼다고 들어서 말입니다.”“내가 네게 죄 지을 것이 뭐가 있겠느냐.”“네, 그렇지요. 하여, 물어본 것입니다.”“엉뚱한 녀석.”“그럼…… 왜 그러십니까?”“내가 무얼?”“왜 이리 친절하십니까? 이러시니 마치…… 마치…….”“마치 뭐?”“평범한 사내와 마주하고 있는 듯합니다.”아주 잠시, 단꿈에 빠져들었었다.
눈앞에 있는 화초저하가 범부가 되고, 자신 역시 평범한 여인이 되는 행복한 꿈.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련한 꿈을…… 아주 잠시 꾸었다.
“라온아.”“네.”“네 앞에서 나는 언제나 평범한 사내였다. 네 앞에서 나는 왕세자도 무엇도 아닌, 그저 네가 베푸는 사랑에 목이 타는 그런 어리석은 사내일 뿐이다.”그 진심 어린 모습에 라온은 목이 메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이리 넘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서조차 그려 본 적 없었다. 하여, 불안하였다.
이것이 하룻밤의 꿈인 듯하여…….
내 몫이 아닌 행복을 누려 갑작스레 불행해질까 언제나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려나?
눈앞에 펼쳐진 행복을 두 손 뻗어 잡아도 되는 것일까?
라온은 한껏 피어오른 표정으로 영을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들려주십시오.”저하의 연주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는 환관도 무엇도 아닌, 그저 영의 여인이 되고 싶었다.
그의 온전한 정인이 되어 그가 주는 사랑을 원 없이 받고 싶었다.
그 품은 속내를 읽은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의 길고 매끈한 손가락이 거문고 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