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곱기도 하구나, 달빛 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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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푸른달(5월) 초하루.
짙푸른 초록의 생명이 빠른 속도로 산하를 뒤덮어갔다. 농익은 봄꽃의 향기가 궁궐 안을 가득 메웠다.
바람결에 흐드러진 꽃잎이 비처럼 날리었다.
연분홍빛 꽃비가 내리는 대전 앞, 아침부터 한 무리의 신료들이 쑥덕대고 있었다.
“들으셨소? 세자저하의 장악원 출입이 잦다 하더이다.”“조선 팔도에서 여령들을 선발해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정재를 위해서라고 하던데, 그게 무에 잘못된 것이오?”“정재는 무슨. 저하께서 색에 빠지셨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연회를 핑계로 기녀들과 흥청망청 소일한다는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어요.”“허허허, 역시 연치 어리신 분이라. 정사(政事)는 뒷전이고 정사(情事)에만 신경을 쓰시는구려. 허허허.”“혈기 왕성하실 때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허나, 지금이 어느 땝니까? 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힘들어할 때가 아닙니까? 그런 때에 저런 일을 벌이시다니요? 쯧쯧.”“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판국에 정재는 무슨 얼어 죽을 정재란 말입니까?”비난하는 기색이 역력한 대신들의 목소리 사이로 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윤성이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신들을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저하께서 지금 기녀들과 무엇을 준비하고 계신다 했습니까?”“곧 있을 연회의 정재를 준비한다고 하오.”“예조참의께서도 모르는 일이십니까?”“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예조에서도 모르는 일이라면, 역시 정재를 핑계로 색을 즐기시는 것이 분명합니다.”“역시…….”비웃음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저하께서도 별수 없으시구나. 계집에게 빠진 젊은 사내란 사리분별이 불분명할 것이니. 한동안 몰아치던 강풍도 이제 끝이겠어.
늙은 신료들의 얼굴에 느긋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 윤성만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대리청정 이후로 사소한 틈도 보이지 않던 왕세자였다.
그런 세자께서 색에 빠졌다?
그 총명하신 분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불길함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왕세자께선 이 늙은 너구리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준비하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언가를…….
* * *
“저하, 대체 왜 이러십니까?”라온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턱을 괸 채 장악원 대청마루에 느른하게 앉아 있는 영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벌써 며칠째 해만 떨어지면 이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 와서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악사들의 연주를 듣고 여령들의 춤을 감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아니지. 종종 연주를 멈추게 하시곤 악사들과 춤을 추는 여령들을 불러 무슨 말씀을 하시고는 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음악과 춤을 본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화초저하께서는 저들을 자신의 비밀병기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비밀병기를 바라보는 저하의 모습은…… 딱 한량의 그것이었다.
영을 만난 이후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걱정하는 라온과는 달리 영은 태평했다.
되레 전전긍긍하는 라온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리 좋은 가락과 춤이 있는데 어찌 그리 종종대는 것이냐? 그러지 말고 너도 이리와 춤이나 구경해라.”“지금 춤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닙니다.”“왜?”“궁 안에 소문이 무성합니다.”“소문?”“네. 저하께서 여색에 빠지셨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그래?”잠시 혼잣말을 곱씹던 영이 낮게 웃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네?”“내가 여색에 빠진 건 사실이니까.”의미심장한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것 같으니. 내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지.”“…….”그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한 채 참으로 잘도 하십니다.
되레 라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괜스레 애꿎은 땅만 발끝으로 쿡쿡 찍으며 수줍은 마음을 대신하고 있자니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말고, 춤 구경하지 않을 생각이면 어디 가서 눈 좀 붙이거라.”“오늘 밤도 또입니까?”“그래. 오늘 밤도 또다.”그 말을 끝으로 영은 다시 여령들의 춤에 집중했다.
그의 어깨너머로 춤사위를 지켜보던 라온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리 춤에 빠지시면 적어도 두 시진은 꼼짝도 안 하신다는 것을 며칠간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오늘도 일찍 돌아가긴 글렀네.”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라온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분들은 대체 어디로 가신 거지?”왕세자께서 장악원에 나오실 때 함께 나왔던 소환내시들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불통내시들이었다. 왕세자 영은 불통내시들에게 지난번 청국 사신들을 맞이할 때와 비슷한 종류의 명령을 내렸다.
장악원 악사들이 사용하는 악기의 종류와 그 악기를 만든 재료. 그뿐만 아니라 여령들이 입고 있는 복색의 종류와 색, 춤, 춤사위 등등. 그야말로 지금 장악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 빠짐없이 세세히 기록하도록 했다.
왕세자의 명을 받은 불통내시들은 장악원의 풀 한 포기마저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 불통내시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좀 전까지 여령들의 춤사위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보십시오, 혹시 궁에서 나온 환관들 보지 못하셨습니까?”라온은 물동이를 이고 나오는 장악원 여비(女婢)에게 물었다.
“아, 그분들이라면 아까부터 뒤채에 계시는걸요.”“뒤채에요?”“네.”무슨 일인지 여비는 뒤채를 돌아보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 * *
장악원 뒤채로 가는 중문을 지나면 작은 연못이 하나 나왔다. 그 연못을 끼고 왼쪽으로 가면 여령들이 쉴 수 있는 작은 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분내와 사각거리는 비단 소리, 소곤대는 속삭임과 꺄르르 터지는 웃음소리로 가득한 그곳은 사내들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금남의 구역이라 불리는 그곳에 오늘 낯선 이방인들이 찾아들었다.
바로 궁에서 나온 불통내시들이었다.
“이걸로 말하자면 우리 충청도 땅에서만 나는 유명한 진흙이랍니다. 이걸 이리 싹싹 바르면…….”충주 관아의 기녀 애랑이 작은 항아리에 든 진흙을 얼굴에 바르는 시늉을 했다. 애랑의 손짓을 따라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시늉을 하던 불통내시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쭉 몰렸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애랑을 보던 도기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바르면 어찌 됩니까?”“어찌 되긴 어찌 되겠수. 아주 피부가 반질반질, 아기 피부가 되지요. 이것 보시어요. 이 애랑이의 피부가 이리 고운 것도 이 진흙 덕분이지요.”“오오, 대단합니다.”불통내시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애랑의 곁에 앉아 있던 덕애가 훗 낮게 비웃음을 흘리며 무언가를 품에서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시오?”“뭡니까?”이번엔 도기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상열이 물었다.
“우리 고을에서만 나는 분꽃으로 만든 향분이라오.”애랑이 입을 삐죽거렸다.
“흥, 분꽃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네 고을에서만 나는 분꽃이 어디에 있누.”“어디서 속고만 살았소?”“내 말이 틀렸는가? 분꽃이야 조선 팔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오?”“그러는 그네는 뭐라 하였소? 충청도에서만 나는 진흙이라니. 진흙이면 다 같은 진흙이지, 그 동네 진흙엔 금가루라도 붙어 있소이까?”티격태격하는 두 기녀 사이로 도기가 끼어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어디 그 향분 한번 발라 봐도 되겠소이까?”도기의 말에 덕애가 애랑을 돌아보며 턱을 추켜세웠다.
마치 자신의 향분이 애랑의 진흙을 이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분한 듯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 애랑을 뒤로 한 덕애가 도기의 얼굴에 향분을 발라주었다.
“상열이, 자네 보기엔 어떤가?”향분을 바른 도기가 상열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 보기엔 궁에 들어오는 향분보다 더 색이 고운 것 같으이.”“그런가?”상열의 칭찬에 도기가 면경을 들여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뭐, 다른 것들은 없소?”도기의 물음에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기녀들의 품속에서 각종 향신료와 화장품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제 고장 최고의 물건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는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통통한 도기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어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껏 분칠을 한 도기가 면경을 들여다보며 상열에게 물었다.
“자네 보기엔 어떤가?”“글쎄…….”흡사 어린 돼지 얼굴에 분칠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리 대답을 할 수는 없음이라.
상열이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은 듯도 하고…….”도기가 이번에는 기녀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기의 눈빛을 받은 기녀들 역시 외로 고개를 틀었다.
“어찌 보면 쓸 만한 것 같기도…….”“달리 보면 곱다고 할 수 있을지도…….”“음음.”기녀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도기가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분이 너무 하얀 것 같지 않은가?”도기가 제 얼굴의 문제점을 향분에서 찾으려 할 때였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녀들을 비롯한 소환 내시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 홍 내관님.”도기가 깍듯한 태도로 라온을 맞이했다.
“마침 잘 왔습니다.”“네?”“홍 내관님 보기엔 어떻습니까?”“뭐가 말입니까?”“이 향분 어찌 보입니까?”도기가 향분을 두텁게 바른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요…….”라온 역시 눈동자를 먼 허공으로 돌렸다.
어찌 보면 사람 같고, 또 어찌 보면 저승 가는 돼지 같고…….
“그런데 예서 뭘 하시는 겁니까?”라온의 물음에 도기가 대답했다.
“전국 팔도에서 여령들이 몰려왔는데, 하나같이 곱기가 꽃 같지 않겠습니까? 하여,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하여 이렇게 묻는 중입니다.”“특별한 비법을 알면요?”“그거야…….”도기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혹, 필요한 궁녀들이 있으면 알려주려고 그러는 것이지요.”라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궁녀들에게 알려주려는 의도였습니까?”도 내관님이 사용하려는 건 아니고요?
환관 중에는 여자보다도 더 치장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더러는 사향이나 향분을 사들이는 데 녹봉의 대부분을 쓰는 이도 있다고 했다.
도기 또한 희고 고운 살결을 유지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그때, 애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보라지. 특별한 향분은 무슨…….”내심 덕애의 향분에 자신의 진흙이 밀렸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던 애랑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 이건…… 얼굴 탓이오.”덕애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얼굴 탓? 흥, 꼭 재주 없는 목공이 연장 탓한다더니.”“이게 임자를 못 만나 그런 것이지…….”말을 하며 두리번거리던 덕애가 라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여기, 이분에게 한번 발라보며 알 것이 아니오.”“아니, 왜 이러십니까?”“가만있어 보시어요.”“이러지 마십시오.”“가만있어 보시라니까요.”덕애는 막무가내로 라온의 얼굴 위로 하얀 향분을 바르기 시작했다.
“어쩜…….”덕애를 비롯한 기녀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환관이라 그러신가? 사내 얼굴이 어찌 이리 곱소?”“내친김이라. 여기 있는 이것도 한번 발라봅시다.”덕애가 향분 바르기를 끝내자 지켜보던 다른 기녀가 화장 붓을 집어 들었다.
“뭐, 뭐 하려고 그러십니까?”“가만 계셔 보시어요? 내 기녀 생활 십여 년에 홍 내관님처럼 고운 사내는 처음 보아 그런단 말이오.”“이러지 마십시오.”라온이 황급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자니 여령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라온의 팔다리를 기녀들이 잡았다.
“다들 왜 이러십니까?”기녀는 힘으로 뽑는 겁니까?
어찌나 힘이 센 지, 아무리 용을 써도 기녀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윽고 울상이 된 라온의 얼굴 위로 섬세한 붓질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화장한 라온을 보며 기녀들은 저마다 신음을 삼키고 말았다.
“어머나!”“이런…….”“오호!”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못마땅한 목소리가 전각을 가득 메웠다.
라온을 찾아 여령들이 쉬는 전각까지 걸음을 한 영이었다. 여령들을 비롯한 소환내시들이 갈대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을 훑는 시선으로 돌아보던 영이 라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라온의 목덜미로 영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홍라온, 고개를 들어라.”“……안 됩니다.”여령들이 제 얼굴에 무슨 장난을 쳤는지 모릅니다.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속내를 알지 못한 듯 영이 다시 말했다.
“고개를 들라 하였다.”“하지만…….”“명이다. 고개를 들어라.”“…….”마지못해 고개를 드는 라온의 얼굴이 영의 눈동자에 맺혔다.
눈이 부시게 하얀 백분, 붉은 잇꽃을 갈아 만든 연지를 볼과 입술에 바른 라온을 보는 순간…….
“쿡.”영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저러시지?
고개를 갸웃하는 라온의 눈앞으로 영이 면경을 내밀었다.
“아아아.”라온의 입에서 아까 기녀들에게서 나온 탄성과 비슷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뭡니까?”라온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녀들을 휙 돌아보았다.
기녀들의 자기 고장 특산품에 대한 과한 맹신이 엉뚱한 결과를 내고 말았다.
눈은 전라도 기녀의 것으로, 볼에 바른 색분은 어디의 누구 것으로…… 이런 식으로 화장하다 보니 라온은 흡사 각시탈을 뒤집어쓴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 만 것이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애랑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역시 향분이 문제였어.”그 곁에서 도기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아…….”앞에서 큭큭 웃음을 참는 영과 기녀들을 번갈아 보던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괜히 했어. 죽어도 안 한다고 할걸.
* * *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건만.
사월 초파일의 등롱이 길게 늘어선 길목은 대낮처럼 환했다.
영과 라온은 초파일의 오색 찬연한 등롱 아래를 걷고 있었다. 바람이 속살거리듯 귀 아래로 흘러내린 자분치를 흔들었다.
여름을 지척에 둔 계절이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두 사람의 발치로 물기를 머금은 싸한 공기가 올라왔다.
“곤하지 않으냐?”앞서 걷던 영이 문득 라온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대답하는 라온의 얼굴 위로 아까 보았던 화장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말갛도록 순진하고 귀엽던 모습이…….
영의 입매가 묘하게 실룩거렸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라온이 볼멘소리를 냈다.
“웃지 마십시오.”“안 웃는다.”“지금도 웃고 있질 않으십니까?”“안 웃는 다질 않았느냐.”“어깨나 들썩이지 말고 그런 소리 하십시오.”라온의 불퉁한 목소리에 영이 웃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얼굴이야?”“속상해서 그럽니다.”“뭐가?”“곱게 보이고 싶었습니다.”“……!”“화초저하께 고운 모습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기녀들이 해주던 화장, 싫다 하면서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거짓 사내로 살아왔다고 해도 저도 여인이니까요.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저하의 앞에서만큼은 여인이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그런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라온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영이 그런 라온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턱을 손안에 오롯이 담았다.
“괜찮다.”괜찮아. 내겐 언제나 고와 보이니 그리 애쓰지 마라. 그리 속상해하지 마라.
라온을 향한 영의 시선에 진심이 가득했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무엇을 하던 내겐 다 고와 보여.”“그리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위로가 아니라 내 진심이다.”“그리 안 하셔도…….”말끝을 매듭짓기도 전에 영의 입술이 라온의 입술을 덮쳤다.
“온종일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저하…….”“특히 아까 붉은 연지 곱게 바르고 있을 땐 더더욱 이 입술에 입맞춤하고 싶었다.”“거짓말 마십시오.”“왕세자가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거짓이 아니면 화초저하께선 성격이 이상하신 겁니다.”“나를 이상한 사내로 만든 장본인에게서 들을 말은 아닌 듯하구나.”“남 탓하는 버릇, 고치셔야 합니다.”“감히 어디서 훈계더냐?”콩, 아프지 않게 라온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하던 영이 낮게 속삭였다.
“이왕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으니 제대로 이상해져야겠다.”아득한 입맞춤이 다시 이어졌다.
따뜻한 숨결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눈빛과 눈빛이, 손길과 손길이,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둘에서 하나가 되었다.
찰나 같은 영원이,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갔다.
겨우 영의 손길에서 벗어난 라온은 수줍은 마음을 감추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영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라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머리에 이고 걷는 라온의 모습은…… 너무 고와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하여,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오래 보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 시선을 느낀 라온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영을 돌아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곱기도 하구나, 달빛 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날이 갈수록 이상해지시는 거 아십니까?”“아까도 말했지만, 나를 이리 만든 것은 바로 너다. 그러니 네가 책임져야지.”“말도 안 됩니다. 저 같은 환관이 어찌 왕세자저하를 책임진단 말입니까?”빼꼼 혀를 빼내 물던 라온이 영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화초저하, 내일도 장악원에 가실 겁니까?”“가야지. 봐야 할 춤이 아직 많으니.”“갑자기 그리 춤에 빠지신 연유가 무엇입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이 길게 입가를 늘이며 말했다.
“그건…… 비밀이니라.”“저하는…… 정말 이상하십니다.”말씀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제게도 비밀이 있으신 겁니까?
조금 서운한 마음에 라온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리 토라진 것도 싫지 않은지라, 영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얼굴 한가득 담은 채 라온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싫으냐?”“…….”싫을 리 있겠습니까?
라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그래야지.”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에 흡족한 빛이 떠올랐다.
머리 위로 길게 수놓인 등롱과 유백색의 하얀 달빛이 두 사람의 발치로 따뜻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 * *
이레 후.
붉은 관복을 차려입은 김조순과 윤성이 경복궁 안으로 들어섰다.
왁자한 연회의 분위기로 궁은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괜찮겠습니까?”윤성의 건조한 물음에 김조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자께서 처음으로 연회를 준비하셨다니. 이 할애비가 참석해야지.”“속셈이 있을 것입니다.”“그렇다면 그 속셈이 무엇인지 궁금하여서라도 더더욱 참석해야 하지 않겠느냐?”턱 아래로 내려온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김조순은 자경전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관록과 여유로 충만했다.
인생의 쓰고 단맛을 모두 맛본 백전노장.
정치와 음모에 관해서라면 이 조정에서 김조순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왕과 왕비, 세자와 종친, 그리고 문무백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자경전에서의 연회는 김조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것의 시작은 춤과 노래에서 비롯되었다.
연회를 알리는 춤과 노래.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춤과 노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