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내가 고픈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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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2
새벽 안개가 애련지를 뒤덮었다.
애련정 위에 선 영은 안개 뒤에 숨은 연잎을 찾기 위해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그 모습을 본 왕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영아.”자상한 부름에 영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날이 밝으면 안개란 자연히 걷히는 법이다. 그리 눈빛 세우지 않아도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조급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근래에 들어 왕세자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한다는 소리가 왕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잃은 것을 되찾으려면 잃어버린 시간보다 배는 더 많은 시일이 걸리는 법이었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
영은 안동 일문에게 대응할 여유를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실추된 왕실의 권위도 하루 빨리 되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왕은 아들의 조급한 행보가 걱정되었다. 서두르면 넘어지기 마련이다.
“제가 그리 급해 보였사옵니까?”“서둘러 달리고 싶은 마음일랑 내 어찌 모르겠느냐. 허나, 영아. 달리는 말을 너무 재촉하면 결국엔 지쳐 쓰러지게 되는 법이다.”“명심하겠사옵니다.”왕이 고개를 내렸다.
이곳에 서서 연못을 바라보면 투명한 수면 너머로 많은 것들이 보이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안개가 짙은 탓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다행히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영은 저도 모르게 라온과 병연을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어떠한 순간에라도 자신의 곁을 지키리라.
그러나 왕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한두 명이면 충분하겠지. 허나 정치는 다른 법이다.”“그 말씀은…….”“외척을 견제할 다른 세력을 만들어라.”“뜻이 같은 사람을 궁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변하기 쉬운 존재다. 탐관오리라 하여 처음부터 탐욕과 부정을 꿈꾸며 관직에 들었겠느냐? 청운의 꿈을 품은 자도 큰 유혹 앞에서는 흔들리는 법이다.”“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이해와 실리로 맺어진 관계는 그 이해가 깨지고 실리가 사라지면 관계마저 깨지는 법이다. 모름지기 피로 맺어진 관계만이 실리를 넘어설 수 있는 법이다.”영은 왕이 말하는 뜻이 능히 짐작되었다.
“이 조정에서 외척을 내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더러 새로운 외척의 세력을 만들라는 말씀이시옵니까?”영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외척의 폐해로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는데.
그 외척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아시면서 어찌 다시 새로운 외척을 만들라 하시는 것인지.
“힘이란 언제나 균형을 이뤄야 하는 법이지. 붕어하신 아바마마께서는 그 힘을 적절히 이용하실 줄 아는 분이셨다. 너는…… 그분을 많이 닮았다. 마치 그분께서 살아 돌아오신 듯 너의 행보가 그분과 똑 닮았다. 그래서 대신들이 그리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두려운 만큼 반발도 거세다는 걸 명심해라.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미 한 번 겪어보았다. 그러니 그 두려움을 어찌 꺾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왕이 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구나. 네게 이리 큰 짐을 짊어지게 해서.”가슴이 아프구나. 네게 그 큰 짐을 짊어지게 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아바마마.”“영아, 고단한 길, 홀로 걷지 마라. 네 뒤를 따를 누군가를 곁에 둬라. 알겠느냐?”영을 바라보는 왕의 눈에는 아들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 마음 모르지는 않았지만, 영이 함께 걷고 싶은 이는 왕과는 다름이었다. 영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음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람.
오직 그만의 사람, 바로 라온이었다.
* * *
“당신이 필요합니다.”영의 말에 백발의 노인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미 많은 사람이 세자저하와 함께하고 있습니다.”“그들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지, 날 이끌어줄 사람이 아니오. 선생, 부디 날 이끌어주시오.”정약용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물결이 필요한 법입니다. 소신은 이미 흘러간 물결입니다.”“지나친 겸손이오.”“과분하신 평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나 부디 그 청은 거두어 주십시오.”“선생.”“소조께서 품으신 꿈을 펼치는데, 어쩌면 이 늙은이의 경험이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오나 소신은 이미 늙고 병들었나이다. 오래되고 고루하여 소조의 이상을 속되게 더럽힐까 염려되옵니다.”“선생…….”“원하실 때는 언제고 부르시옵소서. 소조의 부르심이 있으면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달려오겠사옵니다. 하지만 내리신 관직은 다시 거둬주십시오.”영은 거듭 청했지만, 정약용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역시 한때는 조정에 몸을 담았다. 새로 관직을 받아 높은 곳에 오르면, 과거의 인연들이 다시 그를 찾아와 발목을 잡을 것이다.
늙을수록 정에 약해진다 하였던가.
행여나 약한 마음에 자칫 왕세자께서 이루시려 하시는 대업에 누를 끼칠까 두려웠다. 하여, 성심을 다해 돕더라도 관직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선생의 뜻이 그리 완고하시니, 더는 청하지 않겠소. 하지만 가르침을 베풀 일이 있다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말씀하시오.”“그리 말씀하시면 감히 한 마디만 올려도 되겠습니까?”“무엇이오?”“주상전하의 말씀에 따르십시오.”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어찌 선생마저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알지 않소. 내게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영은 닫힌 문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문풍지 위로 그려지는 라온의 그림자가 그의 눈동자가 또렷이 맺혔다.
문득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정약용의 주름진 눈가에 애잔함이 서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디인 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마음이 어떠한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조께서는 이 나라의 왕세자이십니다.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이시옵니다. 또한,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실 분이시지요.”“알고 있소.”“군주는 세상 만물을 대함에 편애가 있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선 무릇 큰 둥지가 필요한 법. 부디 먼 곳을 보소서.”영은 오롯한 시선으로 정약용을 마주 보며 반박했다.
“마음에 품은 한 사람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만백성을 품을 수 있겠소?”영의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고작 여인 하나 지킬 수 없는 왕이 어찌 수많은 백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여, 지키고 싶었다.
아니, 지킬 것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저 아이를 내 곁에 있게 할 것이다.
* * *
정약용이 돌아간 뒤, 중희당에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얼마 후, 두터운 정적을 밀어내며 중희당 안으로 라온이 들어섰다.
“그것이 무엇이냐?”“오늘 종일 입맛이 없으시다고 많이 드시지 못하지 않으셨잖습니까.”라온은 야식이 담긴 소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생각이 없구나.”“생각이 없다고 안 드시는 것은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음식에 대한 예의?”“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세상 만물에는 다 지켜야 할 법도와 예의가 있다 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음식은 생각이 있으나 없으나 눈앞에 놓였을 때 맛나게 먹어주는 것이 예의라 하셨지요.”“별난 예의도 다 있구나. 정말 다산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더냐?”“당, 당연하지요. 설마 제가 없는 말을 지어내겠습니까?”웬일인지 라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영이 풀썩 웃었다.
“그래?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선생을 불러 물어봐야겠구나. 더불어 세상 만물에 대한 다른 예의도 함께 말이다. 여봐…….”영이 밖을 향해 목청을 돋우려는 시늉을 해 보였다.
화들짝 놀란 라온이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그,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어허!”영이 눈빛을 세우자 라온은 시선을 먼 허공으로 돌렸다.
“시각이 몇 시인데 할아버지를 부르려고 하십니까? 할아버지 연세도 생각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원한다면 시각이 언제가 되었든 상관없다고 하셨다.”“저하께서는 그게 문제입니다. 음식에 대한 예의만 없으신 게 아니라 노인에 대한 공경심도 없습니다. 조정 대신들에겐 예악에 대해 그리 강조하시는 분께서 어찌 그리 기본적인 것도 모르십니까?”라온의 말에 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의 예시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구나.”“그것이 무엇입니까?”영이 라온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난 홍라온에 대한 예의도 없느니라.”라온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홍라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모든 여인에 대한 예의가 없으신 게 아닙니까?”“하하하. 그리 보이더냐? 허면,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해야 예의를 차리는 것이 되겠느냐?”“우선은 여기 있는 음식에 대한 예의부터 보여주십시오.”라온의 재촉에 영은 마지못해 소반 앞에 앉았다.
소반에는 따뜻한 차와 함께 쑥떡과 고운 꽃으로 부친 화전이 가득했다.
“곱구나.”곱긴 했지만, 여전히 썩 내키지 않았다.
“고운 만큼 맛도 좋습니다. 어서 드십시오.”“너나 먹어라.”“되었습니다.”말과 함께 라온은 입안에 고인 단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귀여운 언행불일치에 영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닦으며 말해라.”“침 나왔습니까?”쓱,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문지르던 라온이 영을 따라 맑게 웃었다.
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바위보다 무겁게 느껴졌던 일들이 깃털처럼 가볍디가벼워졌다. 혼탁한 머릿속도 맑아지고,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쑥 향이 좋구나.”“꽃 향도 좋습니다. 그러니 드십시오.”“그래, 꽃 향도 좋구나. 허나 말이다, 나는 향 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그렇습니까?”라온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럼 무에 다른 것을 준비하라 할까요? 무얼 드시고 싶습니까?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하께서 드시겠다고 하면 제가 뭐든 가져올 것입니다.”“정말이냐? 뭐든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대령할 것이냐?”“네.”고개를 끄덕이는 라온의 앞으로 영이 불쑥 다가갔다.
“홍라온.”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말간 눈동자와 한데 엉켰다.
“네.”“나는 말이다, 홍라온이가 고프구나.”“네?”“못 들었느냐? 내가 고픈 것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온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 앉았다.
어째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싶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이리 나오시니.
라온은 입매를 야무지게 다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거기 있는 떡이랑 화전 다 드시기 전에는 어림도 없습니다.”“그렇단 말이지.”어느새 입 안으로 쑥떡이며 화전을 우물거리며 영이 말했다.
“여기 있는 것들 다 먹으면 내가 원하는 것도 취하게 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더냐?”라온을 향한 그의 눈빛이 짓궂게 반짝거렸다.
“저하…….”기어이 라온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 * *
“이러지 마십시오.”소반 위의 야식은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 화전을 입안에 우물거리던 영은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라온의 양어깨를 잡았다.
“너, 분명히 나와 약조하였다. 상 위의 것들만 다 먹으면 내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겠다고.”“제 말이 이런 뜻이 아닌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쉿. 목소리가 너무 크다.”억울한 마음에 라온이 음성을 높이자, 영이 서둘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라온의 시선이 황급히 문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최 내관께서 혹여 들었을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깥을 인기척을 살폈으나,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못 들으셨나 보네. 휴, 다행…….
그러나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앞섶에서 꼼지락거리는 손짓에 입매를 다부지게 여몄다.
탁, 어느새 옷고름을 푸는 영의 손길을 야무지게 밀쳐낸 라온은 가볍게 몸을 굽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감히.”눈매를 매섭게 세운 영이 미간을 한데 모았다.
“아…….”화나셨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라온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잠시 잠깐, 돌처럼 굳어진 그녀의 모습에 영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또 속았다.
영의 장난에 매번 당했건만, 어찌하여 저 표정만 보며 매번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것인지.
아차 하며 몸을 돌리는 찰나, 어느새 라온은 영이 제 팔로 만든 벽 안에 갇힌 뒤였다.
어찌 빠져나가야 할까? 궁리하는 라온의 얼굴 위로 영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괜한 심술에 라온이 쓱 얼굴을 좌로 돌렸다.
덕분에 영의 입술은 빈 허공을 훔치고 말았다.
“감히!”버릇 같은 한 마디가 영의 잇새로 새어나왔다.
또 아까와 같은 표정.
그러나 이번에도 속을 라온이 아니었다.
“제법이구나.”제법 담대한 시선으로 제 시선을 받아내는 라온의 이마로 영은 제 이마를 쿡 맞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이 집요하게 라온의 입술을 향해 내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라온이 이번에는 우로 고개를 돌렸…….
“그럴 줄 알았지.”어느새 라온의 뒷목을 그러잡은 영의 손이 그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꼼짝없이 붙잡힌 라온의 입술 위로 영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안 됩니…… 음.”허무한 반항은 그대로 영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련한 숨결이, 감미로운 영의 온기가 라온을 지그시 감쌌다. 봄꽃의 향기를 품은 그의 혀끝이 라온의 입 안에 더듬었다.
그 달고 상큼한 향내에 절로 라온은 입 안에 단침이 고였다.
농익은 봄꽃을 삼키듯 라온은 그의 향취를 수줍게 들이마셨다. 그 작은 반응이 애써 내리눌렀던 영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손끝으로, 발끝으로 조급증이 찾아왔다.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일었다. 라온을 잡고 있는 손끝에 힘이 깃들었다. 갑자기 갈증을 느낀 사람처럼 그는 라온을 갈구했다.
이 작은 여인을 가슴에 품고, 품고, 또 품고…….
“저하…….”최 내관의 눈치 없는 부름이 영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영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라온에게서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 정적이 최 내관을 불안하게 만들었는가 보다.
문 앞을 다소곳이 지키고 섰던 그림자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저하…….”다시 부르는 소리에 영이 하는 수 없이 라온에게서 입술을 뗐다.
“무슨 일이냐?”“야식은 다 드시었사옵니까?”“아직이다.”“네, 알겠사옵니다.”휴, 안도하는 소리와 함께 분주한 그림자가 다시 멀어졌다.
영이 다시 라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라온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는 제 품에 갇힌 채 열띤 숨결을 내쉬는 라온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영의 입술이 라온의 이마를, 앙증맞은 콧잔등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잠시 사라졌던 기갈이 다시금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영은 라온을 향해 간질간질 다가갔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아주아주 조금만 더…….
찰나.
“저하.”“…….”“저하…….”“무슨…… 일이냐?”최 내관을 향한 영의 목소리에 뾰족하게 각이 서려 있었다.
“저하, 침수 드실 시각이옵니다.”“알고 있다.”“소인이 잠자리를 살펴드리겠사옵니다.”“그럴 것 없다.”“하오나…….”“그럴 것 없다 하였다.”일순, 북풍한설을 품은 영의 목소리가 최 내관을 향했다.
그사이, 라온은 그의 품을 벗어나 저만치 물러나 앉았다.
한순간에 손아귀에 쥐고 있던 당과를 빼앗긴 기분이라.
영의 입매가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가늘게 여민 눈매로 문밖의 최 내관을 응시하던 영이 돌연 자리에 앉아 붓을 손에 쥐었다.
“무얼 하십니까?”“칙령을 내리는 중이다.”“갑자기 무슨 칙령이십니까?”라온이 고개를 기울여 문서의 내용을 살폈다.
“동궁전 섭리 최 아무개는 지금부터 따로 부를 때까지 동궁전 밖을 쉬지 않고 뛴……. 화초저하, 하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또 다른 의미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문밖에서 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던 최 내관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밤도 더디게 흐르겠구나.”낮은 한숨과 함께 최 내관은 망부석이 되어 동궁전 앞을 지켰다.
늙은 내관의 얼굴에는 행여 주군의 별난 취향이 밖에 새어나갈까 전전긍긍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 * *
멀리서 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요란한 야식을 물린 후, 영은 다시 문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지키고 있던 라온은 쏟아지는 하품을 속으로 삼키며 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느닷없는 목소리가 라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요즘 궁의 분위기는 어떠하냐?”“여전합니다.”“여전하다? 요즘도 흉흉한 모양이구나?”영이 대리청정을 한 이후로 궁 안팎의 분위기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과 안동 일문의 첨예한 대립에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얼마 후에 있을 연회를 벌써부터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왕세자께서 대리 청정한 이후 처음 열리는 연회였다.
왕과 신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치러지는 연향.
이곳에서 큰 사달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며, 내관들과 궁녀들은 전전긍긍했다.
혹시나 지난번 주상전하의 탄일 연회처럼 조정 대신들이 모두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다면…….
온갖 추측과 말들이 난무했다.
영의 노력에도 왕을 대하는 조정 대신들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래된 습관이 버릇처럼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자칫 누구 하나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왕세자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또 한 번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너도 걱정되느냐?”“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화도 납니다.”“어찌하여?”“감히 신하 된 자들의 고개가 어찌하여 저리 뻣뻣하단 말입니까?”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라온에게 임금이란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아니, 지금도 그녀에게 왕은 물론이고 왕실 사람들 모두가 하늘 신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또한, 궁에 들어오기 전엔 왕을 모시는 신료들은 모두가 충신들이며, 충심으로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달랐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왕이라 하여 가장 큰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신료라 하여 반드시 충신인 것만도 아니었다.
충신이 하나이면, 탐관오리는 열이고 스물이었다.
수많은 조정 대신 중에 임금 충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왕실의 기강이 이렇듯 모래 위에 세운 누각처럼 불안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그렇지. 네가 보기에도 그리 보이지?”라온의 속내를 읽은 영의 얼굴에 허허로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하…….”당황한 라온은 황망히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라.”“갑자기 왜 그러십니까?”“갈 곳이 있다.”“이 밤에 갑자기 어딜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오늘 밤, 내 너에게 비밀 병기를 보여주려 한다.”“비밀 병기요?”“뻣뻣한 대신들의 고개를 숙일 방도가 있거든.”영의 말에 라온이 반색하며 그의 턱밑으로 달려들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런 방도가 있습니까?”
* * *
잠시 후.
두 사람은 변복한 차림으로 돈화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화초저하, 어딜 가시는 겁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내 비밀 병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영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는 붉은 솟을대문이 눈앞에 다가왔다.
“저하, 여기는 장악원이 아닙니까?”영이 라온을 데려간 곳은 뜻밖에도 궁 밖에 있는 장악원이었다.
“이 밤에 여긴 어이 오신 겁니까? 설마 이곳에 대신들의 고개를 숙일 방도가 있다는 건 아니시지요?”“왜 아니겠느냐?”영은 시원하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조용하던 장악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느닷없는 왕세자의 방문에 잠에 취해 있던 장악원의 별제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작은 소동으로 술렁거리는 장악원의 대청마루에 영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의 곁에 라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립하고 섰다.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기다려보면 알 것이다.”영이 별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신호를 받은 별제가 양 손뼉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윽고, 장악원의 중문이 열리고 화톳불로 환하게 밝힌 마당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동시에 별제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애랑이라고 하옵니다.”풍성한 붉은 치마와 저고리, 화려한 떨잠이 가득 꽂힌 가체를 머리에 얹은 아름다운 여인은 충주 관아의 관기 애랑이었다.
어리둥절하던 라온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 의문은 장악원 마당으로 들어서는 기녀의 숫자만큼 쌓여갔다.
애랑이, 여실이, 덕애, 연심이…….
그렇게 시작된 기녀의 숫자는 쉰 명을 넘어갔다.
라온은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영과 마당에 일렬로 서 있는 기녀들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그때, 영이 라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선 팔도에서 가려 뽑은 조선 최고의 기녀들이다.”영의 말에 라온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조선 최고의 여령들답게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저 기녀들과 조정 대신들을 고개 숙일 방도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라온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화초저하…….”
뻣뻣한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미인계라도 쓰시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