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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89화 (89/131)

89. 어느 봄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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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8

봄꽃이 나른한 기지개를 켰다. 성질 급한 몇몇은 활짝 꽃잎을 펼쳐 설익은 봄과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

회화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누각으로 한 사내가 조용히 들어섰다.

“흠.”낮은 헛기침소리가 잠든 누각을 깨웠다. 누각에 길게 쳐진 발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고민으로 오신 겁니까?”청명한 물기를 머금은 음성의 주인, 바로 라온이었다.

영의 부탁으로 궁인들의 고민 상담을 한 것이 어느새 두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사이, 소문을 듣고 오는 궁인들의 숫자가 많아졌고 급기야 이렇게 관직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도 그녀를 찾았던 것이다.

궁인들이야 아무런 허물없이 라온을 찾아왔지만, 명색이 양반인 자들은 하찮은 환관에게 고민을 상담한다는 사실을 밝히길 꺼렸다.

게다가 그 고민의 내용이라는 것이 남녀 간의 애정문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인지라, 자연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라온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운종가 삼놈이에 대한 명성 때문이었다.

여인에 관한 문제라면 어김없이 해결한다고 하니, 호기심과 동시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라온을 찾긴 했지만.

곧 죽어도 양반은 양반인지라 자신들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또한, 비밀보장은 필수. 그런 이유로 이렇게 조용하고 은밀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누각을 좌우로 나누듯 길게 발까지 처져 있어, 목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상대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고민을 들어 준다 들었소.”“어떤 고민이 있으신지요?”“어험.”고민 상담을 하러 온 사내가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좀처럼 먼저 입을 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던 라온이 먼저 운을 뗐다.

“혹여, 마음에 담아 둔 여인이 있습니까?”“그렇소.”“그런데 그 여인이 근래에 들어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습니까?”“맞소! 어찌 알았소?”“…….”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이제는 반 무당이 되었습니다. 상대의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어떤 고민이 있는지 대충 어림짐작이 된단 말입니다.

라온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자니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한 듯하오.”목소리에서 답답한 기색이 느껴졌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예전과 미묘하게 달려졌소. 날 대하는 태도와 말씨에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거리감이라고요?”“바쁜 와중에 모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황급히 돌아가기가 일쑤고…….”“어쩌면 정말로 바쁜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어젯밤엔 모처럼 함께 야식이나 먹자 하였는데, 무슨 일인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더군.”“무척 바쁜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제 입으로 초심을 잃지 말라 하였으면서, 정작 초심대로 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니…….”“…….”“이 사람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라온은 대답 대신 두 사람 사이에 내려졌던 발을 올렸다. 그 아래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그녀가 물었다.

“화초저하, 여기서 뭐 하십니까?”“그러는 너는 예서 뭐하는 것이냐?”“궁궐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하고 있는 중입니다만.”화초저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닙니까?

설마, 이제 와 잊었다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나 역시 고민을 풀어놓는 중이다. 그러니…….”툭, 영은 라온이 걷어 올린 발을 다시 내렸다.

“내 고민도 좀 해결해다오.”“…….”“어서.”영의 재촉에 라온이 마지못한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왜 그러는 것인지 고민이신 겁니까?”“그것도 고민이고.”“다른 고민도 있으십니까?”“요즘 도통 잠을 잘 수가 없구나.”“잠을 못 주무십니까?”안 주무시는 것이 아니고요?

밤마다 최 내관님이 주무셔야 한다고 우는소리를 해도 언제나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 요즘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어.”“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영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무릎을 탁 하고 쳤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연유가 생각나신 모양이로군요.”“그 여인 때문이구나.”“……!”“요즘 그 여인이 자꾸만 이상하게 행동해서 신경이 무척 쓰이는구나. 그러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지.”“고작 여인 때문에 며칠 밤을 지새운단 말씀이십니까?”“그 여인이 곁에 없으면 내가 잠을 잘 수가 없는데, 그리 거리를 두니. 내가 어찌 자겠느냐. 자, 말해 보아라. 그 여인이 내게 왜 그러는 것이더냐? 어찌 내게 그리 거리를 두는 것일까? 역시 마음이 변한 것이렷다?”영의 투정 섞인 목소리에 라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다? 믿을 수 없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거리를 둔단 말이더냐?”“어쩌면 상대를 배려한 것이 아닐는지요?”“날 배려해? 무얼 배려했단 말이더냐?”“조금이라도 쉬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쉬게 해?”“네. 제대로 안 주무시고 일만 하셨던 날이 이미 여러 날이니. 조금이라도 짬이 날 때 눈 좀 붙이라고 자리를 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하지만 나는 그 여인이 있어야만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몰라?”“살짝만 품에서 벗어나도 숨결이 달라지시는 분께서, 어찌 깊은 잠을 주무신다고 우기십니까?”촤르륵.

발이 올라갔다. 이번에 발을 올린 사람은 영이었다. 올려진 발 아래로 고개를 내밀며 영이 물었다.

“내 숨결이 달라지더냐?”“달라지십니다.”라온은 차분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냐?”영이 무언가 원하는 시선으로 라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흘째다.”“네?”“하루에 한 시진도 제대로 못 잔 것이 벌써 사흘째야.”“알고 있습니다.”언제나 곁을 지키고 있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는 영을 볼 때마다, 밤이 늦도록 문서를 뒤적이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처럼 쌓이고는 했다.

라온의 얼굴에 버릇처럼 근심이 서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영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저하…….”“좀 쉬어야겠다.”말과 함께 영은 단숨에 라온을 끌어당겼다.

품에 안기는 따뜻한 체온.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팽팽하게 경직되었던 얼굴이 일순간에 느른하게 풀어졌다.

“저하, 누가 봅니다.”“누가 보면 좀 어떠냐? 이리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는데.”“그래도…….”“율이에게 주위를 경계하라 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있는 백 보 안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할 것이야. 걱정 마라.”영의 얼굴에 금세 악동 같은 장난기가 서렸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라온을 놓아주었다. 대신, 그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웠다.

“뭐하시는 겁니까?”“말하지 않았느냐? 너 때문에 사흘 동안 도통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잠시 눈 좀 붙일 것이다.”“하지만…….”“이건 벌이다.”영은 톡톡, 베고 있는 라온의 무릎을 두드렸다.

“그러니 조금 저려도 참아라.”그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숨은 진심을 모를 리 없었다.

라온은 조심조심 쓸어내리듯 제 무릎에 누워 있는 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자분자분 여린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영의 입가에 옅고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힘드셨습니까?”“힘들었다.”“딴에는 배려해 드린 겁니다.”“앞으로는 그런 배려하지 마라.”정말 죽을 뻔했단 말이다.

긴 한숨을 토해내며 영은 눈을 감았다. 옅은 치자꽃 향내가 그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영의 숨결이 한결 느긋해졌다.

조정의 대신들이 두려워하고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공포의 사내가 라온의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여려졌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영을 내려다보며 라온이 말했다.

사흘 동안 잠을 설치신 탓일까?

화초저하의 얼굴이 며칠 사이 수척해졌다. 웃으실 때마다 얕게 파이던 볼우물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라온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러니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일랑 하지 마라…….”영의 말끝이 흐려졌다. 동시에 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지난 사흘, 칼날처럼 날카로웠던 감각이 무뎌지고 한순간에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 너른 궁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그를 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라온이 유일했다.

그 사실을 이 바보는 아직 모르는 것일까?

자신이 이 나라 왕세자의 목숨줄이라는 것을…….

그녀가 없으면 그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알겠습니다. 그러니 푹 주무십시오. 어디 가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깊은 잠 주무십시오.”다독이는 라온의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영의 이마로 다가왔다.

보드라운 감촉. 여리고 아릿한 입맞춤이 영의 이마를 덮었다.

일순, 잠든 영의 입가에 긴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늘의 구름은 더디게 흘러갔다. 자분치를 흔드는 바람은 따스했다.

회화나무로 뒤덮인 궁의 봄날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어디서 무얼 하다 이리 늦은 겐가?”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동궁전으로 들어서자 최 내관이 잰걸음으로 라온에게 다가왔다.

“찾으셨습니까?”“그렇다네. 할 일이 산더미야.”최 내관은 문서가 산처럼 쌓여 있는 소반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건 다 무엇입니까?”“이쪽에 있는 것들은 이조로 갈 문서이고, 이건 병조, 여기 있는 이 문서들은 예조로 갈 문서들일세.”왕세자께서 대리청정 한 이후로 동궁전 내관들의 일은 배로 늘어났다. 특히 동궁전에서 나가는 주요 문서들은 대부분 최 내관과 라온을 통해서 육조에 전달되었다.

하루에도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명령이 내려졌다.

그만큼 라온과 최 내관은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문서들을 보는 라온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이번에도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요.”육조에 내려지는 문서 대부분이 외척들의 폐단과 그에 대한 처우에 대한 것들이었다.

부원군을 비롯한 외척들은 비변사를 앞세워 영에게 맞섰지만, 그때마다 영은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는 했다.

그에 대한 안동 일문의 대응은 무시와 방관이었다.

왕세자의 행사와 지시에 따르고 협조하는 척할 뿐,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다. 안동 일문과 그 세력들은 권력의 중추에서 말단에까지 그 뿌리가 깊었다.

그들 모두가 약조라도 한 듯 왕세자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영은 그것을 빌미로 조정 대신들을 징치하고, 빈자리에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

이렇듯 궁궐은 과감한 홀로서기를 시작한 영과 그에 맞서는 안동 일문의 대치로 연일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이번엔 전라도 관찰사가 유배를 가게 되었다는군. 지난번, 주상전하를 배알할 때 언행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일세.”“또 궁궐이 발칵 뒤집히겠군요.”왕실의 법도를 바로 세우려는 영의 노력에도 왕을 대하는 조정 대신들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들에게 왕은 여전히 어린 시절 보위에 올라 부원군에게 의지했던 나약한 군주일 뿐이었다. 하여, 백성들의 안위를 묻는 왕의 물음에 대신들은 그저 좋다, 좋다만 외칠 뿐이었다.

그것이 영의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

영은 그것을 빌미로 감히 왕을 기만한 자와 그러한 행위를 방관한 조정 대신들을 삭탈관직했다.

왕세자를 향했던 긴장감은 점차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어느 순간부터 대신들은 외척이 아니라 왕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조정 대신들은 왕세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여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일과를 마쳤다.

왕세자의 눈과 귀는 영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썩고 부패한 곳이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신들은 언제 그의 엄격한 잣대가 자신에게 향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반면, 영의 사람들은 왕세자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늘어갔다.

하루라도 빨리 조정이 정상화되어야 백성의 삶을 살필 수가 있었다. 하여, 영은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로 많은 양의 업무를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이 많은 일을 세자저하 홀로 하신 것입니까?”“그나마 이제는 그분들이 도와주고 계셔서 숨통이 트이고 있다네.”걱정하는 라온에게 최 내관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보다 어서 저 문서들이나 예조에 전해주게나.”“알겠습니다.”라온은 문서가 수북하게 쌓인 소반을 들고 나섰다.

*  *  *

“아이쿠!”라온이 예조 마당에 다다랐을 때, 앓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이 들어왔다.

“성 내관님!”“아, 홍 내관.”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성 내관의 얼굴에 흐릿한 멍 자국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아니, 아닐세. 그럼, 난 급한 볼일이 생겨서 이만…….”많이 유순해진 모습의 성 내관이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권세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성 내관은 여전히 내시부의 실세였다. 권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성 내관의 눈가에 멍이라니.

감히 누가 그에게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라온은 고개를 돌려 열려 있는 예조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이곳엔 윤성이 있었다.

설마, 참의영감께서……?

에이, 그런 일을 절대 없으리라. 그렇다면 대체 누가 성 내관에게 저런 짓을 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에 라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예조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예조의 너른 집무실 탁자엔 윤성이 홀로 앉아 있었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서책과 문서가 산처럼 쌓여 있고, 창가로 스며드는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도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윤성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동궁전에서 나왔습니다.”라온의 말에 윤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본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며칠 사이,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아니…… 변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엔 무표정한 침묵이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표정이 무심히 라온을 향했다.

“참의영감…….”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상상했었는데……. 변해버린 윤성의 모습이 라온에게 충격을 주었다.

가면 같았던 미소가 사라진 빈자리엔 삭막한 허무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영혼이라도 강탈당한 사람 같았다.

“괜찮으십니까?”저도 모르게 걱정되어 라온이 물었다.

윤성은 대답 대신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가져온 서류는 그곳에 놓아두면 됩니다.”“참의영감…….”“지금 많이 바쁘군요.”윤성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탁자의 텅 빈 곳을 가리켰다.

“……네.”“…….”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따스한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저리도 건조한 반응이라니. 묵직한 바위가 누르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윤성의 공허한 목소리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더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아,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만…….”“그렇다면 그만 가보십시오.”명백한 축객령.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다시 들려온 윤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런데…….”“네.”“괜찮습니까?”“네?”“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여전히 문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윤성이 말했다.

라온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여졌다.

“괜찮습니다만.”뭔가 괜찮지 않을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윤성의 얼굴을 보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그만 나가 보십시오.”메마른 목소리에 떠밀린 라온이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온기가 사라진 방 안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닫힌 문틈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윤성은 고개를 들었다.

세필 붓을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손을 그는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라온이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랬다.

그녀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 그 익숙한 체온이 감지된 그때부터……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성마름이 그를 휘어 감았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윤성은 라온이 사라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혹시나 그녀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일순간, 짧은 웃음이 그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헛된 바람이고, 허허로운 망상임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미련이 문고리에 머물러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 윤성의 표정은 모래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의 눈동자 역시 수렁처럼 깊게 침잠되어 갔다.

*  *  *

어느덧 저녁별이 하나둘 하늘 위로 떠올랐다. 습윤한 바람결에 수줍은 봄꽃 향기가 섞여 있었다.

“비님이라도 오시려나?”눅눅한 공기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라온은 영이 있는 동궁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때, 한 무리의 상궁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라온은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길게 늘어진 상궁들의 행렬이 심상치 않았다.

중전마마이신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온은 가볍게 곁눈질했다. 이내 조족등 아래 아련히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중전마마가 아니었다.

열두 폭 연분홍 스란치마에 붉은 매화가 수자 놓인 하얀 당의를 입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었다.

여인을 향한 상궁들의 태도가 극진한 태도로 보아 귀한 신분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궁 안에서 저런 분을 뵌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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