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너는 알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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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5
<전배 절차를 가지던 효명이 통례원의 정3품관인 상례가 노창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하여 전 이조판서 이희갑, 김재창과 이조판서 김이교의 월봉을 2등 감하게 했다.>
대리청정 나흘째.
영은 태묘와 경모궁, 영희전, 저경궁에 전배하는 절차를 가졌다. 임금이 궁궐(宮闕), 종묘(宗廟), 문묘(文廟), 능침(陵寢)에 참배(參拜)하는 것을 전배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영은 신료들에게 큰 화를 냈다.
의식의 순서를 소리 내어 읊는 자가 실수하고, 순서를 잘못 헤아려 식은 엉망이 되었다.
크게 노한 영은 관련자들을 문책했다.
“궁의 기본적인 법도와 절차조차 제대로 못 하는 자들이 어찌 국사를 돌본단 말인가.”시퍼렇게 날이 선 그의 질책에 대신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일 이후로도 영은 신료들에게 예를 강조했다. 의례의 복잡한 의식과 절차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던 시절이라. 특히나 복잡한 궁중의 법도에 대해 잘 아는 신료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영은 바로 그 허술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조목조목 부족함을 지적하고, 크게 질책했다.
항의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영이 조상에 대한 효심을 앞세우니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그대들이 이 자리에 있는 건, 모두 조상과 부모님의 덕이다.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않는 자가 어찌 나라를 보살필 수 있겠는가? 기본조차 안 된 자들은 이 궁에 있을 자격이 없다.”이렇듯 영은 예(禮)로 신료들을 공격하고, 효(孝)를 방패로 삼았다.
이에 신료들은 두려움에 떨며 언제 소조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감히, 항명하였다간 조상을 우습게 여기는 불효자식이 될 판이라, 그저 고개를 숙이고 이 재난의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 * *
“허허허, 설마 이리 나오실 줄은 몰랐군.”김조순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영이 이쪽의 흠을 트집 잡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설마 예(禮)를 무기 삼을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을 공격당한 터라, 여러 날이 흘렀음에도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지식은 책으로 메우면 될 것이고, 부정은 뒤로 감추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예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마음과 오랜 경험이 함께해야 했다. 단시간에 나아질 방도가 없었다.
허허롭게 웃던 김조순이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윤성이 반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흡족한 시선으로 손자를 바라보며 김조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과연, 네가 말한 대로 되었구나. 어찌 그리 예측했느냐?”윤성이 건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자저하께서는 끊고 맺음이 칼같이 분명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성격은 오히려 의중만 파악하면 그 행보를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니 변수가 적은 것이지요.”“그래도 많은 자들이 세자저하의 행보를 예측하지 못했다.”“그들의 머리가 우둔하여 감히 세자저하의 생각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허허, 그렇다면 너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로구나.”“저 또한 그저 이렇지 않을까 추측한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설마, 예학으로 이리 파고드실 줄은 저도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남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지 않은 한, 어찌 세세한 부분까지 알 수 있겠느냐? 그 정도면 많은 것을 예측한 셈이다.”김조순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세자저하의 행보가 놀랍구나. 치밀하고 거침이 없어. 보아하니 하루 이틀 세운 계획이 아닌 모양이야.”“본시 완벽해 보이는 것일수록 빈틈이 많은 법입니다.”“그래?”“세자저하의 뜻은 좋지만, 지나치게 앞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는 이따금 풍경도 즐기며 여유를 만끽해야 하는 법입니다. 저렇듯 쉼 없이 달리면 결국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사람을 잃게 된다는 말이로구나.”윤성의 말에 김조순은 제 무릎을 손으로 두드렸다.
“네 말이 맞다. 작은 장사도 돈을 욕심내면 망할 것이오, 사람을 욕심내면 이문이 생길 것이라 하였는데, 세자저하는 이 간단한 걸 모르시는 듯하구나.”“듣자하니 이번에 새로 사람을 뽑을 생각이신 듯합니다.”“그러하더냐? 결국, 그 또한 예상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어떠냐? 내 말이 맞느냐?”“…….”할아버지의 말에 윤성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긍정을 뜻하는 침묵이라.
김조순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과연! 과연 이 김조순의 핏줄이로구나.”“옛것을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은 새것도 소중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결국, 세자저하께선 가장 가까운 외척의 마음을 잃게 되겠지요.”김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도움이 되는 것은 혈육이니라. 허나, 세자저하께선 스스로 혈육의 정을 끊어버렸다. 앞으로 큰일이 있으면 아무도 나서지 않게 될 것이다.”윤성이 마주 앉은 제 할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흘렸다.
“그 큰일이 외척들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느냐?”김조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윤성은 그저 그 웃음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웃음을 거둬들인 김조순이 다시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세자저하께서 또 어떤 허무맹랑한 짓을 저지를지 걱정이구나.”“소손은 오히려 세자저하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세자저하께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무슨 말이냐?”“세자저하로 말미암아 공든 탑을 잃어버린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찌 앙심을 품은 자가 없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자들 중에 음모를 꾸미는 자가 나올 수도 있겠지요.”“역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을 거란 말이더냐? 허허, 어찌 그럴 수가. 일이 잘못되면 단순히 자신이 죽는 것으로 모자라 집안이 횡액을 당한다. 그런데도 무모한 일을 저지를까?”윤성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어떤 자들에게는 명예가 목숨보다 귀한 법입니다. 목숨보다 귀한 것을 잃었으니, 어찌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눈이 뒤집힌 사람은 간혹 상상치도 못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래? 그런 자가 있단 말이지? 어떤 자가 그런 방자한 생각을 할까?”“높은 곳에 있었던 자일수록 잃을 게 많은 법입니다.”
* * *
“뭐, 뭐라?”평안 부사 서만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조금 전 그는 아전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다시 말해 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다고?”“초산의 일부 백성들이 도성으로 몰려가 관리의 악행으로 사람이 일곱이나 죽고 큰 재물을 갈취했다고 고발했다 합니다.”“이 고얀 놈들을 보았나. 그 무지한 놈들이 감히!”서만수가 탁자를 두드리며 불같은 화를 터트렸다.
관리의 악행을 고발한 자들은 그가 관리하고 있는 지역의 백성들이었다. 또한, 백성이 고발한 악덕한 관리는 다름 아닌 서만수,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그뿐만이 아닙니다.”“더 있느냐?”아전의 말에 서만수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밝혀진 일만 해도 그는 파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더 많은 비리가 밝혀졌다고 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백성들의 고발 소식을 들은 소조께서 승정원 우승지 김병지를 안핵사로 삼아 현지조사를 명하셨다고 합니다. 하루 만에 평안 감사의 장계가 올라갔는데…….”“뭐, 뭐라고 장계가 올라갔다더냐?”“사, 산삼과 관련된 일이 모두…….”“그 일마저 모두 밝혀졌어?”서만수는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청나라 상인들의 산삼 무역을 엄금한다는 핑계로 민간에 산삼 거래를 조사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감관들이 산삼을 내놓으라며 백성들을 구타하고 혹독한 고문을 일삼았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자만 셋이나 되었다.
관리의 횡포를 버티지 못한 백성들은 집과 전답을 팔아 산삼을 구했고, 산삼을 구하지 못한 자들은 돈과 뇌물을 바쳤다.
그렇게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짠 돈은 고스란히 서만수에게 전해졌다. 산삼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주, 죽었다. 난 이제 죽었어.”서만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두려워했다.
이번 일은 삭탈관직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그동안 뇌물을 바치며 친분은 돈독히 했던 도성의 관리들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 틀림없었다.
“의리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자들 같으니라고.”밤사이 이불 속에 웅크린 채 고민하던 서만수는 급기야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이왕에 죽을 거라면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아전의 물음에 서만수는 길게 찢어진 눈을 빛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을 수배해 봐라.”“서, 설마…….”“세자저하께서 외유가 잦으시다니 그때 일을 처리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분께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면, 천하가 떠들썩해질 터. 내가 한 작은 사고쯤은 곧 잊히고 말 것이다.”“하오나 어찌 그런 일을…….”명을 받은 아전이 주저주저하자 서만수가 서탁을 내리치며 위협하듯 말했다.
“내 비리가 드러나면 너는 무사할 줄 아느냐? 어차피 다 죽게 된다.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모험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소인은 부사 어르신의 명만 따르겠습니다.”위험한 결단을 내린 서만수는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 가뭄이 크게 들어 굶어 죽는 자들이 지천에 널렸다. 굶는 것보다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게 낫다 생각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야. 흥, 왕이 잘못 들어서니 멀쩡하던 나라에 가뭄이 들지 않겠느냐? 어쩌면 왕을 바로잡으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지.”
* * *
길고 긴 겨울도 어느새 한풀 물러가고 있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산자락에 푸릇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직 차가운 기운에 봉오리를 틔우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새로운 생명의 징조가 느껴지고 있었다.
봄이 멀지 않은 어느 날.
영과 라온은 변복한 채 시전을 거닐고 있었다. 오늘따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평소보다 무척 많았다.
그 복잡한 거리를 영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걸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따금 상인에게 가격을 물어보는 여유마저 부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세상 물정 어두운 도령의 시장 구경으로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라온은 결코 여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왜 그리 어수선한 것이냐?”“초조해서 그러지 않습니까?”“초조해? 어째서?”라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런 시절에 호위하는 무사도 없이 잠행을 나오게 됐는데, 그럼 걱정하지 않겠습니까?”얼마 전에 설원에서 큰일을 겪고도 이렇듯 여유를 부리는 영의 모습이 라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그렇게 웃지만 말고, 진지하게 고민해 주십시오. 요즘 분위기가 정말로 좋지 않습니다.”영의 날 선 행보에 조정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추운 날이 계속되면,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 법이었다.
환관들과 궁녀들의 뒷말이 많아졌고, 행동 또한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의 그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언젠가 고양이를 문다.’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작 조심해야 할, 화초저하는 천하태평인 듯싶었다.
설원에서의 일이 불과 얼마 전인데, 또다시 호위도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계시다니. 이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한다?
“요즘 세상인심이 뒤숭숭하다는 말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 잠행이라니.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그래서 부러 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세상인심이 뒤숭숭하니, 어찌하여 그리 뒤숭숭해진 것인지, 내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그런 일이라면 사람을 시키면 될 일이지, 굳이 직접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말이란 여러 입을 거치면 거칠수록 변하고 왜곡되기 마련이지. 백성의 뜻을 알고 싶으면, 백성에게 직접 물어야 하는 법이다.”“물론,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세자익위사 정도는 대동해도 되지 않습니까?”“좌우로 칼 찬 자를 거느린 왕세자에게 어느 백성이 진실을 말하겠느냐? 아마도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을 것이 뻔하겠지.”듣고 보니 이번에도 맞는 말이라.
마땅히 응수할 말을 찾지 못한 라온은 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정말 화초저하 때문에 제 명이 팍팍 깎여나가는 느낌입니다.”답답한 마음에 라온은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런 라온이 귀여웠던지 영이 웃음을 흘렸다.
“하하, 녀석.”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티격태격할 때였다.
맞은편에서 바쁘게 걸어온 사내가 마침 영이 서 있는 좌판 앞에 나란히 섰다.
뭔가 쫓기는 듯 다급한 표정에 잔뜩 긴장한 어깨.
저 사내 뭔가 좀 이상한데?
사내를 힐끗 쳐다보던 라온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저하, 우린 저쪽으로…….”라온이 불길한 사내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영에게 말하려는 찰나였다.
성의 없이 물건 값을 물어보는 척하던 사내가 돌연 품에서 낫을 꺼내 영을 향해 휘둘렀다.
“위, 위험합니다.”라온이 반사적으로 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퍼런 낫이 막 그녀의 가슴을 꿰뚫으려 할 때였다.
사내의 움직임이 돌연 우뚝 멎었다.
무슨 일이지?
영문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던 라온은 이내 눈앞에 벌어진 일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사방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사내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한 순간, 칼을 뻗어 사내를 제압한 자들은 의외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봇짐을 지고 바쁘게 걷던 보부상,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걷던 노인, 좌판을 펼쳐놓은 상인들까지…….
심지어 영이 물건을 고르고 있던 좌판의 상인도 어느새 칼을 뽑아 사내를 겨누고 있었다.
“무기를 버려라.”나직한 목소리에 사내의 손에 들린 낫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에 라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낫을 든 불한당이 달려들고, 기다렸다는 듯이 길 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이 모든 일이 사전에 합의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에 이뤄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곁에 있는 영에게 물었다.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건만, 영은 아예 그런 사실도 모르는 듯 여전히 물건 고르는 일에 심취해 있을 뿐이었다.
“이건 어떠하냐?”영이 고심하여 고른 가락지를 라온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이런 걸 하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좀 전에 큰일 날 뻔하셨단 말입니다. 저하를 시해하려는 자가 나타났다고요.”“그래?”“만약,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어라?”말을 하던 라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대체 누구십니까?”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위기가 닥치자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녀가 궁궐에 들어가 있는 동안 세상의 유행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요즘 세상에는 칼 한 자루쯤 품에 품고 있지 않으면 사내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라온의 물음에도 영은 답이 없었다.
대신 들고 있던 가락지를 상인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건 얼마요?”불한당의 목에 칼을 겨눈 상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엽전 스무 냥만 주십시오.”“고약하게 비싸군.”영의 말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무심코 상인을 본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상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사내.
세자우익위 한율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눈에 익었다. 나름 변장을 하고 있어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모두 세자를 호위하는 위사들이었던 것이다.
“보자. 이게 가장 잘 어울릴 듯하구나.”영이 라온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다.
그러나 정작 라온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어어 하는 의미가 불분명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저하, 이분들은 세자익위사의 위사들이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이분들께서 이런 모습을 분장하고 계신 것이옵니까?”“대청을 시작하고 내게 앙심을 품은 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혹시나 해서 대비책을 마련해둔 것뿐이다.”라온의 손가락에 끼워놓은 옥가락지를 내려다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던 영이 그제야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런 것이었습니까?”역시 화초저하시네.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계셨구나. 그럼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지. 꼭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신단 말이야.
놀람과 동시에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길게 앞으로 내밀던 라온이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호위하시는 분들의 수가 예전보다 늘어난 것 같습니다.”좀전의 사건으로 칼을 뽑은 사람은 단순히 영의 근처를 호위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일이 벌어지기 무섭게 길을 걷던 사람과 시전의 상인들이 몸을 날려 영의 주위를 에워쌌던 것이다.
“여기뿐만이 아니다.”영은 라온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맞은편에 있는 이 층 누각을 턱짓해 보였다.
왕세자를 노린 사내가 낫을 휘두르는 순간, 이 층 누각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반 시진이 넘도록 안주만 먹던 사냥꾼 차림의 사내들이 영에게 위험이 닥치는 순간, 돌연 활을 꺼내 시위를 메겼다.
낫을 휘둘렀던 사내들과 한패, 혹시나 생길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술을 먹고 흥청망청 취해있던 취객들이 바람같이 몸을 날려 사냥꾼들을 제압했다. 술에 취해 있던 자들 역시 세자를 호위하는 무사들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 거야?
“이번에 호위 무사의 수를 조금 늘렸다.”“우와.”라온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러다 파리 들어가겠구나.”영의 말에 라온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지금은 여전히 추운 겨울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곱게 눈을 흘겼다.
“요즘 같은 계절에 파리가 어디에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나저나 어쩌자고 번번이 그런 장난을 치시는 겁니까?”“네가 번번이 속아 넘어가니 장난을 칠 수밖에. 하하하.”유쾌하게 웃으며 영이 걸음을 옮겼다.
“하여간 사내들이란…….”지위고하를 떠나서 사내들이란 한결같이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지. 좀처럼 어른이 되질 못해. 천하의 화초저하께서도 이러시니.
한숨을 내쉬며 영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라온의 걸음이 멈춰졌다.
여긴…….
“언…… 아니, 오라버니.”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동그란 눈에 두 볼이 발그레한 소녀가 라온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단희였다.
어쩐지 낯익은 곳이라 했더니, 바로 단희가 향낭을 파는 담뱃가게였다. 그 이전에는 라온이 고민을 상담해 주던 곳이기도 했다.
“단희야, 잘 지냈니?”“네, 잘 지냅니다. 그런데 오라버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그게…….”사실 나도 그게 궁금해.
그저 화초저하께서 걷는 대로 뒤를 쫓다 보니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화초저하, 이곳엔 무슨 볼일이십니까?
대답이라도 하는 듯 두 사람의 사이로 영이 끼어들었다.
“이걸 주려고 왔느니.”영이 자줏빛의 보퉁이를 단희에게 내밀었다.
시전에서 산 비단과 장신구였다.
영은 단희에게 그것들을 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운 봄옷 만들기에 적합한 비단이라 들었다만.”“감, 감사합니다.”“이것이면 너와 네 어머니의 봄옷 만들기엔 부족하진 않을 거라 하더구나.”“네, 그렇습니까?”단희가 보퉁이를 열어보았다. 이내 소녀는 눈빛을 빛내며 영에게 말했다.
“옷 두 벌 만들기엔 조금 과한 것 같습니다.”“그러냐? 그럼 내친김에 저기 있는 저 녀석을 위해 옷 한 벌 지어주면 좋겠구나.”“네?”단희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 비단은 사내가 걸치기엔 색이 지나치게 곱습니다.
그 속내를 꿰뚫어 본 듯 영이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를 곁들였다.
“이왕이면 어여쁘게 지어다오.”“어여쁘게요?”“그래. 봄꽃 피면 네 언니와 나들이 가려 한다. 그때 입게 곱게 한 벌 지어주면 고맙겠구나.”“……!”단희의 표정이 단박에 환해졌다.
이제야 고운 비단으로 라온의 옷을 지어달라는 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이분은 알고 계셨어.
우리 언니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는 것을.
“네. 그럽지요. 꼭 어여쁘게 만들 것입니다.”“부탁하마.”“옷을 입은 언니를 보고 반하지나 마십시오.”“저런, 그런 일이라면 한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환영이구나.”단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라온이 두 사람 사이를 기웃거렸다.
“둘이 무슨 비밀이 있기에 그렇게 속닥거리는 겁니까?”영과 단희가 동시에 라온을 향해 소리쳤다.
“너는 알 것 없다.”“알 것 없어요.”
<대리청정 이레째 되는 날, 병조의 청에 따라 궐 밖으로 나갈 때 따르는 세자 친위병을 80명에서 100명으로 늘렸다.>
* * *
오후 햇살이 내려앉은 김조순의 사랑채에선 조손 간의 은밀한 대화가 한창이었다.
“쯧쯧. 결국, 평안 부사가 무모한 일을 저질렀구나.”김조순은 못마땅한 얼굴로 쯧쯧 혀를 찼다.
무모한 일을 벌이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윤성의 예상은 정중했다. 이 일로 가뜩이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더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이번 일을 핑계로 저하께선 우리 일문을 더욱더 압박하시겠구나.”“그럴 것입니다.”큰일이 벌어졌음에도 윤성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이제 어찌 해야겠느냐?”“우선은 트집 잡힐 일을 줄여야겠지요.”“트집 잡힐 일을 줄여? 작심하고 트집을 잡자고 하면 아무리 몸을 사린다고 해도 꼬투리를 찾아내지 않겠느냐?”“이럴 때는 세자저하가 편한 면이 있습니다.”“세자저하가 편해?”“그분께서는 지나칠 정도로 사리가 분명하십니다. 공연한 일로 트집을 잡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자신의 적일지라도 잘한 것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그런 면이 있긴 하시지.”“당분간 자세를 낮추고 자중해야 합니다. 잘못을 숨기고, 비리를 감추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세자저하께서도 더는 트집을 잡지 않으실 것입니다.”“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자는 말이로구나. 허면? 그 이후엔? 설마, 이대로 세자저하께서 원하는 대로 무작정 따르자는 것은 아니겠지?”일순, 윤성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도 차가운, 그래서 섬뜩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범이 사라지면 늑대와 여우가 날뛰지 않겠습니까? 우린 그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