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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87화 (87/131)

87. 나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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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1

왕세자께서 대리청정을 시작하는 첫날.

대전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조정의 대신들이 향한 곳은 궁이 아니라 부원군 김조순의 집이었다.

열 칸 사랑채의 사잇문이 죄 올려졌다.

긴 장방형의 방 안에는 수십 명의 대신이 양옆으로 길게 마주 보고 앉았고, 그들의 앞에는 각각 잘 차려진 주안상이 놓여 있었다.

감히 나라의 법도를 어기고, 왕세자의 뜻을 거역했음에도 대신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술잔을 나누는 얼굴엔 미소마저 서려 있었다.

“저하께서 아마 많이 놀라셨을 것입니다.”“그렇지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럴 줄은 몰랐겠지요.”지반 번 주상전하의 탄일 연회 때 벌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행사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삼사의 왕실 길들이기 수법 중의 하나였다.

“대전에 사람이 없어 당황하셨을 겁니다.”이조판서 김이교의 말에 전(前) 이조판서 이희갑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게요. 나랏일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쯤 절실하게 깨닫고 계실 겁니다. 허허허.”이희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조롱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왕실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받들어 모시는 진짜 주군은 궁궐에 있는 왕이 아니었다.

“앞으로 세자저하께서 어찌하실 것 같소? 그분께서 품으신 생각이 많으신 것 같소이다만.”웃음이 가라앉길 기다린 김조순이 술잔을 들며 화두를 던졌다.

“헛된 꿈일 뿐입니다. 현실성이 없습니다.”이희갑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치 어리신 분이라 그런지 아직 세상을 모르는 듯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요? 말은 좋지요. 허나, 그게 어디 말처럼 된답니까? 그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란 그저 책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지요.”이희갑의 말에 김이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경험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어린 겁니다. 어리고 미숙할수록 크고 황당한 꿈을 꾸기 마련이지요.”주고받는 언중에 은근히 얕잡아 보는 기운이 깔려 있었다.

김조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께서 치기 어린 감성에 젖어 있는 것은 사실이오. 허나, 망상일망정 그 계획을 추진해 나갈 뜻이 분명한 것 또한 사실이오.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겠소?”걱정하는 그의 말에 이희갑이 손사래를 쳤다.

“대감, 걱정도 많습니다. 대처는 무슨 대처입니까? 그분께서 아무리 명석하시다 한들 혼자 무엇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릇 정치란 배려와 타협을 바탕으로 해야 하거늘, 저하께서 저처럼 완고하게 계시는 한,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을 겁니다.”“그렇소?”“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하셨습니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요? 그 백성은 누가 다스리고 있습니까? 우리 사대부가 아닙니까?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만든다면서 그 백성을 다스리는 우릴 무시하고 정치를 하시겠다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그의 말에 좌중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옳습니다. 우매한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라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백성이란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끌고 오면 끌려오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낫 놓고 기역도 모르는 그 우매한 것들을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쯧쯧.”“그리 어리석은 백성이 어째 고매한 사상을 알 것이며, 천하의 도리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정치란 경험입니다. 세자저하께서 총명하긴 하시긴 하지만, 경험이 없어요, 경험이 없어.”“그러니 저런 헛된 꿈만 꾸시는 것이 아닙니까?”“그 얘기 들어본 적 있질 않으십니까? 무릇 다방면에 박식한 사람보다 한 가지를 잘하는 게 낫다고요. 세자저하께서는 지나치게 박학하시고 다식하시니 오히려 한 가지만 잘하는 것만 못하게 된 것입니다.”“암요. 저하께서는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될 것을. 복잡한 일은 우리에게 맡겨두시고 말입니다. 궁중의 법도만 따지시기에도 벅찰 터인데. 과욕입니다. 과욕.”“우리가 노력한 바를 너무 쉽게 생각하신 겁니다. 결국은 포기하시고 도움을 청하실 겝니다.”주고받는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띠어 갈 때였다.

문이 열리고 김조순의 심복 하나가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그는 김조순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다시 방을 나갔다.

탁!

김조순이 마시던 술잔을 소반 위에 내려놓았다.

“궁에서 전해온 소식이오.”일순, 좌중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세자저하께서 청명당 사람들을 불러들였다고 하오.”일순, 방 안에 공기가 무섭도록 빠르게 냉각되었다.

청명당이 어떤 자들이던가?

그들과 같은 노론이긴 하지만 안동 일문의 외척 정치를 배척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대리청정을 시작한 첫 날 불러들였다?

세자의 발 빠른 대응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치, 그들이 이리 나올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허허허, 저하께서 나름 노력하시는군요.”누군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깨트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것을 신호로 굳어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 풀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견제할 의도로 하신 일인 듯한데……. 허허허, 그런 귀여운 생각을 하시다니요. 허나, 어림도 없지요. 아무렴, 어림도 없고말고요.”“청명당이라 했습니까? 허허허.”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좀 전의 조소와는 달랐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색한 기운이 좌중에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김조순은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과연 영민하신 분이오. 역시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신 분이질 않소.”김조순이 좌중을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소.”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잠시 그리 보이는 것뿐일 겁니다. 곧 제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저하께서 무엇을 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까. 청명당이요? 그 허무맹랑한 이상주의자들이 현실을 알기는 한답니까? 머잖아 세자저하께서도 우리 안동 일문의 뛰어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그렇소이다.”“맞아요.”“장자몽(莊子夢)이라 하였지요. 세자저하께서는 나비의 꿈을 꾸고 계신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어찌어찌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엔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좌절하게 되실 겁니다. 그때는 별수 없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하시게 되겠지요.”아니, 우리에게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오만하다 생각될 만큼 자신만만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그 지나친 언사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  *  *

어느새 짙은 어둠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불콰하게 취한 대신들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물러났다.

모두가 사라진 텅 빈 방 안.

잠시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김조순은 상을 물리고 눈처럼 하얀 화선지를 펼쳤다. 이윽고 능숙한 손길로 벼루를 갈고 검게 우러난 먹을 붓에 찍었다.

화선지 위에 굵고 가는 먹선이 이어졌다. 단순한 선은 형태를 이루고, 곧 그가 원하는 그림이 되어갔다.

그때, 장지문이 문골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방 안으로 들어온 걸음은 곧장 김조순을 향했다.

“또 잉어를 그리고 계십니까?”김조순의 앞에 자리 잡고 앉으며 윤성이 물었다.

며칠 사이 윤성은 몰라보게 해쓱해져 있었다.

언제나 얼굴 가득했던 온화한 웃음 대신 그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무(無), 말 그대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김조순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전에는 눈만 그리지 못했는데, 저하께서 대청을 하시게 된 이후로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는구나. 머리는 틀어지고 몸은 기형이 되니, 지느러미가 물살을 가르지 못하는구나. 이게 무슨 조화인 줄 모르겠다.”“마음이 흐트러지니 자연히 그리시는 그림도 흐트러질 수밖에요. 무엇입니까? 무엇이 할아버님을 그리 번민하게 만들었습니까?”김조순이 붓을 내려놓고 윤성을 응시했다.

“저하께서 청명당 사람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구나.”“그렇습니까?”윤성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조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로구나.”“총명하신 분이질 않습니까.”“그래. 총명하신 분이지.”“대청 첫날에 그들을 불러들였다는 것은 이미 이쪽에서 어찌 나오실 줄 미리 다 예상하고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까.”“영민하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리 빠르게 적응하실 줄은 몰랐느니. 이래서야 조정을 비운 고생이 헛된 게 되지 않겠느냐? 한 방 먹은 기분이로구나.”“조정의 빈자리를 청명당 사람들로 채운 것으로 보아,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으로 대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거라 봐야겠지요. 대신들은 뭐라 하던가요?”“하찮게 여기더구나.”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들은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알고 경험한 것만 보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지요.”“그들이 어리석다 말하는 것이냐?”“저하께서 지나치게 뛰어난 것이지요.”“과연, 그런 듯도 하구나.”“세자저하께서 어떻게 나오실 거라고 보십니까?”윤성의 물음에 김조순은 화선지 위에 그려진 그림을 흘낏 보았다.

영은 물에 사는 잉어가 어찌 용이 될 수 있겠느냐며 그에게 일침을 놓은 적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신다. 능수하며 또한 과감해. 그런 세자저하께서 앞으로 어찌 나올지 나조차 예측하기 어렵구나.”김조순은 시선을 들어 윤성을 응시했다.

여기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인재가 있었다.

세상을 손금 보듯 살펴보는 혜안은 세자에게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윤성에게는 사람을 옭아매는 재주가 있었다.

또한, 귀가 열려 있으며,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쓴 것을 삼키는 것도 마다치 않으며, 때로는 불의를 알면서도 손을 내미는 용기를 가졌으니.

타고난 왕제(王帝)란 이런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윤성을 향한 김조순의 눈 속에 얼핏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그분께서 앞으로 어찌하실 것 같으냐?”윤성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께서는 이쪽의 허점을 물고 늘어지실 것입니다.”“허점을?”“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안동 일문의 견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정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야겠지요.”“그러려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부터 쳐내야겠군. 하지만 궁에도 엄연한 법도가 있는데, 그게 그리 쉽게 되겠느냐?”“그러니 허점을 찾아내실 거라 말씀드리는 겁니다.”“어떤 허점 말이냐?”“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명분입니다. 빌미만 찾을 수 있으면 쫓아낼 구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생각보다 쉬울 것입니다.”윤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  *  *

“이렇게 하려 하는데, 선생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영의 물음에 정약용의 생각이 깊어졌다.

무려 세 시진에 걸쳐 왕세자께서는 자신의 계획과 품은 뜻을 정약용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저 계획을 설명하는데도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약용의 입에서 몇 번이나 감탄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소조의 계획은 이상적이되 과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추구하되, 균형을 잃지 않았다. 절차와 일의 진행 또한 세세하고 정교하여 따로 지적할 것이 드물 지경이었다.

이처럼 큰 뜻을 품고 계실 줄이야.

세자저하는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곪을 대로 곪아버린 이 나라를 위해 고심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대로 된다면 소조께서 꿈꾸시는 세상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가진 자들의 저항입니다. 항아리가 크면, 그 안에 담고 있는 것도 많은 법이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내놓기 싫어도 내놓게 될 것이오.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오.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알게 되겠지요. 원래 제 몫이라 생각한 것이 사실은 제 것이 아님을 말이오.”“이 많은 계획을 실현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그래서 서두를 생각이오.”“물살이 세면 물고기가 떠내려가는 법입니다.”“조선은 보(堡)에 갇힌 물과 같소. 오랫동안 변화 없이 갇혀 있어 썩고 악취가 진동하고 있지요. 물을 살리려면 우선 물길을 막고 있는 보부터 무너뜨려야 하오. 물살이 세서 떠내려간 물고기도 물이 맑아지면 다시 돌아올 것이오.”“보를 무너트리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때로는 먼 것을 보는 것보다 가까운 것에 치중해야 할 때가 있소. 조바심내지 않고 바닥부터 천천히 다진다면, 어느 순간엔 맑아진 강을 볼 수 있을 것이오.”정약용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보의 필요를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기존의 것이 불편하긴 해도 간혹 필요한 때가 있질 않습니까? 굳이 무너뜨릴 필요가 있겠느냐 주장하겠지요.”“그러니 고인 물속을 들쑤셔야지요. 깊게 가라앉아 눈에 보이지 않던 오물이 올라오면 그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보 때문에 물이 썩었다는 것을 말이오.”

*  *  *

“휴.”도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라온의 곁에 앉았다.

“세자저하께서 요즘 예전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는데. 홍 내관, 괜찮은가? 아니, 괜찮습니까?”저도 모르게 라온에게 하대를 하던 도기는 얼른 입을 가렸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보게. 내가 이렇습니다. 이제는 상훤의 벼슬에 오르신 분인데. 이리 말을 놓고 있었습니다.”“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운이 좋아 벼슬길에 올랐지만, 여전히 모자란 것투성입니다.”“그래도 궁 안의 법도가 그렇지 않지요. 앞으로는 조심할 터이니, 간혹 실수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물론입니다.”라온의 해사한 미소를 본 도기는 통통한 볼을 출렁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은 것입니까?”“세자저하 말씀이십니까?”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그쪽 분위기가 원체 험하다 하던데, 홍 상훤께서 세자저하의 총애를 받으시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됩니다.”근래에 들어 조금 훈풍이 불던 세자저하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궁의 법도와 형식, 제약에 대해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사소한 흠결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궁 안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러워졌다. 그간 느슨하게 늘어졌던 궁 안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다.

아니, 오히려 라온이 궁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살벌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동궁전 울타리 밖에 있는 궁인들의 사정이 이럴진대. 세자저하의 곁에서 그분을 보필하는 홍 내관은 오죽할까?

도기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 이 나라를 위해서 애쓰시느라 그런 것이겠지요. 전 무탈합니다.”“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홍 내관, 느닷없이 고민 상담을 하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네. 궁 안의 사람들에게 소문 좀 내주십시오. 혹시 고민이 있으면 저를 찾아오라고요.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가 고민 상담만큼은 잘하거든요.”라온의 말에 도기가 양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렸다.

“역시, 소조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나는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도기, 책임지고 궁 안에 고민 있는 자들은 모두 홍 상훤을 찾아가라고 하겠습니다.”“네. 고맙습니다.”“…….”도기의 통통한 얼굴에 불현듯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눈빛이 뜻하는 바를 읽은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도 내관님. 혹시 다른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지요?”“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요.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저 감탄하는 것뿐입니다. 이것 보세요.”“네. 믿겠습니다.”말씀하신 대로 제발 감탄만 하세요. 이상한 책 만들어 파실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그나저나 도 내관님. 요즘 궁의 다른 곳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말도 말세요. 동궁전 밖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지요.”“구체적으로 어찌 살얼음판이라는 겁니까?”“그게 말입니다…….”궁의 정보통이자 모든 소문의 근원지인 도기의 입에서 궁 안팎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온은 두 눈을 빛내며 도기의 이야기에 귀를 세웠다.

*  *  *

라온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자선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 내관의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빨랐다.

도기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의 김 내관이 라온을 찾아왔다. 그의 뒤로 동궁전의 나이 어린 항아가, 그다음에는 중궁전 등촉 방 나인이 그녀를 찾았다.

그들을 만나 고민을 듣고 간단한 말로 해결해주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 형.”자선당 대문을 넘기 무섭게 라온은 버릇처럼 병연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병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병연은 영의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딘가로 갔던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맞다. 김 형께서는 지금 안 계시지.”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어깨가 축 아래로 내려갔다.

라온은 맥빠진 얼굴로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바로 그때였다.

텅 비어 있을 거로 생각한 자선당에 웬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임에도 자선당이 꽉 찬 느낌.

라온을 본 그림자가 불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이곳에만 오면 자연스럽게 김 형이 입에 붙는 모양이구나.”“저하!”시들어가던 라온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피어났다.

자선당에 앉아 있는 그림자, 바로 영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당연히 처소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영은 자선당에서 라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라온은 벅찬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단박에 영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어찌 이곳에 계시는 것입니까?”“왜인 것 같으냐?”“절 기다리신 것입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그럼 내가 왜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혹시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다른 이유 같은 건 없다.”“그렇습니까?”영의 한 마디에 라온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 라온의 얼굴을 영은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환한 달빛만큼이나 순수한 웃음이었다. 티끌만 한 속내도 숨어 있지 않은 그 천진한 웃음을 보니 온종일 냉랭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느른하게 풀어졌다.

“시킨 일은 어찌 되었느냐?”“아, 그것 말이죠? 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궁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었습니다. 별 큰 문제들은 없었습니다.”“별 대수롭지 않은 거라도 좋다. 네가 들은 대로 내게 전해주면 되는 것이다.”영의 말에 라온은 소맷자락에서 작은 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대전의 김 내관께서는 요즘 체기가 있는지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십니다. 동궁전의 향심 항아님은 조갈증(燥渴症)이 심해서 고민이라고 하셨고 중궁전의…….”라온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영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궁인들의 쓸데없는 신변잡기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드문드문 세도가와 관련된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영은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긴 이야기를 끝낸 라온이 궁금하다는 듯 영에게 물었다.

“그런데 화초저하, 대체 이런 이야기는 왜 들려달라고 하시는 겁니까?”“무릇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가장 낮은 곳에서 흔한 농담에 섞여 나오기 마련이지. 옥석을 구별할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진흙탕 속에서도 보석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그렇군요.”“혹여 힘들지는 않느냐?”“고민 상담하는 게 뭐가 힘들겠습니까.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저하께 도움이 된다고 하시니. 고마울 뿐입니다.”“고마워? 무어가?”영의 물음에 라온이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습니다.”그 허물없는 순수한 대답에 영은 풀썩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미 많은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네가 없었으면 이 험한 길 걷는 내내 외로웠을 것이다. 기대어 쉴 곳이 없어 내내 고단했을 것이다. 라온아, 아직도 모르느냐? 너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것을.”영은 라온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자상하고 따뜻한 손길에 라온은 얼굴을 맡겼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들 걱정이 많습니다. 분위기가 마치…….”폭풍 직전의 고요 같습니다. 이러다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건 아닌지 다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화초저하께선,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라. 꾹꾹, 입 안으로 삼켰다.

그런 라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영이 불현듯 자신의 이마를 쿡, 라온의 이마에 마주 댔다.

“또 잡생각.”“아얏. 그게 보이십니까?”“모를 리가 있겠느냐? 생각하는 것이 눈에 훤하게 드러나는데.”“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러십니까?”놀리는 듯한 영의 말에 라온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불만을 표현했다.

그런 라온을 영이 불현듯 쓱 끌어당겼다.

“앗, 저하…….”라온의 놀란 감탄사가 채 새어나오기도 전에 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눈꽃처럼 떨어졌다.

“이런 생각 하고 있었던 거 아니더냐?”“아닙니다. 절대 그런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정말이더냐?”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영의 입가에 슬그머니 피어났다.

그 눈 속에 서린 욕망을 읽은 라온이 영의 가슴을 슬그머니 밀쳐냈다.

“이러지 마십시오.”“뭘 이러지 말라는 것이냐?”“저하께서는 정말 일관성이 없으십니다.”“일관성?”“낮에는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궁 안의 궁인들마저도 매섭게 대하시면서, 어찌 밤만 되면 이러하십니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무릇 사람이란 그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도…….”라온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그런 라온을 좀처럼 놔주지 않으며 영은 미소를 지었다.

내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얼굴에 따뜻한 봄바람이 스며들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봄꽃 같은 미소는 마음이 저리도록 아름다웠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영은 라온이 한 것처럼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홍라온이 말하길, 초심을 잃지 말라 하였지.”초심을 잃지 않은 영의 입술이 라온을 향해 다시 날아갔다.

그렇게 범나비처럼 부드럽고 아련한 입맞춤은 길고,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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