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저하의 뒤는 제가 지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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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인정전 높은 누각 위.
석양을 등진 채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붉은 곤룡포를 입은 왕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임금으로서는 네가 이 일을 해주길 바라지만, 아비로서는 네가 이 길을 가질 않길 바란다.”왕의 시선은 붉게 물든 황혼에 매여 있었다.
이윽고 그의 귓가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원한 일입니다.”“영아.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은 지난한 가시밭길이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참담할 것이다. 그런데도 가려고 하느냐?”“…….”“어쩌면 네가 꿈꾸는 모든 것이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정녕 그 길을 가야겠느냐?”“제가 원한 길이옵니다.”“영아…….”임금의 목소리에 안타까운 마음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무엇이냐?”“어찌하여 이 나라를 이리 내버려두셨사옵니까?”“…….”묻는 아들의 목소리에 힐난이 섞여 있었다.
왕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구도 아프지 않길 바랐다. 왕인 자신이 마음을 비우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흐를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과 집착을 버리면 모두가 행복할 줄 알았다.
순리대로. 그래, 누군가가 그에게 말했듯,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흐를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오길 주저하지 않았다.
연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번식을 위한 자연의 순리 때문이었지만, 사람이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욕심과 탐욕 때문이었다.
임금이 내려놓은 권력은 항아리 속에 고인 옥로와 같았다.
옥로를 탐한 자들이 항아리 속으로 모여들었고, 곧 옥로는 그들이 흘린 피로 혼탁해졌다. 오래도록 고인 물은 끝내 항아리마저도 썩게 하였다.
악취가 진동하는 항아리를 이제 그의 아들이 물려받았다.
이 모든 불행이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한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왕세자는 그와 달랐다. 세자는 현명하였으며, 또한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왕세자는 잘못된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권력 속으로 몸을 던지려 하고 했다.
임금인 자신을 대신하여 가시밭길을 자청한 것이다.
왕세자가 임금을 돌아보았다.
올곧은 시선은 왕의 그늘진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지혜로 충만한 왕세자의 눈동자에 단단한 결의가 들어찼다.
“그럼, 준비하겠사옵니다.”누각을 내려가는 영을 노을이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 아래로 붉은 석양이 서걱서걱 밟혔다. 그 검고 붉은 걸음이 앞으로 영이 걸어야 할 길처럼 느껴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임금의 눈에 안타깝고 안쓰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 나라의 왕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게 전부란 말인가.
자괴감이 왕의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 * *
시샘달(2월) 초아흐레.
왕께서 병을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하라는 비망기를 내리셨다. 이에 세자와 조정 대신들이 그 뜻을 거두기를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왕께서는 기어이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시었다.
시샘달 열여드레.
인정전에서 하례식을 마친 세제께서 왕을 대신하여 어좌에 오르시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 * *
“으아아, 늦었다.”자선당을 나서는 라온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관모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헐레벌떡 처소를 뛰어나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이 달라졌다. 소환 내시들이 입던 옅은 초록색의 환관복 대신 그녀는 짙은 녹색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벼슬을 받은 내시들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동궁전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주위로 소환 내시들이 다가왔다.
“홍 상훤 아니십니까?”라온을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다.
정 7품 상훤이라는 벼슬이 그녀에게 내려졌던 것이다.
왕세자를 시해하려는 자들에 맞서 싸운 공로로 하사받은 벼슬이었다.
라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맞서 싸웠다니.
그녀가 한 일이라곤, 점박이 사내의 허리에 매달려 소리를 지른 게 전부다. 하지만 궁의 소문은 그녀가 서른 명쯤 되는 역도들의 절반을 용감하게 무찌른 것으로 되어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그녀가 새로 상훤이라는 관직까지 받게 되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라온은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었다. 상훤이라는 부담스러운 벼슬 역시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이 내린 명령이라 감히 거부할 수도 없었다.
라온을 바라보는 내시들의 눈 속에 무한한 동경과 부러움이 실려 있었다.
“관복이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홍 상훤.”“그러게 말입니다.”“오늘 읽은 내용과 꼭 일치하지 않습니까?”“내 말이 그 말입니다. 이 서책에 쓰인 위풍당당한 모습, 과연 한 치도 틀림이 없습니다.”위풍당당한 모습이라니요. 관모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허겁지겁 뛰고 있는 이 모습 어디가 위풍당당이란 말입니까?
허겁지겁이라면 모를까.
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환 내시들의 손에는 예의 정체 모를 서책이 들려 있었다.
라온은 불현듯 눈빛을 빛냈다.
또 저 서책이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 오는 내시들은 으레 저 익숙한 모양의 서책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얼마 전, 책 제목은 얼핏 본 적이 있었다.
<성공한 환관이 되는 지름길>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소환내시들이 다들 한 권씩 들고 있는 것일까?
호기심이 생긴 라온이 걸음을 멈췄다.
“그 책, 나도 좀 볼 수 있겠습니까?”그녀의 말에 소환내시는 영광이라는 듯,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책을 내밀었다.
“기명이라도 해 주시렵니까?”라온이 책 제목을 확인했다.
역시나 <성공한 환관이 되는 지름길>.
괴상한 제목의 책자였다.
성공한 환관이 되는 지름길이라. 대체 그 방법이 무얼까.
라온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서두에 쓰인 큰 문구가 라온을 반겼다.
홍 내관은 이렇게 성공했다?
라온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검수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걸 보십시오. 그건 지난달에 나온 것이고, 이번에 새로 나온 건 이거지요.”곁에 있던 또 다른 소환 내시가 자신의 서책을 라온에게 내밀었다.
홍 내관처럼 하면 세자저하의 총애는 나의 것?
일순, 라온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대체 누굽니까? 이런 어이없는 책을 만든 사람이?”콧김을 내뿜으며 묻는 그녀의 물음에 소환 내시들의 손끝이 한곳으로 향했다.
라온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눈꽃이 피어있는 소나무 아래, 한 무리의 환관들이 모여 있었다.
무리를 짓고 있는 환관들의 중심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모두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자못 진지했다.
“하하하, 맞네, 맞아. 그 책에 적힌 내용 그대로라네. 내가 다 지켜봤지. 사실, 이건 비밀이네만 홍 내관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절반은 내 덕이지.”“정말이오?”“어허,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당연히 사실이지. 그러니 이 책만 보면 자들도 홍 내관처럼 될 수 있다네. 홍 내관이 어찌 그리 소조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지 그 서책에 다 쓰여 있지.”“나 하나 주시오.”“나도! 나도!”“엽전 열 냥이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네만. 엽전 열 냥에 이런 비기를 얻을 수 있으니. 자네들은 오늘 운 텄네. 운 텄어. 하하하하.”라온의 귓가로 도기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양반이 범인이었군.”불끈 주먹을 말아 쥔 라온은 도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 내관님!”“아, 홍 내관!”라온의 급작스러운 출현에 도기는 크게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녀의 일그러진 미소에 도기는 식은땀을 흘렸다.
“반갑네. 홍 내관. 이게 얼마 만인가?”“그러게 말입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도 내관님. 이 서책들은 다 뭡니까?”“하하하, 뭐 별거 아니라네.”“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한 소문이 궁 안에 돌고 있었더군요.”“그런가? 하여간 말 많은 사람들이 문제일세. 소문이야 항상 있었던 일이니. 신경 끄게.”“그 소문이 저에 대한 것인데도 신경을 꺼야 할까요?”“아무렴. 높은 사람은 작고 소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는 법이 없어야 한다네. 높으신 분들에겐 높으신 분 나름의 고민이 있는 것이니…….”“그런데 이건 대체 뭘까요?”라온이 책을 흔들어 보였다.
도기가 정색하며 말했다.
“아, 그건 말이지…… 그렇지. 상부상조일세.”“상부상조라고요?”“아무렴, 자네와 함께 험하고 궂은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나일세. 자네의 뒤치다꺼리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또한, 바로 내가 아닌가. 그러니 잘난 자네 덕을 조금 보는 건 당연히 상부상조가 아니겠는가?”뻔뻔스러운 말과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난 도기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가 싶더니, 이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버렸다.
“저 양반이!”설마, 내 이름을 팔아 장사하고 있을 줄이야.
“정말 못 말릴 분이시네.”“그러게 말이오. 정말 못 말릴 사람이로군.”어느새 장 내관이 다가와 말했다.
“장 내관님.”라온이 장 내관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정 6품의 상촉(尙燭)으로 승급한 장 내관에게서는 제법 환관다운 면모가 느껴졌다.
“장 내관님, 이번에 공주마마의 전각으로 가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네. 그리로 가게 되었지요.”“명온 공주마마께서는 잘 지내십니까?”“잘 지내시다마다요.”“듣자하니 명온 공주마마의 신임을 단단히 받으시고 계시다던데. 사실입니까?”“날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한 번 이 사람의 야무진 손맛을 본 사람은 이 몸을 신임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내 일이 이리될까 봐 그리 은둔하고 있었던 것인데.”장 내관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체 어찌 그 어려우신 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까?”이번에도 깔끔한 청소로 사로잡으신 겁니까?
라온의 물음에 장 내관이 양 볼을 붉혔다.
“이게 다 홍 내관 덕택이오.”“네 덕이요?”“흠흠. 뭐 그런 것이 있소. 그럼 난 이만.”돌아서는 장 내관의 허리춤에 예의 도기가 팔던 그 서책이 꽂혀 있었다.
“장 내관님마저…….”탄식하는 라온의 귓가로 묘시말(卯時末: 아침7시)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헛! 정말 늦었다.”
* * *
황금빛 아침 햇살이 영의 침소 깊숙이 스며들었다.
침수에서 일어난 왕세자의 짧은 헛기침으로 아침이 시작되었다.
소조(小朝)께서 씻으실 물을 든 궁녀들이 열을 맞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황금 실로 수놓인 곤룡포를 든 환관들이 허리를 굽히고 따랐다.
세자의 침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고귀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 방 안엔 사각거리는 놋대야 안에서 찰랑거리는 물소리만이 들려왔다.
햇살이 한 뼘쯤 더 깊이 방안으로 파고들었다.
소세를 마친 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비상하는 새처럼 양팔을 활짝 펼쳤다. 시립하고 있던 환관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섬세하게 수놓인 곤룡포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태산보다 더 높은 위엄을 지닌 익선관이 그의 머리 위에 덧씌워졌다.
대전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영은 쓱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고운 미간이 눈에 띄지 않게 흐려졌다.
“최 내관.”그의 나직한 부름에 최 내관이 빠른 몸짓으로 다가섰다.
“불러계시옵니까?”“어찌하여 홍 내관이 보이질 않는 것이냐?”눈에 보이지 않는 라온을 찾아 영은 눈동자를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송구하옵니다. 늦었사옵니다.”다급한 비명과 함께 라온이 동궁전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런저런. 저런 부족한 인사를 보았나. 오늘이 어떤 날인데 이리 늦었단 말인가, 쯧쯧.”저도 모르게 작게 지청구를 중얼거리던 최 내관은 황급히 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조께서는 어찌하여 저 부족한 녀석을 그리 귀이 여기시는 것이옵니까?”“그 부족한 녀석이 나의 부족한 곳을 채워주기 때문이다.”영의 말에 최 내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넘치도록 완벽한 소조께 무엇이 부족하여 저 어리석은 아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까.
“어찌 이리 늦었느냐?”묻는 영의 목소리에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라온을 보는 순간, 내내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은 금세 누긋해졌다.
“송구합니다.”“연유는 나중에 듣자꾸나. 그런데…… 이젠 제법 환관 태가 나오는구나.”“아무렴요. 상훤의 벼슬은 투전판에서 딴 것이 아닙니다.”조금 으쓱한 듯한 표정으로 라온이 말했다.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라온의 모습에 영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짧은 한 마디와 함께 영이 걸음을 옮겼다.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듯, 환한 웃음을 머금은 라온이 그 뒤를 따랐다.
수십 명의 환관과 궁녀들 역시 꼬리 연의 꼬리처럼 길게 열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세자저하께서 대리청정에 나서는 첫날이라.
궁궐 안은 은근한 긴장감과 흥분으로 휩싸였다.
그러나 대전에 이르렀을 때, 라온을 비롯한 환관과 궁녀들의 표정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걸까요?”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라온은 영의 눈치를 살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문무백관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대전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대전 안으로 영이 들어섰다.
“아무래도 대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봅니다.”황망한 얼굴로 영의 표정을 살피던 라온이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단상 위에 있는 의자에 몸을 실으며 영이 말했다.
“그 많은 대신들이 한꺼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이리 아무도 안 나타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하겠다는 것이겠지.”“네?”“한마디로 말해 내가 대리청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느냐.”태연스레 말을 하는 영을 라온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응시했다.
“괜찮으십니까?”“날 걱정하는 것이냐?”“…….”“걱정하지 마라.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영의 말에 라온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단 말입니까?”“아니, 조금은 내 예상을 빗나가기도 했지.”“……?”“설마 이리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미처 몰랐구나. 뭐. 그래도 잘 되었다. 이리 명분을 제공해주니.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지.”“고맙기도 하겠습니다. 신하 없는 왕이시니. 이제 이 노릇을 어찌합니까?”한없이 느긋한 영의 모습에 라온은 그만 샐쭉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남은 이리도 걱정하고 있건만, 정작 본인은 다 예상하고 있었다면서 태연한 모습이라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누가 신하 없는 왕이더냐?”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텅 빈 대전 안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라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할아버지?”붉은 아침 햇살을 등에 업은 채 대전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의 등장에 놀란 라온과는 달리 영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런 영을 향해 정약용이 고개를 숙였다.
“신 정약용, 소조의 부르심을 받잡고 달려왔나이다.”“잘 오시었소. 그런데 다른 이들은……?”영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는 듯 대전 안으로 관복을 입은 사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신 김로 소조의 부르심을 받잡사옵니다.”“신 홍기섭 소조를 찾아뵈우옵니다.”“신 김노경도 함께 왔사옵니다.”“신 이인보도 있음을 알아주시옵소서.”외척 일색이었던 대전에 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영은 형형한 시선을 내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자신의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이제…… 간신히 한 걸음 옮겼구나.”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의지가 가득했다.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하더라. 이 용이 만물을 키워 내리니, 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일 것이다. -효명세자->
* * *
계절의 끝자락에 걸린 겨울이 마지막 강샘을 냈다.
문풍지로 스며드는 하얀 달빛을 바라보던 라온은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에 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세상 만물이 깊은 잠에 빠져 있건만. 영은 눈앞에 쌓인 문서들을 처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라온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찼다.
“화초저하.”나직한 부름에 영이 고개를 들어 라온을 바라보았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벌써 자정이 넘었습니다.”“시간이 벌써 그리 되었더냐?”“네. 좀 쉬십시오. 며칠째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셨단 말입니다. 그러다…… 죽겠습니다.”라온의 말에 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네. 그러니 그만 주무십시오.”“그래, 그래야겠다.”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영은 라온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말하지 않았더냐? 그만 자야겠다.”“주무십시오.”라온은 영의 등 뒤로 보이는 이부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찰나.
영이 라온의 작은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왜 이러십니까?”자신을 품에 안은 채 이불 속을 파고드는 영을 보며 라온이 물었다.
“이리해야 깊은 잠을 잘 수 있어 그런다.”“저하.”영의 말에 라온은 배트작거리던 몸짓을 멈췄다.
“라온아.”“네.”“이제부터 나는 험한 길을 가려 한다.”“알고 있습니다.”“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길이 될 것이다.”“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내 곁을 지켜주겠느냐?”긴 한숨을 내쉬며 영이 물었다.
“지킬 것입니다.”“……녀석.”눈을 감은 채 영이 미소를 지었다.
“저하 홀로, 그 길 걷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하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십시오. 저하의 뒤는 제가 지킬 것입니다.”호언장담하는 라온을 향해 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든든하구나.”영은 제 품에 안긴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라온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꽃잎 같은 입맞춤은 두 눈을 지나 붉은 입술 위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하얀 달빛이 내려앉았다.
물속을 유영하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 깊고 아늑한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