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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85화 (85/131)

85. 이리 살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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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5

“아, 다 탔네.”라온의 고운 미간이 흐려졌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닭죽은 바닥이 새카맣게 타고 말았다.

“우리 김 형, 배고플 텐데. 어찌한다?”생각지도 못한 두 손님 탓에 모처럼 마련한 음식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라온은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 쌀을 꺼내려 종종걸음 놓을 때였다.

“뭐가 그리 바빠?”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샌가 병연이 부엌 문간에 기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언제나처럼 시큰둥한 표정으로.

화들짝 놀란 라온이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김 형, 어찌 나오셨습니까?”“닭죽 끓이겠다고 나간 놈이 영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나와 봤다.”병연의 시선이 라온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설마, 저 검게 타버린 것이 내가 먹을 닭죽은 아니겠지?”“다 타지는 않았습니다. 윗부분만 살짝살짝 뜨면…….”병연의 눈매가 가늘게 여며졌다.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게…… 잠시 딴 곳에 정신을 파는 바람에 이리 되었습니다.”이게 다 화초저하 때문입니다. 괜히 사람 깜짝 놀라게 하셔서.

참의영감도 한몫 단단히 했고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재료 남은 것이 있으니, 금방 다시 끓이면 됩니다.”라온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병연은 대답 대신 부엌 한쪽에 등을 기댄 채 앉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분주히 움직이는 라온의 모습이 맺혔다.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자신을 위해 쌀을 씻고, 채소를 써는 라온이마냥 어여쁘게 느껴졌다. 종종거리는 와중에도 웃는 낯빛으로 그를 돌아보는 라온이 하늘 선녀보다 더 고와 보였다.

이리 살고 싶다.

이리 소소한 행복 속에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닭죽을 끓이는 라온의 이마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어느새 맛있게 만들어진 닭죽을 흐뭇하게 맛보는 라온을 향해 병연은 불현듯 말을 건넸다.

“홍라온.”“네, 김 형.”“이리 살지 않을래?”“네?”아궁이 안에 장작을 넣던 라온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김 형,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무 타는 소리 때문에 못 들었습니다.”“…….”“뭐라 하셨습니까? 다시 말씀해주십시오.”“아니다.”“뭐라 하신 것 같은데…….”“배고파 죽겠다고 했다.”감정일랑은 가슴 깊숙한 곳에 갈무리한 병연이 라온의 이마를 톡 하고 건드렸다.

“아얏.”“엄살은.”“엄살 아닙니다. 정말 아프단 말입니다. 그런데…….”잔뜩 찡그린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던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분명 살자, 어쩌고 하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아닙니까?”“예전에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나 같은 형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네. 분명 그리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하지만 김 형께서 싫다고 하시질 않으셨습니까?”“생각해보니 나쁠 것 같지 않을 것 같아 한 말이다.”“그런 말씀이셨습니까?”라온의 얼굴에 단박에 반색하는 빛이 떠올랐다.

“왜? 싫으냐?”“아, 아닙니다.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영 실감 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 라온은 병연의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정말이지요? 김 형, 정말 제 형님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말 바꾸기 없습니다.”“그래.”“정말, 정말입니다. 아니, 이럴 것이 아니라…….”라온은 병연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건 뭐냐?”“단단히 약조하자는 뜻입니다.”“지금 나더러 너랑 손가락을 걸자는 건 아니지?”“네. 그리하자는 겁니다.”“싫다.”단박에 거절한 병연이 등을 돌렸다.

“김 형.”“…….”“하십시오, 약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김 형이십니다. 그런데 약조 못 할 것은 무엇입니까?”“그런 건 여인들이나 하는 것이다.”“약조하는 데 남녀의 구별이 어디 있습니까? 저와 손가락 걸고 약조하십시오. 네?”“성가신 녀석.”끈질기게 달라붙는 라온을 병연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라온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팔짱을 풀고 라온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달빛에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라온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말간 웃음이 병연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치자꽃을 담은 향기가, 아릿한 그리움의 향내가 병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라온을 담은 병연의 눈동자에 바람이 불었다.

그래, 이것으로 족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  *  *

시린 새벽하늘 사이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으, 춥다.”자선당을 나서는 라온의 어깨가 겨울 추위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옷깃을 여민 채 서둘러 동궁전으로 향하는 그녀의 곁으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분주한 발걸음으로 우르르 지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지?”“추국청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아, 장 내관님이 아니십니까?”평소처럼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장 내관을 보며 라온이 물었다.

“그런데 추국청이라니요?”“홍 내관도 알지 않소? 어제 왕세자 저하를 시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잖소. 잡혀 온 잔당들이 배후를 불었다고 합니다.”“그랬습니까?”“곧 궁 안에 피바람이 불 겁니다. 감히 왕세자를 시해하려 하였으니…….”장 내관이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 이내 라온을 돌아보며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지 않소. 언감생심 우리 세자 저하를 상대로 그런 무모한 짓을 시도하다니.”“그러게나 말입니다.”“그나저나 우리 세자 저하께서 그리 무위 출중하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30대 1이라니…….”동궁전을 바라보는 장 내관의 눈동자에 경외감이 가득했다.

“30대 1이라뇨?”“이미 궁 안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제 세자 저하께서 30대 1로 싸워 이기셨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궁인이 없을 정도지요.”“…….”3대 1이었습니다만.

“홍 내관의 활약도 대단하였다면서요?”“네?”저도 활약한 겁니까?

“홍 내관이 아니었다면 세자 저하께서 큰일을 당할 뻔했다면서요?”“아닙니다.”라온은 서둘러 양손을 흔들며 부인했다. 그러나 장 내관은 마치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로 라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 겸손할 것 없어요. 지난밤에 홍 내관과 왕세자 저하의 활약을 듣고 가슴 설렜던 궁인들이 한둘이 아니라오.”라온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진 것일까?

말 많은 궁녀들과 그녀들보다 더 말 많은 환관들의 입을 거쳤으니, 진실에서 얼마나 큰 과장과 허풍이 섞여 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이 소문이 돌고 돌아 나중엔 저하와 내가 국경을 넘는 오랑캐 무리를 섬멸했다는 식이 되는 거 아니야?

걱정하는 찰나.

“홍 내관님.”어린 소환 내시 하나가 라온에게 다가왔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눈에 익었다.

“당신은…….”지난번에 라온처럼 훌륭한 내관이 되고 싶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던 소환 내시였다.

“절 기억하십니까?”어린 소환 내시가 감격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말입니다.

라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환 내시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홍 내관은 우리 소환 내시들의 희망입니다. 아니, 우리들의 꿈입니다.”“…….”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당황하는 라온에게 소환 내시는 품에 안고 있던 서책을 불쑥 내밀었다.

“여기 기명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네?”“집안의 가보로 삼아 자자손손 물려줄 생각입니다.”“…….”내시가 자자손손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라온은 어린 소환 내시가 내민 서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성공한 환관이 되는 지름길>

대체 이건 무슨 책이야?

*  *  *

김조순의 사랑채로 숨 막힐 듯한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흑립을 쓴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김조순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한 짓을 벌였네.”“송구하옵니다.”흑립을 쓴 사내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감흥 없는 시선으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조순이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정이 많이 시끄러워졌더군.”사내는 감히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조순의 입에서 끌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그만…….”“일을 벌였으면 마무리를 제대로 지었어야지. 아니한 만 못한 결과가 되지 않았는가?”“감히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잡혀간 자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네.”“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입이 무거운 자들로 선별하여 보냈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두 번, 세 번 신경을 썼습니다. 문초를 당한다 해도 그자들에게서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옵니다.”사내의 말에 김조순은 서탁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그의 무릎 치에 던졌다.

“이것은……?”“읽어보게.”흑립의 사내가 바닥에 엎드린 채, 두루마리를 풀었다.

“이, 이것은…….”“간밤에 문초를 받은 자들이 토설한 내용일세.”두루마리를 읽는 사내의 턱 아래로 식은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관군들이 자네 집 안으로 닥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군.”김조순의 말에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럴 리 없사옵니다. 그자들은 그 누구보다 입이 무거운 자들입니다. 절대로 저와 제 집안을 입에 담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그 단단한 확신에 김조순은 가볍게 혀를 찼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사내에게 거둬들인 시선을 그리고 있던 그림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주리를 어떻게 트는 줄 아는가?”“네?”“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 허리 뒤에 세운 막대에 두 팔과 상투를 묶는다네. 그리하면 그야말로 옴짝달싹을 못하지. 그리고 두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집어넣고, 뼈가 활처럼 휠 때까지 비틀어댄다네. 그 고통이 끔찍해서 때론 혀를 깨물기도 하고, 머리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네.”“…….”“설사 다리뼈가 부러져도 결코 문초를 멈추는 일은 없지. 두 다리가 너덜너덜해져서 가새주리가 소용이 없으면 줄주리를 하네. 방망이가 하는 일을 줄이 대신하는데, 고통스럽기는 오히려 이쪽이 한 술 더 하지.”사내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김조순이 갑자기 주리를 트는 과정을 설명하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김조순의 말이 이어졌다.

“궁에서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은 이처럼 험악하다네. 제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열지 않는 이가 없어. 없는 사실이라도 만들어서 고변하게 되어 있지.”“……!”“다시 묻겠네.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과연 자네와의 연관을 끝내 불지 않겠는가?”마른침만 꿀꺽꿀꺽 삼키던 사내가 갑자기 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대감.”김조순이 쯧쯧 혀를 찼다.

이렇게 못 미더운 사람을 봤나.

“자네와 내가 안 지 얼마나 되었지?”“올해로 18년이 되었습니다.”“참으로 오래되었군.”“그렇습니다. 하오니, 대감. 그간의 정리를 보아서라도 소인을 살려주십시오.”사내는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김조순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허허.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워낙 복잡하게 얽힌 일이라 풀기가 쉽지 않겠어. 이를 어찌한다?”사내가 저지른 짓은 명백한 역모.

자칫하다간 안동 김씨 가문의 뿌리마저 덩달아 뽑힐 수도 있었다.

김조순의 말에 사내는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김조순의 한 마디에 그와 식솔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그때였다.

“제가 그 방법을 알려드리지요.”낮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내 한 사람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김조순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궁에 다녀오는 길이더냐?”“그렇습니다. 할아버지.”“분위기가 어떠하더냐?”윤성이 고개를 조아린 사내를 흘끔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짚더미에 불이라도 붙인 것 같더군요.”“허허.”“이번 일의 배후를 철저하게 캐낼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그래, 그렇겠지.”이번 왕세자 시해 시도는 외척을 배제하려는 영에게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영특한 그는 이번 일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용하려 들겠지. 그러자면 사로잡은 자들의 입을 어떻게든 열게 할 터.

만약, 그들의 입에서 안동 김씨와 관련된 것이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라도 나온다면, 단순한 피바람에서 멈추지 않으리라.

바닥에 엎드린 사내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덜덜 떨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윤성이 묻자 김조순은 무심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그 방법을 고심하던 참이었다.”문득, 김조순이 윤성에게 물었다.

“혹, 심중에 생각해 둔 묘안이라도 있느냐?”“묘안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간단한 해결책이 하나 있긴 합니다.”“허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래, 과연 어찌하면 이 사달이 간단하게 해결될꼬?”윤성이 고개를 조아린 사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이자가 죽으면 끝날 일이지요.”“……!”일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김조순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윤성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죽는 것만으로 과연 쉽게 해결될까?”“쉽게 해결될 것입니다.”“어째서?”“왕세자를 시해하려 했던 이 자에겐 사실 더 큰 음모가 있었습니다.”“그래서?”“이 사람은 왕세자만을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왕실과 조정의 근간을 흔들어 이 나라를 전복시킬 생각이었던 겁니다. 하여, 할아버지 또한 살해하려 하였지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만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할아버지를 살해하려다 마침 주위를 지나던 호위무사에게 걸려 목숨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소, 소인이 어찌 대감을 살해하려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꿈에서도 생각한 적 없습니다.”김조순이 그 마음 안다는 듯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고 있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김조순은 윤성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아라.”윤성의 말이 이어졌다.

“왕세자를 노린 칼이 실은 할아버지도 노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할아버지를 향한 의심의 눈길은 자연히 다른 곳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왕세자의 의도 또한 무위로 돌아가겠지요.”“허허. 과연 그렇군. 한데, 왕세자께서 속아주실까?”“당연히 속지 않겠지요. 세자저하라면 이 사건에 숨은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더는 파고들 수 없을 것입니다.”“그렇군.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와의 연결고리 또한 사라진 셈이 될 테니. 과연, 과연 묘안이로다.”김조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의 낯빛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이제 보니 당신들…… 나를 제물 삼을 생각이로군.”사내가 으득 이를 악물었다.

그런 사내를 김조순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네도 듣지 않았는가?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네.”“결국, 날 버릴 셈이오?”“허허, 애초에 이 일은 자네가 벌인 사건이 아닌가? 당연히 수습도 자네가 해야지.”“내가 순순히 당신들의 계략에 당해줄 성 싶은가?”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내가 문밖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한 발을 밖으로 빼며 그는 김조순을 돌아봤다.

“오늘의 일은 내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김조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하게. 저승 가는 유언 대신 그런 기억을 챙겨가겠다면, 내 말리지 않겠네.”“그게 무슨…….”푹!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섬뜩한 소음과 함께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홉떠졌다. 사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의 배 위로 피를 머금은 칼끝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문밖을 지키던 김조순의 호위무사에게 등을 찔린 것이다.

“다, 당신…… 처음부터…….”김조순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누군가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지만 자네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일세.”“이, 이 잔인무도한…….”사내가 피를 울컥 토해내며 쓰러졌다. 피비린내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조순이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쯧쯧, 어쩌자고 이곳에서 일을 처리하는 거냐.”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김조순을 향해 호위무사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대감마님. 곧 말끔히 치우겠습니다.”김조순이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내 저 아이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지저분한 덩어리나 대충 치워라.”“명 받잡습니다.”호위무사가 사내를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이내 문이 조용히 닫혔다.

시신은 사라졌지만, 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김조순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보기 싫은 것도 보고, 맡기 싫은 것도 맡게 되는 법이다.”윤성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일을 위해서는 때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지요.”김조순이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좋은 눈빛을 하고 있구나.”“그렇습니까?”“그래, 근자에 들어 가장 마음에 드는 눈빛이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느냐?”“…….”“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눈빛에 서려 있는 욕심이 마음에 드는구나. 탐욕과 욕심이 없다면 일평생 무료함만이 남을 뿐이지.”윤성은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고인 피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어떤 자였습니까?”왕세자 시해 시도가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윤성은 곧바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렇듯 대담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그의 할아버지뿐이었다.

“18년 전 역모에 가담했던 자다.”“홍경래가 일으킨 난 말씀이시군요. 생존자가 있었습니까?”“불순한 자들은 시궁쥐 같지. 눈에 보이는 족족 잡아낸다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 그보다 더 많은 시궁쥐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어쩌다 그런 자와 알게 되셨습니까?”“역적 홍가를 적극 돕던 자들 중에서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 자였지. 과감하기도 했고. 성품이 마음에 들어 보호해 주었다.”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살려두었다……?

윤성은 속으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사람을 귀이 여기는 분으로 착각하겠군.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조부는 그리 인자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죽을 목숨을 살려주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훗날 쓸모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곁에 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역모에 가담한 역적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는 필요하다면 충신이든 역적이든 가리지 않았다. 더러는 그 모습을 보고 넉넉한 인품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윤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겐 넉넉한 인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용가치가 있는 자는 살리고, 가치가 없는 자는 죽일 뿐이다.

또한, 지금 당장 이용가치가 있어 살린다고 하여도, 훗날 쓸모가 없어지면…… 지금처럼 가차 없이 버리고는 했다. 마치 못 쓰게 된 물건처럼…….

애초에 사내는 죽을 운명이었다.

아니, 할아버지가 버리지 않았다면 윤성의 손에 사라질 자였다.

그녀를 위험으로 내몬 죄로.

“이번 일. 할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이었군요.”김조순의 입가에 두터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 보이느냐?”윤성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이번 사건, 단순히 사내가 계획한 것이 아니리라. 그 배후에 할아버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역모에 가담한 자를 숨겨두고, 왕실에 대한 증오를 남겨둔 할아버지는 어떤 식으로 이 칼을 쓸지 고심했으리라.

그러던 중 기회가 온 것이다.

세자가 홀로 잠행을 나섰다는 유용한 정보가 할아버지의 귀로 들어왔다.

그것은 곧장 사내에게 전해졌고, 사내는 18년 전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같은 생각의 무리를 모아 일을 도모한 것이 틀림없었다.

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자가 세자저하를 죽이길 바라셨습니까?”“외손주가 죽길 바라는 할아비가 어디에 있겠느냐? 그저 적당히 경고만 할 생각이었다.”“경고라 하셨습니까?”“그래, 경고. 그간 너무 태평성대가 아니었느냐. 이런 긴장이 필요했지. 한데, 그 사람이 일을 너무 크게 벌였어. 허허허.”김조순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것이었군요.”윤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리 경고하셨으니, 심약하신 전하께서도 더는 딴생각 못하시겠군요.”“암, 그리하셔야지.”“하지만 세자저하께서도 그리하실지는 의문입니다.”“영민하신 분이시다. 이쯤 했으면 말귀를 알아들으시겠지.”“할아버지께서는 진실로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할아버지를 그리 미워하시는 분을 경고 정도로 끝내셨으니 말입니다.”“자상한 외할애비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허허허허.”김조순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웃었다.

그러다 돌연 웃음을 멈추고 윤성을 향해 말했다.

“욕심이 생겼다고 하였느냐? 널 자극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무엇이냐? 무엇이 너를 이리 만들었느냐?”윤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곧이어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위험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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