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저는 그분의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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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2
뺨과 입을 가린 차가운 손길에 라온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설마, 저하를 노린 자들이 궁까지 숨어든 것은 아닐까?
“쉿.”등 뒤의 사내가 경고하듯 바람 소리를 냈다.
일순, 전신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잔뜩 굳어 있는 라온의 어깨너머로 사내가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왜 그리 긴장하느냐?”라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목소리는…….
“화초저하?”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영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아, 놀래라!”틀어막혔던 입이 풀리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한순간, 잔뜩 긴장했던 라온은 굳은 어깨를 풀며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잠시였지만 놀라고 긴장했던 것이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오셨으면 오셨다고 말씀을 하시지. 이리 불쑥 나타나십니까?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라온의 지청구에도 영은 고운 미간을 찡그린 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동궁전으로 가셨던 것 아니십니까? 그런데 이 밤에 예는 무슨 일이십니까?”조가비처럼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는 영을 보며 라온은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까 다친 팔이 많이 아프신 것일까? 어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씀 없으신 걸까?
“저하, 화초저하. 아프십니까? 말씀을 못 하실 정도로 아픈 겁니까?”라온이 손끝으로 영의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제야 내내 굳어 있던 영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 걱정은 된 것이냐?”“당연히 걱정하였지요.”“그러는 녀석이 한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쪽으로는 고개 한 번 안 돌린 것이냐?”“돌렸었습니다. 저하 얼굴 뵈려고 몇 번이나 까치발 들었습니다.”“딱 두 번이었다.”“네?”“내 얼굴 보려고 네가 용을 쓴 것이 딱 두 번이었지. 하지만 그나마도 한 번은 율이 녀석 머리통에 가려졌었고, 다른 한 번은 박 판내시부사의 수선스런 손짓에 절반을 툭 잘라먹었지.”뭔가 상당히 분하다는 표정.
“그걸 일일이 보고 계셨습니까?”화초저하, 은근히 작은 일에 집착하시는 것 같단 말이지.
“그리 살펴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당연한 겁니까?”“당연하다 생각하지 않는 네가 이상한 것이다.”중얼거리는 영의 목소리에 다시 불퉁한 기색이 들어찼다.
“부러 안 본 것입니다. 감히 제가 낄 자리가 없질 않았습니까. 하여, 화초저하 얼굴 뵈면 괜스레 마음 닳을까 봐 안 본 것입니다.”“혀끝에 당과를 물었는가 보구나.”“그리 들리셨습니까?”“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리 들을 수밖에.”“어찌해야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라온이 영의 손을 잡으며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순, 화살에 쏘이기라도 한 듯 영은 심장 한구석이 들썩거렸다.
고작 이런 작은 미소 하나에 어린 소년처럼 설레다니.
어리석은 제 마음을 나무라며 그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그리 웃지 마라.”“안 됩니다. 웃지 않으려 해도 저하를 뵈니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라온의 얼굴에 좀 전보다 더 어여쁜 웃음이 매달렸다.
“마음 푸십시오.”“그리 웃어도 소용없다.”“화내지 마십시오.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말과 함께 라온의 붉디붉은 입술이 쪽, 영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애써 쌓아올렸던 영의 마음 둑이 그예 푸스스 무너지고 말았다.
“감히…….”무의미한 한 마디를 흘리며 영은 라온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동궁전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처치료는 잘 받으신 겁니까?”“상처 치료는 잘 받았다. 그리고 네 말대로 동궁전에 있어야 하는데…… 감히 어떤 자들이 나를 향해 칼날을 세웠는지 찾아내야 하는데…….”발길이 자꾸만 이곳으로 향했다.
잠시 잠깐 떨어져 있음에도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병이 걸려도 단단히 걸렸음이 분명하다.”“병이요?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겁니까?”“홍라온이라는 몹쓸 병, 네 녀석이 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아무것도 생각하질 못하겠다.”“그 병이라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 합니다.”“녀석. 그런데 너는 괜찮으냐?”“무어가요?”“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갑자기 내가 보고 싶거나, 미치도록 내가 보고 싶거나, 죽고 싶을 만큼 내가 보고 싶거나 하지 않아?”“…….”그런 말씀, 그리 멀쩡한 얼굴로 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들을까 겁납니다.
가슴 설레는 말이긴 하지만, 얼굴을 붉히는 말이기도 한지라.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런 라온의 하얀 목덜미로 영의 한숨이 떨어졌다.
“이건 불공평하구나.”“뭐가 말입니까?”“나는 네 녀석 때문에 이리 조바심이 나는데. 너는 어찌 이리 멀쩡해? 이리 태평한 얼굴로 다른 녀석에게 먹일 닭죽이나 끓이고 있으니. 정말이지 불공평하지 않으냐.”투덜거리는 영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화초저하…… 제가 닭죽 끓이려고 한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라온의 물음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차마 자선당 문밖에서 병연과 라온의 모습을 엿보고, 엿들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지라. 영은 낮게 헛기침만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불현듯 라온의 뇌리로 한순간이 떠올랐다.
병연이 자신을 끌어안았던 짧은 순간이.
“행여 오해하신 것은 아니시지요? 김 형께서 그리하신 것은…….”영이 라온의 말 틈새로 끼어들었다.
“알고 있다. 그 녀석, 네 어깨가 필요했던 것이겠지.”그래, 다른 그 어떤 사심도 없이 그저 잠시 잠깐 기대어 쉴 어깨가 필요한 것이겠지. 그리 믿고 싶었다. 아니, 그리 믿을 것이다.
문풍지 위로 그려지던 병연과 라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 여인에 대한 소유욕, 일평생 갖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평범한 사내의 마음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 어리석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영은 손바닥이 파이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네, 맞습니다. 김 형께서 무에 힘든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대체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인지…….”“그래도 앞으로는 함부로 어깨 내어주지 마라. 필요하다면 내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저하.”영의 지나치게 단호한 말에 라온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꼭 질투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시죠?”“그럴 리 있겠느냐?”정색하는 영을 보며 라온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럴 리 없지. 이분이 뉘시던가. 바로 화초저하가 아니시던가.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차가운 성정의 왕세자 저하…….
“어쨌든 내 분명히 얘기했다. 앞으로는 뉘를 막론하고 손도 잡지 말고, 시선도 보내서는 아니 된다. 행여 그것이 여인이라고 해도 안 된다.”“여인도 안 된단 말입니까?”“그래, 여인이라도 안 돼.”“…….”아, 천하의 화초저하께서도 질투하시는구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영이 옅게 홍조가 떠오른 얼굴을 돌리며 한마디 했다.
“질투하는 거 아니다.”“네.”“질투하는 거 절대 아니야.”“네네.”
* * *
닭죽 끓이는 고소한 냄새가 자선당 부엌을 가득 메웠다.
“화초저하도 참…….”주걱으로 죽을 휘젓던 라온은 영을 떠올리며 어이없는 미소를 풀썩풀썩 흘렸다.
왕세자께서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습격을 당했던 일로 궁이 발칵 뒤집혀 있는 터였다.
그 와중에 이리 자선당을 찾아오셔서는 기껏 질투나 하시고 가시다니.
화초저하와 질투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
뭔가 완벽하게 안전한 울타리 안에 놓인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라온은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를 애써 거둬냈다.
분명 화초저하가 틀림없으리라. 또 무어가 미더우셔서 돌아오신 것이겠지.
반기지 않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라온의 얼굴에 깊은 염려가 서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연유이십니까? 자꾸만 이리 하시면…….”그때, 뜻밖에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보다 먼저 찾아온 분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어라? 화초저하가 아니시네.
* * *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 윤성이 라온을 향해 눈매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참의영감이 아니십니까?”조금 높은 라온의 목소리에 윤성이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웠다.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주십시오. 난고가 듣겠습니다.”윤성이 병연이 있는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채 라온이 물었다.
“언제 오신 것입니까? 전 참의영감이신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홍 내관이 날 찾지 않으니, 직접 찾아올 수밖에요.”“…….”윤성의 그린 듯한 미소 위로 불현듯 걱정하는 빛이 떠올랐다.
“큰일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다행히 큰일은 없었습니다.”물론,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요.
“정말 다행입니다.”진심으로 걱정한 듯 윤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셨습니까?”“큰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저하께서 지켜주셨습니다.”영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라온은 가슴께가 따스해지고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윤성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그려졌다.
영을 언급할 때, 라온이 보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는 그 행복한 표정과 수줍은 미소가 얼음송곳처럼 그의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그러나 결코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인지라.
윤성의 가면 같은 미소가 한층 두터워졌다. 짙은 미소 뒤에 마음을 숨긴 윤성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이런 일이 계속 생긴단 말씀이십니까?”윤성을 바라보는 라온의 얼굴에 놀람이 들어찼다.
일국의 왕세자를 시해하려는 음모가 몇 번이나 더 생길 수도 있단 말인가? 어떻게? 감히 누가?
“권력이란 그리 위험한 것이지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하여 가장 안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하께서 계신 자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외로운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곳곳에 함정이 숨겨진 홀림길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 걸음만 잘못 발을 내딛어도 크게 다칠 수 있는……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그럴 리가요.”수긍할 수 없다는 듯 라온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그분께서 계신 자리가 그리 위험하고 외로운 곳일 리 없었다.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지키는 궁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분에게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윤성은 라온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었다.
“홍 내관께서 그리 따르시는 그분께서 가야 할 길은 이처럼 험하고 위험합니다.”“어째서요? 어째서 일국의 왕세자께서 가시는 길이 그리 험한 길입니까? 어째서 그리 위험한 것입니까?”그리고 어째서 참의영감께서는 화초저하께서 가시는 길이 위태로울 거라 장담하시는 겁니까?
“왕이 되실 분이니까요.”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할 사람이기에…….
야망의 정점이며, 권력의 핵심이고, 또한 추악한 탐욕의 마지막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에…….
왕이란 모두가 우러러보기에 또한 가장 탐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분과 함께하면 언제 또 이런 험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염려의 뒤편엔 은근한 겁박이 실려 있었다.
라온은 윤성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리라 믿지 않습니다.”화초저하께서 수시로 위험에 빠진다는 생각 따윈 하고 싶지도, 하기도 싫었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전 그분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어찌하여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십니까?”윤성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뱀의 그것처럼 더없이 차고 독하게 변해 있었다.
“글쎄요.”라온은 해사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을 족했다.
그녀의 웃음만으로도 모든 대답을 들은 듯했다.
윤성이 탄식하듯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바깥경치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이 내려서일까? 유백색의 달빛이 유난히 고왔다. 하지만 윤성의 눈에는 그런 달빛이 차고 예리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의 눈빛처럼 차고 매서웠다.
“오늘 달빛이 참 좋군요.”윤성의 말에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라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달빛이 무척 곱습니다. 몇 자락 떠 있는 구름이 운치를 더하는 것 같아 더욱 보기 좋습니다.”“구름이라. 그렇군요. 달이 홀로 밤하늘에 떠 있는 것보다는 구름과 벗하여 있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뭐든 적당해야 좋은 법입니다. 구름 몇 조각은 달과 어울릴 수 있지만, 먹구름은 다릅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때로 달조차 가려버리기도 하지요.”“……?”라온은 윤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듣기엔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가시가 꽤 매서웠다.
“무슨 뜻입니까?”윤성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은 많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감 없이 할 수 있을 말도 라온에게만은 할 수 없었다.
괜스런 말로 그녀의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일전에 드린 말씀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어떤 말씀이신지……?”“사모한다 하였지요.”“……!”윤성이 라온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홍 내관을 연모한다 하였습니다.”“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면 이미 드린 줄로 압니다.”윤성은 지치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가면 꽉 찬 달도 기우는 법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꽉 차 있을 때는 언제까지고 그 마음이 영원할 거라 생각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도 마르고 새어나가 어느새 바닥을 보이게 마련이지요.”“제 마음은 바닥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포기하십시오.”라온의 말에 윤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 역시 같은 대답을 돌려드려야겠군요. 저의 마음과 물음 또한 바닥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윤성은 걸음을 옮겼다.
큰 보폭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라온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하셨습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는 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우뚝.
윤성이 걸음을 멈췄다.
등을 돌린 채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저는 그분의 여인입니다.”세상 사람들에게 쉬이 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비밀.
라온은 가슴께에 두 손을 모으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군요.”윤성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자선당을 나선 윤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러나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걸음을 멈춘 윤성의 표정이 무서운 속도로 굳어졌다.
가면 같은 미소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자선당의 불빛을 응시하던 윤성은 돌연 주먹으로 담벼락을 내리쳤다.
쾅!
거친 주먹질에 손등의 피부가 찢어지고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윤성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전 그분의 여인입니다.
귓가에 환청처럼 남아 있는 라온의 한 마디가 그의 뇌리와 심장을 아득하게 조여 왔다.
이마를 벽에 기댄 채 윤성은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래. 그렇게 되었단 말이지? 끝내 그렇게 되었단 말이지.”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