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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83화 (83/131)

83. 잠시만 이리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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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숨 막히는 듯한 위기의 순간이 라온의 눈동자에 맺혔다.

점박이 사내의 기습. 그의 손에 들린 단도가 시퍼런 살기를 번뜩였다. 영의 가슴을 향해 곧장 날아드는 칼날에 라온은 제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듯 온몸이 경직되었다.

“안 돼!”라온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위험천만한 순간.

그러나 영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느닷없는 기습을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가볍게 점박이 사내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크윽!”점박이가 단도를 떨어트리기 무섭게 영이 발끝을 툭 올려 찼다.

땅으로 떨어지던 단도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영이 손을 내밀어 단도를 잡았다.

“이놈!”그사이, 점박이 사내가 재주를 부리듯 몸을 빙글 회전하며 발길질을 했다. 영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피하며, 그의 무릎 뒤쪽을 차올렸다.

“헉!”마른 비명과 함께 점박이가 나동그라졌다.

“이런!”“죽어라.”다른 두 사내가 어느 사이에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그들이 등에 멘 길쭉한 보퉁이에 든 것은 비단이 아니라 검이었다.

“멈춰라.”영이 달려드는 사내들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사내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영이 점박이 사내의 목에 단도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다가와도 이자의 목숨은 없다.”사내들은 감히 더 다가오지 못하고 사나운 눈빛으로 영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점박이 사내가 갑자기 영에게 달려들고, 다른 두 사내가 검까지 뽑아든 상황. 좀 전까지만 해도 친근한 얼굴로 동행을 청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칼 든 도적으로 돌변했다.

“날 노린 자들이다.”영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라온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산적입니까?”“산적도 사람인데, 하필 폭설이 내린 날에 칼을 잡았겠느냐?”“그렇다면……?”“필시 내 정체를 아는 자들일 터.”“설마…….”왕세자를 노린 암습?

그렇다면 이것은 엄연한 역모였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 시간이 생명인 귀한 약재나 상하기 쉬운 음식재료라면 모를까. 늦어도 상관없는 비단 때문에 굳이 눈 내린 겨울 산을 넘는 보부상이라.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저자들의 신발.”“신발이 왜요?”“간밤에 내린 눈은 올 들어 처음 내린 것이었다. 그것도 하필 폭설이었지. 그런데 이들은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눈 위를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 멱신을 준비하지 않았더냐?”“아!”보부상들이 제아무리 준비가 철저해도 먼 길을 다녀오는데, 혹시나 내릴지도 모를 눈을 위한 신까지 준비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긴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많은 것을 찾아냈단 말인가?

그야말로 대단한 눈썰미.

그 대단한 눈썰미가 어째서 여인을 볼 때는 어째서 전혀 발휘되지 않는지는 의문…… 은 나중에 풀어도 될 문제고, 지금 당장은 눈앞에서 칼을 들고 설치는 저 사내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부터 고민해야 했다.

“누가 보낸 자이더냐?”영의 물음에 점박이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산적이오.”영이 칼등으로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찍었다.

“크윽!”“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다음엔 피를 보게 될 것이다.”“……차라리 나를 죽이시오.”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크윽!”비명과 함께 점박이 사내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영이 그의 어깨에 단도를 찔러 넣은 것이다.

“다음은 네 심장이다.”“……!”점박이 사내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영의 차가운 눈빛과 표정.

심장을 찌르겠다는 그의 말이 결코 공연한 협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점박이 사내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런 니미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난 상관 말고 죽여라!”점박이가 크게 소리쳤다.

순간, 영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두 사내가 달려들었다.

한 사내의 검은 영을 노렸고, 다른 한 명은 라온을 향해 사납게 칼을 휘둘렀다.

라온을 향해 짓쳐들어가는 검을 보는 순간, 영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점박이 사내를 발로 차버린 영은 곧장 라온을 향해 달려드는 검을 막았다.

칭! 치릉!

등골을 섬뜩하게 하는 쇳소리가 라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라온은 식은땀이 맺힌 얼굴로 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땅을 디디고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영의 손에서 풀려난 점박이가 인상을 흉악하게 찡그렸다.

“조용히 처리해 주려 했더니, 소문대로 눈치가 빠르구나.”라온이 매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분이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겁니까?”점박이의 얼굴에 히죽 비웃음이 걸렸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떻단 말이냐? 칼로 베면 피를 토하고 죽는 건 왕이나 백정이나 똑같은 법일 터.” “…….”왕이나 백정이나…….

영의 말이 맞았다. 저자들은 영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라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대는 물론이고 그대의 집안까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그런 법도가 두려우면 감히 이런 일을 할 생각이나 할까. 걱정 마라. 하늘 아래 피붙이 하나 없는 팔자니까.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저 높으신 양반은 이 산에 뼈를 묻게 될 것이야.”말과 동시에 점박이를 비롯한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물러서 있어라.”라온을 자신의 등 뒤로 물러서게 한 영은 사내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그는 점박이 사내에게서 빼앗은 짧은 단도로 사내들의 긴 장검에 맞섰다.

칭! 챙챙! 창창창!

사나운 쇳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영은 평소의 성정처럼 칼을 쓰는 순간마저도 냉정하고 차분했다. 검이 코끝을 찔러 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그는 옆구리를 찔러오는 사내를 어깨로 들이받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사내의 복부를 발로 찼다. 그사이 점박이 사내가 영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위기의 순간!

“그만둬!”지켜보던 라온이 점박이 사내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엇! 이, 이 녀석이!”난데없는 라온의 난입에 점박이 사내가 크게 당황했다. 몸을 세게 흔들어 라온을 떨어뜨린 점박이가 살기를 드러냈다.

“조용히 기다리면 순서대로 보내줄 것을. 네놈이 일찍 죽으려고 발악이로구나.”점박이가 검을 비껴들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감히, 누굴 죽여?”영은 서리가 묻어날 것 같은 표정으로 점박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순간, 점박이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 이 양반이 어떻게?’분명 다른 두 명과 싸우고 있었을 텐데.

의문은 쉽게 풀렸다.

영의 등 뒤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둘 모두를 쓰러트렸단 말인가?

왕세자가 문무에 능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소문에 오히려 부족한 면이 있었다.

점박이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영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그를 위협해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 일을 받아들일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점박이 사내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점박이는 그대로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눈앞으로 다가온 영의 발길질에 걷어차인 것이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이라, 생각하고 말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한 영은 검을 든 점박이의 손을 발로 밟았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냐? 배후를 밝힌다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점박이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흐흐흐. 당신 목숨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것이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산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이 산을 내려가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것이다. 그러니 네놈은 배후에 뉘가 있는지부터 말해라. 누구냐? 누가 감히 이런 일을 꾸민 것이더냐?”“흐흐흐. 그리 순순히 말해 줄 성싶소?”어쩐 일인지 점박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좀 전과는 다른 느낌의 웃음이었다.

뭔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영을 덮쳐왔다.

영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의 눈에 반갑지 않은 광경이 들어왔다.

산 아래쪽, 하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무리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든 흉기가 햇살을 받아 무시무시한 광채를 번뜩였다.

일을 꾸민 것은 여기 있는 세 놈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소? 오늘 이 산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점박이 사내의 단정에 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헛된 바람일…….”영은 인상을 뒤틀며 비웃는 점박이의 턱을 힘껏 찼다. 이내 점박이 사내는 혀를 베어 물고 기절했다.

잠시 차가운 시선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던 영이 라온을 향해 돌아섰다.

“라온아, 홍라온.”“저하.”“이리 와.”영이 라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잔뜩 얼어 있던 라온이 단숨에 영의 품으로 달려왔다.

영은 가늘게 몸을 떠는 라온을 힘껏 끌어안았다.

“앗!”라온의 낮은 비명이 들려왔다.

“저하. 팔에 피가…….”영은 무심한 시선으로 팔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베였는지, 검붉은 핏물이 흥건했다.

“괜찮다. 스친 것뿐이니.”“태평하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라온은 서둘러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영의 팔을 감쌌다.

제 살이 베인 듯 미간을 찡그리는 그녀의 모습이 영의 눈에 맺혔다.

그는 기절한 점박이와 산을 오르는 무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산을 벗어나지 못한다 했더냐?

아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산을 내려가야겠다. 저 녀석 때문에라도 여기서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지. 절대로……!

칼을 쥐고 있는 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먼 곳에서 달려오던 사람들은 금세 가까워졌다.

어느새 그들의 얼굴도 대강 알아볼 수 있는 거리.

영은 품에 안은 라온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다.”주문(呪文)같은 영의 목소리가 라온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떨리는 라온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이 혹여 죽음이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라온의 마음이 굳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라온아, 홍라온.”버릇처럼 라온을 부르는 영의 목소리.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음성이 들떠 있는 듯했다.

영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있던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변해버린 숲 저편, 수십 필의 말을 탄 사람들이 설원을 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도 화초저하를 노리는 자들인가? 많이도 모여들었네.

생각하는 찰나, 앞서 달려온 무리와는 다른 복색이 눈에 띄었다.

하얀 눈과는 대조되는 선명한 붉은빛.

어라? 저건?

“저건 세자익위사 복색이 아닙니까?”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제 눈을 비비며 라온이 말했다.

“위사들이 내 명을 어긴 것 같구나.”“네?”“산 아래에서 기다리라는 내 명을 어기고 기어이 날 쫓아온 모양이다.”호위무사들의 출현은 영을 노린 자들에게도 의외의 사건이었다.

눈을 헤치며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놀란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붉은 철릭을 입은 위사들이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뒤쫓았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설원을 질주하던 말발굽 소리가 어느덧 멎었다.

감히 왕세자를 시해하려던 무리들은 일순간에 위사들에게 잡히거나, 세상과 일별하였다.

“저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글쎄. 나도 그게 궁금하구나.”말을 하는 영의 시선이 붉은 철릭 차림의 위사들을 향했다.

맨 앞에서 위사들을 통솔하던 우익위 한율이 서둘러 말에서 내려 영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저하. 소신이 늦었사옵니다. 벌을 내려주시옵소서.”“아니다. 너희가 아니었으면 큰일을 당할 뻔하였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명을 어긴 것이냐?”위사들이 이리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하지만 어찌하여 그들이 영의 말을 어긴 것일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궁금해하는 영에게 한율이 사정을 설명했다.

“저하의 명을 받들던 중, 백운회에서 급한 연통을 받았사옵니다.”“백운회에서?”“네. 백운회의 회주께서 불온한 움직임을 알려주어 큰일을 막을 수 있었사옵니다.”“회주가?”영의 말이 허공에 채 흩어지기도 전에, 라온의 탄성이 들려왔다.

“김 형!”시선을 돌린 영의 눈동자에 라온과 마주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김 형!”안도한 탓일까?

병연을 본 라온의 눈에 그렁 눈물이 맺혔다.

삿갓을 깊게 눌러 쓴 병연이 특유의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구나.”그의 말에 라온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서둘러 지워내며 웃음을 지었다.

“정말 놀랐습니다. 어찌 알고 오신 겁니까? 혹시, 정말 귀신이신 거 아닙니까? 제가 죽은 겁니까?”대답 대신 병연은 라온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였다.

“아얏! 아픈 것을 보니 다행히 죽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다친 곳은 없느냐?”라온이 양팔을 활짝 펼쳐 보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하지만?”“저하께서 다치셨습니다.”그제야 병연이 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날 봐주는구나.”영이 뒷짐을 진 채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누이처럼 다정해 보이는 병연과 라온의 모습이 영 신경에 거슬렸다.

병연은 영의 다친 팔을 잠시 보더니 다시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하께서도 괜찮으신 듯하구나.”“하지만 팔이…….”“괜찮아. 저 정도로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야.”그렇게 말하며 병연은 라온을 세세한 눈길로 살폈다. 혹여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봐…… 다친 건 나라니까.”영의 말에도 병연은 요지부동,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괜찮아. 그 정도는.”“하지만…….”바로 그때였다.

“저하! 괜찮으시옵니까?”안정을 되찾아가던 겨울 숲에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란이 일었다.

뒤늦게 도착한 박두용이 영의 앞으로 득달처럼 달려왔다.

“저하, 아이고, 저하! 어디 다친 곳은…… 아니! 팔이! 저하의 팔이!”“괜찮다. 그보다 선생은 어찌하고……?”“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옵니다. 저하의 팔이…….”“선생은 어찌하였느냐 묻질 않느냐?”“한가 놈이 잘 보필하고 있사오니, 걱정 마시옵소서. 그보다 어서 치료하셔야 하질 않사옵니까? 다들 뭣들 하는 것이오? 서둘러 저하를 뫼시질 않고서.”“나는 괜찮다니까.”그러나 누구도 영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박두용에게 끌려 말 위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영은 저 멀리 나란히 서 있는 라온과 병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드디어 돌아왔다.”깊은 밤.

자선당에 들어선 라온은 자리에 벌렁 누워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하루였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자선당은 그 어느 때보다 안락하고 편안했다.

“저하께서는 괜찮으시겠지요?”열린 문 저 너머로 동궁전의 불빛이 들어왔다.

멍하니 그 불빛을 바라보던 라온이 자리에 앉았다.

“벌써 백 번째 묻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괜찮으실 거야.”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병연이 라온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김 형, 거긴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너야말로 거기서 뭘 했던 것이냐?”“뭐…… 그냥.”차마 영과의 일을 말하기가 어려워 라온은 먼 허공을 응시했다.

“아 참, 그보다 들으셨습니까? 저하께서 찾으셨던 분이 우리 할아버지였다는 것을요.”“대충은 들었다.”“참으로 신기한 인연이질 않습니까?”“그렇구나.”“그런데 김 형, 어디 아프기라도 하셨습니까? 어찌 이리 수척해지신 겁니까?”“걱정이라도 했어?”“당연하지요. 그렇게 훌쩍 떠나시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나저나 이제 돌아오신 겁니까?”“글쎄…….”“뭡니까? 또 떠나시려는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말한다고 하여 나아질 것은 없다.”“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의 고민 상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들어드린다고요. 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라온이 제 앞의 바닥을 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였다.

좋은 말 할 때 제게 고민 상담을 받으십시오.

“성가신 녀석.”“아, 그보다 먼저…… 식사부터 하셔야지요. 분명 제대로 끼니도 안 챙기고 다니셨을 것이 뻔하니……!”라온이 부산을 떨며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어느샌가 다가온 병연이 등 뒤에서 라온을 끌어안았다.

“김 형……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느닷없는 병연의 포옹에 놀란 라온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병연은 대답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놀란 녀석의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이런 표정이 보고 싶었나 보다.

이리 걱정해주는 눈빛과 표정이…….

이러니 돌아오고 싶은 거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지.

“김 형…….”“잠시만. 잠시만 이리 있자.”“김 형.”“이제야 숨통이 트여서 그런다. 이제야 살 것 같아.”이제야 살고 싶어졌다.

이렇게라도 살고 싶어졌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깊은 적막이 자선당에 내려앉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깨트린 것은 병연이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라온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닭죽.”“네?”“네 녀석이 만들어 줬던 닭죽이 먹고 싶었다. 그거…… 지금 만들어 줄 수 있어?”라온이 밝은 얼굴로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만들어 오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온은 날다람쥐처럼 금세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텅 빈 공간을 보며 병연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라온을 품었던 가슴과 그녀를 안았던 손길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  *  *

“김 형도 참.”밖으로 나온 라온은 자선당 문풍지 위로 그려지는 병연의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깊이 그늘진 얼굴.

무언가 큰 고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을 안아오던 병연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잔뜩 지쳐 보이셨는데…….

무슨 일일까?

그에게서 느껴지던 바람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아스라이 사라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게다가…….

“어찌 피죽도 한 그릇 못 먹고 다니신 얼굴인지.”말을 하며 라온은 쌀이 담긴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처음이었다.

병연이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은.

라온은 기꺼운 마음으로 닭죽을 끓이기 위해 쌀을 꺼냈다.

항아리 뚜껑을 닫고 돌아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김 형,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됩…….”말을 하는 라온의 입으로 차가운 손이 다가왔다.

놀란 라온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헛!”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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