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82화 (82/131)

82. 초심을 잃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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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5

밤이 깊었다.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는 시각. 그러나 도성 인근에 자리한 화월루는 오색등록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화월루의 하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화월루는 근방에서 기녀들의 기품이 탁월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화월루 주인인 기녀 여랑의 미모와 재능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의 미색에 홀린 사내들은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화월루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도도하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기로 유명한 기녀 여랑은 그 손목 한 번 잡기도 어려운 기녀였다.

그런 콧대 높은 기녀의 방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시린 눈빛, 굳게 다물어진 입매. 열린 동창 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에서 텅 빈 공허함이 느껴지는 사내, 병연이었다.

“바람이 많이 찹니다.”작은 술상을 내오던 여랑은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려 했다.

백운회의 일원인 여랑에게 회주인 병연은 극진히 모셔야 할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병연을 바라보는 여랑의 눈 속에는 그 이상의 정이 담겨 있었다.

병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시게.”그는 사내라면 단박에 미혹되고도 남을 아름다운 여랑에겐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병연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흐리던 하늘에선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은 금세 녹아버렸다.

“아침부터 내리는 것이, 참으로 많이도 옵니다.”여랑이 술잔에 술을 따라 병연에게 내밀었다.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차오르는 술.

정작 술잔을 바라보는 병연의 뇌리엔 김조순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역적 김익순의 손자가 아니신가?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역시 그 할아비에 그 손자로구나. 네 할아비도 그랬지. 이쪽에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정작 충성의 맹약은 다른 곳에 하였지. 네가 네 할아비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구나. 허허허허.’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단숨에 빛을 잃어갔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할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마침내 절망이 되어 무너졌다.

피를 타고 이어진 배신의 유전자.

가슴 속에 커다란 바위가 올려진 듯 갑갑했다.

벗, 세자저하는 자신을 벗이라 불렀다.

“벗, 벗이라…….”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병연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맺혔다.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왕세자의 곁을 지켜왔다.

제 뿌리에 침을 뱉고 조롱했던 잘못에 대한 죄 갚음을 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오욕을 털기 위해…… 그 낙인처럼 찍혀 있는 과거를 털어내기 위해…… 그 기나긴 배신의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내기 위해…… 왕세자를 지켜왔고, 함께 새로운 나라를 꿈꿔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역적들에게 잡혀 어쩔 수 없이 역모에 휩쓸렸던 가엾은 희생자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역모에 가담했던 역적이었다.

왕을, 왕세자를, 이 나라를 완전히 뒤엎으려 했던 역도였던 것이다.

자괴감이 일었다.

왕실을 위협한 역적의 자손이 왕세자의 벗이라니.

지금까지 지키고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율배반적인 현실 앞에 병연은 차라리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술을 마셔도 머릿속은 오히려 또렷해져 왔다.

대체 얼마나 더 마셔야 취할 것인가.

얼마나 술잔을 들어야 혼탁한 머릿속이 가벼워지려나.

얼마나 더 괴로워해야 무거운 과거가 사라지는 것일까.

병연은 술병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그보다 먼저 하얀 손이 술병을 가로챘다.

“회주, 대체 무슨 일인지요? 무에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여랑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내가 그리 보이는가?”“네. 여느 때와는 달라 보이시어요.”“…….”“말씀해 보시어요. 대체 무슨 일이신지요?”문득 병연이 술잔에서 시선을 떼고 여랑을 빤히 응시했다.

여랑의 얼굴 위로 라온의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녀석이 지금 내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이러겠지?

‘김 형,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무슨 고민인지 몰라도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바로 곁에 있는 듯 라온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졌다. 칼날처럼 날카롭던 신경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내내 곧추세우고 있던 등이 느른해진다.

비로소 술기운이 오르는 듯했다. 단지 녀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기억과 어두운 그늘이 한 줌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웃으십시오.”병연의 입에서 라온이 평소에 곧잘 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네?”영문을 알지 못한 여랑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 이리 말했을 것이네. 김 형, 웃으십시오……라고.”“……?”“녀석이라면…… 웃으라 했겠지. 억지로라도 웃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며 웃으라고 했을 것이야.”“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지만, 회주의 웃으시는 얼굴이 궁금하기는 합니다. 단 한 번도 회주의 웃는 낯을 본 적이 없는지라…… 아!”말을 하던 여랑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병연의 얼굴 위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쓸쓸하고 아픈 미소였다.

미소 끝에 짙은 그늘이 담긴, 그러기에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서글픈……그런 미소였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 아름다웠고, 감싸주고 싶었다.

동시에 가슴을 떨리게 하는 그런 미소.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연의 입가에 서린 작은 미소는 촛불이 꺼지듯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뭔가에 홀린 듯 여랑이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여랑아! 여랑 년이 여기에 있느냐?”벌컥 방문이 열리고 잔뜩 취한 사내가 휘청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파서 쉰다는 년이 여기서 놀고 있었네? 가자, 가서 나랑 놀자.”패랭이 갓을 목에 건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여랑의 손목을 낚아챘다.

여랑의 눈매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이게 무슨 짓이어요?”“과연, 소문대로 비싸게 구는 년이로구나. 여기 있다. 네가 좋아하는 돈이다. 이쯤 주면 옷고름을 풀겠느냐?”엽전 한 꾸러미가 여랑의 치마폭에 떨어졌다.

여랑의 표정이 단박에 냉랭해졌다.

예상했다는 듯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로 부족한 모양이구나.그래,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밖에 누구 없니? 손님이 방을 잘못 찾으신 것 같구나. 뫼셔다 드려라.”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녀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왜 이러셔요? 여랑 언니는 내버려두고 저랑 놀아요.”사내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기녀 사월을 옆으로 밀쳐냈다.

“니미럴!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기녀 주제에. 오호라. 듣자하니 저년은 양반들만 상대한다던데. 그래서 나 같은 놈하고는 못 놀겠다 이 말이냐?”“아이참! 억지 부리지 마셔요. 여랑 언니는 원래 손님상엔 안 앉아요.”“그럼 지금 이건 뭐냐? 저놈은 또 뭐고?”사내가 병연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 비릿한 비웃음이 걸렸다.

“아하! 이제 보니 저놈이 저년 기둥서방인가 보구나. 겉으로 고고한 척하더니, 여랑이 저년이 이리 뒤로 호박씨를 깠구나.”어깨를 들썩이며 킬킬 웃어대던 사내가 병연의 앞으로 불쑥 다가섰다.

“넌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사내와 병연 사이로 여랑이 끼어들었다.

“말씀 삼가시어요.”“아, 꼴에 기둥서방도 서방이라 이거냐? 왜? 저놈은 몸에 금싸라기라도 둘렀느냐? 어디 얼마나 대단한 놈인데 천하의 여랑이가 그렇게 감싸고도는 것인지 한번 볼까?”말과 함께 사내는 병연의 술상을 발로 걷어찼다.

와장창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술상에 놓인 술병과 술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꼴같잖게. 돈 준대잖아. 돈 준다고! 잔말 말고 따라와.”사내가 여랑을 잡아끌었다.

“그만둬.”내내 침묵하고 있던 병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의 눈에 조소가 서렸다.

“왜? 제대로 기둥서방 노릇 한번 해 보시게?”사내의 표정이 일순간 돌변했다. 그가 겁박하듯 병연에게 말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저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생긴 건 꼭 계집처럼 생긴 놈이!”사내가 다시 여랑을 끌고 나가려 했다.

“말로는 안 될 녀석이군.”병연이 사내의 어깨를 잡았다.

“이 녀석이!”사내가 병연에게 주먹을 날렸다.

병연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잡고 있던 사내의 손목을 비틀었다. 그리고 무른 두부 누르듯 아래로 꾹 찍어 눌렀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사내가 죽는다며 비명을 쥐어짰다.

병연이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죽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줄까?”“……!”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사라졌다. 취기가 가신 듯, 사내는 마른침만 삼켰다.

그때, 밖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행패를 부린 사내의 일행들이었다.

병연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무리의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점박이 사내가 흘끔 병연을 살피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요. 새벽에 길 떠나기 전에 회포나 풀자고 한 것인데. 이놈이 실수한 모양이군요.”점박이 사내가 동료들에게 서둘러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행패를 부린 사내는 일행들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폐허만이 남았다.

여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방 생활에 이런 일일랑은 부지기수로 겪어왔다.

하지만…… 저 사람 앞에서는 이런 꼴 보이기 싫었는데.

금세 표정을 털어낸 여랑이 병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해하시어요. 새벽에 길 떠나는 보부상들이라, 초저녁부터 술판을 벌이더니 기어이 이 난동을 부리네요.”여랑의 말에 병연이 눈을 가늘게 여미며 물었다.

“보부상?”보부상이라는 사람들의 눈빛이 범상치가 않았다. 특히, 우두머리로 보이는 점박이 사내가 그랬다.

“보부상들이 회포를 풀기에는 기방의 술값이 녹록지 않을 터인데.”“이번에 큰 건수가 있다 하네요.”여랑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술상을 다시 봐야겠어요. 아니, 우선은 방부터 치워야 하나.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아예 뒤채로 가시어요.”“…….”“쇤네 처소에 술상을 차려놓았습니다.”지금까지 백운회의 일로 여러 번 만났지만 이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여랑이 이리 속내를 비친 데는 아까 보았던 병연의 미소가 큰 몫을 단단히 했다.

병연을 바라보는 여랑의 눈에 은근한 열기가 서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독점하고 싶은 사내에 대한 열망이 여랑의 몸을 달구었다.

“회주께선 어찌하여 사내들이 기방을 찾는 줄 아시어요?”“…….”“근심을 털어내기 위함이지요.”복잡한 마음을 지우고, 세상사를 잊기 위해 사내들은 기방을 찾았다.

그것이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라도. 단 한 순간이나마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술과 여인을 찾는다.

“그런가?”“회주의 근심이 무엇인지 털어내시어요. 오늘 밤은 아무 생각 없이 쇤네와 함께 술잔을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여랑이 병연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병연이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뒤늦게 취기가 오른 것일까. 그가 몸을 휘청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분 나쁘지 않은 취기. 좀 전까지만 해도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었는데. 단 한 번도 취기가 기분 좋다 느낀 적이 없었다. 이것도 그 녀석 덕분일까?

뒤따라 나온 여랑이 병연의 팔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회주, 뒤채는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어요.”그러나 병연은 그 손을 거절했다.

“성가시군.”“네?”병연은 대문 쪽을 향해 걸었다. 여랑의 얼굴에 다급함이 들어찼다.

“어디로 가시는 것이어요?”“…….”병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한 사람의 얼굴로 가득했다.

병연은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운 사람이 있는 곳으로.

홍라온, 그 성가신 녀석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  *  *

나뭇가지에 하얀 눈꽃이 폈다.

겨울 햇살이 닿은 눈꽃은 간지럼 타는 어린아이처럼 꺄르르 녹아내렸다.

햇살이 눈부신 정오 무렵.

주막을 나서는 영과 라온에게 옥선 할매가 다가왔다. 노파는 라온에게 두 개의 커다란 씨앗을 건네주었다.

“분이야. 이거 갖고 가라.”“이게 뭐예요?”“몇 해 됐나. 주막에서 하루 묵었던 땡중이 밥값 대신이라며 복숭아를 줬더랬어. 털어봤자 벼룩밖에는 안 나올 거지꼴을 한 중한테 복숭아라도 받았으니 어데여.”“…….” “그런데 말이여, 그 복숭아, 내가 먹었던 복숭아 중에서 젤루 맛난 복숭아였어. 우리 석이도 주고 싶었는데. 그때는 군역 하러 갔지 뭐냐. 그래서 먹이질 못했어. 분이야, 그 씨앗 잘 키워서 나 대신 우리 석이한테 일평생 맛난 복숭아 먹게 해다오.”눈물을 글썽거리는 노파의 얼굴에는 조금의 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노파를 보며 라온 역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마친 라온은 영과 함께 눈 덮인 숲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눈길.

영의 발자국과 라온의 발자국이 나란히 걸었다.

하늘보다 높으신 왕세자 저하. 하지만 하얀 눈 숲에선 오롯한 라온의 사내처럼 느껴졌다.

내 사내, 내 정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한가득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힐끔 영을 곁눈질하던 라온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말머리를 꺼내는 라온의 목소리에 어쩐지 불퉁한 기운이 서려 있다.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느냐?”“뭔가 잊으신 거 없으십니까?”“잊은 거?”영이 제 몸을 둘러보았다.

“잊은 물건은 없다.”“물건이 아닙니다.”“그럼?”라온이 영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소리더냐?”“사람들이 말하길 화초저하께서는 세상에 다시 없을 천재라 하셨습니다.”“말하길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말이다.”“네. 그런 것 같습니다.”팽, 토라진 얼굴로 라온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이 나 무슨 불만 있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맹랑한 모습에 영의 입에서 ‘허’ 마른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뭐냐? 무엇 때문에 마음 새가 불퉁해진 것이냐?”“몰라 물으십니까?”“모르니 물은 것이지. 대체 무엇이냐?”영의 물음에 라온은 잠시 머뭇거렸다.

“무어냐? 말해봐라.”영의 재촉에 라온이 입을 열었다.

“아무 짓도 안 하셨습니다.”“……?”“아무 짓도 안 하질 않으셨습니까?”주막을 나서서 예까지 걷는 동안, 아무 짓도 안 하셨습니다.

평소에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까지 안으려 하고, 입맞춤하셨던 분이…… 반 시진이 넘도록 아무 짓도 안 하셨습니다.

차마 내놓기 부끄러운 말이 라온의 입속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런 라온은 영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윽고.

“하하하하.”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귀여운 녀석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그의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나비 같은 입술이 영의 입술 위로 포르르 날아들었다.

어느새 영의 코앞으로 다가온 라온이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던 것이다.

영의 표정이 멍해졌다.

달콤하고 아련한 향내에 한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영의 귓가에 라온이 속삭였다.

“이것을 잊으셨습니다.”“…….”“싫다고 할 때는 기어코 하시더니…… 낚은 물고기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라온의 작은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그 투덜거림을 잠식하려는 듯 영이 라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발쪽거리는 붉은 입술을 한입에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아스라한 몰아의 세계가 그의 발치로 밀려들었다. 아득한 천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정지한 시간 속엔 영과 라온,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해서…… 차라리 두려운 순간이었다.

마치 이것이 꿈인 것 같아서, 두 눈 똑바로 뜨면 와스스 깨져버릴 신기루 같아서 영은 차마 두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고 싶은 영의 따뜻한 품을 벗어나며 라온이 수줍게 말했다.

“초심을 잃지 마십시오.”“알았다.”너무도 사랑스러워 가슴이 뛰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라온의 존재를 왕실에 알리고 싶다. 떳떳하게 그녀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다.

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로 남기 싫다는 그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화초는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찾아주는 이가 없으면 언제나 외로이 기다려야만 할 운명.

뜨거운 햇살에 잎이 타들어 가고, 뿌리가 말라가도. 그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마냥 기다려야만 한다.

라온은 언젠가는 말라죽을 화초가 될 바엔, 길가의 잡초가 되고 싶다 했다.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잡초.

그리하여 그분 지나시는 길가에 앉아 오가며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꽃이 되길 원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일랑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주고, 주고 또 주고 싶었다. 하염없이 주고 베풀어도 언제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대로 도성으로 가면 되는 것입니까?”“다산 선생은 따로 올라오기로 하였다 하지 않았느냐?”“다른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박두용과 한상익도 있었고 한율을 비롯한 세자의 호위무사들도 있었다.

“따로 언질을 두었으니, 아마도 산 아래에 가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아! 그렇군요.”고개를 끄덕이는 라온의 얼굴에 문득 서운한 기색이 깃들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에 영이 물었다.

“표정이 어찌 그래?”“아닙니다.”“그보다 왜 그것이 궁금한 것이더냐?”라온이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입니다.”저 눈빛, 저 표정.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혹, 언제까지 나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여 물어본 것은 아니겠지?”“네?”“아니. 나도 궁금하여 물어봤다.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절대로. 설마요. 전혀! 아닙니다.”라온이 손사래까지 치며 적극 부인했다.

영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리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그랬던 모양이구나.”라온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영과 함께 걷는 이 길이 더없이 행복하고 좋았다. 이 둘만의 길이 끝없이 펼쳐졌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속내를 들킨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숲 아래까지는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함께 할 수 있으…….

“여보시오.”느닷없는 부름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라온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볼멘소리를 투덜거렸다.

“지나치게 짧은 거 아닙니까? 너무하십니다.”

*  *  *

“여보시오!”보부상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긴 보퉁이를 등에 짊어진 채 영과 라온을 향해 재게 발을 놀렸다.

하얀 눈 위에 찍힌 영과 라온의 발자국이 세 사람의 발자국에 지워졌다. 둘만의 흔적이 사내들에게 무참히 밟히는 것 같아 라온은 입술을 내밀고 말았다.

왠지 두 사람이 독점했던 시간과 세상을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 산과 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낮게 한숨을 쉬고 있노라니 보부상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산 아래, 마을로 가시는 길입니까?”사람 좋게 생긴 사내가 허허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영이 그들을 쓱 훑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먼 곳에 다녀오는 길인가?”말과 행동에서 배어 나오는 기품이 범상치 않아서일까.

보부상들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북쪽에서 물건을 사오는 길입니다.”사내들의 행색을 살피던 영의 시선이 그들의 신발에 멈춰 섰다.

둥그니신.

경험 많은 보부상들이어서 그럴까?

세 보부상 모두 바닥이 넓고 평평하여 깊게 쌓인 눈 위를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 장화 모양의 멱신을 신고 있었다.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괜찮았는가?”“어이쿠. 말도 마십시오. 눈이 얼마나 오는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길은 이번엔 사내들의 봇짐에 가 있었다.

그 시선을 의식한 것일까?

일행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점박이 사내가 묻지도 않은 말에 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귀한 비단이 왔다는 소식에 이 겨울에도 산을 넘었습지요.”“고생이 많겠군.”영과 라온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점박이 사내가 동료들과 함께 따라붙으며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원 무슨 눈이 이리 많이 내렸는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생긴 줄 알았습니다요. 그런데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보아하니 귀한 분들이신 것 같은데…….”“…….”“걸음이 빠르시군요. 이렇게 동행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함께 길동무라도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이번에도 영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마디 붙였지만, 여전히 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겸연쩍은 듯 보부상들은 영과 라온에게서 한발 떨어진 채 뒤따라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던 라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왜 그러느냐?”보부상들의 물음엔 일언반구조차 없던 영이 라온의 말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라온이 영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자꾸만 멀쩡한 길 두고 에둘러 가는 것입니까?”“우연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네?”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나 영은 대답하는 대신 뒤따라 오는 사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눈을 뚫고 굳이 이 산을 넘은 걸 보니, 이곳으로 자주 다닌 모양이군.”“발이 닳도록 다녔지요. 이 근방이라면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있습지요.”“그렇군. 헌데, 좀 전부터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데. 눈치채지 못했는가?”“……네?”사내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드리워졌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길을 좀 잘못 든 것 같군요.”“난 초행이라 길을 모르네. 어디로 가면 되겠는가?”사내가 산세를 훑어보더니, 서쪽 어디쯤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요.”순간, 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리 가면 아랫마을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네만.”“……!”점박이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리가요. 나으리께서는 이 길이 초행이라 하셨잖습니까? 이곳의 지리는 제가 잘 압니다.”“내, 남보다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기억하는 것일세.”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 번 본 것은 쉽게 잊는 법이 없지.”“…….”“오는 동안 이 근방의 지리는 대충 외워두었네.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은 하나. 자네가 가리킨 그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겠지.”“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었군요.”점박 사내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찰나에 불과했다.

짧은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 돌연 품에서 짧은 단도를 꺼내는 점박이는 영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앗!”갑작스러운 사태에 라온은 비명을 삼켰다.

화초저하, 위험합니다.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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