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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81화 (81/131)

81. 걸음마부터 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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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1

산을 뒤덮은 하얀 눈 위로 유백색의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고운 달빛을 받은 설원은 어둠과 어울려 신비로운 푸른빛을 자아냈다.

푸른빛이 스며드는 어둠 속.

영과 라온이 마주 보고 있었다.

라온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영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속적삼 고름을 잡아당겼다. 발치에 흐드러진 붉은 활옷 위로 나비 날개 같은 속적삼이 소복이 쌓였다.

방 안을 스며드는 푸른 빛 사이로 라온의 동그란 어깨가 드러났다.

오소소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에 라온은 어깨를 움츠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긴장한 태를 감추려 애를 써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지켜보던 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긴장했느냐?”“아, 아닙니다.”꼴깍. 그 와중에도 연신 침이 고였다.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상태였다.

그저 꼴깍꼴깍, 마른 침만 삼키는 라온의 뇌리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 두려움은 언젠가 들었던 기생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운종가에서 삼놈이 노릇을 하던 시절.

기방 기녀들의 고민 상담을 하던 중, 그녀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고단한 이야기를 전하며,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매혹적이며, 때로는 유혹하는 듯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하였다.

물론, 가끔은 눈살이 찡그려질 만큼 가혹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기기묘묘한 것이라.

라온에겐 큰 충격이었다.

속내를 살펴보면 기녀들은 순진한 라온을 놀리기 위해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한 말이었건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라온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 중, 라온에게 가장 큰 충격이 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춘화첩이었다.

춘화첩, 남녀 간의 은밀한 장면을 그린 화첩 속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낯 뜨거운 장면들이 가득했다.

기녀들은 한 사내의 여인이 되면 으레 그 춘화첩처럼 해야 한다고 라온에게 속삭였다. 라온을 유혹하기 위한 은밀한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정작 여인이었던 라온은 여인을 엿가락처럼 그려놓았던 그림에 충격을 받아 하얗게 질려 버렸다.

몇 장 보았던 춘화첩의 그림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오늘 밤, 나와 화초저하도 그 춘화첩의 그림처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불에 덴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동시에 막연하기만 했던 두려움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라온은 제 양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심장이 쿵쿵 날뛰고 산길을 뛰어 올라온 듯 숨이 거칠어졌다.

어찌한다? 어찌해?

연신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던 라온이 기어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보아도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비통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못하겠습니다.”영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이제 와 마음이 바뀐 걸까? 하지만 저 참담한 표정은 우려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두근거려야 할 시간에 비통하고 참담한 표정이라니.

영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의문이 담긴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차마 그 눈빛을 마주할 수가 없어 라온은 더더욱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은 채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하겠습니다.”“혹여 마음이 바뀐 것이냐?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게 마음이 없었던 것이더냐?”“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초저하를 연모합니다. 네. 연모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하지만?”“아무리 생각해도 그 그림들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합니까?

목에까지 올라온 말을 입 안에 고인 마른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림?”점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영의 고개가 더더욱 기울어졌다.

그런 그를 향해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게 조금만 말미를 주십시오. 그럼 그림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단련하겠습니다.”“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림은 무엇이고, 몸을 단련하겠다는 것은 또 무엇이냐?”“그러니까…… 그림처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그 그림이라는 것이 대체 무어냐니까?”“춘화첩 말입니다.”“춘화첩?”“기방의 기녀들이 말하길, 사내와 여인이 연모하면 춘화첩의 그림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그래서…….”“그래서 춘화첩의 그림처럼 하려 하였다?”“……아닙니까?”두 눈을 깜빡거리며 묻는 라온의 표정은 진지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하하하하.”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이 순진한 녀석을 어찌할까? 하여, 그리 긴장했던 거란 말이지.

“춘화첩이라. 대체 어떤 것이 그려진 것을 보았느냐?”“그러니까…….”영의 짓궂은 질문에 라온은 잔뜩 울상을 한 채 더듬더듬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못 하겠단 말이지?”“지금 당장 못 하겠다는 것이지, 영영 못 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어둠 속이라. 영의 얼굴에 걸린 짓궂은 표정을 보지 못한 라온이 자분자분 제 속내를 이야기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영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를 어찌할까?”이 어여쁜 녀석을 어찌할까? 이 사랑스러운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숨겨두고 혼자서만 보고 싶었다.

“왜 웃으십니까? 제가 무어 실수라도 한 것입니까?”“없다. 그저 좋아서 웃는 것이다. 네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좋아서.”증명이라도 하는 듯 영은 라온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바르르 떨리는 여린 몸짓이 느껴졌다.

쿡, 영은 라온의 작은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댔다.

“요 작은 머릿속에 그런 음흉한 그림이 들어 있었단 말이렷다.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녀석이 뛰려고 했구나.”“하지만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아닙니까?”“우선 걸음마부터 떼자.”“걸음마는 어찌 떼야 하는 것입니까?”라온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작게 웃음을 흘리던 영이 라온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그리고 속삭인다.

“눈부터 감아라.”말 잘 듣는 아이처럼 라온이 눈을 감았다.

라온의 이마에 입맞춤하던 영의 입술이 감긴 눈자위 위로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그렇게 눈자위에서 콧잔등으로, 콧잔등에서 두 볼로…….

영은 천천히, 부드럽게 라온에게 자신의 표식을 남기기 시작했다.

*  *  *

두 평 남짓한 좁은 방 안엔 열기를 품은 숨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나 한순간, 눈부시게 하얀 라온의 나신을 마주한 영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어둠 속이었지만 라온의 아름다운 모습은 선명하게 그에게 각인되었다.

그녀의 작은 것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여, 영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라온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 올곧은 시선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아찔하고 혼곤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시선에 닿아 있는 살갗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 보지 마십시오.”수줍은 떨림이 고스란히 영에게로 전해졌다.

그 미세한 긴장이 영을 부추겼다. 라온을 바라보는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더듬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무기력한 저항도 간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영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저항하는 라온을 결박한 채 입맞춤을 이어갔다.

라온의 등줄기가 활처럼 휘어졌다.

저릿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흘러내려 갔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 이대로 명멸하는 별처럼 바스러진다고 해도 오직 한 사람,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라온의 잇새로 별빛 같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일순간, 몽혼한 꿈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허공을 허방 짚은 듯 아찔한 부유감이 가슴을 날뛰게 했다. 손끝으로, 발끝으로 아릿한 감각이 쉼 없이 스며들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점점 한 곳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오직 한 곳, 오직 한 사람을 향한 본능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하…….”느닷없는 질주에 덜컥 겁이 났다.

라온은 어린아이처럼 영의 가슴팍에 힘껏 매달렸다.

“나 여기 있느니. 네 곁에 있느니.”어린아이처럼 두려워하는 라온을 영이 다독거렸다.

그러나 그 역시도 라온과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정점을 향해 치달리고 싶은 열망이 그를 휘감았다. 귓가에 떨어지는 라온의 숨결이, 그녀의 몸짓이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은 조바심내지 않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진실로 원했던 한 사람이 품속에 있었다.

너무 작고, 너무 애틋하여 차마 바로 쥘 수도 없었던 한 여인.

하여, 사랑한 여인이, 자신보다 더 사랑할 여인이…… 하여, 영원토록 사랑할 여인이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한다, 원한다, 오직 너만을 원한다.’소리 없는 울림이 공기 중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라온을 더듬는 눈길과 손길에 영의 온전한 마음이 담겼다. 갖고 싶은 욕망과 지켜주고 싶은 열망이 한 데로 뒤엉켰다.

서로를 갈망하는 두 사람은 아찔한 황홀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앞으로 함께 꽃잠 잘 수많은 밤중에 첫 밤이 깊어갔다.

*  *  *

창가로 희붐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에 라온은 콧등을 찡그렸다.

온몸이 물 먹인 솜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벌써 아침이네.”아쉬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라온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아직 잠이 덜 깨 안개처럼 흐릿한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화초저하?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라온은 손등을 들어 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가를 힘껏 문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화초저하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화초저하가 내 곁에……?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던 이불. 그러나 그것은 이불이 아니었다. 자신을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화초저하의 팔이었다.

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서늘한 것이…….

이불 속으로 쏙 머리를 집어넣었던 라온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숙였다.

벗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비명이라도 지르려는 찰나, 뒤늦게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활옷을 입고, 화초 저하와 속마음을 나누었지.

그리고, 그리고…….

비로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을 인지한 이후로는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난밤엔 어둠 속인지라 제법 견딜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날이 훤하게 밝았다.

곁에 누워 있는 화초저하의 속눈썹이 들여다보일 만큼.

어쩌지?

라온은 눈동자를 굴리며 서둘러 생각을 짜냈다.

저쪽에 허물처럼 쌓여 있는 옷가지가 보였다. 그렇다면 우선은 옷부터 입는 것이 순서겠지.

살금살금, 라온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속내를 알기라도 한 것일까?

잠결에 뒤척이던 영이 라온을 등 뒤에서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헛!”새어나오는 비명을 겨우 삼킨 라온은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잠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영의 숨결이 고르게 오르내리면 조심조심 그 품에서 조금씩, 조금씩 벗어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슴과 허리에 머물러 있던 그의 따뜻한 온기가 봄눈 녹듯 서서히 흩어졌다. 아쉬웠지만…… 그것보다는 수줍음이 먼저였다.

간신히 영의 품을 빠져나온 라온은 입고 왔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찾아 입었다. 아직 아랫단이 눅눅했다. 겨울이라 온기가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입고 있다 보면 마르겠지.

지금 딱히 다른 것을 입을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활옷을 다시 입을 수도 없지 없었던 터였다.

그렇게 옷을 입은 라온은 까치발을 한 채 방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아스라한 미련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호기심과 충동일지도 모른다.

어찌하여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보고 싶었다.

내 사내의 얼굴을, 나를 연모한다고 속삭이던 그 사람을 찬찬히 더듬어 보고 싶었다.

라온은 살금살금 무릎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잠든 영의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듯한 이마와 날카로운 콧날, 그린 듯 아름다운 눈매와 붉은 입술이 아침 햇살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사내가 어쩌자고 이리 곱다는 것입니까.”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라온의 목소리에 불퉁한 기색이 깃들었다.

아무래도 이건 불공평했다.

여인인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영의 모습. 손을 들어 제 볼을 만지작거리던 라온은 이번에는 잠든 영의 얼굴로 팔을 뻗었다.

손끝으로 그의 이마를 어루만진다.

날렵한 콧등으로 손가락을 흘러내렸다.

여린 꽃잎 같은 입술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기묘한 전율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선홍빛의 입술이 그녀를 유혹했다.

잘 익은 과일을 마주한 듯 입 안에 새콤한 단침이 고였다.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킨 라온은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여 누가 보지는 않을까 살피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

가끔, 아주 가끔,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일을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라온은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영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라온은 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쪽.

찰나에 이뤄진 수줍은 입맞춤.

영의 입술에선 달고 향긋한 향기가 났다.

아련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듯한 그런 향기였다.

잠시 입술을 뗀 채 머뭇거리던 라온은 다시 입술을 그에게로 가져갔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저 달콤한 향내를 머금고 싶었다.

정말 딱 한 번만 더.

그렇게 딱 한 번만을 되새기며 라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잠자는 줄 알았던 영이 눈을 떴다.

“헉!”놀란 라온은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뭐하는 것이냐?”“잘, 잘못했습니다.”너무 놀라 엉뚱한 소리를 내뱉은 라온은 그대로 쪼르르 문밖으로 달려 나가버렸다.

“감히…….”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영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그는 라온의 입술이 닿았던 제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다시 빼꼼 문이 열리며 라온이 머리를 내밀었다.

“홍라온.”눈을 감은 채 영이 라온을 불렀다.

“……네.”풀죽은 목소리가 영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이리와.”영은 라온을 향해 팔을 뻗었다.

“가면요?”불퉁하게 대답하면서도 라온은 주섬주섬 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몸을 일으킨 영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라온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감히 왕세자의 입술에 허락도 없이 입맞춤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어젯밤에는 왕세자니, 뭐니 생각하지 말자고 하셨던 분이…….”말을 덧붙이는 입술 위로 영의 입술이 날아들었다.

“감히 왕세자의 입술에 허락도 없이 입맞춤한 건 돌려주마. 그리고…….”영은 단숨에 라온을 끌어당겨 제 품속에 가둬버렸다.

“이건 허락 없이 입맞춤한 벌이다.”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농밀해졌다.

그 눈 속에 담긴 저의를 알기에 라온은 황급히 몸을 뺐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단단히 결박당한 라온은 다시 이불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  *  *

방 깊숙이까지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까지 영의 품에 안겨 있던 라온이 이불 밖으로 쏙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영이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한숨만 더 자고 일어나자.”“이미 늦었습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평소엔 잠도 없던 분이 어찌 이리 늦장을 부리십니까?”“그러게 말이다. 어찌 이리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것인지. 도통 모르겠구나.”“어서 일어나십시오.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다산 선생의 집으로는 아니 간다.”“안 간단 말입니까?”“그래. 일어나면 곧장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나눠드릴 수 없는 복숭아라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아마 벌써 한양으로 출발하셨을 거야.”“할아버지께서 한양으로 가셨단 말입니까?”의기소침하던 라온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한양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구나.”“무슨 일이 그리 많습니까?”“우선은…….”“우선은?”“네 환관복부터 벗겨야지.”“제 환관복……부터라고 말입니까?”무심결에 영의 말을 따라 하던 라온이 용수철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무어?”덩달아 놀란 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제 환관복을 벗긴다고요?”“그래야지. 그래야 너를…….”온전한 나의 여인으로 들이지 않겠느냐.

라온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송구하오나, 그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뭐라?”“전 자선당의 홍라온으로 있고 싶습니다.”“어째서?”라온을 환관이 아닌 여인으로 만드는 것은 영에게 있어 다른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라온은 여인이 되길 거부하고 있었다.

“싫으냐?”“…….”“내 곁에 있는 것이 싫으냐?”“곁에 있고 싶어 그러는 것입니다.”“곁에 있고 싶은데 어찌 그래?”라온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언제나 곁을 지키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숙의 마마처럼 저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싶진 않습니다. 궁궐이라는 커다란 조롱에 갇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영은 그녀가 다다르기엔 너무 높은 하늘이었다. 지금처럼 지척에서 곁을 지킬 수는 없으리라.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저어하는 이유일랑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잣대가 자신과 라온을 갈라놓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영이 라온을 품속 깊숙이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라. 그 누구도 너와 나를 갈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 나를 너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그런 바보 같은 사내로 만들어버리질 않았느냐.”영의 단단한 맹세에도 라온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믿기 때문에 더더욱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저의 존재는 세자 저하께 누가 될 수도 있습니다.’영은 큰 뜻을 품고 드넓은 창공을 향해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에 얹혀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만큼 라온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영에겐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에게 왕세자를 향해 발톱을 세울 명문을 만들어 줄 것이다.

하여, 영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차라리 자선당의 홍라온으로, 환관 홍라온으로 그의 남아 곁을 지키는 것이 나으리라.

“제가 환관 홍라온으로 있으면 오히려 저하의 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라도 저하의 그림자가 되어 저하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라온아.”나직한 부름에 라온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약조해주십시오. 당분간은 이대로 그저 환관 홍라온으로 저하의 곁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훗날 저하께서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실 때까지. 제가 스스로 여인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땐 진실로 저하의 온전한 여인이 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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