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나를 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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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
선연한 붉은 옷이 흡사 꽃처럼 보였다.
옷자락 가득 흐드러지게 수자 놓인 연꽃이 하도 고와 금방이라도 향긋한 향내가 날 듯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입는 옷이라.
눈이 부시도록 고왔다. 너무 고와 눈물이 날 만큼…….
하지만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라온은 십장생이 수놓인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아무래도 주막 할머니의 고약한 장난 같습니다.”“장난이라…….”“가서 물어봐야겠습니다. 대체 이런 고약한 장난을 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방을 나가려는 라온을 영이 붙잡았다.
“그만둬라. 네가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이상한 분 같다고 말이다.”“그건 제 짐작이지 사실이 아니질 않습니까? 말리지 마십시오. 정말 곱씹을수록 이상하고 고약한 노파입니다. 부엌에서도 그렇고…….”말을 하던 라온은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쩌자고 부엌에서의 일을 입에 담았을까.
그렇지 않아도 그 일을 생각하면 눈앞에 새까매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라온의 얼굴이 석류처럼 붉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주막의 노파를 찾아가야 할 판이었다.
“이 고약한 할머니를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부러 큰소리를 치며 라온은 방을 나섰다.
* * *
휘이이이이잉.
방을 나선 라온을 기다리는 것은 칼날처럼 시린 겨울바람이었다.
“으, 춥다.”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은 라온은 후다닥 작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단숨에 주막 안채로 달려간 그녀는 불 켜진 방문 앞에서 목청을 다듬었다.
“할머니.”“…….”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못 들으셨나?
“할머…… 니.”아랫배에 힘을 주고 다시 부르는 찰나.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며 노파가 주름진 얼굴을 드러냈다.
“할머니, 이 옷 말입니다. 좀 이상해서…….”“분이냐?”“네?”느닷없는 질문에 라온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노파가 말을 이었다.
“분이 너, 어째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돌아다니는겨? 첫날밤에 새색시가 이러면 안 되쟤.”“할머니, 뭘 착각하셨는가 본데요. 저는 분이가 아닙니다.”“왜? 석이 그놈이 뭐를 서운하게 했냐?”“할머니, 그러니까 저는요…….”“석이 그놈이 무뚝뚝해서 그렇지, 속정은 깊은 놈이다. 분이 너가 지금 입고 있는 그 옷도 석이 놈이 마련한 것이쟤.”“할머니…….”“분이 너도 알쟤? 석이 놈이 그 옷 마련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군포 대신에 마련한 옷이 아니여, 그 옷이. 내 아들놈이지만 사내로 보자면 참으로 장한 사내여. 그러니 분이야, 그놈이 네 성에 차지 않아도 네가 눈 한번 꾹 감아버려라.”“…….”“뭐 하고 있는지 거여? 이러다 날 새겠다. 석이 놈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분이 네가 젤루 잘 알고 있지 않어? 그놈, 장가간 날 받아놓고 죽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놈이 아니여. 분이야, 너도 기억 나쟤? 왜 사람들이 우리 석이 죽었다고 우겨대질 않았냐?”노파의 주름진 눈가에 진득한 눈물이 세월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다 석이 놈이 죽었다고 해도 너랑 나랑 우리 둘은 믿었쟤. 그놈이 돌아올 거라고 말이여. 지금 생각해도 참말 웃기쟤? 이리 멀쩡히 살아서 장가까지 가는 놈을 두고 죽었다고 하니. 말이라는 게 참말로 흉한 것이여.”자글자글한 주름 위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 눈물 지으면서도 아이처럼 환히 웃는 노파를 보며 라온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분이 참말로 곱네. 석이 놈이 그리 안달을 낼 만혔어.”노파는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라온을 분이라는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이런 고약한 장난을 치느냐 묻는 것은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노파의 얼룩진 눈동자엔 슬픔과 탄식이 백태가 되어 앉아 있었다.
“분이야, 석이 골나겠다. 어여 들어가. 꽃잠 잘 새색시가 찬바람 쐬고 다니면 못 써.”노파가 손을 내저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온의 옷자락 위로 노파의 마지막 당부가 내려앉았다.
“분이야, 놓지 마라.”“네?”“귀한 것일수록 손에 꼭 쥐는 법이쟤. 그러니 절대 놓지 마라. 그게 네 목숨줄이거니 생각하고 네 사내 손 절대 놓지 마라. 알았냐?”“……네.”“그래, 그래야지. 곱네, 우리 분이 참말로 곱네.”흐뭇한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던 노파가 방문을 닫았다.
닫힌 방문 앞에서 라온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왜 여기에 왔는가를 깨닫고는 뒤늦게 당황했다.
“어? 이게 아닌데.”할머니,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런 활옷 말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은 없습니까?
그러나 입 안을 가득 채운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노파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불 꺼진 방 안에선 낮게 코 고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영의 물음에 라온은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리 되었습니다.”“그러기에 쓸데없는 짓은 관두라고 하질 않았느냐?”기껏 따뜻한 물에 녹인 몸을 다시 꽁꽁 얼린 채 되돌아온 라온을 보며 영이 눈매를 매섭게 치떴다.
“매병 걸린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방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이 옷을 입고 어찌 밤을 보내야 할까.
라온의 어깨가 절로 아래로 축 내려갔다.
속내를 꿰뚫어보듯 영이 눈매를 초승달 모양으로 여몄다.
“정 불편하면 벗어도 상관없다만.”“제가 상관이 있습니다.”라온이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찌 그리 자위처럼 가시를 세우는 것이냐?”“그거야, 저하께서 자꾸만 제게 이상한 장난을 치시니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장난? 네게 내 행동들이 모두 장난으로 느껴지더냐?”“아닙니까?”장난으로 받아들였던가?
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각해진 분위기에 라온이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무에 잘못하였나?
조심스레 영의 눈치를 살폈다. 괜스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숨조차 크게 쉬질 못하겠다.
황망하여 눈동자가 굴리는 라온의 뇌리로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참! 할아버지께서 전해주라고 했던 것이 있습니다.”“다산 선생께서?”“네. 만약 오늘 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유숙하게 되면 이 서찰을 꼭 저하께 전해드리라고 하였습니다.”영은 라온이 건넨 서찰을 펼쳐 들었다.
다산 선생의 정갈한 필체가 영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그거 아시옵니까, 저하. 한겨울의 복숭아는 인세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지요. 만약 사람이 이것을 취하고자 한다면 응당 그 허물마저도 모두 감내해야 합니다.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기에 감히 사람이 감내할 수 없는 짐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복숭아를 탐하시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저하께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연신 어깨너머를 힐끔거리던 라온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할아버지는 내가 무척 미덥지 못한 모양이구나.”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러다 문득 눈동자에 이채가 들어섰다.
단순한 의심일까? 아니면 손녀에 대한 염려?
하지만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염려치곤 지나친 감이 있다.
두 사람만이 마주한 자리에서도 라온에 대한 염려와 우려를 충분히 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서찰로 다시 쐐기를 박고자 했던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영의 생각이 깊어졌다.
단순히 라온의 정체가 여인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득, 윤성의 말도 떠올랐다.
그 역시 물었다. 라온에 대해 아느냐고. 당신은 절대로 홍라온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무언가 더 깊은 것이 있다. 대체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일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라온이 물었다.
영은 마주쳐 오는 라온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촉촉한 눈망울엔 순수한 의문과 호기심이 매달려 있었다. 티끌만 한 거짓도 존재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라온 역시 알지 못하는 무언가란 뜻.
지금까지 그녀가 숨겨왔던 것은 자신이 여인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라온,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별것 아닌 것에서부터 최악의 경우까지.
“혹시 제 말 때문에 기분이라도 나빠지셨습니까? 그렇다면…….”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였다.”라온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며 영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저 아이가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결심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그 독이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것이라 하여도.
영이 앞에 놓인 술병을 기울였다.
제 앞에 놓인 술잔에 먼저 술을 채운 영이 이번에는 라온에게 물었다.
“너도 한잔할 테냐?”“네?”하지만…… 마치 합환주같지 않습니까?
“사양하겠습니다.”“어쩐 일이더냐?”“그 술 나눠마셨다간 저하와 저, 백년해로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머쓱한 기분에 라온이 가볍게 농담을 했다.
“하면 안 되느냐?”그때였다.
영이 조금 날이 선 음성으로 물었다.
“너와 나, 이 술 나눠 마시고 함께 백년해로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당치도 않는 소리 마십시오. 어디라고 감히 제가…….”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게…… 제 말은. 아, 그렇지요. 처음 자선당에서 저와 저하가 만났을 때 저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하의 옆자린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고 말입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네.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감히 뉘의 옆자리를 탐내겠습니까.”“……탐내라.”“네?”“탐내란 말이다. 내가 무어라고 네가 탐내지 못한단 말이냐?”“저하.”영의 시선이 라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원한다.
오직 한 사람, 너를 원한다.
속마음이 훤히 내보이는 눈빛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정녕 몰라서 제게 그리 물으시는 것입니까? 저하께선 이 나라의 왕세자가 아니십니까? 이 나라의 국본이십니다.” 그러니 그리 바라보지 마십시오. 자꾸만 기대할 만한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저라고 어찌 욕심이 안 생기겠습니까.
하지만 올려다보기에도 벅찬 분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지 마십시오. 제발…… 흔들지 마십시오.
“라온아…….”“싫습니다. 저하께서 원하신다고 해도 제가 싫습니다. 저하의 옆자리, 감히 원할 수가 없습니다.”그 단호한 말이 영의 명치에 가시처럼 박혔다.
잔잔하던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지금 싫다 하였느냐?”“네. 싫습니다.”“진심이더냐?”“…….”“진심이냐 물었다.”“제 진심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내겐 중요하다. 그럼 말해봐라. 지금까지 너와 내가 했던 그 모든 것들은 무엇이냐? 너를 연모한다고 하였다. 너 역시 나를 연모한다고 하질 않았느냐? 그것은 무엇이냐? 그 모든 행동과 말들이 무어냐?”“한순간의 유희입니다.”“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라.”내 혼백까지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주제에. 이제 와 무어라?
싫어? 유희?
너의 의미 없는 한 마디가 칼날이 되어 내 심장에 박히는 것을 모르느냐?
“내가 너를 원한다.”라온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제자리를 찾은 그녀가 다시 단호히 말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환관일 뿐. 여인도 무엇도 아닙……!”그러나 더 이상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서늘한 영의 눈빛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그대로 라온의 얼굴 위로 별똥별처럼 쏟아져 내렸다.
영의 커다란 손이 라온의 가느다란 뒷목을 움켜쥐었다.
입술과 입술이 하나로 겹쳐졌다.
한순간에 입술을 빼앗긴 라온이 작게 저항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영의 숨결은 라온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라온의 입술은 봄에 피어난 어린 꽃잎처럼 여리고 부드러웠다. 맑고 청아한 향내를 머금고 있는 그것을 영원토록 제 입 안에 봉인하고 싶었다.
또한, 영은 알고 있었다. 이 입 안에 한번 맛보면 더더욱 맛보고 싶은 하늘 열매가 숨어 있다는 것을. 하여,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라온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영은 어린아이 달래듯 그녀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온기를 품은 그녀의 입술을 영이 베어 물 듯 살짝 깨물었다.
“앗!”놀란 라온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영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성마른 마음을 고스란히 품은 아릿한 혀끝이 라온의 입 안을 헤집었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그것은 라온의 잇몸을 두드리고, 자꾸만 수줍게 안으로 달아나는 그녀를 혀를 잡아 당겼다.
내게서 달아나지 마라, 내게서 멀어지지 마.
나른한 향내가 금세 그의 입 안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기갈은 여전했다.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라온과 입맞춤할 때마다 느끼는 이 갈증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강도를 더해갔다.
어찌해야 이 목마름이 사라질 것인가.
어찌해야 너를 볼 때마다 안달하지 않을 것인가.
라온을 볼 때면 언제나 향기로운 꽃밭에 발을 디딘 듯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 몽혼한 꿈결의 한 자락인 듯 한없이 아련해지고는 했다.
그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영의 마음에 조바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하여, 그리웠다.
라온이 곁에 있음에도 언제나 그녀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라온아, 나를 그저 사내로 보아주면 안 되겠느냐?”“저하…….”“왕세자느니 하는 건 저만치로 미뤄두고. 너와 나, 그저 서로를 연모하는 사내와 여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냐?”“저하.”라온은 오롯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영의 진실이 라온의 마음을 흔들었다. 영의 순수한 고백이 라온의 마음에 쌓인 둑을 허물어버렸다.
한순간의 유희라도 좋았다.
눈 뜨면 잊힐 꿈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이 사내의 여인이 되고 싶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의 오롯한 연인이 되고 싶었다.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아.”“어쩌면 제가 욕심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저하의 손, 놓고 싶지 않아 떼를 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습니까?”“내 명이 없는 한, 너는 감히 내 손을 놓을 수도, 놓아서도 아니 된다.”“정말입니다. 이리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그래. 나를 놓지 마라.”영의 눈 속에 라온의 모습이 또렷이 맺혔다.
설원 위에 피어난 붉은 매화 같은 여인.
아리도록 아름다워 차라리 서글픈 그 여인을 영은 제 품속 깊숙이 끌어당겼다.
이윽고 떨리는 한숨 소리와 함께 붉은 활옷이 두 사람의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위로 영의 옷자락 역시 허물처럼 쌓였다.
어디선가 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한 사내의 여인이 되고, 한 여인의 오롯한 사내가 되는 비밀스러운 밤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