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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79화 (79/131)

79. 이 주막, 대체 정체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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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4

“뭐라고 하셨습니까?”“너를 사모한다.”“지금…… 사모라고 하셨습니까?”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이라. 막상 입에 담아보지만, 여전히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설레는 단어.

언(言)에 담긴 마음이 라온의 심장으로 파고든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어째서 눈물이 나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모한다는 영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손끝이 떨리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영의 손이 라온의 두 뺨을 꼭 감쌌다. 그리고 힘 있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타는 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사모한다. 사모한다. 홍라온을 사모한다.”라온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저하께 무엇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네게 무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다.”“저하께서 바라지 않으신다고 하여도 저는 해드리고 싶습니다. 연모하는 이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사내나 여인이나 모두 똑같단 말입니다.”답답한 마음에 라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켜보던 영의 입가에 문득 긴 미소가 걸렸다.

“그 마음으로 족하다.”“무슨 뜻입니까?”“너의 연모 말이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것 외에는 네가 날 위해 무얼 할 필요는 없다. 너는 그저 열심히 나를 연모하면 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어떤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 무얼 해줄 필요도 없다.”“하지만…….”“내가 해줄 것이다. 내가 네가 원하는 사내가 되어줄 것이다.”단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이질적인 감정. 일평생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낯선 경험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가 되고,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해 주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여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저하.”영을 부르는 라온의 음성에 습윤한 물기가 서렸다. 고개를 돌리는데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귀엽게 색이 드는 콧방울을 손끝으로 간질이며 영이 말을 이었다.

“다만……”“……?”“더는 내게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더는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이 꽉 잠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초저하께서 호되게 야단을 치신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헌데, 어찌 자꾸 우는 것이냐?”“모르겠습니다.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울지 마라.”“네.”대답은 했지만, 좀처럼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

지금껏 누구 앞에서도 이리 속 시원하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울지 말라 하였다.”“네네.”“자꾸 그리 울면, 정말 벌을 줄 것이야.”“네.”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라온의 얼굴은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보다 못한 영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꾹꾹 누르는 입맞춤에 서서히 눈물이 걷히기 시작했다.

오른쪽 뺨과 왼쪽 뺨을 천천히 오가던 입술이 콧등을 타고 내려왔다.

인중 언저리를 맴돌던 그의 입술이 간질이듯 라온의 입술 위를 맴돌았다.

그의 입술에 묻어 있던 달고 씁쓸한 눈물이 그녀의 입 안으로 새어들어 갔다. 마치 어린 산짐승처럼 라온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할짝거렸다.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기갈을 느끼는 아이처럼 그의 입술을 탐하는 라온의 모습이 영의 심장을 두드렸다.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미치도록 아련한 그 일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무언가 영을 옥죄고 있던 단단한 것이 툭 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라온아.”“저하…….”“다시 한 번 묻겠다. 달아날 테면 지금 달아나라.”“…….”“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달아난다고 해도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 것이야.”말과 함께 영은 라온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 따뜻한 감촉을, 이 아릿하면서도 나른한 기분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  *  *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국본, 조선의 몇 없는 적통의 왕세자. 그것이 그의 이름이자, 발목에 채워진 고귀한 족쇄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늦은 밤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그는 왕세자여야 했다.

사사로운 것은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궁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삿된 입들은 그의 행동에 대해 수군거리고는 하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소년에게 세자의 방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지독하게 넓었다.

그 너른 방에 언제나 혼자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늦은 밤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그는 혼자여야 했다.

세상을 모두 갖고 태어났으나,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갖지 못했다.

어머니의 품속이 그리웠다.

아버지의 자상한 손길을 느껴보고 싶어 입 안이 말라갔다.

그러나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다른 이들이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진실로 그가 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참으라 하였다.

왕이 될 귀한 분, 인내하여야 큰사람이 된다 하였다.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실 분, 외로움도 홀로 삭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했다.

외로워도, 아파도, 섬뜩한 악몽에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도 품에 안아주는 이가 없었다.

사라져버린 기억의 저편, 아득한 어느 어린 시절.

그저 캄캄한 어둠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던 그 어느 날 이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만 감았다 하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벽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작고 갑갑한 나무통에 갇히는 악몽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의 잠결을 지켜주는 이는 없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실로 갖고 싶은 이가 없었기에, 진실로 곁에 두는 이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모두가 말했다.

왕세자의 삶이란 그토록 시린 것이라고.

아무리 따뜻한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어도 한기가 느끼는 것이 왕의 삶이라고.

하여 참았다. 참아야 한다기에, 인내하고 견뎌내야 한다기에 참고 또 참았다. 군왕은 특별히 친애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백성의 어버이가 될 자에겐 특별히 아끼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고 하기에 진실로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홍라온, 이 아이만은 갖고 싶다.

참고 싶지 않았다.

진실로 갖고 싶은 한 가지, 품고 싶은 유일한 것이 되었다.

그러기에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영은 얼어버린 라온을 자신을 바라보도록 바로 앉혔다. 그리고 얼굴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물기를 머금은 여린 입술이 그의 입술 끝에 와 닿는다.

바르르 떨리는 놀란 숨결이 그대로 영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더불어 치자향을 닮은 달콤한 향내도 입 안 가득 들어찼다.

아련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그 향기를 머금는 순간, 영은 진실로 라온이 그리워졌다. 제 품에 안고 있음에도 행여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졌다.

연한 입술을 더듬는 숨결이 좀 더 깊어졌다. 눈앞의 라온이 실재하지 않는 듯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그녀를 깊이 안고 싶었다.

사람에게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라온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바르르 떨리는 라온의 작은 몸을, 심장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영의 심장에 붉은 욕망이 꽃잎처럼 피어났다.

라온을 감싸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목덜미를 그러안고 있는 손끝에 알알한 기운이 맺혔다.

이내 영의 길고 매끈한 손길이 라온의 뒷목을 훑고 내려간다. 가녀리고 날렵한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손길. 느닷없는 감각에 라온의 입 안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영의 입 안에 봉인되었다.

그녀의 날숨과 들숨, 심지어는 가느다란 탄성마저도 그의 입 안에 가둬진 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영은 집요하도록 라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미의 젖무덤을 물고 놓지 않는 갓난아이처럼 그는 라온의 붉은 입 안을 무람없이 침범했다.

이촉을 더듬는 날카로운 감각에 라온의 전신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물속을 찰방거리는 발끝으로 연신 저릿한 감각이 치고 들어왔다.

“저하…….”꽉 잠긴 목에서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에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가득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영의 입술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눈처럼 하얀 목덜미와 가쁘게 오르내리는 쇄골이 유혹하듯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밤에는 왕세자가 아닌, 평범한 사내가 되고 싶었다.

형식과 규범에 얽매이는 국본이 아니라 사모하는 이를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그런 온전한 사내가 되고 싶었다.

영은 열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라온은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간질이던 영의 입술이 좀 더 아래로 움직였다.

“라온아…….”라온을 부르는 영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함께 흘러나왔다.

귓전에 울려 퍼지는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것과 어울려졌다.

뒤엉킨 심장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뱃속에서 뭔가 뜨거운 공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뜨거운 공기가 부풀어 오를수록, 라온을 향한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온몸이 쾅 하고 폭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동시에 이렇게 사라진다고 해도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 그녀를 품 안에 안은 채 명멸하는 별처럼 아스라이 바스러져 버리고 싶었다.

*  *  *

“옥선 할매요?”어린 소년이 두 눈을 깜빡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 근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할매예요.”“유명해?”마주 앉아 있던 한상익이 소년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어찌 유명한 것이더냐?”그의 물음에 소년이 검지를 펼쳐 들고 제 머리 옆에 빙빙 돌려 보였다.

“미쳤어?”옆에서 구운 고구마를 먹던 박두용이 쯧쯧 혀를 찼다.

저녁을 마친 박두용과 한상익은 정약용의 행랑채에서 어린 소년과 수다 삼매경에 빠진 참이었다.

한겨울에 때 아닌 복숭아 타령을 하던 삼미 선생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였다. 커다란 덩치의 하인 녀석이 정약용이 있는 사랑채 앞을 떡하니 지키고 섰기 때문이다.

세자저하 돌아오실 때까지는 이 집구석에서 꼼짝도 않겠다는 박두용의 집념에 정약용은 행랑채를 내주라 하였다.

소박하게 차려진 저녁상을 물린 한상익은 주전부리로 구운 고구마를 가져온 어린 종자에게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옥선 할매가 뉘인지. 아까부터 하인들이 옥선 할매, 옥선 할매, 하며 저희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자기가 하늘나라 옥황선녀라고 우기는 할매지요.”“옥황선녀?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고구마를 우물거리며 박두용이 맞장구를 쳤다.

“제 말이요. 그런데 그뿐이면 말을 안 해요. 소문으로는 그 주막에 머무는 사람들은 죄다 곤혹스러운 일을 당한대요.”“별난 할멈이네.”“매병 걸리기 전에는 좋은 할매였는데…….”소년이 아쉽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할매 아들이 군포(軍布)를 내지 못해 군역을 하러 가지만 않았어도. 할매가 저리 정신 놓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매병 걸리기 전에는 우리 동네에서 최고로 총기가 좋은 할매였거든요.”“그 집에 우환이 있었느냐?”한상익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혼삿날 잡아놓은 할매 아들이 군대에 끌려갔지 뭐예요. 그런데 성벽 쌓는 일에 동원되었다가 그만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죽었대요. 그때 이후로 시름시름 앓던 할매가 재작년인가, 기어이 정신줄을 놓았지요.”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

오죽 슬프고 괴로우면 단장의 슬픔이라 하였다.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아득한 슬픔이라. 그리 총기를 잃었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안 됐구나.”일순, 방 안에 숙연한 기운이 번졌다.

“제 말이요. 예전에는 그래도 제법 멀쩡한 날이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없다고 하네요. 어쨌든 그 이후로는 주막에 묵었던 보부상들이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합니다.”“곤란한 일? 대체 무슨 일인데?”“그게…… 그…….”“그게 뭐?”“사내랑 여인이랑 그…….”어린 소년이 하기에는 다소 껄끄러운 말인지라.

조금 전까지 조잘조잘 잘만 떠들던 소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빤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두용이 주름진 입매를 길게 늘였다.

“아하, 그런 얘기란 말이지.”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표정.

소년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거참, 할망구가 노망이 들어도 곱게 들 것이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는고. 흐흐흐. 그런데 말이다, 혹시 부러 거기 찾아가는 능청맞은 인사는 없느냐?”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하는 박두용을 향해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리 쳐다보느냐?”“그런데 어르신은 걱정도 안 되세요?”“걱정?”연신 고구마를 쩝쩝거리던 박두용이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었다.

“어르신이 모시는 귀하신 분 말입니다.”“갑자기 그분은 왜?”“그분께서 거기 갔는데, 걱정 안 되십니까?”“…….”“…….”잠시 침묵이 일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사태를 파악한 박두용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뭐야? 그럼 네 주인이 우리 귀하신 세자저하를 보낸 곳이 매병 걸린 할망구의 주막이란 말이냐?”“박가야, 너 지금까지 여기서 뭘 듣고 있었던 것이냐?”한상익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박두용의 눈매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한가, 네 이놈. 그걸 알면서도 거기 구들장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냐?”“등 붙이고 누워버릴까 고민 중이다.”“이놈아, 당장에 우리 저하 찾아가야 하지 않겠느냐?”“이 밤에 무슨 수로 눈 쌓인 숲으로 들어간단 말이냐? 저하를 뵙기도 전에 저승사자를 먼저 만나겠구나.”“그렇다고 이리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괜한 짓 하지 말고 먹던 고구마나 마저 먹어라.”한상익이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고구마 하나를 박두용의 손에 쥐여주었다.

“세자 저하께서 여인과 함께 그곳으로 간 것도 아닌데, 무에 그리 걱정이란 말이냐? 쓸데없는 걱정 말고, 지금은 다산 선생 구워삶을 방법이나 논의하자꾸나.”

*  *  *

“보지 마십시오. 보시면 안 됩니…… 엣취.”욕조에서 나온 라온은 젖은 옷을 벗고 옥선 할매가 준비해둔 마른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정말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엣취.”“안 본다질 않느냐?”라온의 말에 벽을 향해 돌아 앉아 있던 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는가 보다.

다행이다. 라온의 마음도 자신과 같았다. 언제나 싫다 하며 밀어내 조금이라도 저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찌하나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 어여쁜 입술로 말하지 않았던가.

좋아한다고, 연모한다고 말이다.

영의 입귀가 길게 늘어졌다. 미소를 지은 채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각거리며 옷자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도 뭐가 걱정인지, 다시 당부하는 듯 라온이 말했다.

“절대, 절대 보면 안 됩니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의 방에는 갈아입을 옷과 야참인 듯 보이는 소반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막의 노파가 나이에 비해 눈치가 빠르다 생각하며 두 사람은 각자 등을 돌린 채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이게 왜 이러지?”“왜? 무슨 일이냐?”“아, 아무것도 아닙니다.”급히 얼버무리는 대답이 귓등을 두드렸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영의 뇌리로 들어찼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돌아보지 마십시오.”“알았다. 안 본다.”다시 이어지는 사각거리는 소리.

주막의 주모가 내어주는 입성치고는 지나치게 사각거리는 입성이었다.

그때 다시 라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 어? 이거 왜 이러지?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냐?”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영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울상이 된 라온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거 이상합니다.”“…….”“이상합니다. 아무래도 저 할머니, 제정신이 아닌 듯합니다.”입고 있는 옷과 영을 번갈아 보며 라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수긍하듯 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그래서 마음에 드는구나.”영은 라온이 입고 있는 옷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막의 노파가 준비해놓은 옷은 라온이 평소 입던 사내복이 아니라 여인의 옷이었다. 그것뿐이라면 라온이 이상하다는 말을 연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얀 속치마와 속적삼 위에 라온이 걸치고 있는 고운 비단옷.

붉은 다홍빛 저고리에 한 쌍의 봉황과 모란이 수자 놓인 화려한 옷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활옷이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활옷을 입고 있는 라온의 아름다운 모습에 영의 표정이 멍해졌다. 입안에 단침이 고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순간, 영의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미친 듯 요동치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질끈 아랫입술을 물고 주먹을 말아 쥐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여릿한 행동을 오해한 라온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 정색하지 마십시오.”안 어울린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혼례의 날 신부들이 입는 활옷을 입은 채로 라온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속적삼 위에 걸칠 것이 없어 입긴 했지만, 하필이면 혼례복이라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한 라온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방 안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소반이 눈에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단출한 먹거리와 표주박 모양의 술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마치 혼례 때 마시는 합환주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이 주막, 대체 정체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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