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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78화 (78/131)

78. 너를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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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1

“도망가려면 지금 가.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영의 목소리가 라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셋 세마.”“저하…….”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하나.”말과 함께 영은 물속에 있는 라온의 두 손을 포박했다.

화초저하, 이건 언행 불일치입니다.

말로는 달아나라 하면서 이리 잡으면 어찌 달아난단 말입니까?

“둘.”입술이 다가왔다.

“셋.”부드러운 입술이 꽃잎처럼 겹쳐진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내 것이야. 영원히…….”혀끝에서 흘러나온 말이 주술이 되어 라온을 얽어맸다.

두 개의 숨결이 하나로 얽혔다.

그러나 짧은 입맞춤은 라온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입술을 뗀 채 영은 라온을 응시했다. 물끄러미 마주 보던 라온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뭐하는 것이냐?”“달아나라면서요.”“뭐?”어이가 없어 영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저리 생각하는 라온이 한편으로 맹랑했고, 다른 한편으로 귀여웠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려 하는 라온의 머리를 꾹 눌러 다시 욕조에 앉혔다.

“이미 늦었다. 말했지 않느냐? 가려거든 셋 세기 전에 가라고.”“못 가게 잡고 계시지 않았습니까?”“그래. 잡고 있었지. 그대로 보낼 수 없었거든.”“네?”영이 말없이 라온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동상에 걸리지 않았느냐? 쓸데없이 짐을 들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리되지 않았느냐?”“아프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 간지러울 뿐입니다.”“대수롭지 않다고 하여 내버려두면 위험해질 수도 있느니.”영이 라온의 손가락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입술이 발자취를 남기듯 손가락을 더듬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입술의 온기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왜 이러십니까?”“당연하질 않느냐? 내 소중한 벗이 동상에 걸리게 할 수는 없질 않으냐?”벗, 또 벗이라고 하신다.

괜스레 섭섭해졌다. 조금 전에도 입맞춤까지 하셨던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여전히 벗이라니.

하지만 섭섭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신의 처지에 감히 세자저하의 벗이 된 것만으로도 어디인가.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서운한 마음이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설마…… 벗이라 불리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처럼 하시는 것입니까?”불퉁한 마음에 입술을 내밀며 라온이 투덜거렸다.

“그럴 리가 있느냐?”“그럼 제게는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몰라 묻는 것이냐? 너는 내게 특별한…… 벗이기 때문이다.”“특별한 벗? 특별한 벗은 또 무엇입니까?”“글쎄. 그것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던 영의 눈동자에 낯설지 않은 빛이 떠올랐다. 짓궂은 눈빛. 저런 눈빛을 하면 항상 엉뚱한 장난을 생각해 내곤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라온의 손가락을 더듬던 그의 입술이 손등을 타고 손목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개미 떼가 줄을 지어 올라오는 듯한 간질간질한 느낌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라온이 손목을 틀며 저항했다.

그러나 영은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았다. 라온의 어깨를 잡은 손이 단단한 족쇄처럼 그녀를 억압했다.

“가만, 움직이지 마라.”그의 입술이 그녀의 팔등에 이어 동그란 어깨까지 향기로운 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끝내 하얀 라온의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목덜미를 훔치는 뜨거운 열기.

무기력하게 반항조차 않던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풀에 놀란 그녀는 있는 힘껏 영을 밀쳐냈다.

“이러지 마십시오.”거센 저항에 영의 몸이 싸리 벽 뒤로 넘어갔다.

쿵!

*  *  *

너무 세게 밀었나? 조금 요란한 소리에 라온의 얼굴이 미안한 기색이 들어찼다.

“그러게 이러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저하께서는 사람이 말을 하면 한 번에 듣질 않으십니까? 그 또한 나쁜 버릇입니다. 고치셔야 합니…….”어라?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해?

말을 하던 라온이 돌연 입을 다물고 성기게 엮인 싸리 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쯤이면 호통을 치며 몸을 일으켰어야 하는데. 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지? 뭐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저하? 왜 그러십니까? 어디, 벽에 머리라도 부딪히신 겁니까? 저하? 저하!”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일순,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혹시 내가 밀어서 욕조에 머리라도 부딪힌 거라면 어쩌지? 의식을 잃은 채 물속에 가라앉기라도 한 거라면…….

걱정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라온은 욕조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목을 길게 빼 내민 채 담장 너머를 살펴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도통 보이지 않았음이라.

욕조 안에 담그고 있던 몸을 조금씩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저하?”상체의 절반이 욕조 밖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하, 괜찮으십니까?라온은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급한 시선으로 싸리 담장 너머를 살펴보았다.

그때였다.

담장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두 개의 손이 담장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라온을 한 번에 휘감았다.

“앗!”라온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제야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구나.”예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라온을 아이처럼 가볍게 덜렁 들어 싸리 담 너머 자신의 욕조로 끌어들였다.

좁은 욕조에 영과 라온이 함께 잠기게 되었다.

영의 입고 있던 옷은 어느새 물에 젖었다. 몸에 찰싹 붙은 옷은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라온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싸리 담 너머로 대화하는 게 불편했다.”“그, 그렇다고 이러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벗끼리 안 될 건 또 무어냐?”“그보다 조금 전엔 왜 그러신 겁니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라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번번이 이런 장난을 치시는 것입니까?”“번번이 속아주니, 장난을 치는 수밖에.”“정말 못 말리겠습니다.”낮게 한숨을 쉬는 라온을 영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걱정하였느냐?”“당연히 걱정하지요.”“왜?”“네?”“어찌하여 그리 걱정하느냐?”영의 물음에 라온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린 벗이라고요. 그것도 아주 특별한 벗.”잠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던 영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라온을 등 뒤에서 끌어당겼다.

“이러니 좋을 수밖에.”낮게 중얼거리며 영은 라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체향이, 아늑한 여인의 향기가 코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좋았다. 제 가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이 작은 여인이 좋아 견딜 수가 없었다.

*  *  *

“저하…….”등 뒤에서 자신을 안아오는 영을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왜?”느른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하께서는 저와 이러시면 안 됩니다.”“어찌하여?”“저는 화초저하께서 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심연처럼 검고 푸른 눈빛이 동공에 맺혔다. 그의 담담한 눈빛을 마주 보던 라온이 입술 끝을 깨물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오늘 따라 이상하구나. 뭘 알고 있단 말이더냐? 선문답 같은 말은 그만두고 분명하게 말해 봐. 내가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리고 넌 어찌하여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냐?”“전…….”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인입니다.”“…….”“저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니, 절 아는 모든 사람을 속였습니다. 감히,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어 궁의 법도마저 어지럽혔습니다. 전 저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될 수도 없습니다.”털어놓으니 후련했다. 또한, 두려웠다. 화초저하께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두려웠다. 영의 반응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이대로 바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은 여전했다. 그는 변함없이 맑고 선연한 눈길로 라온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말해주는구나.”라온의 얼굴 위로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까?”“그래. 기다리고 있었느니. 날마다, 언제쯤이며 네가 진실을 말해줄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어째서…….”“너니까. 홍라온. 너라면 언젠가 내게 말해 줄 거라 믿었다.”“영영 말씀 안 드릴 생각이었습니다.”“아니다. 언젠가 너는 내게 진실을 말했을 것이다.”말을 하는 영의 눈 속엔 라온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단단히 못 박혀 있었다.

“제가 사정을 숨기는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으셨습니까?”“당연히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러나 어떤 사정이건 너의 사정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그의 확신에 라온이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정말로 말 못 할 속사정이라면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한번 말해 보아라. 말 못 할 속사정이 무언지 한 번 들어보자꾸나. 그러고 나서 대답을 들려주마.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 일인지.”“그것이…….”라온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어찌 짧은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다. 차라리 그 과정은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평생 사내로 살아야 했던 이유, 그녀조차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그리 살라 하셔서 그리 살아왔다. 그저 살려면,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대답밖에는 듣지 못했다.

그런 세세하고 복잡한 사정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어냐? 뭔가 큰 게 있을 법한 표정이더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모르겠다는 말이더냐?”“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습니다.”“그래, 속사정이야 그렇다고 치고. 어찌하여 여인인 걸 내게 말하지 않았더냐?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말해줄 때까지 참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어찌하여?”“제가 저지른 짓은 삼족이 멸할 대죄입니다.”잠시 생각하던 영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내게는 가벼운 이야기였겠지만. 네게는 너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온 가족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었겠구나.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겠구나.”자신보다 제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였다. 그러니 말을 할 수가 없었겠지. 그 깊은 속내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영을 향해 라온이 입을 열었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무엇이냐?”“언제 아신 것입니까? 제가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 아셨습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의 입가에 싱긋, 짙은 미소가 생겼다. 이윽고 그가 손을 들어 라온의 상투를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모습을 처음 봤을 때.”긴 머리카락 라온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처음 길게 머리를 땋고 내 앞에 섰을 때, 알아버렸다. 네가 여인이라는 것을.”“하지만…… 저하께서는 여인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지병이 있질 않습니까?”“그랬지.”“그런데 어찌 제 얼굴은 알아보신 것입니까?”“나 역시도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너는 알아보겠더구나.”“저를 사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아니면?”“어쩌면 처음부터 내 본능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네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는 것을. 그러니 이제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 난 처음부터 여인으로 널 받아들였다. 넌 바로 내가 원한 사람이다.”“저하…….”“내가 진실로 원하는 단 한 사람, 그것이 바로 너다.”“저하…….”“나는 분명히 말했다.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네가 사내던 여인이든, 상관없이 네가 좋다. 내게 너는 그저 홍라온일 뿐이니까.”“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화도 안 나십니까?”“지금이라도 화를 내랴?”“아무리 제게 사정이 있다고 하여도 저하를 속였습니다. 그러니 벌을 내리십시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정녕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것이냐?”“네. 그럴 것입니다.”대답하며 라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영의 커다란 손이 라온의 머리 위로 감싸듯 내려앉았다.

후, 내뱉는 낮은 한숨 소리도 들려왔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서 하는 말이더냐?”“무슨 뜻입니까?”되묻는 라온을 영은 살며시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이리와.”“벌 내리신다면서요?”“이것이 나의 벌이다.”“…….”“이제 나는 네게 화를 낼 수도, 벌을 내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네게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구나.”“어째서 그렇습니까?”“왜냐하면…….”영을 바라보는 라온의 입 안으로 마른 침이 가득 고였다.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키는 라온을 보며 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너를 사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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