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더는 못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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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7
노파는 영과 라온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눈 내린 깊은 산 속.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주막이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작은 방은 깨끗했고, 군불이 지펴져 따뜻했다.
방에 들어서자 얼어있던 손끝과 발끝으로 찌르르한 감각이 되돌아왔다. 잔뜩 웅크렸던 어깨가 펴지고 전신으로 나른한 기운이 번져나갔다.
아, 따뜻해. 이대로 잠들…… 수는 없지.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던 라온은 두 눈을 애써 동그랗게 치떴다.
온몸을 나른하게 하는 온기에 잠시 잠깐 망각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마침 주막이 있어 다행입니다. 추위라도 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영의 침전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방인지라. 혹여 불편하지는 않은지 라온은 그의 표정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라온의 짐작대로 영은 불편했다.
후, 마른 입바람을 작게 불던 영이 마땅치 않은 눈길로 라온을 응시했다.
“넌 거기서 뭐 하는 것이냐?”영의 심기를 언짢게 하는 것은 이 작은 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의 작은 크기는 영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면 바로 라온의 태도였다.
“네? 제가 왜요?”라온이 순진한 눈빛을 깜빡였다.
영이 그녀를 턱짓하며 다시 말했다.
“벽에 딱 달라붙어 있질 않으냐?”영의 말처럼 라온은 맞은 편 방구석에 등을 딱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는지 무릎을 세우고 거북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잔뜩 경계하는 태가 역력한 표정과 행동.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한양을 떠나올 때부터 이상하게도 라온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음에도 둘 사이에는 여느 때와는 다른 벽이 존재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 생각했다.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예민해진 자신의 착각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방구석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기세로 앉은 라온의 모습.
온몸으로 ‘나는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고 역설하고 있었다.
대체 뭐냐? 네가 그리 나를 경계하는 이유가.
오늘 느닷없이 할아버지를 만나 예민해진 탓일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예정에도 없던 할아버지와의 재회였으니. 라온의 심정에 어떤 변화가 올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군.
자신과 거리를 둔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라온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은 언짢은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문을 열고 옷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냈다.
휘이잉!
짐승 같은 바람은 여전했다.
영은 서둘러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라온은 여전히 무릎 위로 눈만 빼꼼 내민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영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왜요?”라온의 눈이 대번에 댕그래졌다.
“어깨 위에 눈이 잔뜩이다. 털어줄 테니, 이리 와.”“아닙니다. 제가 털면 됩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터니 금방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라온은 행여 영의 손길이 닿을세라 후다닥 눈을 털어냈다.
영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자꾸 신경 쓰이게 할 것이냐?”“제가 신경 쓰이게 했습니까?”“그래. 거기 그렇게 있으니 신경이 쓰인단 말이다. 그러니 이리 와.”“신경 쓰게 하지 않겠습니다. 숨소리도 내지 않을 테니, 절대 신경 쓰지 마십시오.”라온은 새어나가는 숨이라도 있을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입까지 가린 모습이 귀여웠다.
“이쪽 바닥이 따뜻해. 엉뚱한 짓은 그만두고 이리 오란 말이다.”“여기도 따뜻합니다.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가 딱 좋……아얏!”“기어이 매를 벌지.”영이 라온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그거 아십니까? 저하께선 정말 이상하신 분입니다. 왜 매사 저하 마음대로만 하시려고 합니까?”“네가 매사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하니까 그러는 것이다.”“하고 싶다고 모든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나는 지금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리 살 것이다.”“말도 안 됩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말 돼. 왕세자쯤 되면 안 되는 일보다 되는 일이 훨씬 많으니까.”“……저도 다음 생에서는 왕세자로 태어나야겠습니다.”그리고 화초저하를 꼭 제 환관으로 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건 다음 생에서나 생각하고. 지금 당장은 이리 가까이 와. 명이다.”눈매를 매섭게 치뜨는 영의 겁박에 라온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요즘 들어 권력 횡포가 심하십니다.”“요즘 들어 네가 말을 도통 듣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질 않으냐.”“이런 말, 제 입으로 하긴 뭣하지만. 저, 원래 남의 말 잘 안 듣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그럼 어찌하여 내 말은 그리 안 듣는 것이냐?”“그거야 당연히 저하께서 말도 안 되는 명만 내리시니까…….”“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가 판단해. 네가 아니라.”“부당합니다.”“감히 왕세자에게 부당을 말하는 고얀 입이 이 녀석이더냐?”영은 짓궂은 표정으로 라온의 두 볼을 길게 늘였다.
“으으, 하지 마십시오. 아픕니다. 하지 마……으응?”두 팔을 내저으며 반항하던 라온이 문득 방 한구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엔 또 뭐냐?”뭔데 이 녀석이 이리 넋을 잃어?
장난을 치던 영이 라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작은 방 한 귀퉁이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날이 워낙 궂으니 어찌 될까 싶어 노파가 방으로 들여놓은 모양이었다.
“아아, 정말 예쁘다.”손바닥보다 작은 하얀 솜뭉치 같아 보이는 그것을 품에 안으며 라온은 탄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영의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강아지냐?”겨우 라온과 시선을 마주하는가 싶었더니. 이번엔 강아지가 그를 방해했다.
라온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작은 짐승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연신 강아지를 어루만지는 라온을 보며 영은 문득 강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으면 지금쯤 라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저 강아지가 아니라…….
“미쳤구나.”영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가 알까? 한 나라의 국본이 고작해야 어린 강아지를 부러워할 줄을.
스스로의 어이없는 생각에 영은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 * *
“어미 어미젖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있기에 방 안에 들여놓은 것이여.”얼마나 지났을까?
금세 따끈한 국밥 두 그릇을 말아 온 노파가 라온이 안고 있는 강아지를 보며 말했다.
“어미젖을 제대로 못 먹어요? 왜 그런 겁니까? 혹여 어미가 어디 아팠던 거예요?”“그런 것이라면 저놈이 저리 불쌍하지는 않쟤. 어미라고 다 같은 어미가 아니여. 새끼라면 제 목숨도 내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이놈 어미처럼 새끼만 낳아놓고 훌쩍 제 갈 길 가는 매정한 놈도 있는 법이쟤.”“그러니까, 이 어린 것을 두고 어미가 떠나버렸단 말입니까? 그럼 이 아인 어떻게 합니까? 남겨진 새끼는 어찌 살라는 것입니까?”“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것어. 제 타고난 명줄대로 사는 것이쟤. 어미 젖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놈은 사는 것이고. 죽을 놈은 죽는 것이쟤.”노파의 말에 라온이 아픈 눈으로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 녀석은 할머니를 만나 죽지는 않겠네요.”“모르는 일이여. 어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여.”“어째서 그렇습니까? 끼니 거르지 않으니, 죽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짐승이든, 사람이든 배만 불린다고 살게 되는 건 아니란 말이쟤.”“아닌가요?”라온의 물음에 노파가 투박한 손으로 자신의 배와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여기가 주리면 죽지만, 여기도 주리면 살 수가 없는 법이여.”“아!”“제대로 보듬고 돌봐주는 손길이 있어야 제대로 크는 법이쟤. 이리 끼니 밥 먹여 살려놔도 어미 품에서 자라지 못한 것들은 이상하게 동티가 잘 난단 말이여. 툭 하며 아프니…….”혀를 차던 노파가 몸을 일으켰다.
“그 어린놈은 이쪽으로 치워두고. 얼른 국밥이나 후루룩 먹어. 지금까지 산속을 헤맸으면 허기졌을 텐데.”“네. 그렇지 않아도 뱃속에서 전쟁이 났습니다.”라온이 허물없이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노파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은 도령께선 밥 다 먹으면 부엌으로 나와.”“부엌이요? 왜 그러십니까?”“나와 보면 알 것이여.”그 말을 끝으로 노파는 방을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영과 이 좁은 방 안에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국밥을 그야말로 후루룩 마시듯 먹어버린 라온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같이 가 줄까?”“됐습니다. 부엌이라고 해봐야 지척인데요, 뭘.”등 뒤로 따라붙는 영의 시선을 애써 뿌리친 채 라온은 쫓기는 사람처럼 부엌으로 향했다.
* * *
“이게 다 뭡니까?”부엌에서 라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따뜻한 목욕물이었다. 둥근 나무 욕조엔 향긋한 향내를 품고 있는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라온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뭘 그리 놀라는 것이여? 보아하니 한참을 눈 속에서 헤맨 것 같은데. 손발이 꽁꽁 얼어버렸을 것이 아니여. 그대로 두면 손발에 얼음 알이 단단히 박힌단 말이쟤. 이리 따뜻한 물에 풀어내지 않으면 훗날 큰일 날 것이여. 그러니 약이다 생각하고 목욕혀.”“하지만…….”노파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라온에게 기다렸다는 듯 노파가 말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올해로 여든이란 말이여. 이 나이쯤 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가끔은 본단 말이쟤.”“그러십니까?”난데없는 말에 라온이 옅게 웃었다. 그 흐린 웃음을 보며 노파가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말이여,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린 도령이 사실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는 것도 이 늙은 눈에는 보인단 말이쟤.”순간,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할머니…….”“놀랐어?”“어찌 아셨습니까?”그것도 단박에 말입니다.
“말하지 않았는가. 이 나이쯤 되면 젊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고. 대신 남들 다 보는 것을 종종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쟤.”노파가 잇몸을 드러내며 홀홀 순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문 닫고 나갈 테니, 마음 놓고 씻으란 말이쟤. 남루하지만 여기 갈아입을 마른 옷도 준비해 뒀으니까.”“감사합니다. 그러나…….”라온은 영이 있는 방을 건너다보았다.
이번에도 노파는 라온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걱정 말어. 방에 있는 큰 도령은 내가 잡아놓고 있을 터이니. 잔뜩 얼어 있었을 거니. 술 한 잔 권해 토막잠이라도 자게 해 두면 그만이여.”“고맙습니다.”노파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사실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본 지 정말 아득했다.
궁에 씻을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환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목욕탕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여, 언제나 깊은 밤 자선당의 부엌에서 도둑 목욕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호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뜻밖에 횡재에 라온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노파의 배려로 오랜만에 즐길 수 있는 목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눈에 젖어 눅눅해진 옷을 벗어버린 라온은 아이처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따뜻한 물의 열기가 손끝과 발끝으로 스며들었다.
안개처럼 번지는 그 느른한 기운에 꼿꼿했던 등줄기가 맥없이 허물어졌다.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던 신경도 한풀 느슨해진다.
손끝으로 물을 찰박거리며 라온은 눈을 감았다.
물속에 띄워놓은 마른 꽃잎의 향내가 행복한 열감을 전해주었다.
얼어있던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마에 송골송골 기분 좋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야말로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상황인지라.
세상에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말이다.
느닷없이 삐거덕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을 행복이었다.
라온이 따뜻한 물의 온기에 취해 나른하게 늘어져 있을 때, 별안간 부엌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라온이 들어왔던 문이 아니라 반대편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던 문이.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부엌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아이 키 높이의 싸리 담장 저편의 문이었다.
그런데…… 어라?
이제 보니 이 부엌 이상하네. 부엌 정중앙에 어쩌자고 이런 싸리 담장이 세워져 있는 것이며, 이 작은 부엌에 문이 두 개인 까닭은 또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찰나.
무심한 표정의 영이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헉!”라온의 입에서 절로 마른 비명이 새어나왔다.
뭐야? 화초저하께서 왜 이곳에 들어오는 거야?
의문은 금세 풀렸다.
주막집 노파가 라온에게 들려주었던 그 자상한 목소리 그대로 영에게 말하는 것이 들려왔던 까닭이다.
“그럼 씻고 나오시오. 남루하지만 여기 갈아입을 새 옷도 마련해 두었소.”귓가를 두드리는 노파의 말에 라온은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 이건 말씀하셨던 거랑 다르잖아요. 저분,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붙잡아 두고 계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술이라도 한 잔 권해 잠들게 하시겠다고 하셨으면서……. 그런데 이게 뭐예요?
망연자실해졌지만, 목구멍을 가득 채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럴 새가 없었다.
행여 영에게 그림자라도 보일세라, 라온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물에서 영영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물고기가 아닌 이상, 오랜 시간을 물속에서 버틸 수는 없었다.
참고, 참고 또 참던 라온은 결국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았다.
그사이, 영 역시도 몸을 눅눅하게 만든 젖은 옷을 벗어버린 채 나무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성기게 짜인 싸리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욕조가 나란히 놓여있는 상황이었다.
‘이 주막 정말 이상하군.’가난한 보부상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주막에 목욕하는 곳이 있는 것도 신기할 노릇인데, 그런 장소가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이나 있다니.
조선의 엄격한 법도 상, 한 장소에 남녀가 혼욕하는 일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주막에 여자가 씻을 장소라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인을 배려하는 그런 장소가 있다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필시 의도적으로 만든 장소라는 뜻.
큰 도령을 잡아놓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노파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돌았다.
싸리 담 너머로 찰방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라온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이게 다 주막집 할머니가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이 할머니가 정말…….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엉큼한 노파에게 달려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곁에 영이 있었다.
라온은 차마 숨소리조차 함부로 흘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하는데.
어찌한다? 그래, 가장 먼저 옷부터 걸쳐야지.
라온은 최대한 물소리를 내지 않으며 살금살금 손을 뻗어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긴장한 탓인지, 입안에 마른 침이 가득 고였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심호흡을 길게 하며 라온은 조심조심 옷에 팔을 꿰었다.
젖은 몸을 제대로 닦지 못한 탓에 옷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연신 영이 있는 부엌 저쪽의 동태를 살피며 라온은 옷을 입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옷을 걸칠 수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은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이게 어디인가?
작금의 상황에 감사하며 라온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욕조 밖으로 나가 그대로 후다닥 방으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라온은 물 밖으로 한 발 살포시 내디뎠다.
바로 그때였다.
“홍라온.”별안간 등 뒤에서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앗!”귓가를 파고드는 선명한 소리에 놀란 라온은 저도 모르게 물속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 틈엔가 영의 긴 그림자가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었다.
싸리 담장을 헤치고 담을 넘어온 상태.
언제 입었는지 마른 옷까지 걸친 모습이었다.
라온은 물 위에 어룽 비치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뭐야? 지금까지 보고 계셨던 거야? 설마…… 아니겠지? 아니야, 이리 기척도 없이 다가오신 것을 보면 보셨을 거야?
정말 보셨을까? 안 되는데. 절대 봐서는 안 되는데. 아, 정말 봤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과 부끄러움이 머릿속을 가득 뒤덮었다.
라온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물속으로 푹 담갔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염원도 곧 영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영은 물속에 잠겨있는 라온의 긴 머리카락을 그러잡았다.
“대체 언제까지 물속에 있을 작정이냐?”영의 손길에 라온의 얼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내 그녀의 눈에 욕조 위에 턱을 기대고 있는 영의 모습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이다. 옷을 입고 있어서.
만약 옷을 입지 못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찔한 상황인지라. 라온의 심장이 절로 방망이질 쳤다. 온몸의 혈액이 심장으로 확 몰리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눈앞에 있는 화초저하 때문이리라.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영은 허락하지 않았다.
라온의 시선을 자신을 향해 고정한 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찌해야 좋을까?”“무얼 말입니까?”“이 짓도 더는 못 하겠구나.”“무슨 짓이요?”“…….”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짓, 하여 언제까지고 참고 기다리는 짓.
어릴 적부터 그랬다.
언제나 참아야 한다고, 그래야 성군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여, 참았다. 아파도 참았고, 그리워도 참았다. 분해도 참았고, 서러워도 그저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는 참고 싶지 않았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다 영영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려면 지금 가.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무슨 말씀이십니까?”“셋 세마.”“저하…….”“하나.”영은 물속에 있는 라온의 두 손을 포박했다.
“둘.”입술이 다가왔다.
“셋.”부드러운 입술이 꽃잎처럼 겹쳐진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내 것이야. 영원히…….”혀끝에서 흘러나온 말이 주술이 되어 라온을 얽어맸다.
두 개의 숨결이 하나로 얽혔다.
그러잡은 손길에 서서히 따뜻한 열기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