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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76화 (76/131)

76. 방은 하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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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한가야, 저하께서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됐느냐?”박두용의 물음에 한상익이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두 시진이 조금 넘었다.”“헌데 어찌하여 감감무소식일까?”어느덧 해가 서쪽 하늘 끝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박두용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난들 어찌 알겠느냐.”“삼미 선생, 이 양반이 혹시 우리 저하의 명을 받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구나.”“단박에 덥석 받아들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냐?”“흥, 그래도 저하께서 명을 내리시는데 아니 받잡을 수 있겠느냐.”“저하가 아니라 주상전하께서 명하셔도 그분의 마음이 쉬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뭐야? 한가 네 이놈. 너는 대체 누구 편이냐?”“누구 편이 아니라, 너도 생각해봐라. 괜한 이유를 핑계 삼아 18년이나 유배를 보냈다. 어디 그뿐이냐? 한 집안을 그야말로 요절을 냈단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다시 손을 잡자고 하면 고분고분 그 손을 잡겠느냐?”“그러게 누가 천주교를 믿으라고 했더냐? 분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을 따져보자면 저 양반이란 말이지.”“신유년 있었던 박해사건과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삼미 선생을 18년이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보냈던 일들이 어찌 저 양반이 만든 분란이라 하는 게야?”“그거야…….”“박가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그 긴 유배가 사실은 삼미 선생을 조정에서 축출하려고 벌인 노론과 외척들의 술수라는 것은 지나가는 똥개도 다 아는 사실이다.”한상익의 입바른 소리에 박두용은 마른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러다 뭔가 말꼬리를 잡은 듯 의기양양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한가야, 너 말 참 잘했다. 네 말대로 삼미 선생을 저리 만든 건 노론과 외척들이지, 우리 저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질 않느냐. 저하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다.”“박가야, 어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냐?”“내가 뭘 모른다는 게야?”“저하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그 외척의 피라는 사실을 잊은 게야?”박두용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가, 네 이놈. 어찌 말 마디마디에 뼈가 있구나.”“흠흠.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런 것은 아니다.”그때였다.

“뭐가 뜻이 그런 것입니까?”투닥거리는 두 사람 사이로 라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환관의 고개가 동시에 대문 안으로 향했다.

이윽고 라온을 앞세운 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노인은 앞다퉈 영의 앞으로 달려갔다.

“저하, 일은 어찌 되었사옵니까?”“삼미 선생께서는 뭐라고 하시었나이까?”영은 대답 대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박 선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구나.”“아, 박 선비라면. 한 시진 전에 급히 한양으로 돌아갔사옵니다.”“한양으로?”“늙은 노모께서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위태롭다는 전갈이 왔습니다.”“저런. 별일 없어야 할 터인데.”“그런데 저하, 어찌 되었사옵니까? 삼미 선생께서는…….”“아무래도 오늘은 궁으로 돌아가기 어렵겠구나.”담담한 한 마디와 함께 말에 오르는 영을 보며 박두용은 의기소침해졌다.

“한가야, 아무래도 안 됐는가 보구나.”“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질 않았느냐.”소곤대는 두 사람을 돌아보던 영이 말을 이었다.

“한 상선과 박 판내시부사는 여기에 남아야겠다.”“알겠사옵니다. 열 번이 안 된다면 백 번을 찍어서라도 삼미 선생을…….”“찍는 건 그만두고, 선생께서 짐 싸는 것이나 도와라. 선생께서 모처럼 큰 결심을 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야.”느닷없는 영의 명에 박두용과 한상익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하, 그 말씀은……?”“선생께서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시기로 하였다.”“정녕 선생께서 저하의 손을 잡으셨단 말씀이옵니까?”“그렇다.”영의 대답에도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박두용이 재차 물어왔다.

“정녕, 정녕 정약용 선생께서 저하를 돕겠다고 하셨단 말씀이옵니까?”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실감이 난다는 듯 박두용이 한상익을 돌아보았다.

“한가야, 들었느냐? 다산 선생께서 저하와 함께하시기로 하였단다.”“언제는 삼미 선생이라고 하더니.”“어허, 한가야. 어디라고 다산 선생님을 그리 부르는 것이냐? 아이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가야, 서둘러야겠다. 선생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기 전에 짐부터 꾸려야겠구나.”급히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박두용이 문득 영을 돌아보았다.

“하온데, 저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것이옵니까?”영이 유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선생께서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을 하였다. 하여, 선생이 원하는 것을 구하러 가는 길이다.”“네?”박두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다산 선생께서 청한 것이 무엇이옵니까?“그것이…… 복숭아입니다.”곁에 있던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할아버지께서 믿으라 큰소리를 치실 때면 어김없이 엉뚱한 사건이 벌어지고는 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뵈었으니, 조금은 달라지셨나 했는데 아니었다.

화초저하의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

할아버지께선 느닷없이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 이 한겨울에 복숭아를 먹게 해주면 손을 잡겠노라 말씀하신 것이다.

짓궂은 장난이 분명했다.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였지만, 그런 장난에 응수하는 화초저하의 속내 역시 짐작하기 어려웠다.

라온의 황망한 대답에 박두용이 기어이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뭐라?”박두용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하, 삼미 선생께서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보옵니다. 이 한겨울에 복숭아라니. 거절할 것이면 차라리 싫다 말할 것이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한상익도 한마디 거들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세자저하께 복숭아를 구해달란 말을 했단 말이옵니까? 수태라도 했답니까? 한겨울에 웬 복숭아? 소인, 절대 못 참사옵니다. 아니, 아니 안 참을 것이옵니다.”박두용과 한상욱이 기세등등하여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삼미 선생인지, 다산의 상징인지. 내 오늘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한가야, 뭐하느냐?”“알았다. 간다, 가.”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낮게 중얼거렸다.

“율아.”그의 부름이 허공 중에 퍼지기 무섭게 세자우익위 한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의 곁에 있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아, 깜짝이야. 제발 인기척 좀 하고 다니세요.

매번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줄 알면서도 깜짝깜짝 놀란다.

“율아, 너는 그 아이들이 어찌 일하고 있는지 살펴보아라.”“분영(分影)들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이곳으로 올 때, 외척들의 눈을 따돌리기 위해 그림자 무사를 다른 곳으로 보내놓은 터였다.

“그들이 일을 제대로 하였는지, 뒤를 쫓는 사람들은 없었사옵니다.”율의 말에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불안하구나. 이렇게 어설프게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니 말이다. 혹, 그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구나.”“하오나, 소인이 떠나면 세자저하의 곁을 뉘가 있어 지키겠는지요? 위사들을 보내겠사옵니다.”영이 단호히 머리를 내저었다.

“내 호위라면 따로 백인회에 말해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나직이 말한 그가 한율의 귀에 다시 속삭였다.

“아무래도 위사들의 태도가 수상하다. 그들이 따로 사람을 붙이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분영들의 동태를 살피는 척하고, 위사들을 감시하거라.”한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세자저하의 말대로 위사들이 외척에게 포섭되었다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명을 따르겠나이다.”이윽고 한율과 세자익위사의 위사들이 영과 라온의 곁에서 모습을 감췄다.

영이 뒷짐을 진 채,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귀찮은 녀석들은 모두 쫓아 보냈군.”수다스러운 박두용과 한상욱은 이곳에 남게 되었고, 한율은 세자익위사들을 감시하느라 혼을 빼놓을 것이다.

물론, 정말로 위사들의 태도가 수상한 것은 아니었다. 율의 시선을 잠시 떼놓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제 정말로 저 녀석과 둘만 남았구나.”영이 고개를 돌려 라온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말고삐를 잡은 라온이 천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그럼 우리도 그만 가볼까?”“어디로 가실 겁니까?”“너도 듣지 않았느냐? 복숭아. 구해와야지.”영의 말에 라온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이 한겨울에 복숭아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께서 괜한 농담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아, 제가 깜빡 잊고 말씀 안 드린 것이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 장난이 꽤 심하십니다.”“선생께서 여기로 가면 복숭아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가보면 알 일이지. 복숭아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선생께서 장난을 치신 것인지.”“밤중에 산속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어찌합니까?”“나쁘지 않겠구나.”“네?”“너와 함께라면 설사 길을 잃고 헤맨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다.”“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재미없는 농담은 하지도 마십시오.”“언제까지 그리 말대답만 하고 있을 것이냐? 이리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음이다. 어찌할까? 이대로 가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까? 아니면 서둘러 길을 재촉하여 선생께서 원하는 복숭아를 갖고 무사히 돌아올까?”라온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이러다 정말 산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녀석.”말안장에 앉은 영이 몸을 기울여 라온의 허리를 감아올렸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 한 필의 말에 앞뒤로 함께 타게 되었다.

처음엔 불편했는데, 계속 타다 보니 나름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어쩌지? 이러다 습관 될 것 같아.

*  *  *

“영감마님, 그 귀하신 분을 어쩌자고 그곳으로 보내신 것입니까? 아무래도 하늘이 낮은 것이. 밤중에 눈이 꽤 내릴 듯합니다. 어쩌면 한동안 눈 속에 묻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정약용의 곁을 지키고 있던 어린 종자가 아까부터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걱정 말거라. 해울 주막으로 가는 길을 표시한 지도를 주었으니, 잘 찾아갈 것이야.”“그곳이라면…… 옥선 할매가 계신 곳이 아닙니까?”웬일인지, 어린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옥선 할매, 매병(煤病:치매)에 걸렸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알고 있다. 때때로 용태를 살피러 가는 내가 어찌 모르겠니?”다방면에 재능이 많았던 다산은 그중에서도 의술에 능했다. 하여, 인근에 병든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산 선생을 찾고는 했던 것이다.

매병 걸린 옥선 할매는 요즘 들어 노인이 살피던 환자 중 하나였다.

노인의 느긋한 대답에 어린 종자가 제 가슴을 쾅쾅 쳐댔다.

“그걸 아시는 분께서 어찌 그곳으로 귀한 분을 보내신 겁니까? 옥선 할매한테 걸려서 곤혹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근방을 지나가는 상인들도 해울 주막은 빙 돌아다닌다고 합니다.”“그러기에 그곳으로 가시게 한 것이다.”“네?”“내 오랜만에 만난 손녀에게 약조하였거든.”“어떤 약조를 하셨습니까?”“어쩔 수 없이 맞게 되는 매라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세상에 덜 아픈 매가 있습니까?” “옥선 할매라면 덜 아프게 매를 맞도록 해줄 것이야.”“네?”“역경을 함께 이겨낸 사이만큼 끈끈한 것도 없을 터. 그럼 뭇매를 맞더라도 조금은 덜 아플 것이고, 조금은 덜 아프게 때리겠지.”“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아프게 때리면 아프게 때릴수록, 때리는 사람도 아플 거라는 말이다.”도무지 뜻을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정약용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낮게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껏 흐린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눈발이 흩날릴 듯했다.

*  *  *

“여기가 어디더냐?”영과 라온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길을 걷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솜털처럼 날렸다. 머리 위며 어깨 위며 털어내지 못한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중이었다.

뽀독뽀독.

내딛는 걸음마다 순백의 눈이 내지르는 경쾌한 소리. 그와 더불어 허리춤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 나가는 라온의 숨소리도 함께 곁들여졌다.

타고 왔던 말은 눈 내린 산속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산 아래에 말을 매어둔 채 두 사람은 눈밭을 헤매고 있었다.

라온은 연신 쥐고 있던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복숭아를 구할 수 있는 곳을 표식해둔 지도였다.

여기가 맞는데…….

분명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길, 여기가 확실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복숭아는커녕, 복숭아나무처럼 생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부러 이 길로 온 건 아니더냐?”“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정색하는 라온의 모습에 영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 웃자고 한 말에 그리 정색을 하느냐.”“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도 이 겨울 산에서 말입니다.”아, 할아버지.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러다간 복숭아는 저승에서 먹게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할아버지 댁에서 하룻밤 쉬었다가 내일 날 밝으면 올 것을 그랬습니다.”겨울 산은 해가 지기 무섭게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추위를 몰고 왔다. 꽁꽁 얼어버렸는지 발의 감각은 한참 전에 사라져 버린 후였고, 손끝에서도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정이 이리되었음에도 영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산책이라도 하는 듯 눈 덮인 산속을 거닐었다.

“그럴 수야 없지. 아직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이들의 눈에 띌 일은 안 하는 것이 좋을 터.”“그래도 겨울 산에서 얼어 죽는 것보단 낫습니다.”불퉁한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는 라온의 목소리에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대로 가다간 죽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이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얼어 죽지는 않을 듯싶구나.”“네?”영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자 노란 불빛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발견한 그 희미한 불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살았다. 살았습니다.”라온이 금세 되살아난 표정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영이 느긋하게 따랐다.

*  *  *

얼마나 갔을까?

활짝 열린 싸리문 밖에 주(酒)가 써진 작은 등불이 걸려 있는 허름한 초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산중에 웬 주막일까요?”“보부상들을 위한 주막인 거 같구나.”영의 짐작에 라온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계세요? 계십니까?”반가운 마음에 라온은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몇 번을 소리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십니까?”기다리다 못한 라온이 염치불구하고 불 켜진 방문을 열었다. 체면치레하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기엔, 너무 추웠던 탓이다.

다행히 방 안엔 사람이 있었다.

“뉘시여?”이부자리를 펴던 노파가 찬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등이 잔뜩 굽은 노파가 열린 문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무슨 일이여?”“산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어 이곳에서 하룻밤 쉬었다 가려고 합니다. 빈방 있으면 두 개만 주십시오.”라온의 말에 노파가 이가 몽땅 빠진 잇몸을 훤히 드러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오른쪽 검지를 반듯하게 세워 보였다.

“하나여!”“네?”“빈방은 하나뿐이여.”“저희는 방이 두 개가 필요합니다만.”“방은 하나여.”노파는 단호한 목소리로 라온의 말을 잘랐다.

라온은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영을 돌아보았다.

한방에서 잔 것이야,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의 일이었다.

영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사정은 달라졌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지 않았던가. 선현들께서 이런 말을 만들어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방이 하나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상황이 정말 곤란해졌다.

아……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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