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75화 (75/131)

75. 할아버지와의 재회

별점10.03,612명 참여 | 댓글354

2014.06.20

“할아버지, 할아버지!”가슴 터질 듯한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라온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호수처럼 고인 눈물은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라온은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쓱쓱 말끔히 지워낸다.

“할아버지!”다시 고개를 드는 라온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해사한 미소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녀석.”노인의 눈에 애잔함이 들어찼다.

툭툭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

“잘 지냈느냐?”“무척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요? 잘 지내셨어요?”“보다시피 잘 지내고 있었단다. 라온아. 여전히 씩씩하고 즐거워 보이는구나.”라온이 말끔해진 얼굴로 검지를 세웠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항상 건강하고 밝게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죠.”“그래.”노인의 눈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그려졌다.

이 아이는 여전하구나.

해맑게 웃는 모습이, 변함없는 눈빛과 표정이, 헤어지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노인의 기억이 먼 과거를 되짚어 올라갔다.

기쁘고 행복했던 때보다 아프고 괴로운 상처가 더 많았던 시절이다. 주름진 미간 위로 후회와 회한이 새겨졌다.

탁류가 되어 흐르던 부끄러운 기억이 어느 순간 맑아졌다.

라온과 처음 만난 바로 그날.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노인의 뇌리엔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  *  *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밤새도록 이어진 사나운 눈보라에 이불 안에서도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차마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그날, 라온이 그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사람이기보다는 배고픈 어린 짐승의 모양을 하고서 말이다.

새카만 땟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아이의 얼굴에서 오롯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커다란 눈뿐이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작은 몸은 뼈마디가 앙상했다.

그 가냘픈 몸으로 아이는 만덕산 기슭에 위치한 노인의 초당을 용케도 찾아왔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 정도나 되었을까?

느닷없는 어린아이의 출현에 놀란 노인에게 아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듯한 얼굴로, 아직 여물지 못한 입술을 열어 했던 한 마디.

“살고 싶어요.”살려 주세요, 가 아니었다.

살고 싶다 하였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당찬 모습이, 생의 한 귀퉁이를 잡고 몸부림치는 그 작은 몸태에 노인의 가슴이 쩍 하고 갈라졌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여기던 시절이었다.

자신을 배신한 세상이, 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원망하고 탓하던 시절이었다. 지리멸렬한 생에 환멸마저 느꼈다.

그런 노인의 삶 속에 갑자기 뛰어든 아이.

돌이켜보면 하늘이 그에게 내린 또 하나의 기회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물었다.

“내가 무얼 해 주면 네가 살 수 있겠느냐?”아이가 마른 입술로 대답했다.

“어머니와 동생이 죽어가고 있어요. 전 그 두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살고 싶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살려달라고. 그래야 자신도 살 수 있다고.

노인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였다.

산속 어두운 동굴 속에 웅크린 채 죽어가던 아이의 어미와 여동생을 데려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살이 인생이라.

아직 이름도 없다는 아이에게 이름을 주었다. 항상 행복하게,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라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많이 웃을 수 있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라온과 함께 하는 삶은 노인에게도 즐거웠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라온을 알게 된 지 5년, 라온이 아홉 살이 되던 그해, 노인의 인생에 라온과 그녀의 가족들이 깊숙이 들어와 있던 그 어느 날, 노인은 알게 되었다.

라온이 뉘의 자식인지, 그녀의 아비가 뉘인지.

왜 설산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었는지.

갑작스레 라온 일가를 찾아온 정체 모를 사내들이 노인에게 말해주었다.

라온이 역적의 자식이라는 것을.

친손녀보다 아끼던 라온이 역적 홍경래의 핏줄이라는 것을.

노인은 실망하지 않았다. 노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쓰게 웃었다.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하늘은 진정 잔인하구나.

허허로운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역적의 자식이라. 그게 무에 어때서?

한때는 그들을 역도라 부르고, 감히 역천의 음모를 꾸미는 폭도라 정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을 가리켰던 일이었다. 자식은 부모의 피를 이은 것이지, 죄와 잘못마저 이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뉘의 피를 타고 태어났는지 알 바 아니었다.

라온이 홍 씨라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라온이 노인의 삶에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핏줄, 그 이상의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온과 그녀의 가족들은 처음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들처럼 노인의 삶 속에서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라온의 어미, 최 씨가 두려움을 느낀 것일 터. 역적의 가족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어찌 나올지 무서워 도망간 것이리라.

그것이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어찌하여 이제야 찾아오는 것이냐?”길고 긴 상념의 문을 빠져나온 노인이 라온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그 퉁명한 목소리에 담긴 것은 물기 어린 그리움이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런데 할아버지야말로 언제 이곳으로 이사 오셨어요? 예전에 사시던 곳에 찾아가 봤더니 안 계시던데요?”“꽤 되었다. 혹시 네가 다시 찾아올까 싶어 이웃에 말을 해 두었는데 듣지 못했느냐?”“어디 먼 곳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습니다.”“그래, 그랬구나.”그러고 보니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못했다. 라온이 떠나고 한동안 공허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이제라도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빨갛게 물든 코끝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라온이 익숙한 웃음을 보였다.

“웃지 마라. 정든다. 그리 정들게 하고서는 다시 사라질 거면 웃지 마, 이 녀석아.”불퉁한 지청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진심을 담은 지청구가 아니었다. 그저 오랜 기다림에 속절없이 부려보는 투정에 불과했다. 라온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 반가움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마치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사람들처럼. 말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물 어린 감동도, 떠들썩한 기쁨도 내색하지 않는 재회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라온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노인의 속내를 알고도 남음이었다. 소리 없이 전해지는 마음에 라온의 눈가가 다시 알큰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괜스레 투정을 부리는 노인의 팔에 매달리며 살가운 눈웃음을 흘렸다.

“웃지 말래도.”“웃음이 나오는데 어떻게 안 웃어요? 너무 좋아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찌합니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이 제 속내를 감추는 것이라고요.”“거짓말 마라.”“거짓말 아니에요.”“그러는 녀석이 그리 말도 없이 휑하니 사라져?”“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갑작스레 서두르시는 바람에…….”9년 전, 갑자기 노인의 곁을 떠났던 이유를 라온 역시도 알지 못했다.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머니는? 단희도 잘 지내느냐?”“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행여 못 지낸다고 하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제가 누군데요. 할아버지 손녀잖아요. 그런 제가 있는데 못 지낼 리가 없지요.”라온이 턱을 치켜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녀석, 큰 소리는.”흐뭇하게 지켜보는 노인에게 라온이 궁금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언제 강진에서 이사 오신 거예요?”“봄에 너희가 그렇게 떠나고 가을 무렵, 유배가 풀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다행이다. 남몰래 초당에 들렀다 안 계시는 통에 걱정하였지 뭐예요.”“그랬었구나.”저를 걱정했다는 라온의 말에 노인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러다 이내 뭔가를 발견하고는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라온아…….”라온의 귓가로 숨죽인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어쩌다가 저런 분과 동행하게 되었느냐?”“저런 분이요?”라온은 노인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이내 제 뒤를 장승처럼 지키고 서 있는 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화초저하 말입니까?”라온 역시로 영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노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화초저하?”“귀하디귀하게 자라신 태가 역력하기에 제가 붙여드린 별명이에요.”“그런 별명을 들으시고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단 말이더냐?”“네.”“혹여 삼족을 멸하겠다고 하시거나, 아니면 왕세자 모욕죄로 벌하시진 않으시고?”라온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는 용케도 지금까지 살아 있구나,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조금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분이시긴 하지만, 고작 별명 갖고 뭐라고 하실 만큼 속 좁은 분은 아닙니다.”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한 것 같은데.

등 뒤에 서 있는 영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라온이 눈으로 물었다.

‘헉, 들으셨습니까?’영이 한쪽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럼 안 들리겠느냐?’라온이 새끼 고양이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귀도 밝으십니다. 설마…… 기분 나쁘거나 그러신 것은 아니시지요?’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아니다.’화초저하라는 말에 성을 냈다간 졸지에 속 좁은 사람이 될 성싶기에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소리 없는 대화를 지켜보던 노인이 서둘러 라온을 안채로 데려갔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을 어찌할꼬.”“왜 그러세요?”“장난을 칠 때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지.”“괜찮습니다. 보기완 달리 마음이 무척 넓으신 분이십니다.”“그나저나 넌 대체 저분과 어떤 연으로 닿아있기에 이리 함께 다니고 있는 것이야?”노인의 물음에 라온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벗입니다.”“벗?”“네. 화초저하께서 종종 우리는 벗이다 말씀하시곤 했지요. 물론 비공식적이지만요.”“그럼 공식적으론 어떤 사이인데?”“그게…….”차마 할 수 없는 말이라. 라온은 말끝을 흐렸다.

노인이 대답을 재촉했다.

“어서 말해보려무나. 대체 두 사람, 공식적으로 어떤 사이냐?”“군신…… 관계라고나 할까요?”“군신? 네가 출사를 했단 말이냐?”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던 노인은 얼른 제 입을 막았다.

라온이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노인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놀람도 컸다.

라온은 계면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출사를 했다기보다는……. 그것보다는 좀 더 은밀한 관계라고나 할까요?”“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말을 이리 뱅뱅 돌리느냐? 얼른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느냐?”“그게 말입니다. 제가…….”“제가?”“제가…… 환관이 되었어요.”한참을 머뭇거리던 라온은 깊게 들이마신 숨을 토해내듯 단숨에 말했다.

“그래. 환관이 되었구나.”그렇게 된 거였군. 과연 왕세자와 환관이면 군신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의 눈이 다음 순간 휘둥그레 떠졌다.

“응? 네가 무엇이 되었다고?”“환관이 되었습니다.”눈을 끔뻑이며 라온을 쳐다보던 노인이 다시 재차 물었다.

“네가 말하는 환관이 내가 생각하는 그 환관이 맞는 것이야?”“아마도요.”“궁에서 왕족들의 손발이 되어 살아가는 그 환관?”끄덕끄덕.

“수염도 나지 않는 반쪽 사내?”역시 끄덕끄덕.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랫도리가 싹둑 잘린 그 환관?”“네. 할아버지. 그 환관 맞아요.”“어떻게 이런 일이…….”노인의 입에서 절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예전부터 별난 구석이 있어 엉뚱한 일을 벌이긴 했지만, 설마 환관이 되었다니.

여인이 환관이 되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농담인가 싶었지만, 진지한 라온의 표정은 결코 농담을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믿기지 않으시죠?”“여인이 환관이 되었다는데, 너라면 쉽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그러게요. 사실 저도 아직 믿기지가 않습니다.”이해된다는 듯 라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이런, 천하에 몹쓸 놈을 보았나.”어쩌다 환관이 되었는지, 설명하는 라온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노인은 박두용에 대해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서?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라온이 여인인 것을 아직 들키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힐끗, 바깥을 살피던 라온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저하께서 눈치채신 거 같아요.”“이런! 이런!”노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긴, 워낙에 명민하신 분이라. 쉽게 속일 수는 없었을 게다.”“그런데 저하께선 어째서 지금까지 내색을 안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온의 말에 노인이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야.”“할아버지, 이럴 땐 그냥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는 게 낫겠지요?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하루하루가 아주 살얼음판입니다.”“아서라. 빨리 맞는 매는 제일 아픈 법이다.”“하지만…….”“이 녀석아, 할아비 말을 어디로 들었느냐? 매를 맞을 땐, 때리는 상대방의 기력이 쇠진했을 때 맞는 게 났다고 몇 번을 말했어? 매 맞는 것도 요령이다, 요령. 요령껏 맞아야 덜 아픈 법이지. 밖에 나가서 기다려봐라. 이 할아비가 저분의 의중을 한번 떠봐야겠으니.”“뭘 어쩌시려고요?”“이 할아비만 믿어라. 이왕 맞는 매라면, 한 대라도 덜 아프게 맞게 해주마.”“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어허! 이 할아비만 믿으라니까!”그거 아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런 말 하실 때가 제일 불안해요.

*  *  *

쪼르륵.

맑은 찻물이 찻잔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영과 마주앉은 노인은 노란 찻물이 담긴 찻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에 수확한 차입니다. 맛이 제법 괜찮사옵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영은 말없이 노인이 권하는 찻잔에 입술을 담갔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임에도 몸에 밴 듯한 고아한 품위가 가득했다. 바람직한 군왕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리라.

“담백한 것이 좋구려.”담담히 차맛을 평가하는 영의 목소리가 향긋한 차보다 더 향기롭게 느껴졌다.

영을 찬찬히 살피며 감상하던 노인이 물었다.

“이 힘없는 늙은이를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인지요?”“선생의 도움이 필요하오.”“저 같은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저하를 도울 수가 있겠사옵니까?”“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오.”영의 단호한 목소리에 노인이 문득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반듯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뚜렷한 결기. 붕어하신 선대왕의 눈빛을 고스란히 빼다 막았다.

그러나…….

노인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다시 시선을 거둬들였다.

다시 돌아가기엔 빼앗긴 것들이,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은 세월이었다.

“새로운 나라라……. 역대 많은 왕께서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꿈입니다.”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며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이루려 하오.”영의 단호한 대답이 노인의 귓가를 날카롭게 후려쳤다.

그러나 노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묵묵히 차를 마시던 노인은 문득 열린 동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노인이 세운 작은 학당에서 어린 학동들과 어울리고 있는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가끔 후회하곤 합니다. 저 아이의 이름을 라온이라 지은 것을요.”“……?”“퍽퍽한 삶이라도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었지요. 하온데, 그 이름 탓일까요? 어린 녀석이 좀처럼 울지도 않고, 언제나 씩씩하게 살려 하는 것이 안쓰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노인이 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아이를 어찌 여기시옵니까?”“귀이 여기오. 헌데 선생께서는 저 아이와 어떤 연이시오? 할아버지라니?”“그리 연이 되었습니다. 저 아이를 통해 알았사옵니다. 핏줄로 이어진 연보다 더 깊은 연이 있다는 것을요.”“어찌 만났는지 물어봐도 되겠소?”“강진에서 추위에 얼어가던 것을 거둔 것이 인연이 되어 강진을 떠나올 때까지 할아비 노릇을 하게 되었사옵니다.”영이 돌연 손을 들어 보였다.

“저 녀석이 심심하면 손을 이리 들고 말하더군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맹랑한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제법 괜찮은 말을 한다 싶었소. 하여, 언제고 저 녀석이 말하는 할아버지라는 분을 만나보고 싶다 생각하였지요. 과연, 녀석에겐 훌륭한 스승이 있었소.”노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랬사옵니까? 영특한 아이라 가르치는 재미가 톡톡했던 아이입니다.”“알고 있소.”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무척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것도.

말을 하는 영의 시선은 동창 밖의 라온에게로 향해 있었다.

노인의 눈 속에 묘한 빛이 서렸다.

“저하께선 저 아이에 대해 알고 계시옵니까?”노인의 물음에 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라면 이미 알고 있소.”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더욱 많이 알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라온에 대해 알고 싶었다. 심지어 그녀 자신보다도.

자꾸만 욕심이 생겨났다. 하여, 어울리지 않게도 질투하고 집착하고 있었다.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동자에 진심이 가득했다.

“…….”영과 라온을 번갈아 바라보던 노인의 눈 속에 의미심장한 이채가 스며들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기묘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군.

속내를 감춘 채 노인이 다시 물었다.

“하오면, 하나 더 여쭙겠나이다.”“허락하오.”“저하께서 꿈꾸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옵니까?”“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오.”“사람이 사람답게라…….”“왕이 왕다운 세상, 신하가 신하다운 세상. 사람이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 세상.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고,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는 세상이오. 여인이 거짓 사내 노릇을 하지 않아도 좋을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소.”일순, 노인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왕이 왕답고 신하가 신하다운 세상.

백성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아이가 아이답고, 노인이 노인답게, 그리고 여인이 여인으로 살아도 좋을 세상…….

이 심지 곧은 젊은 왕세자께서는 역적의 자식마저도 품을 만큼 깊고 너른 품을 지녔단 말인가?

“저하의 세상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충분히 알겠습니다.”노인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노인의 귓가로 영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허면, 내 청을 받아 주겠소? 나를 도와주겠소?”때마침, 마당 한쪽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엔 학동들과 어울려 해맑게 웃는 라온의 것도 끼어있었다.

저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세상, 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

노인의 주름진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노인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청이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