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똑똑똑. 똑똑.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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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7
딸깍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눈 덮인 숲을 가로질렀다.
설산의 풍경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말을 모는 영의 시선은 줄곧 라온에게 못 박혀 있었다.
“라온아, 홍라온.”영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라온을 조용히 불렀다.
“네? 네.”내내 굳어 있던 라온이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돌려 영을 보지는 않았다.
영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발끝이 오그라들었던 탓이다.
영의 입가에 자꾸만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저리 잔뜩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작게 만들어 버릴 수만 있으면 품 안에 쏙 집어넣고 싶을 만큼.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 말할 수 있음에도 괜스레 라온의 귓가에 따스한 입김을 간질거렸다.
그럴 때마다 라온은 어김없이 반응해왔다.
말 잔등이 굽실거려 영과 닿을 때마다, 말고삐를 잡아당기는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라온은 매번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고 신기하다.
한참을 보았지만, 도통 질리지 않았다.
끝없이 놀려주고 싶은 마음 한가득이었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밤에 경기라도 일으킬 성싶었다.
영은 톡톡 가벼운 손길로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 풀어라. 네가 그리 긴장하면 말도 긴장하느니.”“기, 긴장 안 합니다.”“녀석…….”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는 주제에 대답은 따박따박이다.
영의 얼굴에 피싯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질문을 던졌다.
“아까 보니 박 판내시부사와 아는 사이인 거 같던데.”“그게…….”라온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제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박두용이 재빠르게 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인이 온정을 베풀어 저 아이를 궁으로 들였사옵니다.”세자저하께서 저 아이를 마음에 두고 계신 듯하여 소인이 들였지요.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 영을 향했다.
그러나 무정하게도 영의 두 눈은 여전히 라온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영의 시선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라온이 박두용의 말에 반박했다.
“온정이라기보다는 돈에 속고, 사소한 문서에 속아 궁에 들어온 겁니다.”라온의 말에 박두용이 킁킁, 괜한 콧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돈에 속고 문서에 속아?”“…… 그런 게 있습니다.”영의 물음에 라온이 고개를 움츠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영이 박두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이 아이를 천거했다 하였는가?”“그렇사옵니다.”“이 아이에게 환관이 되는 시술을 한 자는 뉘더냐?”“엄공 채천수이옵니다.”“엄공 채천수?”“네. 조선 최고의 솜씨를 가진 엄공이옵니다. 채천수가 아니라면 저리 장성한 아이를 환관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옵니다.”“그래?”영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라온의 하얀 뒷덜미를 응시했다.
박두용이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용케 들키지 않았는가 보다.
신기한 녀석. 어찌 여인인 것을 속이고 들어왔을까.
혼자서 마음 졸였을 라온을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 여인이 여인으로 살 수 없었던 이유,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라온이 살아온 삶이었다.
여인이되 거짓 사내 노릇을 하며 살아온 삶이 어찌 평범할 수가 있었겠는가? 필시 고되고 힘들었을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능히 짐작되었다.
그러니 그리 웅크리고 있지 마라.
그러니 그리 가시 세우고 있지 마.
영은 잔뜩 굳어 있는 라온을 슬며시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라온은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어깨를 파르르 떨며 오히려 달아나려 했다.
라온을 잡쥐고 있던 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조금 내게 기대어라. 그리 꼿꼿이 있다간 얼마 견디지 못할 것이야.”힘들고 어려우면 내게 기대도 된다.
의지해도 된다.
내 품 안에 있으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떨지 않아도 된다.
너는 내 사람이니, 내가 지켜줄 것이다.
어떤 불행도, 어떤 슬픔도 내가 막아주고 걷어주마.
그러니 날 믿어라. 내 안에선 빗장처럼 꽁꽁 닫힌 그 마음을 맘껏 풀고, 자유롭게 날갯짓해도 된단 말이다.
“하지만…….”라온이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두용과 한상익은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었고 박만충은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긴장 풀어라. 아무 짓도 안 해. 이리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곳에서 무에 그리 긴장을 하는 것이냐. 조금만 기대라. 나도 많이는 빌려줄 생각 없으니. 조금만, 아주 잠시만 내 가슴에 기대어라.”영은 라온의 작은 머리를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간 모처럼 좋은 풍경을 놓쳐 버릴 것이야.”“……네?”“네게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 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중인데, 이러면 내 노력이 허사가 되질 않느냐.”영의 말에 라온은 내내 뻣뻣하게 굳은 목을 뒤로 돌렸다. 하얀 눈꽃이 핀 겨울 산 사이로 영의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이제야 돌아보는구나.”영은 아프지 않게 라온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댔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건만……. 영의 자상한 배려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따뜻한 미소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라온은 목이 꽉 멨다.
어찌 된 이유일까요?
눈 내린 산의 풍광이 이리 아름다운데…… 이리 고운데…… 어찌하여 제 눈에는 저하의 얼굴만 보이는 걸까요?
어찌하여 저하의 미소만 보이는 걸까요?
* * *
“박가야, 너 보기에는 어떠하냐?”한상익이 박두용의 곁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는 한가,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아무래도 저하께서 저 아이를 많이 귀애하는 것 같지 않으냐?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그러게나 말이다. 이제 우리가 궁을 떠난다고 해도 세자저하께서 마음 붙일 곳이 있으니.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이야. 하하하하.”“그런데 박가야. 이렇게 웃고 있어도 되겠냐?”“웃지 못할 건 또 무언가?”“걱정도 안 되느냔 말이다. 저리 세자저하까지 뫼시고 가는 길인데, 아무런 소득도 없으면 어쩔 것이야?”“걱정하지 마라. 다 된 밥이다. 이제 뜸만 들이면 된다.”“정말이냐? 정말로 그 고래심줄 같은 양반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이냐?”“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이제 한 번만 더 찍으면 되니, 한가 너는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너라.”“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냐?”한상익의 걱정 가득한 물음에 박두용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고만 살았느냐? 너는 그저 나만 믿어라. 하하하하.”
* * *
쾅!
솟을대문이 눈앞에서 매몰차게 닫혀버렸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문을 두드렸던 박두용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니, 저놈이! 당장 문 열어라. 당장 문을 열지 못하겠느냐?”쿵쿵쿵쿵.
성화가 뻗친 박두용은 노한 음성과 함께 발로 솟을대문을 걷어찼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다시 문이 안쪽으로 빠끔히 열렸다.
“그러면 그렇지.”박두용이 뒤편에 있는 영을 돌아보며 웃음을 보였다. 그런 그의 앞으로 아까 야멸치게 문을 닫고 사라졌던 젊은 하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문을 활짝 열어라. 여기 어떤 분이 오셨는지 아느……컥!”박두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무뚝뚝하게 생긴 하인은 바닥에 소금을 한 움큼 휙 뿌렸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런 미련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잠시 멍한 상태로 서 있던 박두용의 눈이 뒤집어졌다.
“이, 이, 네 이놈! 내가 뉘인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내가 박두용이다. 이 나라 최고의 환관, 박두용이란 말이다. 네놈이 내가 반쪽 사내라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야? 네 이놈!” “그만해라, 박가야. 저하께서 보고 계시질 않느냐.”한상익이 서둘러 박두용을 말렸다.
흥분하여 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던 박두용이 서둘러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생각보다 일이 어려운가 보군.”영의 나지막한 말에 박두용이 서둘러 주름진 얼굴을 가로로 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것이옵니다. 그러니 잠시만, 아주 잠시만 짬을 주시옵소서.”“그 이야기를 반년 전부터 듣고 있네.”“아니오이다. 아니오이다. 정말로 다 된 밥이옵니다.”“내 보기에는 아직 쌀도 씻지 않은 것 같은데?”“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질 않습니까? 이미 열 번 하고도 한 번을 더 찍었습니다. 이제 넘어가는 것만 기다리면 될 것이옵니다.”“나무를 찍으려면 도끼로 찍어야지.”“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박 내관이 방망이로 나무를 찍는 것처럼 보여서 하는 말일세. 도구가 잘못되었으니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을 찍어도 소용없을 것 같군.”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영의 말에 박두용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어디를 가든 수문장이 항상 문제지요.”“…….”물끄러미 박두용을 바라보던 영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세자저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박두용의 어깨가 아래로 푹 내려갔다.
한상익이 위로하듯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괜찮으이. 세자저하께서는 다 이해해 주실 것이네.”“이번에는 진짜 될 거 같았는데.”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박두용이 별안간 얼굴을 반짝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그놈을 찾아 족쳐야겠군.”“그놈?”한상익이 물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지껄인 그놈 말이다.”어이없는 박두용의 말에 한상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라온이 다가왔다.
“와, 살다 살다 이런 문전박대는 처음 봅니다.”그녀는 낙심하고 있는 박두용에게 물었다.
“대체 저 안에 있는 분이 뉘신데 그러십니까?”“말해준들 네가 알겠느냐?”“궁금하여 그럽니다. 대체 어떤 분이신데 귀인을 이리 문전박대하시는 것인지 말입니다.”“세자저하께서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지.”“세자저하의 스승님이요?”엄청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 화초저하께서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니.
“그래도 이 정도로 완강히 나오는데 단념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진작에 그리 말씀드렸지.”“하온데요?”힐끔, 제 뒤편에 서 있는 영을 돌아보던 박두용이 작은 목소리로 라온에게 속삭였다.
“삼고초려다.”“삼고초려요?”“훌륭한 인재를 거두려면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 한다고 하시더구나.”라온 역시 작은 소리로 박두용에게 속삭였다.
“삼고초려가 아니라 사서고생 같습니다만.”“죽고 싶으냐?”박두용이 사납게 노려보자 라온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발 한발 대문 가까이 다가섰다.
특이하게도 대문에는 산과 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모양이 어찌 보면 글자 같고, 또 어찌 보면 평범한 산수화 같았다.
그 그림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라온이 박두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곳에 계신 분이 누구십니까?”“삼미(三眉) 선생이시다.”“이 사람아, 좋은 호를 두고 삼미가 뭔가?”“놔두게. 이리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어찌 좋게 부를 수 있겠는가? 어험.”“속 좁기는.”한상익이 박두용을 타박했다.
한편, 삼미라는 이야기를 들은 라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뭔가에 홀린 듯 라온은 대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귀인 어르신, 오늘이 며칠인지 아십니까?”“날짜 가는 것도 모르느냐?”“며칠입니까?”“매듭달 초아흐레가 아니더냐.”“매듭달 초아흐레…….”작게 혼잣말을 곱씹던 라온이 별안간 대문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똑똑. 똑똑. 똑. 똑똑똑똑.
박두용과 한상익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뭐하는 것이냐? 장난하지 말거라.”그러나 라온은 들리지 않는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똑똑. 똑똑.
“어허, 뭐하는 것이야? 요즘 어린 것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다고 문을 열어줄 것 같으냐?”박두용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라온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가만있어 보아라.”영이 박두용을 막았다.
“하오나 저하, 저 어린 것이 별 쓸데없는 짓을…… 어라?”박두용의 말문이 막혔다.
일순간 대문 앞에는 깊은 정적이 흘렀다.
박두용은 눈으로 보고 있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열렸네?”굳게 닫혀 영영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 열리고 하인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지난 반년간 박두용의 앞에서는 뻐끔도 하지 않았던 입을 열어 라온에게 물었다.
“지금 몇 번이나 두들겼소?”“모두 일곱 번입니다.”“빠른 것 몇이고 느린 건 몇이요?”“빠르게 세 번을 두드렸고, 느리게 두 번, 중치로 두 번을 두드렸습니다.”“잠시만 기다리시오.”하인은 문득 품속을 들어 작은 서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책을 휘리릭 넘기며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왜 저러는 거지?”박두용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없기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사람,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영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언적(言的)인가? 아니, 두드려 물으니 고적(鼓的)이라고 할 수 있겠군.’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하인은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저 어린 녀석이 하는 짓이 괴이해서 물어본 것이 틀림없다.”박두용이 말을 하는 찰나.
솟을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 * *
“저…… 저게 어찌……?”박두용은 말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놀라기는 영도 마찬가지였다.
이리 쉬이 열릴 줄은 몰랐다. 한 며칠 고생할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일까? 라온이 했던 고적과 어떤 관련이 있음이 분명한데…….
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떻게 라온이 이곳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때, 문을 연 하인이 라온을 손짓했다.
“그쪽만 나를 따라오시오.”“잠시만요.”라온이 영을 돌아보았다.
“저분도 함께 가겠습니다.”잠시 고민하던 하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러시구려.”하인의 뒤를 쫓아 영과 라온이 대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박두용은 제 눈을 비볐다.
“한가야, 내가 귀신에 홀렸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흠.”대문을 더듬는 한상익의 눈 속에 이채가 스며들었다.
글자 같으면서도 그림 같은 문양.
라온은 필시 이것을 보고 들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묘하다는 느낌만 들지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을 저 아이가 어찌 알았을까?
내내 말없이 일행을 바라보던 박만충이 은근슬쩍 박두용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체 이곳에 누가 있는데, 세자저하께서 저리 안달하십니까?”“어허, 자넨 몰랐는가?”박만충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지요.”“이곳이 바로 삼미 선생의 집일세.”박만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삼미 선생님이시라면…….”박두용과 한상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분일세.”“그렇군요. 과연, 그분이시라면 세자저하께서 직접 행차하실 만하지요.”박만충의 얼굴 위로 벅찬 표정이 피어올랐다.
삼미 선생께서 도와준다면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단 격이 될 것이다.
“그분께서 부디…… 세자저하께서 내민 손을 잡아주셔야 할 텐데요.”듣고 있던 박두용이 단정 짓듯 대답했다.
“잡으실 걸세.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역하겠는가? 명령을 내리면 받잡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겠는가?”박만충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분이라면 모르지만, 삼미 선생님이시라면……. 어쩌면 세자저하의 뜻대로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 *
“영감마님, 모시고 왔습니다요.”라온과 영을 안채로 안내한 하인이 문풍지에 그려지는 그림자에 대고 고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형한 눈빛, 일자로 꽉 다문 입술, 그리고 곧은 의지를 보여주는 날렵한 콧날까지. 초로의 사내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전신에서 풍기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노인의 오른쪽 눈썹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삼미 선생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훑는 눈길로 밖을 내다보던 노인이 영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노인을 향해 영 역시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드는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작 영이 아니었다.
무언가 아련한 기운이 서린 노인의 눈빛이 향한 곳.
그것은 다름 아닌 라온이었다.
라온 역시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라온을 바라보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온아.”그 온화한 부름에 라온의 눈에 눈물이 글썽 들어찼다.
“……버지!”목구멍이 꽉 막혀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영이 의아한 얼굴로 라온과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 눈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라온은 대청마루로 나오는 노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그립고, 그리웠던 한 마디가 기어이 라온의 입을 통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