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73화 (73/131)

73. 화초저하께서 알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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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3

라온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겼다.

‘그분도 알고 계신다.’반쯤 넋이 나간 모습으로 소양공주의 말을 작게 읊조렸다.

내가 여인이라는 것을 화초저하께서 알게 되셨단 말이야?

들키고 말았다. 마침내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된 죄는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일까? 애초에 정체를 숨기고 궁에 들어온 것부터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살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한다. 어머니와 단희를 데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달아나야만 했다.

그러나…….

라온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선뜻 궁을 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분도 알고 계신다.’화초저하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분께선 언제부터 내가 여인인 걸 아신 걸까?

소양공주를 통해서 이번에 알게 되신 걸까? 아니면 예전부터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영의 눈빛이, 내 사람이 되어라 하던 말들과 그 달콤하면서도 아릿했던 입맞춤. 깊은 한숨을 쉬며 라온을 끌어안듯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여인인 걸 알면서도 했다는 거야? 정말?

머릿속이 복잡했다.

뒤엉킨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자선당에 다다랐다.

불 꺼진 자선당 처소 안으로 들어선 라온은 버릇처럼 대들보 위를 올려다보았다.

“김 형!”텅 빈 대들보 위에선 공허한 메아리만이 되돌아왔다.

이럴 때 함께 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성가신 녀석’ 불퉁한 한 마디를 내어놓으며 등을 돌리던 병연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그리웠다. 외롭고 불안했다.

화등잔에 불을 붙였다. 노란 불빛이 어둑한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어? 저게 뭐지?”헛헛한 눈길로 방 안을 훑던 라온은 눈을 크게 떴다.

방 한가운데 한 통의 서찰이 간잔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김 형께서 두고 가셨나?”라온은 서둘러 서찰을 읽어내려갔다.

<홍 내관 보아라, 나 소양 공주다.>청국으로 돌아가신 소양 공주께서 내게 무슨 일로?

<놀랐느냐? 나도 내가 네게 이런 서찰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또한, 이리 빨리 청국으로 돌아가게 될 줄도 몰랐느니.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에는 네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말하고 싶어 이 서찰을 쓴다.>말인즉, 너 때문에 내가 청국으로 가는 거야, 하고 역설하고 계시는군.

<내게 세상의 사내란 둘 중 하나였다. 내게 반한 사내와 앞으로 내게 반할 사내. 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지.>역시 소양 공주시네.

<세자저하 역시도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내게 반할 사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젠가 이 소양이의 매력에 매료되어 헤어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서찰을 읽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웠다.

패기의 공주님. 다른 건 몰라도 소양 공주의 이 자신만만함은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이 자신만만한 공주님께서 무슨 연유로 의지를 꺾으신 것일까?

<그러기에 네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것이다. 적어도 너의 약점을 쥐고 너와 경쟁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러나 이런 나도 한번은 마음이 흔들렸었지. 기억하느냐? 지난번 동궁전에서 그분과 차를 마시던 날을. 그때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더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이 너라는 말씀 또한 하셨다.>서찰을 읽던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소양공주께서 갑자기 동궁전을 뛰쳐나가신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나.

잠깐만, 그럼 화초저하께서는 그때 이미 내가 여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날 마음에 품었다고 공주마마께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나는 생각했다.>역시…… 공주님도 같은 생각이시네.

서찰을 읽는 라온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아마도 화초저하께선 소양공주를 거절할 명분으로 날 내세우신 모양이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처음으로 여인의 복색을 하고 화초저하를 만났을 때, 날 더러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라 하셨지.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백성이라 어여삐 여기는 것이라고……, 다른 뜻은 없다고 하셨었다. 이번 역시 그런 핑계를 댄 것이 틀림없었다.

<괜한 핑계라 생각했다. 행여 지금 당장 그분께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셔도 한때의 유희일 뿐이라 생각하였다. 어찌 환관으로, 정체조차 속이고 있는 여인을 마음에 둘 수 있단 말인가? 나 소양을 곁에 두고.>아! 공주마마께서는 이미 그전부터 내가 여인인 것을 알고 계셨구나.

하긴, 소양공주께서는 화초저하처럼 여인의 얼굴을 구분 못 하는 것도 아니시니. 여인의 복색을 하고 있던 내 모습을 보고 눈치채지 못하였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보았다. 궁 밖으로 잠행 나가신 세자저하와 홍 내관 너의 모습을.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내게 반하지 않는 사내도 존재한다는 것을.>소양 공주께서 뒤를 따라오셨단 말이야?

<또한, 나는 알게 되었다. 너와 세자저하의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새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돌아가기로 하였다. 다른 여인에게 넋이 나간 사내는 흥미 없거든.>잠시 머릿속이 멍해진 라온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라온은 마지막 글귀로 시선을 옮겼다.

<추신, 너처럼 궁핍하게 생긴 아이가 어떻게 그분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어쨌든 잘해봐라.>궁핍하게 생긴…… 이거 응원해주는 거야? 아니면 욕을 하시는 거야? 어쨌거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저도 모르게 옅게 웃던 라온은 서둘러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화초저하께서 알고 계신다. 내가 여인이라는 것을.

아, 이제부터 어쩐다?

* * *

부원군 김조순의 거대한 저택 위로 검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화등잔에 불을 댕긴 사랑채 문풍지 위로 김조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대감.”방 안에 앉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김조순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인이옵니다.”“무슨 일이냐?”김조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화답했다.

“세자께서 내일 아침, 먼 곳으로 잠행을 떠난다는 전갈이옵니다.”“먼 곳으로 잠행이라…….”유연하게 붓을 놀리던 김조순이 허리를 펴고 문풍지 밖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세자께서 어떤 패를 움켜쥐었는지 봐야겠구나. 네가 잘 알아보고, 보고 하도록 하여라. 명심해라. 절대 세자께서 눈치채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명 받잡겠나이다.”조용히 고개를 숙인 그림자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조순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너무도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이뤄진 일이라.

누구의 눈에도, 그 어떤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때마침, 김조순의 부름을 받고 사랑채로 들어서던 윤성의 눈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인영이 들어왔다.

윤성은 미간을 찡그린 채 어둠 속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저자는……!”가늘게 여며진 윤성의 눈 속에 차가운 이채가 스며들었다.

* * *

밤새 내린 눈이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내리는 눈이었다.

길게 날숨을 내쉬는 영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톡톡.

중희당 이 층 누각에 선 영은 손가락 끝으로 난간을 두드리며 고개를 길게 뺐다.

그러다 제 모습이 떠오르자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만 섞인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동이 틀 무렵이면 라온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시(辰時:아침 7시)는 되어야 라온이 동궁전으로 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여 오늘은 일찍 오지 않을까 하여 이리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먼발치에서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언제 기다렸느냐는 듯 시치미를 뗐다. 하여, 라온은 영이 그녀를 기다린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던, 알지 못하던.

기다리라 하여 기다리는 것이 아니니…….

좋아하라 하여 좋아하는 것이 아닌 마음처럼.

영은 묵묵히 눈 덮인 길을 응시했다.

진시말(辰時末:아침 9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라온이 늦어지고 있다. 오늘 잠행 떠난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리 늦을까?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려나?

영의 뇌리로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상념이 길어질수록 그의 표정도 무겁게 침잠되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듯한 유리알 같은 시선이 하얀 눈길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동궁전 대문 앞을 기웃거리는 라온의 작은 몸이 들어왔다.

톡톡, 난간을 두드리던 영의 손길이 멈춰졌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발길은 어느새 라온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라온의 앞에 당도한 영은 언제 초조하게 기다렸느냐는 듯 언제나처럼 짓궂고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제 오는 것이냐?”지나가는 듯한 무심한 말투가 라온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담비 털을 덧댄 연보랏빛 솜옷을 입은 라온이 동그래진 눈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꼭 겨울 산속을 헤매던 하얀 토끼 같군.

시린 바람결에 빨갛게 붉어진 두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느껴졌다.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엉뚱한 상상을 애써 잠재우며 영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행 떠난다 하질 않았느냐? 일찍 오라는 전갈, 못 받았느냐?”지금 라온이 입고 있는 솜옷을 최 내관을 통해 보내며 여느 때보다 일찍 동궁전으로 오라고 일러두었던 참이었다.

“들었습니다.”“헌데, 어찌 이리 늦었느냐?”“짐을 챙기느라 늦었습니다.”“짐?”영은 라온이 메고 있는 커다란 보퉁이로 시선을 옮겼다.

짐 크기가 얼마나 큰지, 제 몸의 절반은 됨직했다. 혼자 메고 오느라 꽤 고생했을 듯싶었다.

“그게 다 무어냐?”“먼 길 떠난다고 하시질 않으셨습니까?”“그 짐만 봐서는 영영 궁을 떠나는 사람 같구나.”“…….”“뭐야? 설마 이참에 궁에서 아예 나가려 했던 것은 아니지?”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안해졌다.

쐐기를 박듯 묻는 영의 물음에 라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그녀의 얼굴 위로 겨울 햇살처럼 시린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가벼운 웃음 한 조각에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라. 영은 잠시동안 멍해지고 말았다.

그런 영을 향해 라온이 천천히 입을 뗐다.

“저기…… 저하.”“왜?”“저기…… 그러니까…….”무슨 일인지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라온을 보며 영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영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왼고개를 돌리는 라온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일 있느냐?”“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라온이 주저주저하며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저하.”세자우익위 한율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떠나실 채비를 마쳤사옵니다.”“잠시만 기다려라.”영은 라온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말해 봐.”“아닙니다. 급한 일이 아니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라온은 커다란 짐 무게에 눌러 되똥되똥 어린아이 같은 걸음으로 율의 뒤를 쫓았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거지? 지금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맹랑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던 녀석이 왜 이러는 것일까? 혹시…….

영의 눈 속에 이채가 스며들었다.

혹여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것이 아닐까?

“그럼 좀 더 기다려 볼까? 저 녀석이 스스로 내게 털어놓을 때까지.”영의 얼굴에 한껏 즐거운 미소가 맺혔다.

라온에게 비밀을 물으려던 생각은 당분간 취소였다.

그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리라.

과연 어떤 비밀인데, 저리 주저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 라온을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라온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달랑 들어 올렸다.

“이리 내라.”“아닙니다. 되었습니다.”“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서둘러 뒤쫓아와라.”영은 라온의 손목을 잡고 궁궐 밖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초겨울의 아침 햇살이 진주알처럼 부서져 내렸다.

꼬막 연의 꼬리처럼 영의 뒤를 쫓던 라온이 문득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엊그제가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눈이 내립니다. 겨울은 어쩐지 스산해 싫습니다.”앞서 걷던 영이 뒤따르는 라온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고개를 드는 라온의 얼굴 위로 황금빛 햇살이 튀어 올랐다.

해사한 그 모습이 영의 심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주쳐오는 라온의 다사로운 빛에 눈이 시린 영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 스산한 계절도 다른 계절 못지않게 좋다. 너와 함께라면…….’너와 함께라면 그 어떤 곳이라도 상관없다.

영은 다시 고개를 돌린 채 걷기 시작했다.

라온이 자박자박 재빠른 걸음으로 뒤따라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부산함을 듣는 영의 얼굴에 자꾸만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 * *

‘홍라온,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어디라고 그리 웃는 것이야? 지금이 웃을 때야? 저분께서 알고 계시다질 않아. 내가 여인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와?’라온은 스스로에게 소리 없는 지청구를 날렸다.

영에게 손목이 잡힌 채 궁을 나선 그녀는 운종가를 가로질러 백탑으로 향했다.

사실, 화초저하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도 많이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까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자연스레 동궁전으로 발길이 향했다.

무섭고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화초저하의 얼굴을 어찌 볼까, 심란하기만 하였다.

그럼에도 영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여인인 걸 아신다, 화초저하께서 내가 여인인 걸 아신다.

주술 같은 한 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럼 지금까지는 왜 모른 척하고 계셨던 것일까? 왜? 어째서? 내가 벗이기 때문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복잡해진 머릿속에 아까부터 떠나지 않는 의문이 다시 피어났다.

잠시 망설이던 라온은 앞서 걷는 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화초저하. 우리 어딜 가는 것입니까?”“말하지 않았느냐? 내게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의 마음을 돌리러 가는 길이라고.”“혹시 그분…… 여인입니까?”앗! 여기서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와?

미쳤나 봐, 미쳤어.

라온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는 입을 서둘러 막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영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이윽고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그가 되물어왔다.

“그게 왜 궁금한 것이냐?”“뭐, 그러니까…… 어떤 분의 마음을 돌리러 가는 줄 알아야 미리 방도를 생각할 듯해서 말입니다.”“정녕 그런 것이냐?”“네. 그런 것입니다.”“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다른 뜻이라뇨? 절대 다른 뜻 같은 것은 없습니다.”절대 여인인 게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라온은 확고히 단정 짓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농담이었다. 헌데, 정색하는 걸 보니 오히려 의심스럽구나.”“아닌 걸 아니라고 한 것뿐입니다.”“그래? 그런 거란 말이지.”“네. 그런 겁니다.”“그런 거라면 더더욱 말해주고 싶지 않구나.”“네?”“가서 만나면 여인인지 사내인지 알 것이니.”“정말 그러실 겁니까? 벗이라면서 그 정도도 안 알려주시는 겁니까?”“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곧 알게 될 것이다.”싱글싱글 웃던 영이 라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예서 잠시만 기다려라.”영은 운종가에 있는 백탑 한쪽에 라온을 기다리게 했다. 그러고는 백탑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내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영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라온의 눈에 걱정이 깃들었다.

자신을 대할 때는 훈훈한 봄바람 같은 분. 하지만 뭇 사람들을 대할 때면 차디찬 겨울처럼 돌변하시고는 했다.

혹시나 나중에 자신에게도 저리 눈빛 차갑게 세우시지는 않으실까 두려웠다.

그나저나 요즘 들어 자꾸만 화초저하께 말려드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자신을 바라보던 영의 짓궂은 웃음을 떠올리던 라온은 백탑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영을 흘겨보았다.

그때였다.

“네 이놈! 어디라고 그리 눈빛을 세우는 것이더냐?” 어느 틈엔가 다가온 노인이 라온의 이마를 콩 아프게 쥐어박았다.

“아얏!”느닷없는 일격에 놀란 라온이 이마를 부여잡고 노인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인 어르신이 아니십니까?”라온을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한 박두용이 주름진 눈가를 휘며 웃고 있었다.

“귀인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그러는 네놈은 여기 어쩐 일이냐? 아니, 그보다, 네 이놈. 환관 노릇을 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도 그 모양이더냐?”“제가 뭘 어쨌다고 다짜고짜 이러십니까?”“자세 불통, 시선 불통, 걸음걸이 불통. 쯧쯧, 어째 나아진 게 하나도 없구나.”“그렇습니까? 딴에는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박두용의 지청구에 라온이 혀를 살짝 내밀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노력한 게 그 모양이냐? 그래. 요즘은 어디에서 일하는 게냐?”“아, 요즘은 동궁전에서 세자저하를 보필하고 있습니다.”“그래?”박두용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웬일인지 두 뺨에 발그레 홍조까지 떠올린 노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라온에게 물었다.

“그럼 요즘도 종종 저하와 약과도 먹느냐?”“약과요?”영문을 알지 못하는 라온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다 알고 있느니라. 너와 세…….”괜스레 라온의 어깨를 툭툭 치던 박두용이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박가야. 무슨 흰소리를 하는 게냐?”언제 다가왔는지 한상익이 박두용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고, 퉷퉷! 한가, 이 늙은 놈이 사람 잡는구나. 오랜만에 만나서는 어쩌자고 남의 입을 틀어막고 난리인 게야?”“어린아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 그렇질 않은가.”“내게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였다고 이래?”“그럼 그런 그게 쓸 데 있는 소리인 게야?”“내 입 갖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 것이네.”“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 손 갖고 막고 싶은 곳을 막은 것뿐이니. 상관하지 마라.”“이놈이!”“어허! 오랜만에 몸 좀 풀어봐?”“두 분 그만두십시오.”두 노인 사이에 서 있던 라온이 당황한 표정으로 싸움을 말렸다.

그렇게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투닥거림은 영이 돌아온 후에야 끝이 났다.

* * *

영은 백운회의 일원인 박만충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백탑 아래에 있던 사내들은 백운회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한 상선도 왔는가?”예정에 없었던 한상익의 출현에 영이 물었다.

박두용이 서둘러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한양에서 하던 일이 끝났다고 하여 소인이 함께 가자고 불렀사옵니다. 하온데…… 저분은 뉘시온지요?”박두용이 영의 뒤에 서 있는 박만충을 건너보았다.

“백운회 사람이다. 회주를 대신하여 이번 잠행에 동행하기로 하였느니라.”“박만충이라 합니다. 그냥 편하게 박 선비라 불러주십시오.”박만충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 박두용일세. 여기 있는 이 친구는 한상익이라고 전 상선이고. 헌데…….”박두용이 난처한 얼굴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박 선비가 함께하는 줄 미처 몰랐사옵니다. 하여, 준비한 말이 네 필밖에 없사옵니다.”영과 라온, 박두용과 한상익, 거기에 박만충까지 모두 다섯 사람인데 준비한 말은 네 필밖에는 없었다.

“다시 궁으로 돌아가 말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곤란해하는 박두용에게 한상익이 말했다.

“박가야. 어쩔 수 없이 너와 내가 함께 타야겠네.”“흥.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아직도 아까 했던 말싸움의 앙금이 남았는지, 박두용이 앵돌아진 여인처럼 고개를 팽 돌렸다.

“저 밴댕이 소갈딱지를 보았나.”한상익이 어이없다는 듯 마른 웃음을 허허 터트렸다.

박만충 역시 곤란한 표정으로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하하하. 아무래도 제가 불청객이 되었습니다.”곤란한 일행들 틈새로 라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 몫의 말을 타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말 타는 법을 몰라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선뜻 말을 내 주는 라온에게 박만충이 물었다.

“내게 말을 주면 자네는 어찌 따라오려고 그러는가?”“걸으면 됩니다.”“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먼 길이네.”“상관없습니다. 아직 젊고, 무엇보다 무쇠보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라온이 한쪽 발을 치켜들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영의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 요즘은 갈대처럼 비쩍 마른 다리도 무쇠 다리라고 부르느냐?”어느새 말 잔등에 올라탄 영이 라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네?”“이리 지체했다가는 해 저물겠구나. 너는 나와 함께 말을 타면 될 것이니, 서둘러라.”“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열심히 쫓아갈 것이니 먼저 가십시…… 앗!”라온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영이 라온의 허리춤을 낚아채듯 들어 올렸다. 그렇게 라온을 가볍게 품에 안은 영은 그대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이럇!”고삐를 잡은 영이 몸을 낮게 숙였다.

말을 모는 영의 손이 연신 라온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등 뒤에 맞닿은 심장과 귓전을 간질이는 숨결은 교대로 라온의 등과 솜털을 간질거렸다.

“꽉 잡아라. 떨어지지 않게.”낮지만 단호한 영의 목소리가 라온을 포박했다.

꼼짝없이 갇혀버린 라온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라온의 얼굴을 두드렸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라온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영의 숨결이, 고동치는 그의 심장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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