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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72화 (72/131)

72. 진정한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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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0

윤성의 뜻하지 않은 등장으로 모든 것이 일변했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영의 눈빛이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병연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묵직한 공기를 뚫고 윤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영의 목소리에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는 저…… 사촌께서는 여기 웬일이십니까? 게다가 난고까지.”윤성이 웃는 얼굴로 영과 병연을 번갈아 보았다.

라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윤성은 영을 저하라 부르려다 급히 사촌으로 바꿔 불렀다.

만약, 그가 눈치 없이 영을 ‘저하’라 호칭했다면, 지금의 온화한 상황은 돌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영의 냉랭한 대답이 들려왔다.

“가정방문이다.”“무슨 말씀이신지?”“내 사람을 돌보려면 당연히 내 사람의 가정에도 소홀히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영의 말에 윤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외사촌께서 그렇게 다정다감하신 분인 줄 몰랐군요.”영이 지지 않고 냉랭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내 사람에게만은 다정다감하지. 설마, 방해만 되는 외사촌과 대하는 것이 같을 수야 있겠느냐?”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라온이 얼른 끼어들었다.

“참의영감께선 여기 무슨 일이십니까?”“우연히 지나던 길에 이곳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요. 향낭을 무척 잘 만든다고 하여 일부러 찾아왔지요. 설마, 이곳에서 홍 내관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고 하더니. 우리 두 사람, 정말 예사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아, 네.”누군가 작심하고 뒤쫓기라도 한 것처럼 우연이 참으로 많습니다.

윤성의 웃는 낯에 대고 차마 반박을 할 수는 없었던지라. 라온은 계면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영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흰소리는 그만하고. 향낭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어서 향낭만 사서 나가면 되겠구나.”윤성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도 있질 않습니까. 홍 내관을 만났으니 좀 더 머물다 갈 생각입니다.”“할 일이 무척 많을 터인데?”“어디 사촌만큼 바쁘겠습니까?”“…….”축객령이 담긴 침묵이 윤성을 향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윤성이 아니었다. 예의 웃는 얼굴로 가볍게 축객령을 무시한 윤성은 뒷짐을 진 채 향낭을 살피는 척을 했다.

그러다 단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향낭들 모두 해서 얼마입니까?”“그건 왜 물으세요?”단희가 동그란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사려고 묻지, 왜 묻겠습니까?”윤성이 하얗게 웃으며 소맷자락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값이 얼마든 모두 치르겠다는 뜻이 확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단희의 순했던 눈망울이 단박에 단단해졌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팔지 않겠어요.”윤성이 문득 행동을 멈춘 채 시선을 돌려 단희를 응시했다.

“지금 팔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네. 팔지 않을 거예요.”“이 향낭들,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아닙니까? 어째서 팔지 않겠다는 것입니까?”“감사한 말씀이지만, 이유 없는 호의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사양하렵니다.”윤성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과연, 홍 내관의 동생이로구나. 어리지만 야무진 구석이 있다.

“이런, 제가 결례를 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홍 내관과 친해지려고 하는데 좀처럼 잘 되지가 않는군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마음을 좀 얻어 볼까 합니다. 그러니 조금 도와주시겠습니까?”단희가 라온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영과 병연을 보았다.

“송구합니다.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팔 수가 없겠군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이유 있는 호위는 더더욱 위험하다고 하셨어요.”단희의 단호한 거절에 라온이 민망한 얼굴로 말렸다.

“단희야.”그때, 영이 말리는 라온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로 좋은 할아버지를 두었군. 꼭 한번 뵙고 싶단 말이야.”영의 말에 맞장구치듯 침묵하던 병연마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 사람들이!

“다들 그만 하십시오.”라온이 영과 병연을 향해 가볍게 눈을 흘겼다.

“아닙니다, 홍 내관. 내가 많이 경솔하였습니다.”윤성이 단희를 돌아보았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어쭙잖은 치기로 낭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용서하세요.”단희가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오라버니의 일이라 함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헌데, 이를 어찌할까요. 전 이미 단희 낭자의 환심을 사려고 작심하였는데.”단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직도 제가 만든 향낭을 사실 생각이세요?”“제가 성격에 조금 모난 구석이 있어서, 뭔가를 결심하면 반드시 이루고 말아야 직성이 풀린답니다.”“하지만 전 이 향낭 모두를 나으리께 팔 수 없습니다.”“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사과의 의미로 내가 이걸 팔아드리겠습니다.”“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필요 없는 것을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아닙니다. 내가 사겠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팔겠다는 겁니다.”“잠시만요! 지금 참의 영감께서 여기서 장사를 하시겠다는 뜻입니까?”지켜보고 있자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던지라. 라온이 다급하게 물었다.

윤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도 안 됩니다. 어찌 양반께서 장사를 하신단 말입니까?”“못할 이유가 무어겠습니까? 여기서 아예 장사판을 벌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만 하겠다는 겁니다.”“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행여 참의께서 파신다고 해서 누가 살 리도 없겠거…….”어라?

“이거 파는 것이지요?”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라온의 말허리를 잘랐다.

어느샌가 눈웃음을 짓는 기녀 하나가 향낭 하나를 들고 윤성에게 물어왔던 것이다.

윤성이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능숙하게 그녀에게 되물었다.

“물론입니다. 어느 것이 마음에 드십니까?”“이게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훌륭한 안목입니다. 이 노란 나비 자수야말로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잘 묻어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 있는 청초한 느낌의 수국이 놓인 향낭도 낭자의 청아한 느낌과 잘 어울리니…….”“그, 그럼 그쪽의 향낭도 함께 주세요.”채 말끝을 마무리 짓지도 못한 라온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 윤성은 이미 향낭을 두 개나 팔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도 향낭을 골라주시지 않겠습니까?”“저도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 되어요. 직접 알려주시지 않겠어요?”윤성에게로 여인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긴 줄이 이어졌다.

그 어이없는 광경에 모두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긴 줄의 끝자락에 서 있던 여인이 삿갓을 쓴 채 앉아 있는 병연의 앞으로 주저주저하며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어울리는 향낭을 골라주실 수 없으신지요.”“…….”물끄러미 여인을 보던 병연은 윤성과 단희, 그리고 라온을 말없이 돌아보았다.

잠시 가게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라온이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분은 향낭을 파시는 분이 아니…….”라온의 말이 채 끝나기 전, 병연이 말없이 패랭이꽃이 수 놓인 향낭을 내미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 이것이 저에게 어울린다는 것인가요?”“……그렇소.”마지못해 입을 열어 대답하니, 여인의 얼굴이 박꽃처럼 환해졌다.

“아! 그럼, 전 이걸로 사야겠습니다.”주위에서 귀를 쫑긋하던 여인들이 얼른 병연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머낫! 나도 여기서 사야겠다.”윤성의 앞에 서 있던 여인들 중에 많은 이탈자가 생겨났다.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병연에게 관심이 있었으나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에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던 탓이라. 한번 틈새를 보이니, 놓치지 않고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다.

“김 형! 참의 영감!”두 분 다 왜 이러십니까?

지체 높으신 분들께서 갑자기 여인들에게 향낭을 권하고 있으니. 엄청난 심적 부담에 라온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두 분 좀 말려보십시오. 이거 참, 어쩌면 좋습니까?”라온은 묵묵히 관망하고 있는 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내 묵묵히 지켜보던 영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움이 된다면, 어디 나도…….”“화초저하?”뭐야? 사태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설마 세 분, 경쟁하시는 건 아니시죠?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라온은 가게 왼편에 앉아 있는 윤성을 보았다.

여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 자상한 그의 배려에 여인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의 수는 어림잡아 열 명가량이었다.

라온은 이번에는 가게 오른편에 있는 병연을 보았다.

나름 노력하는 윤성과 달리 병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배려로 여인들을 유혹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인들이 향낭을 꺼내 들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였고, 좀처럼 고르지 못하는 여인에겐 말없이 향낭 하나를 들어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마치 꽃에 날아드는 나비처럼 그의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다들 향낭보다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병연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의 수는 열다섯 명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김 형.’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라온은 마지막으로 정중앙에 앉아 있는 영을 보았다.

영이 앉아 있는 중앙자리로 붉은 노을빛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본디 하얀 살결에 붉은 빛깔이 덧칠해진 탓일까? 노을빛에 물든 영의 모습은 천상의 태자인 듯 아련한 신비로움마저 자아냈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온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영의 앞에는 구름 같은 여인들이 모여들……기는커녕 단 한 명도 없었다.

라온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화초저하께는 한 사람도 가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도 그런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만만하던 영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윤성은 물론이고 심지어 병연마저도 여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어찌하여 내겐 한 사람도 안 온단 말인가.

이대로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

영은 처음 맛보는 패배의 쓴맛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끊임없이 향낭을 팔고 있는 두 경쟁자 사이에서 그는 고심하는 중이었다.

무슨 이유일까?

어째서 단 한 명의 여인도 오지 않는 것이지?

라온과 그 여동생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때였다.

자박자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낙심한 그의 귓가로 청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향낭, 하나 주십시오.”고개를 드는 그의 눈앞에 라온의 얼굴이 보였다.

하늘 꽃보다 아름다운 하얀 웃음이 그를 향해 있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 모습이…… 영의 눈을, 그의 마음을 단박에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영의 얼굴에 금세 자신만만한 미소를 되돌아왔다.

한 사람이지만, 백 명의 여인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단희가 준비한 향낭은 순식간에 동이 나고 말았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여인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단희는 세 명의 사내들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도움이 되었습니까?”윤성의 말에 단희가 활짝 웃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낭자의 환심을 사려던 내 계획은 어찌 되었습니까?”단희가 엄지와 검지를 들어 작은 틈을 보였다.

“요만큼 도움이 되었습니다.”윤성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만큼이라. 아무래도 원하는 만큼 환심을 얻으려면 꽤나 노력을 해야겠군요.”단희 역시 윤성을 따라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병연과 영을 곁눈질했다.

특히, 단희는 병연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근래 들어 병연과 자주 마주치곤 했다. 담담한 표정과 믿음직한 어깨. 그래서 그런지 남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 사내 중 마음이 기운다면 병연 쪽에 가장 많은 마음의 무게추가 기울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언니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영이라는 사내.

언니가 저렇듯 환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물론, 언니는 언제나 미소를 지었지만, 저 사내 앞에서 짓는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게는 한 사람도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영의 말에 단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녀는 어째서 여인들이 영에게 접근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었다. 가게 안에 모여 있는 여인들의 소곤거림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내, 너무 아름답지 않아?’‘태어나서 저리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 봐. 그런데 너무 아름다우니까 차마 다가갈 수가 없질 않니?’‘그래. 나도 왠지 무서워서…….’한쪽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소곤거림에 단희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영을 보았을 때 자신도 그야말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으니까.

영에게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이 느껴졌다. 하여, 마음이 생기면서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결국, 영이 어이없는 시합에서 지게 된 이유, 바로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 때문이었다.

‘하지만 왠지 진정한 승자는 저분 같은데요.’ 영과 마주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는 라온을 보며 단희는 입가를 길게 늘였다.

어쩌면 저 사내야말로 언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놓치지 말라고 해야지. 꼭 놓고 그 손 절대 놓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야무진 소녀의 마음에 당찬 생각이 자라났다.

***

“모처럼 나갔는데 어머니를 뵙지 못해 아쉽겠구나.”영이 뒤따르는 라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북촌으로 잔치 음식을 하러 갔다던 라온의 어머니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잔치 음식을 할 때면 으레 있는 일이라 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뵙지 못했다는 사실에 라온은 서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뵙게 되면 묻고 싶었던 것도 있었는데…….

“괜찮습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질 않습니까.”자꾸만 눅진해지는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라온은 부러 밝은 소리를 냈다.

“그래. 오늘만 날이겠느냐. 이번에 잠행에서 돌아오면 사흘 정도 말미를 줄 테니. 그때 집으로 어머니와 누이랑 원 것 회포를 풀도록 해라.”“정말입니까?”영의 말에 내내 처져 있던 라온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곁에 바싹 다가섰다.

“그래. 정말이다.”“감사합니다.”“그래. 내가 생각해도 감사한 일인 듯하구나. 이리 감사한 일을 해줬으니, 너는 내게 무엇을 해 줄 것이냐?”영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운이 서렸다. 그가 상체를 기울여 라온의 작은 얼굴 가까이로 제 얼굴을 가져갔다.

“네?”화초저하, 왜 이러십니까?

영의 눈 속에 생겨나는 짓궂은 기운을 느낀 라온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그렇게 영의 시야 밖으로 벗어난 라온은 빠른 걸음으로 궁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녀석.”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라온을 보며 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한 녀석은 어찌 되었는데. 다른 한 녀석은 어찌한다?”영은 어둠이 깊어진 거리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향낭을 다 팔아치운 병연은 함께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함경도를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는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영은 저녁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청명한 겨울밤이라.

“떠나기엔 나쁘지 않은 밤이구나, 병연아. 그러나 너무 오래 떠나 있지는 마라.”영은 길을 떠난 벗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

벗의 방황이 길지 않기를, 벗의 외로움이 깊지 않기를 기원하며…….

***

“이 밤에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자선당으로 향했던 라온의 걸음은 장 내관을 만난 뒤로 급선회했다. 이윽고 그녀의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태평관이었다.

태평관에는 청나라로 떠날 채비를 마친 소양공주의 일행들이 공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비전과 중궁전으로 작별인사를 하러 간 소양공주만 돌아오면 그대로 청국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라온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크게 당황했다.

“정말 돌아가신답니까?”왜요? 영영 돌아가실 것 같지 않던 분이 갑자기 떠나신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라온은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곁에 서 있는 장 내관에 물었다.

“그렇다 하오.”“갑자기 왜요?”“그 속사정이야 난들 어찌 알겠소이까만은…….”“……?”“한 며칠, 태평관 안에서 꼼짝을 않으시던 소양공주께서 이리 야밤에 고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으로 보아…….”“보아?”“뭔가 마음에 상처를 가득 안고 가시는 것이 분명하오.”“상처요?”갑자기 화초저하의 처소에 들었다가 울며 뛰쳐나오던 소양공주의 모습이 라온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무슨 말씀들을 나누셨던 것일까?

궁금해하는 찰나, 저 앞쪽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일었다.

대비전과 중궁전에 두루두루 인사를 마친 소양공주가 돌아온 것이다.

예의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의 소양공주는 어깨를 활짝 편 채로 그곳에 모여있는 환관들과 궁녀들을 돌아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훑는 눈길로 바라보던 공주는 어쩐 일인지 가마에 오르는 대신 환관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공주의 걸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라온이 있는 곳이었다.

도도한 얼굴로 라온에게 다가온 소양공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해봐라.”그것은 순수하게 응원하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영문을 알 수 없었던지라. 라온은 의아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소양공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비밀 하나 말해주랴?”“비밀이요?”“나는 말이다…….”길게 말끝을 늘이던 소양공주가 라온의 귓가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온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알고 계셨던 거야? 그러면서도 여태 아는 체 안 하고 계셨던 거야?

그러나 충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소양공주의 목소리에 라온의 심장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분께서도 알고 계신다.”라온의 눈이 더 커졌다.

소양공주가 언급한 그분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분은 아니시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그러나 명확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은 채 소양은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라온은 멍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저 멀리 불을 밝히고 있는 동궁전을 돌아보았다.

화초저하.

설마, 그분께서 알고 계셔?

내가 여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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