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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71화 (71/131)

71. 화초 저하께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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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6

어느덧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한낮의 태양 빛도 뜨거운 열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영은 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누각에 서서 차가운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궁은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삶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라 하였던가.

그러나 그 평범한 일상에 숨어 있는 특별함을 발견한 뒤로 영에게 삶은 더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소소했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단 한 사람, 홍라온.

라온을 만날 수 있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특별했다.

그 특별한 나날에 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것은 부원군의 집에서 윤성과 만난 이후였다.

그날 이후로 내내 윤성의 말이 영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었다.

김윤성은 물었다. 라온의 비밀을 알고 있느냐고.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온이 여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윤성의 눈빛.

가면 같은 미소 너머로 보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엔 수렁과 같은 혼란을 담고 있었다.

무언가 더 있다. 고작 여자라는 것 때문에 그런 눈빛을 할 리 없다.

처음에는 신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란 어려움과 난관은 있어도 극복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윤성은 말했다.

결단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무언가 더 있다. 그게 무엇일까? 그게…….

영은 라온이 있을 법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햇살을 받아 해맑게 웃는 라온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보일 것만 같았다. 진정으로 소중하고 아련해 차마 마음 놓고 바라볼 수도 없는 사람.

라온에 대한 호기심이 나무처럼 자라났다.

리온을 향한 욕망이 수풀처럼 무성해졌다.

라온에 대한 모든 것이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녀석은 제 속내를 온전히 내게 보여 주려나?

윤성은 알고 있지만, 자신은 모르는 것이 무엇일까?

문득, 이질적인 감정 하나가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질투.

자신보다 윤성이 라온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생각하니, 묘한 질투가 일었다.

“더는 참을 수 없구나.”라온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려면 얼마나 큰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의문이 일고, 호기심이 고개를 들어도 묵묵히 참고 있었다.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참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것이 벗에 대한 예의고, 또한 마음에 품은 여인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라온에 대해 말하던 윤성의 표정과 행동에서 표현 못 할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물어봐야겠구나.”라온에게 직접.

그 아이의 비밀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물어보리라. 그리고 미소를 지어줘야지. 그 어떤 말 못 할 속사정이라도 다 품을 수 있음을 알려주리라.

결심을 정한 영은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우물쭈물하며 자신의 사연을 풀어놓을 라온의 모습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때, 등 뒤에서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무슨 일이냐?”“전 판내시부사 박두용 영감에게서 기별이 왔나이다.”“그래? 그분께서 드디어 마음을 돌리셨다더냐?”내내 깊게 가라앉았던 영의 눈동자에 작은 반짝거림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그 불빛은 대답을 머뭇거리는 최 내관의 모습에 금세 사그라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이…….”“이번에도 아니 되었다더냐?”“조금만 더 말미를 주신다면 기필코 마음을 돌리겠노라고 기별을 해 오셨사옵니다.”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벌써 열 번이 넘었다.

“더는 시간이 없다, 시간이.”“…….”잠시 생각에 잠겼던 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율아!”영의 나직한 부름에 세자익위사 한율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봐야겠구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것이니 채비하라.”“알겠사옵니다.”“조용하고 은밀한 걸음이 될 것이다.”“네, 저하.”한율이 물러가고 난 뒤, 영은 뒤편에 시립하고 있는 최 내관을 돌아보았다.

“일전에 말한 것을 가져오너라. 먼 길 떠나기 전에 다녀올 곳이 있느니.”

***

“끙차!”라온은 제법 묵직한 문갑을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주위에는 붉은 옻칠한 가구들이 가득했다.

어제까지는 대비전의 집기를 모두 바꿨고 오늘은 중궁전의 가구를 바꾸는 중이었다.

궁의 겨울나기를 위해 많은 환관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환관은 궁의 아침을 열고 밤을 준비한다. 새로운 계절을 맞는 것도 환관의 당연한 본분이었다.

그러나 일을 하는 라온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원군 대감의 잔칫날이 벌써 사흘이나 지났건만, 복잡한 심사는 여전했다.

‘자네, 아비에 대해 알고 있는가?’‘자네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네.’부원군 김조순의 목소리가 한여름 밤의 모기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라온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병연의 침묵이 길어졌다. 평시에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말을 안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고개만 저을 뿐이다.

말 못 할 고민이 있음이 분명했다.

‘김 형께선 대체 왜 그러시는 것일까? 부원군 대감은 나를 어찌 아는 것이고, 우리 아버지는 또 어찌 아는 것일까? 그리고 김 형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라온은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기 위해 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는 것이냐?”문갑을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라온의 귓가로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초저하.”문갑 너머로 보이는 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힘이 쑥, 맥없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멍하니 서 있는 라온의 얼굴 위로 영의 물음이 다시 떨어졌다.

“묻질 않느냐? 무슨 잡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야?”“잡생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보다시피 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라온은 문갑을 옮기기 위해 다시 힘을 냈다. 하지만 커다란 문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갑에 매달린 라온의 발이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녀석.”영이 미소를 지으며 문갑을 당겼다. 그가 힘을 쓰자 비로소 문갑이 움직였다.

라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런 눈빛을 보는 것이냐?”“화초저하. 보기보다 힘이 세십니다.”영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그려졌다.

“나더러 화초저하, 화초저하,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정말로 내가 방 안에 놓인 화초처럼 맥도 못 쓰는 사람인 줄 알았던 모양이로구나.”“왕세자 저하라면 항상 환관과 궁녀들이 손발이 되어주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니…….”손 많이 가는 화초처럼 여리디여리기만 한 줄 알았다.

“왕세자라고 남의 손길에만 기대어 산다고 생각하느냐?”“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작은 일에 시간을 아끼는 대신, 남은 시간을 더 많은 곳에 할애해야 하는 법이다.”밤늦도록 학문을 닦고, 무술의 연마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왕세자의 하루가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다면, 라온의 말버릇인 화초저하라는 말도 더는 못 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넌 왕세자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겠구나.”“송구하오나, 환관에 대한 공부도 아직 다 마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왕세자 저하에 대한 공부는 나중으로 미뤄야겠습니다.”“녀석. 그런데 무슨 고민이더냐?”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라온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부원군 대감 댁에서 돌아온 이후로 김 형께서 도통 입을 열지 않으십니다.”“그래?”“네.”“걱정되느냐?”“당연히 걱정됩니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하지만…….”그날 김조순 대감과 나눴던 대화가 심상치가 않았단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뭔가 말을 하려던 라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이 쓱 손을 들어 라온의 이마를 툭툭 가볍게 쓸어내렸다.

“저하…….”그 단순한 동작에 이상하게도 라온은 마음이 놓였다. 마음속의 근심들이 영의 손짓에 모두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영이 낮게 말했다.

“요 작은 머릿속에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 것이냐. 그런 걱정일랑은 그만하고, 잠행 나갈 것이니. 따라나설 준비나 해라.” “지금이요?”“그래.”“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중으로 이것들을 모두 중궁전으로 들이고 청소까지 마쳐야 합니다.”그때였다.

“홍 내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겐가?”어느 틈엔가 다가온 도기가 영에게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디라고 감히 세자저하께서 내리는 명을 거역하려는 겐가?”연신 영의 눈치를 살피던 도기는 옴쳐드는 목소리로 라온에게 속삭였다.

“어서 변복하고 세자저하의 뒤를 따르게나.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하지만…….”“어허, 홍 내관. 자네의 일이 곧 나의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니까. 자네는 그저 저하의 곁만 잘 보필하면 되는 것일세.”도기는 주저하는 라온의 등을 은근슬쩍 떠밀었다.

지켜보는 영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홍라온, 든든한 동료를 두었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도기이옵니다.”“도기라. 내 기억하마.”“성은이 망극하옵니다.”도기가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은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채근했다.

“들었느냐? 도 내관이 저리 말하니, 궁의 일은 도 내관에게 맡기고 너는 어서 나를 따라오너라.”영의 말에 도기가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서 따르시게, 홍 내관. 그리고 잊지 말게나. 자네는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을 말일세.”도기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문득 그의 허리춤에 비스듬히 걸린 서책이 라온의 눈에 들어왔다. 책머리 일부가 검게 칠해져 있어서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오는 서책이었다.

라온은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언제부터인가 도기는 저 서책을 항상 끼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새로 들어온 소환 내시들도 저 서책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처음엔 내시부에서 치르는 시험을 대비하여 공부하는 서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로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들고 다니는 걸 보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서두르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네, 갑니다.”하는 수 없이 영의 뒤를 쫓던 라온이 다시 도기를 돌아봤다.

저 서책은 대체 뭘까?

***

라온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영이 기다리고 있는 금호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밖으로 나서니 사대부 사내차림의 영이 라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눈에 라온을 훑던 영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옅게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러십니까?”“아니다.”사내 복장을 한 라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음이라.

영은 괜스레 들고 있던 커다란 보퉁이를 라온에게 건네는 것으로 마음을 심술을 풀어냈다.

“이건 뭡니까?”“보면 모르느냐? 짐이다.”“그걸 왜 제게 주십니까?”앞서 걷는 영을 부지런히 뒤쫓으며 라온이 물었다.

“요 맹랑한 녀석을 보게나. 그럼, 왕세자인 내가 들어야겠느냐?”“아, 그건 그렇네요.”“괜한 소리 하지 말고, 물건이나 한번 살펴보아라.”“제가요?”“그럼 왕세자인 내가 살펴야 할까?”“하지만 뭐가 들어 있어야 잘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어찌 살필 수가 있겠습니까?”“그 녀석. 말이 많구나. 보면 알 것이니, 살펴봐라.”“알겠습니다.”라온을 불퉁한 표정으로 보퉁이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복숭앗빛 도투락댕기와 은비녀, 은은한 빛깔의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지난번에 네가 골랐던 것들로 준비해 보았는데. 제대로 잘 준비했는지 모르겠구나.”라온의 눈 속에 얇은 눈물 막이 생겨났다.

지금 보퉁이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지난번에 무덕과 그 수하들에게 납치당하기 전, 영에게 받았던 선물들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무덕에게 납치되던 그날, 영이 주었던 선물일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속상한 마음이야 말해봐야 입만 아프리라. 그런 것을 이리 고스란히 다시 준비해주시다니.

“왜 이리 잘해주십니까?”서둘러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습기를 쓱쓱 지워내며 라온이 물었다.

“잡아먹으려고.”영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네?”“포동포동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으로 이리하는 것이다.”라온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뭡니까? 지금 농담하신 겁니까? 그런데 무슨 농담을 그리 진지하게 하십니까?

“그만 가자.”스스로 생각해도 계면쩍은 농담인지라.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던 영은 오도카니 서 있는 라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선물 주러 가야지.”“네?”“매번 챙겨놓기만 하면 뭐하느냐? 이번에는 제대로 주고 오잔 말이다.”“지금 저희 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그럼 그 선물, 다른 뉘에게 줄 생각이었던 것이냐?”“그건 아니지만…….”“내일 먼 곳으로 잠행을 나갈 일이 있다. 너를 그 잠행에 데려갈 참이야. 꽤 먼 길이 될 것이고, 제법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내리는 상(償)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뭔가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인가 봅니다.”“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힘든 일이 될 것이다.”“무슨 일인지 귀띔이라도 해 주시면 안 됩니까?”“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사람의 마음이요?”“그래.”“어떤 사람입니까?”라온의 물음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영이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또한,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지.”라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초 저하께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

혹시 여인?

***

집이 가까워질수록 라온의 걸음은 빨라졌다.

어머니와 단희를 이리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터라. 셀레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망연자실한 그녀에게 옆집 바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어 달 전부터 두 모녀가 나란히 운종가 구 영감댁 담뱃가게로 매일같이 나가더구먼.”어머니가 구 영감님 담뱃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단희까지 함께 할 줄을 몰랐다. 그것도 매일.

“단희, 그것이 요즘 제법 살림에 보탬이 되는 모양이여. 그게 손끝이 야무져서…….”바우 할머니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라온은 운종가를 향해 치달렸다.

“단희야!”숨을 헐떡이며 운종가 구 영감의 담뱃가게로 달려온 라온은 단희를 불렀다.

담뱃가게 앞에 앉아 있던 작은 소녀가 라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 아니, 오라버니!”저도 모르게 ‘언니’라고 부르려던 단희는 서둘러 호칭을 바꿔 부르며 단숨에 라온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이제 영영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아니, 아니야. 잠시 심부름을 나온 거뿐이야.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닌 왜 안 보이셔?”“어머닌 북촌 윤 대감 댁에서 부탁해서 잔치 음식을 하러 가셨어요. 저녁 늦게야 돌아오실 거예요.”“여기서 일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간간이 높으신 대감댁에 음식 하러 다니시곤 해요.”“그래?”라온이 궁에 들어가고, 단희가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로 어머니는 전보다 더 열심히 생업에 뛰어들었다.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진 라온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나저나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몸은 괜찮은 거야?”“이젠 말짱해요. 온종일 집에 누워만 있기도 뭐해서 두어 달 전부터 여기 구 할아버지 가게에서 가게도 지켜주고, 향낭도 팔기 시작했어요.”단희의 말에 라온은 담뱃가게에 진열된 향낭을 바라보았다.

“소일 삼아 하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구나.”“제법 찾는 사람이 많아서 본격적으로 나섰어요.”“그런데…… 생각보다 장사가 잘 안 되나 보구나.”라온은 손님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웬걸요. 처음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장사가 잘되었어요. 그런데 저 길 건너 여주 상단에서 제가 만든 향낭과 똑같은 모양의 향낭을 대량으로 만들어 싼 가격에 팔아치우니. 당해낼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요.”단희가 눈웃음을 그리며 저간의 사정을 짧게 설명했다.

“그래? 그렇구나.”당장에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라온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오라버니, 저분은 누구세요?”단희가 라온의 뒤쪽에 서 있는 영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아, 그러니까…… 이분으로 말씀드리자면…….”“혹시, 그분이세요?”라온이 머뭇거리자니 단희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분?”“지난번에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던 그 두 분 중 한 분 아니세요?”“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내내 침묵하고 있던 영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네.”단희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라고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영의 물음에 단희는 라온의 눈치를 살폈다.

안 돼. 절대 말하면 안 돼.

라온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뭘 그런 걸 물으십니까? 그보다 달려왔더니 목이 타네.”라온은 가게 한쪽 구석에 있는 식혜를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그제야 생각난 듯 단희가 서둘러 영에게 식혜를 권했다.

“죄송해요. 대접해 드릴 게 이런 것밖에는 없어요.”“이것이면 충분하다. 마침 나도 조갈이 나던 참이었으니…….”말이 끝남과 동시에 영은 단희가 권한 식혜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워냈다. 궁의 그 귀하고 맛난 음식도 이리 먹어본 적이 없는 영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식혜건만, 유난히 달고 맛나게 먹는 그 모습에 라온은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맛나게 드셔 주셔서.’‘맛난 것을 맛나게 먹었을 뿐이다.’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니, 단희가 문득 가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오셔서 이 식혜 한 잔 드세요.”영과 라온의 시선이 동시에 가게 밖으로 향했다. 이윽고 라온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새어나왔다.

“어? 김 형!”라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제부터인가 병연이 길 건너에서 라온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언제 오신 것입니까? 오셨으면 들어오시지 않고 거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라온은 서둘러 병연을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그 앞으로 단희가 다가왔다.

“맞지요?”“……?”“일전에 저희 집 근처에서 뵈었던 분, 맞지요? 그땐 시를 짓고 계신다고 하셨는데.”병연은 침묵했다. 하지만 긍정을 뜻하는 침묵이었다.

“그런 적이 있으셨습니까?”집 근처에 시상이 떠오를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있었던가?

의아한 생각에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세 사람을 돌아보던 단희가 작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단희에게로 쏠렸다.

“아, 죄송해요. 세 분을 뵈니 일전에 오라버니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요.”“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느니. 오라버니가 우리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영의 물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단희가 아차 하고 제 입을 막았다. 행여 라온의 눈치를 보는가 싶어 영은 은근슬쩍 그 앞을 막아섰다.

“눈치 볼 것 없다. 우리 세 사람은 마음이 통하는 벗이라. 서로 아무런 허물이 없는 사이니 말이다.”대체 라온이 자신에 대해 어찌 말했는지 궁금했다.

하여, 영은 등 뒤에서 발버둥치는 라온을 지그시 붙잡으며 단희를 은근하게 채근했다.

영의 소리 없는 채근에 단희가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오라버니께서 궁에서 참 좋은 벗을 만나셨다고 하셨어요.”“좋은 벗이라…… 그뿐인가? 혹여 달리 뭐라고 했는지 들려줄 수 있겠느냐?”“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시길, 한 분은 무서울 정도로 잘 생기신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분이라고 하셨어요.”“그 무섭도록 잘 생기신 분이 이쪽입니까? 아니면, 저쪽에 삿갓을 쓰고 계신 분입니까?”그때였다.

그들의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온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윤성을 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참의영감께선 여기 웬일이십니까?”오늘 무슨 날입니까?

아니면, 여기서 만나기로 미리 약조라도 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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