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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70화 (70/131)

70. 그런 세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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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3

“이제야 자네와 만나게 되는군.”붓을 잠시 내려놓은 사내가 라온을 향해 미소 지었다.

마치 조각칼로 새겨 넣은 듯한 짙은 미소였다.

라온은 초로의 사내를 향해 얼른 허리를 접었다.

“부원군 대감이 아니시옵니까?”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부원군 김조순이었다.

라온은 당황했다.

설마, 할 일이라는 것이 김조순과의 독대였단 말인가.

“앉게.”김조순이 고갯짓을 하며 짧게 말했다.

라온은 한쪽 옆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 어린 것이 영 쓸모가 없는가 하였더니. 이리 쓸 데가 있군.”“네? 무슨 말씀이신지요?”“영온 옹주를 모시고 왔다고?”“네? 네. 그렇습니다.”“그 어린 것을 부르면 혹시나 자네가 따라오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였다네. 그런데 이리 왔군. 자네는 모를 것이야. 내가 이 만남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말이야.”“…….”뭐야? 설마 나를 만나겠다고 옹주마마를 부르셨다는 건가? 왜?

라온은 신중하게 붓을 놀리는 김조순을 의아한 눈길로 응시했다.

세상을 내려 보는 듯한 시선과 예리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김조순의 웃음은 누군가와 꼭 닮아 있었다.

언제나 웃는, 그러나 단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 없었던 예조참의 김윤성의 웃음과 똑같았다.

아니, 윤성의 웃음보다 더욱더 견고한 가면처럼 느껴지는 김조순의 웃음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두려움이 있었다.

만나고 싶었다는 말을 끝으로 한동안 김조순은 말이 없었다. 잠시 놓았던 붓을 들고 다시 그림에 열중할 뿐이었다.

무슨 그림이지?

라온은 살며시 부원군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곁눈질했다.

너른 연못을 유유히 유영하고 있는 잉어 그림.

잉어 애호가신가?

방 안 곳곳에 잉어 그림이 가득 걸려 있었다. 죄다 크고 생기가 넘치는 그림이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족자에 걸린 잉어 그림에 하나같이 눈이 없었다.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눈을 그리지 않은 것일까?

“잉어의 눈이 없는 이유가 궁금한가?”김조순이 불쑥 물었다.

“네? 아닙니다.”고개를 흔들던 라온이 잠시 후, 본심을 말했다.

“사실은 궁금합니다.”“아직 때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세.”“때가 되지 못했다고요?”“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시기라는 게 있는 법일세. 난 아직 잉어의 몸통은 그릴 순 있어도, 그에 맞는 눈을 그릴 기회를 얻지 못했다네.”선문답 하듯 중얼거리는 김조순의 말에서 묘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라온은 그가 말하는 잉어의 눈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꾸만 오그라드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라온이 다시 물었다.

“저를 왜 만나고 싶어 하신 것입니까?”김조순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궁금하였다네. 그자의 자식들이 어찌 자랐을지 말일세.”“그자의…… 자식들이라 하였습니까?”김조순의 느닷없는 말에 라온은 머릿속이 멍해졌다.

창백해진 라온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김조순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는 운명을 믿는가?”붓이 화선지 위를 유영했다. 물결을 그리는가 싶더니, 잉어의 비늘이 하나하나 채워졌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숙명이랄까? 어떤 사람에겐 태어나는 순간부터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 정해져 있지. 그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을 바로 운명이라고 부른다네.”“소인은 어리석어 대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빙빙 에두르는 말씀은 그만두십시오.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요?”“제법 당차군.”라온을 한번 쓱 쳐다본 김조순은 잠시 멈췄던 붓질을 다시 놀렸다.

“여러 해전부터 잉어를 그리고 있지. 그런데 좀처럼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할 수가 없더란 말이지. 잉어의 몸통을 먼저 그리면 눈을 그릴 수가 없고, 눈을 먼저 그렸더니 이번에는 몸통과의 조화가 깨지니. 어찌해야 좋을지 고심 중일세.”“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그렇지. 내 그림 실력이 부족한 것도, 눈과 몸이 조화롭지 못한 것도 모두 때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일세. 그러나 점점 그림 실력이 좋아지고 있으니, 어떻게든 완성할 생각일세. 자네 생각에는 어떠한가? 내가 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가?”이건 또 무슨 속내를 품은 말일까?

점점 아리송해지는 말에 라온의 고운 아미에 주름이 그려졌다.

잠시 끊겼던 김조순의 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라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자네, 아비에 대해 알고 있는가?”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송구하오나 아버지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자네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네.”김조순의 말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문득 등줄기로 불길한 예감이 타고 올라왔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의문이었다.

왜 그리 세상의 눈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 했는지, 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어머니께서 그리 아픈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하셨는지, 왜 일평생을 거짓 사내로 살아왔어야 했는지.

돌이켜보면 라온의 지난날은 도주와 의문의 연속이었다.

이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 깊은 속내를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다.

뭔가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직면할 것 같은 생각에 두렵고 긴장이 되었다.

듣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내 아버지에 관한 일이니 들어야 한다는 상반된 번뇌가 작은 머릿속을 진흙탕처럼 어지럽혔다.

혼란스러운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라온을 보며 김조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침내 부족한 그림을 완성할 때가 되었는가.

이 아이가 그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시작일 것이다.

주름진 김조순의 입술 사이로 라온의 혼란을 가중시킬 이야기가 더 나오려했다.

찰나,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김조순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패어졌다.

“무슨 일이냐?”노기가 서린 물음에 문밖을 지키고 섰던 그림자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웬 자가 난동을 부리고 있사옵니다.”“어떤 놈이 감히 내 집에서 난동을 부린단 말이더냐?”“삿갓을 쓰고 있는지라, 미처 얼굴을 보지 못했나이다.”“삿갓? 헌데, 무슨 연유로 경사스러운 잔칫집에서 소란을 부린다더냐?”“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옵니다.”그때 두 사람의 사이로 라온이 끼어들었다.

“혹시 그분이 찾는 사람이 홍라온이 아닙니까?”문밖의 그림자는 침묵했다.

그 침묵의 의미일랑은 긍정이 분명했다. 삿갓을 쓰고 홍라온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 라온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감,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밖에서 소란을 피우고 계신 분께서 저를 찾는 듯합니다.”김조순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네 아비에 관한 이야기다. 궁금하지 않느냐?”그의 목소리에 지금 가면 영영 못 듣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겁박이 실려 있었다.

라온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지금 저를 찾는 분과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말과 함께 꾸벅 인사를 건넨 라온은 방을 가로질렀다.

그때였다.

탁!

김조순이 갈고 있던 먹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게 서거라. 네가 감히 내가 명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을 나가겠다는 것이냐?”라온은 김조순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이 족쇄가 되어 라온의 발길을 묶어버린 듯했다.

김조순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두려웠다. 보이지 않는 칼이 목에 겨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소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되레 시간이 갈수록 커지더니, 어느새 지척까지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던 김조순이 기어이 목소리를 높였다.

“뭣들 하는 것이냐? 고작 한 놈을 막지 못해 이리 소란을 떤단 말이더냐?”그때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무사가 구겨진 종이처럼 방 안을 나뒹굴었다.

일순, 소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고요한 정적 사이로 삿갓을 쓴 병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 형!”병연을 부르는 라온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병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을 마땅찮게 지켜보던 김조순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오다니. 예의가 없는 자로군.”“실례했소.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어 소란을 피웠소이다.”병연은 라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때, 삿갓 아래로 드러난 병연의 얼굴이 김조순의 망막에 맺혔다. 김조순의 얼굴 위로 다시 미소가 또렷하게 새겨졌다.

“이게 누군가? 이제 보니 역적 김익순의 손자가 아니신가?”

* * *

즐거운 유흥거리라도 발견한 듯 김조순의 눈동자에 서늘한 이채가 스며들었다.

그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병연과 라온을 번갈아 보았다.

“허허허허,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그림이로군. 허허허.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뼈가 있는 말이 병연의 귓전을 아프게 두드렸다. 그러나 애써 무시한 병연은 라온의 손목을 이끌고 방을 나서려 했다.

“세자저하와는 일별했느냐?”“무슨 말이시오?”“네가 그자의 손을 잡고 있으니 묻는 것이다. 이제 저하와는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이더냐?”“대답할 이유가 없소.”“역시 그 할아비에 그 손자로구나. 네 할아비도 그랬지. 이쪽에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정작 충성의 맹약은 다른 곳에 하였지. 네가 네 할아비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구나. 허허허허.”“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뒤돌아보는 병연의 안색이 창백하게 바래졌다. 그의 눈가에 경련이 파르르 일었다. 라온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와락 거센 힘이 들어갔다.

“김 형…….”라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연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왜 그리 창백하십니까? 대체 부원군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모두 무엇이란 말입니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라온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 속내를 읽은 것일까?

금세 평정을 되찾은 병연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나는 괜찮다. 그러니 그만 가자.”병연은 걱정하는 라온에게 낮게 속삭이며 문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무사들이 촘촘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도 달려왔군.”어림잡아도 수십 명은 넘어 보이는 그 숫자에 병연의 얼굴에 난처함이 피어올랐다.

비단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무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하나같이 대단했다. 아무래도 무사히 이 집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김 형, 저 때문에 또다시…….”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김조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좋은 날이라. 집 안에서 삿된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군. 그 환관을 놓고 조용히 나가라. 그럼 내 오늘의 소란은 눈 감아 줄 터이니.”그러나 병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소. 아니, 그러고 싶지 않소.”“그래? 허허허. 그 기개만큼은 네 조부와 다르구나.”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던 김조순은 무사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창창창창!

검을 뽑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십여 자루의 검날이 병연과 라온을 둥글게 에워쌌다.

“김 형.”놀란 라온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김 형, 가십시오. 저는 부원군 대감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가겠습니다.”“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김 형.”“너는 모른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 잔말 말고 내 뒤에 따라붙어.”“하지만…….”저 사람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저를 위해 그러지 마십시오. 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마세요.

“성가신 녀석. 내가 널 두고 갈 것 같으냐? 널 두곤 절대 안 가. 아니, 못 간다. 그러니 따라와. 내 손 놓지 마.”“김 형.”서슬이 퍼런 검들을 보며 라온은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두려웠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원인은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김 형이 다칠까 두려웠다. 다른 일도 아닌 자신의 일에 말려들어 그가 상처받게 될까 무서웠다.

그때, 병연이 그녀의 손을 굳게 잡쥐었다.

‘내가 있다. 떨지 마라.’일순, 신기하게도 거칠게 날뛰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병연의 손을 잡고 있으면, 세상 그 어디에 있어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독거리는 손길을 느끼며 라온은 병연이 이끄는 대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였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을 겁박하고 있는 검도 더욱 바싹 다가왔다.

병연은 천천히 라온을 제 등 뒤로 돌려세웠다.

그의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가 피어올랐다. 마주하고 있는 자들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가 안개처럼 흘러내렸다.

위기일발의 상황.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왕세자 저하 납시오!”왕세자의 행차를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병연과 라온을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이 물살 갈라지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김조순의 눈짓을 받은 무사들은 순식간에 검을 거두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최 내관을 앞세운 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의 무심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천천히 병연과 라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딜 갔는가 했더니, 여기 있었더냐?”“여긴 어쩐 일이시옵니까?”병연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네가 라온이와 함께 영온이를 호위한다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말을 하는 영의 시선이 병연이 잡고 있는 라온의 손목에 멈췄다.

찰나,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흠흠, 어색한 헛기침을 하던 영은 우연처럼 병연과 라온의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삿갓 아래 숨겨진 병연의 입가에 어이없는 미소가 희미하게 맺혔다. 그 모습일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영은 김조순이 내준 자리에 정좌했다.

“세자저하께선 참석하지 못하신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영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으며 김조순이 말했다.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해 드릴 생각으로 부러 그리하였지요. 혹여, 제가 방해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그런데…….”영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을 돌아보았다.

“경사스런 날에 분위기가 너무 험악한 것 같습니다.”“물러가라.”김조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사들이 종적을 감췄다.

영은 방 안에 서 있는 병연과 라온을 돌아보았다.

“너희도 그만 물러가거라. 들어올 때 보니 영온이 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있더구나. 그 아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라.”“명 받잡습니다.”고개를 숙여 보인 병연이 라온의 손목을 잡아끌고 밖으로 향했다.

“저 녀석들, 그 손은 놓고 가지…….”영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영과 김조순의 앞에 각기 다담상이 놓였다. 찻잔에 입술을 축이며 영이 입을 열었다.

“이곳엔 잉어 그림이 참 많군요.”“소일삼아 그리는 것인데. 세자 저하께 보여드리기 부끄럽습니다. 세자 저하께서야 말로 그림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이신다 하던데, 이 늙은 외조부를 위해 하나 그려주시지 않겠습니까?”부원군 김조순의 말에 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호사가들의 세 치 혀 때문에 제 실력이 많이 부풀려지고 말았습니다. 한낱 보잘것없는 솜씨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거두십시오.”단호한 말과 함께 영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오른쪽 벽 중앙에 걸린 가장 큰 잉어 그림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잉어는 때론 용을 상징한다고도 하더군요.”“허허허, 그런 이야기가 있사옵니까?”“또한,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동물이지요.”영의 나직한 목소리에 김조순의 얼굴이 잠시 잠깐 굳었다가 풀렸다.

“허허허. 흙탕물을 뒹구는 잉어가 어찌 고귀한 용에 비유될 수 있단 말입니까?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꾸며낸 흔한 억지인 모양입니다.”“그렇겠지요. 역시 입 가벼운 호사가들의 가벼운 말장난이겠지요? 어찌 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잉어가 구름과 벗하는 용에 비견될 수가 있겠습니까?”영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 의미심장한 말의 진의를 김조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련한 사내는 그저 허허, 인자한 웃음으로 시종일관했다.

“허허허. 그렇지요. 허허허허.”그런 외조부를 향해 영이 쐐기를 박듯 한 마디 덧붙였다.

“본시 만물에겐 그에 합당한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물을 벗어난 잉어는 결국 죽게 될 뿐이지요.”

***

댓돌에 놓인 신발을 신는 영의 앞으로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윤성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벌써 가시옵니까?”“…….”“그리 청하여도 이런 행사에는 좀처럼 얼굴 보이지 않으시던 저하께서 갑자기 납시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사옵니다.”“그랬더냐.”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서는 영의 뒤를 따르며 윤성이 물었다.

“무슨 연유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연유?”“갑자기 마음이 바뀌시어 걸음 하시게 된 연유 말이옵니다.”“너야말로 그걸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혹여 홍 내관 때문이옵니까?”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영이 윤성을 돌아봤다.

“무어라?”“갑자기 마음이 바뀌시어 저희 집을 찾으신 연유, 홍 내관 때문이옵니까? 그 사람이 여기에 있기에 저하께서 걸음을 하신 것이옵니까?”“그렇다면 어찌할 것이냐?”윤성이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마음 접으시옵소서.”영의 눈썹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영의 서늘한 눈빛에도 윤성의 미소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홍 내관을 향한 세자저하의 마음, 그만 접으시옵소서.”“뭐라?”“저하께서는 홍 내관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알고 있다.”“정녕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자부하실 수 있으시옵니까?”“자부할 수 있다.”“그렇다면 더더욱 잘 아시겠습니다. 저하께서는 절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옵니다. 저하와 그 사람,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이뤄질 수 없는 헛된 꿈이라면 아예 꾸지 않는 것이 옳지요.”“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홍 내관이 마음에 듭니다.”“……!”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윤성이 알고 있다, 라온에 대해.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윤성이 라온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의 심기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저라면 저하께서 이뤄줄 수 없는 꿈을 현실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할 수 있지만, 저하께서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너는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다?”“네. 그렇사옵니다.”그 당당한 대답이 영을 자극했다.

영의 입에서 낮지만 감히 반박할 수없는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다. 네가 만들 수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고 싶지 않다. 그러나 감히, 내 사람을 상대로 그런 꿈일랑은 꾸지 마라. 감히 내 사람과 함께 할 현실 따윈 네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옵니다.”“무슨 소리냐?”“세자저하시니까요!”“뭐라?” “세자저하의 세상이 그 사람을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옆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처 입히고, 다치게 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그만 물러서십시오. 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아프게 하지 마시옵소서.”영은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냉기를 담은 표정으로 윤성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한 마디, 한 마디 뼈에 새기듯 말했다.

“그런 세상이라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람을…… 홍라온을 상처 입힐 세상이라면…… 내가 먼저 부숴버릴 것이다.”그럴 것이다.

라온아, 너를 다치게 하는 세상이라면, 하나 남김없이 부숴버릴 것이야. 그리하여 새 세상을 만들 것이다.

네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내 백성들이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이 손으로 만들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하여도…….

라온아, 나는 너를 놓고 싶지 않다.

너를 잃고 싶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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