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69화 (69/131)

69. 이상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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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30

‘저 아이는 옹주님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귓가를 속삭이는 목소리.

머릿속을 꿰뚫어보는 눈동자.

‘저 아이를 죽인 것은 바로 옹주님이십니다. 옹주님께서 저 아이를 죽인 것입니다.’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 아니야! 아아악!”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영온 옹주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유모상궁과 나인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옹주마마, 왜 그러시어요? 또 꿈을 꾸신 것이옵니까?”“…….”“괜찮사옵니다. 이제 괜찮사옵니다.”유모상궁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떠는 옹주를 다독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옹주가 해쓱한 얼굴로 유모상궁을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다.>“그럼 조금 더 주무십시오.”유모상궁의 말에 영온 옹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답답하구나. 산책하고 싶어.>“이른 새벽이라, 바람이 많아 차갑습니다. 조금 더 주무시옵소서. 날이 환하게 밝으며 쇤네가 모시겠사옵니다.”유모상궁은 고집을 부리는 영온을 이부자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날이 밝았음에도 영온 옹주의 처소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옹주마마, 기침하시옵소서. 아침 수라 젓수실 시각이옵니다.”낮게 아뢰며 유모상궁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한 것은 주인 없는 텅 빈 이부자리와 열린 동창이었다. 아연한 유모상궁은 열린 동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옹주마마. 옹주마마 어디로 가신 것이옵니까?”유모상궁의 허무한 외침이 궁궐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

이른 아침의 폄우사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보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책을 읽던 영은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아까부터 괜스레 몸을 재게 움직이며 작은 폄우사 안을 부산하게 오가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종종걸음치던 라온이 영을 돌아보았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 책은 다 읽으셨습니까? 동궁전의 서고로 가서 새로운 서책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아니.”“그럼, 차라도 다시 올릴까요?”“여기 있는 것으로 충분해.”영은 서안 위에 놓인 찻잔을 턱짓했다.

라온이 한달음에 다가와 찻잔을 감싸 쥐었다.

“벌써 싸늘하게 식지 않았습니까. 차란 모름지기 적당한 온도로 마셨을 때 참맛을 음미할 수 있는 법이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따뜻한 물을 준비…….”말과 함께 라온이 서둘러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이 그녀의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아얏! 아프지 않습니까?”엉덩방아를 찧은 라온이 콧등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왜 이리 별스럽게 구는 것이냐?”“별스럽다니요?”“어찌하여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질 못하느냔 말이다.”“해야 할 일이 많아서…….”“네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제가 해도 무방한 일입니다.”“정히 필요하면 다른 아이들을 부르면 그만이다. 그러니 넌 그저 얌전히 내 옆에 앉아 있으면 돼.”“싫습니다.”“싫어? 왜?”토씨를 다는 라온을 향해 영이 눈빛을 세웠다.

“옆에 있으면…… 또 이상한 짓 하실 거잖습니까?”“이상한 짓?”“네. 입……맞춤을 하신다든가…… 안으신다든가…….”라온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영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 또 나왔다. 저 표정.’일순, 라온은 서둘러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무릎걸음으로 물러섰다. 화초저하께서 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실 때면 언제나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곤 했던 것이다.

라온은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절대로,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으리라.

불끈 주먹까지 말아 쥐며 의지를 다지는 그녀의 앞으로 예의 영이 한 발짝 다가왔다.

어느새 일종의 놀이처럼 되어 버린 일상적인 모습.

그러나 이번에는 저도 안 당할 겁니다.

라온은 두 눈을 한껏 치뜨고 영을 응시했다.

이윽고 심연의 빛을 닮은 눈동자가 라온의 새카만 눈동자에 와 닿는다. 허공중에 맞부딪히는 시선은 금세 그녀의 심장을 올무처럼 옭아맸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절대로 안 돼.

라온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결국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동시에 영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큰 걸음을 성큼 라온에게 다가섰다. 내내 버티고 섰던 라온 역시 영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선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의 눈빛과 기세에 절로 몸이 떨려왔다.

이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일까, 기대일까.

라온 스스로도 제 마음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아아, 이번에도 이리 무너지는 것인가.

다시 한 걸음 바싹 앞으로 다가서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라온은 최대한 뒤로 물러섰다.

나름의 반항이라면 반항.

그러나 이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벽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글렀다, 이번에도…….

라온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영의 숨결이 라온의 뺨을 간질이듯 다가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어라?

라온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반짝 떴다.

어라? 아무 일도 없네.

라온을 벽까지 몰아친 영은 그녀의 곁에 있던 책장에서 서책 하나를 뽑아들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하십니까?”평소 하시던 거 안 하십니까?

“너야말로 뭐하는 것이냐?”“네?”“그곳에 서 있지 말고 그만 이리 오너라.”영이 라온을 향해 손짓했다.

“가면 이상한 짓 안 하실 겁니까?”“안 한다.”네가 싫다면.

“정말 안 하실 거지요?”“왕세자가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정말, 정말입니다.”“그래. 그러니 너야말로 이상한 짓 그만하고 이리와.”“약조하셨습니다.”라온은 주춤거리며 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상한 짓 안 하신다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뭐지? 뭐가 이리 섭섭해?

이상한 짓 하실 때는 당황스러웠건만, 막상 아무 짓도 안 하신다고 하니. 왜 이런 기분이 되는지.

이율배반적인 제 마음에 라온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말았다.

그때였다.

내내 서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무에가 마음에 안 들어 그리 불퉁한 표정이냐?”“아무것도 아닙니다.”라온은 빡빡빡, 죄 없는 방바닥만 손끝으로 긁었다.

이렇게 하면 마음에 덧씌워진 이 섭섭함이 사라질까?

아 뭐지? 뭐가 이리…….

“서운하더냐?”“네. 네?”엉겁결에 영의 물음에 대답한 라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드니 시야에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혼백을 앗아버리는 듯한 그 미련한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라온은 영혼 없는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서운하지 않습니다. 절대 서운한 거 아닙니다.”“거짓말.”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 녀석을 어찌할까?

뻔뻔하게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이 녀석을.

이리 사랑스러우니, 자꾸만 욕심이 나는 것이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말과 함께 영의 얼굴이 라온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안 됩니다. 이상한 짓 안 하신다면서요.”화들짝 놀란 라온이 두 손으로 영을 밀어냈다.

“네가 감히 왕세자를 미느냐?”영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눈빛에 스며든 장난기는 여전했다.

라온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미는 게 아닙니다.”“미는 게 아니라면? 그럼 내 어깨에 놓인 네 두 손은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느냐?”“미는 게 아니라 받치고 있는 것입니다.”“받치고 있다?”“왕세자 저하의 옥체가 보잘것없는 환관의 몸 위로 떨어지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래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이렇게 받치고…….”“넌 보잘것없는 환관이 아니다.”“또 내 사람이다. 내 벗이다. 이러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그놈의 벗 타령은…….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엔 김 형과도 이러고 계셨지. 설마, 화초저하께서는 같이 씨름하고 싶은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아니긴. 표정에 다 보이는데.”“아무튼. 아무리 벗이라 해도 더 이상은 안 됩니다.”“벗이라도 안 된다……. 그렇다면 널 다르게 보면 되겠구나.”“어떻게 다르게 본다는 말씀이십니까?”“이런 짓을 해도 무방한 사람.”영의 입술이 라온의 입술을 살포시 덮쳐왔다.

“어, 어찌하여 또 이러시옵니까?”라온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싫으냐?”“조, 좋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싫지는 않은 모양이구나.”영의 숨결이 다시 밀물처럼 라온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 나른한 기운에, 그 아늑한 감각에 영을 밀고 있던 라온의 두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연분홍빛으로 뒤바뀌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선계에 한 발짝 디딘 듯 몽혼한 기운이 전신으로 잦아드는 찰나…….

스르륵 무너지던 라온의 팔에 다시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뭔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

단순한 느낌이려나?

감았던 눈을 뜨니 영 역시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우뚝 행동을 멈춘 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길이 빠끔히 열린 폄우사의 문틈으로 향했다.

좁은 틈 사이로 동그란 눈이 호기심을 반짝이고 있었다.

귀엽고 옹망 졸망한 이목구비.

그들이 익히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

“옹, 옹주마마!”“영온아!”

***

폄우사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흠흠.” 어색한 헛기침으로 침묵을 깬 영이 맞은편에 얌전히 앉아 있는 영온 옹주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움으로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라온은 도망치듯 문밖으로 나갔다.

문풍지 위로 어른거리는 라온의 그림자를 건너다보며 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을 어찌 설명한다?

“영온아, 아까 네가 본 그것은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네?>“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남…… 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이 어린아이에게 어찌 설명해야 하나.

환관인 라온과 입맞춤하는 광경을 들키고 말았으니, 영온은 영락없이 자신을 남색가로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라온의 정체를 함부로 말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던 영온 옹주가 작은 손을 들어 서안 위에 글씨를 썼다.

<알고 있습니다.>“뭐?”영의 눈에 작은 놀람이 들어찼다.

영온이 다시 쐐기를 박듯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영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영온은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눈치가 빨랐다. 특히나 자신이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나 상세히 꿰고 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였으니 라온이 여느 환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그렇구나.”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라온의 비밀을 알게 된 자가 영온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황은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냐?”<…….>“말해보려무나.”<세자저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무엇이냐?”<오늘 하루만 홍 내관을 제게 빌려주실 수 있으시옵니까?>“홍 내관을?”<어머니와 함께 부원군 대감댁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사옵니다.>“부원군 대감댁에?”영의 눈에 이채가 스며들었다.

외조부께서 숙의 박 씨와 영온을 친히 집안 잔치에 불렀단 말인가?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온의 청이 이어졌다.

<단 한 번도 궁밖에 나간 적이 없었던 터라. 많이 겁이 납니다. 홍 내관이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사옵니다.>“그래? 그럼 홍 내관의 의중부터 물어봐야겠구나.”영은 문밖에 서 있는 라온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영온이가 너와 함께 부원군 대감 댁에 가고 싶다고 하는구나. 네가 있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다 하는데. 어찌하겠느냐? 가겠느냐?”이내 문이 열리고 라온이 해사한 얼굴을 내밀었다.

“당연합니다. 뉘의 명이라고 어기겠습니까?”“홍 내관이 괜찮다는구나.”영온의 얼굴이 환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옹주마마. 제가 옹주마마의 곁을 꼭 지켜드리겠사옵니다.”몸을 돌려 라온의 앞으로 다가간 영온이 손 글씨를 썼다.

<홍 내관, 부탁이 하나 더 있네.>“무엇입니까?”<홍 내관 말고 한 사람을 더 청해도 되겠는가?>“한 사람 더요?”대체 누구 말입니까?

***

영온을 태운 가마가 창덕궁의 돈화문을 나섰다. 가마 곁을 따르던 라온이 열린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옹주마마, 괜찮으시옵니까?”가마 안에 있던 영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온은 시선을 등 뒤로 돌렸다.

“김 형.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단출한 행렬의 맨 뒤쪽엔 삿갓을 깊게 눌러쓴 병연이 묵묵히 뒤따르고 있었다.

***

영온 옹주의 일행이 부원군 김조순의 집에 당도한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숙의 박씨의 명으로 대문 앞에서 영온 옹주를 기다리고 있던 오 상궁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옹주마마, 이제 오시면 어찌하시옵니까?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어요. 종친 아가씨들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옵니다.”<어마마마는 어디에 계시느냐?>“부부인 마님과 담소를 나누시고 계시옵니다. 곧 부원군께서 자리에 함께하실 것이라 하니. 서두르십시오.”오 상궁의 재촉에도 영온은 주춤거렸다.

그런 영온의 귓가에 라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김 형이 여기서 꼼짝도 않고 옹주마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안으로 듭시옵소서.”그 말에 힘을 얻었는지, 영온은 자박자박 작은 발을 움직여 종친의 어린 여식들이 모여 있는 별당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라온의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애써 태연한 척 별당 안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영온 옹주의 어깨가 떨렸던 것이다.

대체 뭐가 무서워서 저러실까?

댓돌 아래에 시립하고 있던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방 안에서는 소녀들 특유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 속에 영온 옹주의 것은 없는가 하여 라온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옹주마마께서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으셨다.

“웃으십시오, 옹주마마. 함께 웃으십시오.”라온이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그녀의 곁으로 환관 하나가 다가왔다.

“자네가 동궁전의 홍 아무개가 아닌가?”“그렇습니다.”“나는 대전의 윤 내관이라고 하네. 마침 잘됐군. 일손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잠시 도와줄 수 있겠는가?”“제가요?”라온이 궁의 환관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지금은 영온 옹주를 모시는 중이었다.

“송구하오나 지금은 옹주마마를 모시고 있습니다.”“허허,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닐세. 잠시면 되니 도와주게.”라온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불안해하는 영온 옹주를 놔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옹주 마마라면 걱정 말게. 내가 이렇게 있는데, 별일 있겠나?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게.”댓돌 아래, 라온과 나란히 서 있던 영온 옹주의 유모상궁이 말했다. 유모상궁까지 그리 합세하니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라온은 호위무사를 자청하고 있는 병연을 돌아봤다.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병연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믿겠습니다. 김 형.’눈으로 부탁한 라온이 윤 내관을 따라 중문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별당 안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불안감이 증폭된 영온이 급기야 물그릇을 쏟고 수저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방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영온 옹주에게로 향했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그 눈빛을 영온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할 거라는 유모상궁은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이러시면 아니 된다느니,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느니,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느니.

영온 옹주에게 부담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보다 못한 병연이 끼어들었다.

“옹주마마.”유모상궁이 질색하며 눈빛을 세웠다.

“어딜 감히!”그녀는 애초에 라온과 병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도깨비 같은 자들이 갑자기 영온 옹주의 정신을 흐려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홍라온은 환관이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럭저럭 곁에 둘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자는 근본도 알 수 없는 자였다. 왕세자 저하께서 특별히 이자의 신분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면, 하루일망정 호위무사로 쓰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영온 옹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유모상궁을 슬며시 밀었다. 그리고 병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는 의미였다.

병연이 허리를 숙이며 영온에게 물었다.

“잠시 산책이라도 가시겠습니까?”영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원군 대감께 얼굴부터 보이는 것이 예의였으나, 상황을 보니 금방 올 것 같진 않았다.

*  *  *

후원으로 나오자 영온의 불안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병연은 담벼락에 기댄 채 영온을 바라봤다.

무엇이 저 어린 소녀를 저리도 힘들게 하는 것일까?

사람들? 아니, 평소에도 옹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고 해서 불안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영온 옹주와는 고작 세 번째 만남. 첫 만남부터 영온 옹주는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옹주께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특히, 그 증세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 더 심해졌다.

그렇다는 것은 옹주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이 집 어딘 가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잠시 후원을 구경하던 영온이 병연에게 다가왔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평온했던 것도 잠시.

어린 영온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돌아가고 싶소.>“벌써 말이옵니까?”묻던 병연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영온과 눈을 맞췄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왜 이리 떨고 계시는 것이옵니까?”<……무섭소.>“무엇이 그리 무섭습니까?”<나는…… 나는…….>그때였다.

병연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던 영온이 돌연 그의 뒤춤으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의 앞으로 하얀 도포를 입은 초로의 사내가 지나갔다.

“휴…….”영온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내의 입성에 긴장했다가 얼굴을 보고는 안심하는 것이다.

저런 입성이라면…….

잠시 생각을 되짚던 병연이 영온을 바라보았다.

“혹여 부원군 대감이 두려우신 것이옵니까?”영온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제대로 짚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사옵니까?”영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병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영온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믿으십시오.”병연은 영온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의 곁에 있으면 어째선지 안심이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 해도 그의 곁에만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눈이, 영온의 마음에 믿어도 된다고 말하는 듯 했다.

영온이 병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을 곧게 펴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

<나는…… 나는 말을 하면 안 되오.>“어째서요?”<나 때문이라 하였소. 내가 말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였소.>

***

3년 전.

7살의 영온은 향아라는 어린 나인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12살의 향아는 영온 옹주의 소꿉친구였고 또한 마음 넓은 언니 같은 존재였다.

영온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는 시각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향아와 함께 움직였다. 하여, 나인 향아를 자신의 피붙이처럼 생각하며 믿고 의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의 박씨의 처소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난 영온은 그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향아가 어머니의 베갯속에 무언가를 섞는 모습을.

“향아야, 그게 뭐야?”영온이 깨어 있는 줄 몰랐던 향아는 심하게 당황했다.

“옹주마마!”“그게 뭐야?”“약, 약재이옵니다.”“약재?”“네. 숙의마마께서 밤잠을 쉬 못 이루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숙면에 좋다고 하는 약재를 넣어드리고 있었사옵니다.”“그걸 넣으면 잠이 잘 오게 되는 거야?”향아가 방긋 웃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그렇다고 들었거든요.”“어마마마께서 좋아하시겠네.”“네, 옹주마마. 하지만 비밀이옵니다.”“왜?”“이건 숙의마마께서 모르고 계셔야 효험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거든요. 그러니 옹주마마, 절대 비밀이옵니다. 아셨지요?”영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비밀.”그렇게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했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기엔 영온은 너무 어렸고, 며칠이 지나서는 약속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향아가 내 베개에 약재를 넣었다고?”“네.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사옵니다. 아, 그런데 이거 비밀인데.”뒤늦게 향아와의 약속이 생각난 영온이 제 입을 막았다.

“그래?”“네. 그러니 어마마마, 모른 척해주시어요. 향아와 약속하였단 말이어요.” 박 숙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온 옹주는 자신의 한 마디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한 시진 후.

향아는 감찰 내관들에게 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영온이 향아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혼자 노는 것에 지친 영온이 향아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모두들 모른 척했다. 향아는 궁 밖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영특한 영온은 사람들이 거짓을 말한다는 걸 눈치챘다.

향아가 갑자기 제집으로 돌아갔다고? 집도 절도 없는 고아인 향아가?

그 후로도 영온은 집요하게 나인들을 독촉했다. 거짓말하지 말고 향아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달라고.

저녁 무렵, 대비전의 최 상궁이 우연히 지나는 길에 영온을 만났다.

“향아는 아직 궁 안에 있사옵니다. 쇤네가 향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사옵니다.”영온은 최 상궁을 따라 향아를 찾아 나섰다.

잠시 후, 최 상궁이 영온을 안내한 곳은 궁의 후미지고 음습한 곳이었다. 궁에서 태어나 자라왔지만, 궁궐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곳에 향아가 있단 말이냐?”“네. 저기, 저 안에 있습지요.”최 상궁이 가리키는 문풍지 위로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영온은 그 문 틈새를 빠끔히 들여다보았다.

향아는 그곳에 있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두꺼운 동아줄로 칭칭 묶여 있었다. 항상 곱게 땋아 내렸던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언제나 미소를 짓던 얼굴엔 끔찍한 상처와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하얀 옷을 붉게 물들인 피가 바닥 아래까지 흘러내려 작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붉은 인두질을 당한 12살의 어린 소녀는 영온을 보자 애원했다.

“옹…… 옹주마마.”“향아야.”“살려주세요, 옹주마마.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옹…… 옹주마마.”애원은 그리 길지 못했다.

눈에 고여 있는 눈물이 채 흐르기도 전에 향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영온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붉은 관복을 입은 초로의 사내.

매서운 눈빛과 가면처럼 두꺼운 웃음을 지은 사내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향아는 죽었습니다, 옹주마마.”“향…… 아야.”죽었어? 향아가 죽었다고? 왜? 왜?

의문이 가득한 어린 영온의 귓가에 김조순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아이를 죽인 건 옹주마마십니다.”“어째서?”김조순의 미소가 짙어졌다.

“옹주마마께서 숙의마마께 고하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가 숙의마마의 베개에 이상한 약재를 넣었다고 말입니다.”“고작 그것 때문에?”“때로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법이랍니다. 특히, 옹주마마처럼 귀한 분의 말이라면 더더욱 그런 법입니다.”“난, 난 향아를 죽일 생각이 없었어. 이건 잘못되었어. 내가, 내가 원한 게 아니야.”“착하신 옹주 마마께서는 향아가 죽길 바라진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옹주 마마의 경솔한 한 마디로 결국 향아는 죽고 말았군요.”“살려줘. 다시 되돌려줘. 이건 아니야. 잘못됐단 말이야.”“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무를 수도 없지요.”김조순이 검지를 입술 위에 세우며 말했다.

“옹주마마께서 저 아이를 죽인 겁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길 바라신다면 앞으로 말을 조심하십시오. 옹주마마.”

***

<향아는…… 내가 죽였소. 내가…… 어마마마께 말씀만 드리지 않았어도. 내가 말만 하지 않았어도. 결국, 그 아이를 죽인 건…….> 손글씨를 쓰는 영온의 손가락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향아의 죽음 이후로 영온 옹주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말을 하면 안 된다. 말을 하면 누가 또 죽을지도 몰라.

어린 소녀의 가슴엔 이런 두려움이 가득했다.

병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옹주마마께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하지만……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향아를 죽인 건…… 나라고. 내가 말을 해서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이오.>영온의 몸이 아까보다 더 떨려왔다.

<궁으로 돌아가고 싶소.>“알겠습니다. 그 전에 홍 내관을 찾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말을 하는 병연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라온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홍라온,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

“아직 멀었습니까? 이쪽으로 쭉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까?”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리 먼 곳까지 데려오는 것일까?

앞서 걷던 라온이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후원의 별채로 들어선 이후 벌써 일곱 번째 문지방을 넘고 있었다. 긴 장방형의 방은 사잇문이 죄다 걷혀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길고 큰 방이었던지, 방의 깊숙한 안쪽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들어가야 합니까? 어디까지…….”말을 채 끝나기도 전.

탁탁탁.

열려 있던 등 뒤의 사잇문들이 일제히 닫혔다.

그와 동시에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사잇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안에는 하얀 도포에 정자관을 쓰고 있는 초로의 사내가 그림 같은 자태로 붓을 놀리고 있었다.

“이제야 자네와 만나게 되는군.”붓을 잠시 내려놓은 사내가 라온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조각칼로 새겨 넣은 듯한 짙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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