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차라리 빼앗고 후회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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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7
“이게 정말이냐? 정녕 이것이 세자저하께서 좋아하시는 거란 말이지.”책장을 넘기는 소양 공주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서안을 하나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맞습니다. 분명 거기에 쓰여 있는 것이 세자저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이른 아침.
라온은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소양 공주의 처소부터 찾았다. 어제 소양 공주가 주었던 세자저하에 대한 질문이 가득한 서책을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서책을 본 소양 공주의 입술이 가로로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맨 마지막 장에 다다르자 얼굴에 떠오른 호기심 대신 불만 한 가닥이 새겨졌다.
“어째서 마지막 질문에는 답이 없는 거야? 세자저하께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건 답을 못 들은 거야?”소양 공주의 물음에 라온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네, 그 질문에 대해 세자저하께선 따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다만…… 몸으로 말씀하셨지요.
어제, 영은 라온의 손을 포박하듯 잡쥔 채로 끊임없이 입맞춤했었다. 그게 다 저 마지막 질문 때문이었다.
소양 공주님, 우리 화초저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건 다름 아닌 입맞춤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사내와의 입맞춤…… 이라고는 죽인다고 해도 말할 수가 없기에 라온은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래? 하긴 여인도 가까이하지 않으니, 딱히 하고 싶으신 일도 없으실 테지. 그 무료한 일상, 이 소양이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그 속내를 알지 못한 소양 공주는 무에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이내 밖에 시립하고 있는 궁녀를 불러들였다.
“너, 지금 당장 이것들을 준비해 오너라.”소양공주는 서책에 쓰여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것저것을 준비하라 명을 내렸다. 궁녀들의 몸짓이 바빠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영이 좋아하는 색의 당의를 입고, 영이 좋아하는 화장을 한 소양은 이번에는 조선의 여인처럼 머리를 길게 땋아 내렸다.
어린 소녀처럼 잔뜩 들떠 치장하는 그 모습이 같은 여인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지켜보는 라온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맺혔다.
알고 있었다. 저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지금 화초저하께서 자신에게 보이는 성심일랑은 한때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자꾸만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저렸다.
마음에 품은 사내를 위해 치장하는 여인을 보니 이상하게도 바람을 삼킨 듯 헛헛하고 시려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맛을 보지 않았으면 그 달콤함을 알지 못했으련만.
영의 미려한 입술이 가져다주는 달콤함과 그의 아득한 숨결이 전해주는 아찔함을 기억하는 라온의 입술은 저 혼자서 마구 두근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자저하와의 사랑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버릇처럼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라온은 불에 덴 사람처럼 얼른 손을 내렸다.
정신 차려, 홍라온. 정신 차리자. 너는 그저 일개 환관일 뿐이야. 3년이 지나면 이 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러니 미련 둘 일은 이제 그만하자. 괜히 발걸음 무거워질 일일랑은 이쯤에서 멈춰야 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라온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모질게 마음먹어야 한다. 난 홍라온이다. 일생을 사내로 살아왔고 지금은 환관으로 살아야 한다.
문득, 처연한 마음이 들었다.
사내로도 여인으로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이 사내이되 사내가 아닌 환관들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보기에 어떠하냐? 아름다우냐?”그런 그녀의 앞에서 한껏 단장한 소양 공주가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묻는 소양 공주를 향해 라온이 애써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름답사옵니다.”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이요.
라온은 가슴 속의 우울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렸다.
라온…… 즐겁게 살라는 이 이름답게 그저 즐겁게 살아야지. 아니 되는 일에 괜히 마음 쓰지 말고 우울해하지 말아야지.
금세 평소의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온 라온을 향해 소양 공주가 오만하게 턱을 세우며 말했다.
“그래? 그럼 가자.”“어딜 말입니까?”“준비가 끝났으니 가야지. 이제 세자저하께서 아름다운 내 모습을 보고 반하실 일만 남았다.”호언장담하며 소양 공주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아 몸을 일으키던 라온이 문득 왼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공주마마.”“왜?”“머리에 꽂으신 그것은 웬 장식입니까?”“뭐긴 뭐야? 세자저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가을 국화지. 이거 구하느라 애 좀 먹었느니. 호호호.”아…… 화초저하, 저 공주님. 드디어 머리에 꽃까지 꽂았습니다.
이제 어찌하실 것입니까?
***
동궁전, 중희당의 공기가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작은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 있는 영의 표정은 서늘하다 못해 차디찬 얼음처럼 느껴졌다. 그는 심기 불편한 눈길로 산처럼 쌓여 있는 상소문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마땅히 임금에게 들어가야 할 상소문이지만, 정작 이 나라의 임금께서는 읽어보지도 못한 상소문.
지금 영의 눈앞에 쌓여 있는 상소문은 환관들과 조정대신들이 자신들의 임의대로 추려낸 것들이었다. 영은 그렇게 걸러진 상소문들을 살피고 있었다.
“생각대로군.”왕에게 올라가지 못한 상소문 대부분이 외척과 안동 김씨 일문의 횡포에 대해 토로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감히!”영의 얼굴에 노여운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상소문을 검열하는 자가 누구인가?”“이조판서 이희갑 대감과 대전의 윤 상선인 줄 아옵니다.”“그들 모두, 당장 동궁전으로 불러들여라.”“명 받잡겠사옵니다.”그러나 명을 받든 최 내관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사나운 눈빛으로 상소문을 읽던 영이 고개를 돌렸다.
“달리 할 말이 있는 것이냐?”“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부원군 대감 댁에 경사가 있다고 하옵니다.”“경사?”“부원군 대감의 조카이신 김근교 영감께서 득남하여 이번에 돌을 맞이하였다고, 친히 잔치에 참석하여 주시길 청하신다고 하옵나이다.”영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나더러 돌잔치에 오란 말이더냐?”“함께 친족의 돈독한 우애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하시며…….”“친족의 돈독한 우애라? 지나가는 개가 웃겠구나.”미련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린 영이 말을 이었다.
“비단이나 몇 필 보내거라.” “……그리하겠습니다.”최 내관이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이곳을 나가는 즉시 그는 사람을 이조판서와 윤 상선을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동궁전엔 세자저하의 매서운 호통소리가 메아리치겠지.
그리고 그 일로 가뜩이나 불편해진 외척과의 관계가 더욱더 복잡해질 것이다.
지혜로우신 세자저하께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뜻을 세운 이상 왕세자께서는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변경도 변동도 없다. 오로지 자신이 세운 계획을 그대로 밟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빈틈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것이겠지. 세자저하께서는 그런 분이시다. 지금까지 계획하고 예정한 일을 바꾸는 일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생각이 바뀌었다.”영의 목소리에 최 내관이 움찔 뒷걸음질하던 발을 멈췄다.
방금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말을 들었다.
생각이 바뀌었단 말이옵니까?
“이조판서와 윤 상선은 오후 늦게 중희당으로 들라 하라.”“……특별히 그러시는 연유가 있으시옵니까?”“낮 동안엔 내 긴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최 내관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 어떤 대단한 계획을 생각해 내신 걸까.
경이로운 시선으로 영을 바라보던 최 내관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영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곧 녀석이 올 텐데, 험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군.”최 내관이 어림짐작했던 영의 대단한 계획은 곧 이곳으로 올 라온에 대한 것이었다.
***
황금빛 아침 햇살이 영의 양어깨에 내려앉았다.
중희당 마당을 서성이던 그는 시야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 아직인가?”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영은 중희당으로 들어오는 중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라온을 찾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해 결국 뜰로 나온 것이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무겁게 가라앉았던 영의 눈동자에 생기가 들어찼다. 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그려졌다.
“라온아…… 홍라온.”단단하게 굳어 있던 영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연초록빛 관복에 제 정체를 숨긴 라온이 중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영의 입가에 조금은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종종걸음으로 영의 앞에 다다른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화초저하, 여기서 무엇 하고 계십니까? 설마, 절 마중 나오신 것은 아니시지요?”반은 농을 섞은 질문이었다.
“그럴 리 없질 않으냐.”“그렇지요. 그럴 리 없지요. 그럼 화초저하, 여기서 뭐 하셨던 겁니까?”“오늘따라 유달리 바람이 좋은 것 같아 좀 쐬러 나왔다.”“바람이라고요?”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람은…… 한 점도 안 부는데요?”그녀의 말대로 공기 중에는 옅은 미풍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불었다.”“아, 그렇습니까?”“못 믿는 것이냐?”“믿습니다.”“믿는다는 녀석의 표정이 어찌 이래?”영의 얼굴 가득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중희당 중문으로 들어서는 소양의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분은 뉘더냐?”“소양공주이십니다.”“아침부터 공주께서 동궁전엔 무슨 일이냐?”라온에게 묻고 있지만, 그의 서늘한 눈빛은 소양에게 향해 있었다.
찌르는 듯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소양이 생긋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궁전의 차 맛이 그리 깊다고 하더군요. 세자저하, 소녀에게 그 깊은 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
소양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뒤에 시립 한 라온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영과 담소를 나누는 소양 공주를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그러다 그녀는 영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의 얼굴이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화초저하께서 왜 저러실까? 왜 저리 냉랭한 것이지?
그러다 문득 라온은 깨달았다. 영은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웃지 않고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사람. 세자저하께서는 원래 그리 차가운 분이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웃고, 짓궂은 장난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기에 깜빡 잊고 있었다. 저분이 어떤 사람인지.
설마…… 나한테만 그런 것일까?
갑자기 심장이 질주한 야생마처럼 두근거렸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작은 기대감에 라온은 마음이 설레었다.
차를 마시던 영이 라온과 눈이 마주쳤다.
찻잔 아래로 슬쩍 드러난 차가운 턱선. 그 위에 자리 잡은 입술이 라온을 보는 순간, 실금 같은 미소를 그렸다.
그것은 찰나처럼 짧은 미소였다. 그러나 그 짧은 미소를 눈치챈 사람이 있었다.
영의 맞은편에서 줄곧 그를 지켜보던 소양 공주였다. 그녀는 영과 라온을 번갈아 보았다.
한동안 마뜩잖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소양 공주가 라온에게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네?”“내가 세자저하와 긴히 할 말이 있느니.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느냐?”“아…… 알겠사옵니다.”그때, 물러나려는 라온의 발길을 붙잡으며 영이 말했다.
“굳이 저 아이를 물릴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소녀가 저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러니 잠시 둘만의 시간을 마련해 주시옵소서.”“…….”“아직도 거기 있는 것이야? 어서 나가 보라지 않느냐?”소양 공주의 재촉에 라온은 서둘러 영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
밖으로 나온 라온은 햇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날씨가 꽤 추워졌네.”라온이 시린 어깨를 감싸 안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돌연 영의 처소 안쪽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빠른 발소리와 함께 곧 문밖으로 소양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온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영의 처소를 나온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았다.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것일까? 담소를 나누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인데. 혹시 두 분이 함께 산보라도 나가시는 것일까?
그러나 라온의 생각과는 달리 홀로 나온 소양 공주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댓돌을 내려와 달리듯 걷기 시작했다.
“공주마마?”라온의 부름에 걸음을 멈춘 소양 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라온을 돌아보는 소양 공주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혹시 우시기라도 하신 건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그 당당하고 자신만만하시던 소양 공주님께서 우실 리가.
“너…….”무슨 이유에선지 소양 공주가 라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황한 라온이 연유를 물었다.
“제게 무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옵니까?”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소양 공주가 찬바람이 일도록 몸을 돌렸다.
“오늘은 이만 가겠다. 날 따라올 필요는 없어.”어쩐지 냉랭한 목소리 끝자락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의문을 느낀 라온은 영의 처소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소양 공주가 떠나고 난 뒤에도 영은 처음과 다름없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소양 공주님께서 어찌 이리 빨리 돌아가신 것입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별일 아니다.”“하지만 소양 공주께서 우신 것 같은데요.”“별일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영이 라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앉아라.”“네?”“오늘 차가 제대로 우려졌구나. 너와 함께 마시고 싶으니, 그곳에 앉아라.”
***
“아, 지친다.”오늘도 힘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라온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소양 공주가 갑자기 떠난 이후로 라온은 영과 함께 차를 나눴다.
하지만 조용하게 차를 마시는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갑자기 영의 짓궂은 장난이 발동하는 바람에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환관의 임무 중에 왕세자 저하와의 몸싸움도 있는 줄은 몰랐네. 이러다가 체력만 좋아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라온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뒤통수가 가려웠다.
라온은 휙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등 뒤로 어린 소환내시들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었다.
“저기,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소환내시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그때 용기를 쥐어짠 어린 내시가 라온의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홍 내관 어르신이지요?”“어르신은 아니지만, 제가 홍 내관은 맞습니다만.”“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홍 내관님처럼 될 겁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어린 내시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라온에게 보이며 탄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이 책을 제 평생의 지침으로 삼을 것입니다.”다들 왜 저러는 것이지? 새로 들어오신 분이신가? 그나저나 저 서책과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저리 말하는 것이지?
그러나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소환내시들은 발그레 두 볼을 붉히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거참, 이상한 일이네.
라온은 한 무리를 지어 쪼르르 사라지는 소환 내시들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 아, 도 내관님.”“하하하, 홍 내관. 정말 고맙네. 내 자네만 믿고 있는 걸 알고 있겠지? 고맙네.”라온을 바라보는 도기의 눈빛이 예전보다 더욱 친근했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진 도기는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도 내관님은 또 왜 저러실까?
그러고 보니 그의 허리춤에도 아까 어린 내시들이 보여주었던 서책 하나가 꽂혀 있었다.
대체 다들 왜 저러지? 나도 모르는 시험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저렇게 즐거워하는 거지?”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아마도 저분께서도 저처럼 홍 내관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저보다 홍 내관을 더 사모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참의영감.”언제부터인가 윤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라온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대체 언제부터 등 뒤에 계셨던 것입니까?”“계속 옆에 있었는데 모르셨습니까?”계속 옆에 있었다고요? 그런데 왜 전 몰랐을까요?
라온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했다. 그런 라온의 얼굴 가까이 윤성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작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언제 답을 주실 것입니까?”“답이요?”“제 마음에 대한 홍 내관의 답 말입니다. 저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홍 내관만 결심하면 되는 일입니다.”일순, 라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엔 단순한 장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니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가볍게 받아서는 안 된다.
저쪽이 진심으로 나온다면, 이쪽도 진심으로 답해야 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미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홍 내관이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 혹시 세자저하이십니까?”윤성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라온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다. 자신은 세자저하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세자저하를 언급하는 윤성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무너지는 듯했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지켜보던 윤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그랬군요. 다행입니다.”“뭐가 다행이라는 말씀이십니까?”“제가 들어갈 틈이 있으니까 말입니다.”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세자저하께 마음이 있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설혹 그분께 마음이 있다고 해도 참의영감이 파고들 틈은 전혀 없습니다.”라온의 단호한 부정에도 윤성의 미소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언젠가 홍 내관께서 제 마음을 받아 줄 거라고 믿습니다.”“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것입니까?”“홍 내관이 내게로 올 때까지요.”윤성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순간, 라온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이 사람이 웃지 않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자꾸만 놀라고 만다.
분명 윤성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다만, 저 집요함에 온몸이 굵은 쇠사슬에 묶인 듯 갑갑하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언제부터인가 윤성은 라온에게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처럼 부딪혀 오는 윤성의 진심이 라온의 마음을 점점 무겁게 짓눌러왔다.
“제 조부께서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뭐라 하시던가요?”“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가져라. 만약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 버려라. 그리하여 미련을 떨쳐버려라.”담담히 말하는 윤성의 목소리에 라온의 전신으로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설마, 날 부숴버리겠다는 겁니까?
윤성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진심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라면…… 도저히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하여, 영원히 후회할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빼앗아라.”윤성이 진심이 서린 눈과 표정으로 라온에게 속삭였다.
“빼앗을 겁니다. 가지지 못하고 후회할 바엔 차라리 빼앗고 후회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