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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67화 (67/131)

67.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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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3

“옹주마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니, 그보다 우선 그 위에서 그만 내려오십시오.”라온은 대들보 위에 앉아 있는 영온 옹주를 불안한 눈길로 응시했다.

병온이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어린 옹주께서 저리 앉아 계시니.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여 조바심마저 일었다.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 병연이 영온을 안고 대들보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온 이후에도 영온 옹주는 병연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옹주마마, 괜찮사옵니까? 다들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영온 옹주를 세세히 살피며 라온이 물었다.

옹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무슨 삿된 일이라도 생겼는가 하여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만 숙의마마께 가시어요. 소인이 바래다 드리겠사옵니다.”라온은 영온 옹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잡을 거라 생각하며 내민 손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영온 옹주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옹주마마…….”그 돌연한 반응에 라온은 당황했다.

“하지만 숙의마마께서 크게 걱정하고 계십니다.”아닌 게 아니라, 갑자기 사라진 영온 옹주 때문에 박 숙의는 반은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궁궐 안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온 옹주는 병연의 등 뒤로 몸을 숨긴 채 앞으로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라온의 입에서 절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숙의마마께 가서 옹주마마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소식 전하고 오겠습니다.”그 순간, 영온이 라온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리지 말라는 뜻이 분명한 행동이었다.

“옹주마마, 어찌 이러십니까?”그때, 두 사람의 사이로 병연이 끼어들었다.

“아직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신 듯하니. 안정될 때까지만 여기 계시도록 하는 건 어때? 숙의전에는 조금 있다 연락해도 괜찮을 것이야.”“……네, 김 형. 김 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잠시뿐입니다. 마음이 진정되시면 그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숙의마마께 가셔야 합니다.”라온이 다짐하듯 말하자 영온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맑아졌다.

아무리 귀하신 분이라 해도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금세 속내를 드러내며 말갛게 미소를 짓는 옹주를 보며 라온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하다는 듯 라온이 물었다.

“그런데 옹주마마, 마마께서는 사내를 무서워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영온 옹주는 병연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아침에 대신들을 보며 놀라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 이질감마저 일었다.

옹주는 병연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경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혹여 사내는 두려워하지만 김 형만은 예외? 그러고 보니 대들보 위에 나란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상당히 친근해 보였다.

“김 형, 예전부터 옹주님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병연이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영온 옹주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뭐지? 이 상반된 반응은?

라온의 눈매가 가늘게 여며졌다.

“김 형, 영온 옹주님께서는 뵌 적이 있다고 하시는데요.”그러나…….

힐끗 어린 옹주를 돌아보던 병연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 처음 뵀다.”저 단호하신 분 좀 보시게. 그걸 또 뭘 그리 딱 잘라 대답하십니까? 듣는 옹주마마 무안하시게.

“송구하오나, 옹주마마. 저기 계시는 김 형을 어디서 뵈었습니까?”영온이 라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린 소녀는 라온의 손바닥 위에 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홍 내관을 만나러 몇 번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네. 그때마다 홍 내관과 같이 있는 이분을 볼 수 있었지.>“아하, 그러셨습니까? 옹주마마께서 저를 찾아오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들어오지 않으시고 그냥 가신 것이옵니까?”<홍 내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네.>그리 밝게 웃는 웃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네. 나도 그리 밝게 웃고 싶다고, 그리 웃게 하여 달라고 떼쓰고 싶어질까 봐 차마 들어올 수가 없었네.

하고 싶었던 뒷말일랑은 속에 꾹꾹 누른 채 영온 옹주는 손글씨를 멈췄다.

라온은 아랫입술을 꾹 악물고 있는 영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옹주마마께서 원하실 때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라온은 작은 고사리 손을 힘껏 그러잡으며 말을 이었다.

“옹주님께서는 아직 어리십니다. 힘든 속내를 꾹꾹 누르며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참지 않으셔야 합니다.”라온의 말에 영온 옹주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 해사한 웃음이 천천히 꽃봉오리 피어나듯 피어났다.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옹주이기에 지켜야 할 법도와 규범이 많았다.

옹주마마, 이러지 마시옵소서. 옹주마마,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언제나 안 된다, 하지 마라, 하는 소리만 들어왔지, 해도 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힘든 속내를 꾹꾹 누르며 참지 않아도 된다고?

그 한 마디에 이상하게도 심장을 꽁꽁 매듭짓고 있던 단단한 끈이 툭 하고 끊어진 기분이었다.

어린 옹주는 한껏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웃음을 마주하며 함께 미소 짓던 라온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어둠을 응시했다.

옹주마마께서 여기 계시다고 빨리 알려드려야 할 텐데. 어쩌지? 그나저나, 사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시라면, 대체 아침에는 왜 그리하셨던 것일까?

문득 라온의 뇌리 속으로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영온 옹주께서는 부원군 김조순 대감과 그를 따르던 조정 대신들을 만나는 순간 전신을 바르르 떨며 두려워했다.

하여, 이곳에 나타난 옹주께서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하기에 당연히 사내들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병연과 함께 있음에도 영온 옹주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왜 이러시는 것일까?

사내를 두려워하시는 게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겁을 먹고 있는 계시는 거야? 혹여 아침에 만난 조정 대신 중에 옹주마마께서 무서워하는 분이 계셨던 건 아닐까?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리까지 하시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궁금증이 또 하나의 궁금증을 몰고 왔다.

그렇게 의문이 깊어질 때였다.

“홍 내관! 홍 내관! 홍 내관, 안에 있는가?”지붕이 들썩일 정도의 큰 목소리와 함께 자선당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거한의 사내가 안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

좌포도청의 종사관 최재우가 이곳 자선당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자신이 연모했던 의녀 월희가 라온에게 마음이 있는 줄 오해하여 찾은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자신의 오해였다.

라온과 대화하는 중에 오해도 풀고 여인에 대해 개미 눈곱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일을 기회로 의녀 월희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월희 의녀를 사모하노라고, 오래전부터 연모를 품었노라고.

그리하여 의녀 월희와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환관 홍라온과의 만남은 최재우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만남 중 하나로 꼽을 만큼 흡족한 일이었다.

하지만…… 월희와 마음을 주고받게 되었지만,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다음이 더 큰 문제였다.

그는 다급한 눈길로 방 안을 훑었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라온이 들어왔다.

“홍 내관!”최재우는 한달음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의논할 것이…….”말을 하던 그는 문득 라온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병연을 보고 흠칫 놀랐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병연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맞았던 관절 마디마디가 갑자기 쿡쿡 쑤셔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서던 최재우의 눈동자에 이번에는 영온 옹주의 모습이 맺혔다. 단순히 어린 소녀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기엔 입성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최재우가 조심스럽게 라온에게 물었다.

“이 분은…….”“옹주마마시옵니다.”라온의 대답에 최재우의 퉁방울만 한 눈이 더욱 커졌다.

“헉!”최재우는 바닥에 머리를 쿵 박으며 소리쳤다.

“좌포도청의 종사관 최재우, 옹주마마를 뵈옵나이다.”그 어마어마한 목청에 라온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옹주 마마께서 놀라겠습니다. 적당히 하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하얗게 경직된 얼굴로 최재우를 내려다보던 영온 옹주가 라온의 손바닥에 손글씨를 썼다.

<고개를 들라 하시게.>“고개를 들라 하십니다.”“제가 어찌 감히…….”<어허!>라온의 전하는 말에 최재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를 향해 라온이 물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각에 여긴 무슨 일입니까?”“그, 그저 안부 차…….”“정말입니까?”“정말일 리가 없잖아.”라온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은 병연이었다.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던 병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저 사내가 네 안부를 물으러 여기까지 왔겠어? 여기에 너를 찾아온 이유라면 뻔하지 않겠어?”순간, 라온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최재우에게 물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 것입니까?”“아, 아닐세.”“말씀해 보십시오. 혹시 월희 의녀님 때문에 그러십니까?”정곡의 찌르는 질문에 최재우의 입에서 곧장 휴 하고 긴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도대체 여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네. 대체 여인들은 어찌 그러는가? 어찌 그리…….”말을 하던 그가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영온 옹주의 눈치를 살폈다.

“송구하옵니다, 옹주마마. 소인이 감히 옹주마마 앞에서 불경스러운 말을 입에 올렸사옵니다.”귀하신 옹주마마 앞에서 일신의 사소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최재우와 달리, 영온 옹주는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고 하시게.>“옹주마마께서 개의치 마시고 하시던 말씀 그냥 하라고 하십니다.”“하지만…….”<어서!>“그러니까…… 그것이…….”옹주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던 최재우가 가슴을 두드리며 고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네.”“뭐가 그리 이해가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얼마 전, 중추절에 월희 의녀에게 달맞이를 함께 가자고 하였다네. 그랬더니 야밤에 여인이 외간 사내와 어울려 다녀서는 아니 된다 하질 않은가. 게다가 입고 나갈 옷도 변변치 않아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란 말일세.”“그래서요?”“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 그만두었지. 괜히 더 보챘다가는 월희 의녀를 곤란하게 만들까 싶기도 했고 말일세. 그랬더니 그 일로 나흘을 나와 말을 섞지 않는 것일세. 어디 그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하네.”“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요즘은 툭하면 마음이 변했다고 하니, 내가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단 말일세.”“무에 예전과 달라지신 것입니까?”“달라질 게 뭔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네.”“정말로 변한 것이 없으십니까?”라온의 물음에 최재우가 제 가슴을 소리 나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내 친우들이 나는 언제나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라고 엄지를 추켜세울 정도일세.”“그런데 월희 의녀님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그걸 모르겠단 말이네. 툭하면 토라지고, 이제는 마음이 식었다며 나를 몰아붙이니…… 휴우.”“혹시 화를 내거나 그러시진 않으셨겠지요?”“설마 내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변한 건 그쪽이지.”“월희 의녀님께서 변하셨다고요?”최재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암, 변했지. 내가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고 피하더니, 아예 당분간은 얼굴 보지 말고, 행여 궁에서 만나도 아는 체하지 말라고 하지 않겠나?”라온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혹시, 그 말을 하신 때가 중추절 이후입니까?”“그 다음 날이었네.”“그렇게 된 거로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난들 어쩔 수 있겠는가? 당분간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 하니,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있었지.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날 보고는 갑자기 원망하는 말을 쉼 없이 하질 않겠는가? 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말이야. 그래서 황당한 표정으로 이리 말했지.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그랬더니 입술을 이렇게…… 이렇게 내밀면서 찾아오지 말란다고 정말로 찾지 않느냐며 원망하더란 말일세.”라온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그렇게 되었군요.”“그 후로도 계속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니, 내가 복장이 터져서 살 수가 없네. 대체 월희 의녀가 왜 그러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무엇 때문에 자꾸만 말이 바뀌는가 말일세.”“요즘도 월희 의녀님과 만나십니까?”“얼굴을 못 본 지 벌써 보름째라네. 대체 언제가 되어야 날 다시 만나줄지 모르겠네.”“그 사이에 월희 의녀님을 찾아가보신 적은 있으시고요?”최재우가 고개를 저었다.

“날 보고 싶지 않다고 하니, 보고 싶어도 가지 못했지.”“월희 의녀님에 대한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니시지요?”“내가 왜 자네를 찾아왔겠는가? 이제나저제나 날 언제 불러줄까 기다리고 있네. 자네가 남의 애정사를 잘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어떤가? 내가 어떻게 해야 월희 의녀의 마음이 풀리겠는가?”최재우의 물음에 영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라온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저 사내는 정말 이유를 몰라 묻는 거야? 왜 당연한 걸 모르는 거지?>라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영온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사내들이란 대부분이 저렇답니다.”<정말?>“보시겠습니까?”라온이 병연을 돌아보았다.

“김 형, 월희 의녀께서 왜 그러는 것 같으십니까?”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병연이 결론을 냈다.

“아무래도 월희 의녀는 변덕이 심한 모양이다. 심술도 있는 듯하고. 그래서 저 사람을 놀리고 괴롭히며 즐기는 것 같다.”“왜 월희 의녀는 저분에게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했을까요?”“마음이 식은 것일 테지.”병연의 말에 최재우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역시. 역시 그런 것이었소? 아이고, 이를 어쩐단 말이오.”두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라온과 영온의 입가에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이 떠올랐다.

“왜 웃는 건가? 나는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네. 대체 월희 의녀는 무슨 생각을 이리 오래 하는 것인가? 혹여 나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 이제 내가 싫어지기라도 한 것일까?”최재우의 말에 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월희 의녀께서는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 종사관님을 좋아하셔서 그러는 것입니다.”“좋아해?”“네.”“좋아한다면서 어찌 그리 행동하는 겐가?”“아마도 월희 의녀께선 불안하신 것이 아닐까요?”“불안해? 뭐가 불안하단 말인가?”“종사관께서 예전과 다르시니 불안할 수밖에요.”“아까도 말하지 않았는가. 월희 의녀를 대하는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네.”“하지만 하시는 행동은 확실히 달라지셨습니다. 예전에는 싫다 하셨는데도 쫓아다니질 않으셨습니까?”“홍 내관이 말하지 않았는가? 여인이 싫다고 할 때는 정말 싫은 거라고.”“그 경우와 이 경우는 다르지요. 사실 월희 의녀께서도 중추절에 달맞이를 가고 싶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옷도 없고 해서 뒤로 미루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월희 의녀님은 달맞이를 위해 밤에 몰래 옷을 짓고 계셨을 겁니다.”“왜 굳이 옷을 짓는단 말인가?”“그만큼 함께 달맞이하는 것에 기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대하고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예뻐 보이고 싶으셨던 것이겠지요.”“그럼 왜 싫다고 한 겐가?”“겉으로는 싫다고 하시면서 속으로는 다르셨던 것이겠지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물어보십시오. 월희 의녀님은 틀림없이 새 옷을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기대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밤을 지새우며 새 옷을 짓고, 입어보고 뿌듯해했겠지요. 이 옷을 입고 종사관과 함께 달맞이할 생각으로 밤에 잠도 못 주무실 정도로 설렜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종사관께선 달맞이를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마, 안 하셨을 겁니다.”“분명 나한테 싫다고 했다니까.”“싫다는 말을 그리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면 어찌합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벌써 보름이나 말도 안 하고, 찾아가지도 않으셨으니…….”“월희 의녀가 당분간 찾아오지 말라 했단 말일세!”최재우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 말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찾아가지 않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자주 찾아가서 월희 의녀님의 마음을 달래주셔야지요.”“거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학문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여인일세.”고개를 푹 숙이는 최재우를 향해 라온이 다시 물었다.

“다툼이 있으시면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다툼이 있었던 후에도 월희 의녀님을 연모한다고 말한 적이 있으십니까?”“연모한다고? 그걸 꼭 말해야 아는가?”“설마, 말 안 하셨습니까?”“그걸 꼭 말해야 아는가? 내가 연모하지 않으면 왜 이러겠는가? 내가 미쳤다고 밤낮으로 쫓아다녔겠는가?”최재우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쾅쾅 쳐댔다.

“연모하는 마음을 수시로 말씀해 주십시오. 연모하는 그 마음을 자주 표현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표현하실 땐 길가의 작은 꽃이라도 하나 꺾어다 건네주세요.”“꽃? 그놈의 꽃. 갖다 주면 하루도 못 되어 시들어 버리는 것을 뭐 하러. 그게 사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 헛된 치장일세.” “여인은 작은 것에 감동하고 마음이 설레는 법입니다.”“했다니까요. 예전에 다 해본 짓거리라니까요.”“그러니까 말씀드리잖아요. 계속, 매일, 끊임없이 하십시오.”“어째서 그래야 하는가?”“확인받고 싶으니까요. 여인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고 싶어 한답니다.”최재우가 질렸다는 듯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인들은 왜 그러는 것인가? 수시로 확인? 한 번 이야기했으면 됐지. 어째서 수시로 다시 확인하고 싶은 거란 말인가? 뭔 의심병이라도 걸린 겐가? 대체 왜 그러는가 말일세.”“사내들은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인들은 사소한 부분에 감동하고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라온의 말에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병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라온의 손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 사이, 머릿속의 의문을 다소 해결한 최재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큰 도움이 됐네. 한번 해보겠네.”최재우는 커다란 머리를 영온에게 조아린 후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홍 내관님, 홍 내관님.”월희가 문을 삐쭉이 열고 자선당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다 마침 나가려던 최재우와 눈이 마주쳤다. 월희의 얼굴에 단박에 팽 토라진 표정이 떠올랐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월희 의녀님.”“아닙니다. 저는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엉거주춤하게 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재우 대신 라온이 서둘러 달려가 돌아서 나가려는 월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지금 가시면 앞으로 크게 후회하시게 될지도 모릅니다.”그 말에 잠시 망설이던 월희가 못 이기는 척 자선당으로 들어왔다.

***

자선당 방 안에 둥글게 둘러앉은 가운데 최재우와 의녀 월희의 토닥거림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분이 이렇다니까요. 됐어요, 이제 저한테 다시는 말도 붙이지 마세요.”앵돌아진 월희가 콧김을 뿜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일순, 최재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말 붙이지 말란다고 또 저렇게 입을 다무시니.

“달래주세요.”보다 못한 라온이 언질을 주자, 최재우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월희를 달래기 시작했다.

“저, 월희 의녀. 그리 화내지 말고 내 말 좀…….”“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아, 그러시오.”다시 착한 아이처럼 입을 다무는 최재우의 우직한 모습에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까지 나왔다.

저리도 단순하게 받아들이니 월희 의녀님과 매번 싸울 수밖에.

라온이 최재우에게 다시 눈짓했다. 최재우가 머뭇거리며 월희에게 말을 걸었다.

“월희 의녀. 내가 잘못했소.”“뭘 잘못하셨는데요?”“그러니까 그게…….”최재우가 어수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잘못했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정작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 보세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시고 계시잖아요.”“아닐세. 내가 잘못했네. 그러니까 뭘 잘못했느냐면…….”최재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잘못을 짜내려 안간힘을 썼고, 월희는 입술을 내민 채 그의 둔함을 원망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하하하.”라온의 바로 곁에 있던 영온 옹주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일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의 시선이 영온 옹주에게로 향했다.

“어? 영온 옹주님. 웃으셨습니까?”옹주마마께서 이리 큰 소리로 웃다니. 말을 더듬었던 영온은 사람들 앞에서는 좀처럼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특히 이리 큰 웃음소리를 들은 사람은 어쩌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이 유일할 것이다.

이 뜻밖의 일에 모두들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다.

“영, 영온아…….”언제 온 것일까?

열린 자선당 문밖에 숙의 박 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영온 옹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숙의마마.”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들의 인사를 받지 않은 채 박 숙의는 영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힐끗 눈치를 살피던 월희와 최재우는 조용히 자선당 밖으로 사라졌다.

내내 등 뒤를 지키던 병연 역시 어느새 자취를 감춘 채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라온과 영온뿐이었다. 영온을 향해 오 상궁을 대동한 박 숙의가 다가왔다.

“네가 가끔 이곳으로 발길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여 걸음을 하였는데…… 정말로 여기 있다니.”박 숙의가 영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만 가자꾸나.”그러나 영온 옹주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흔들었다.

“옹주마마. 자꾸만 왜 이러시옵니까? 저녁 내내 옹주마마를 찾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시옵니까? 쇤네 가슴이 다 녹아내리는 줄 알았사옵니다.”오 상궁이 채근하듯 말을 이었다.

“어서 가시옵소서. 숙의마마께서 얼마나 놀라셨는지 모르시옵니다. 가서 숙의마마를 위로해 주시어요.”“되었네. 그만두게.”“하오나…….”손을 들어 오 상궁의 입을 막은 박 숙의는 조용히 영온 옹주를 끌어안았다.

힘껏 끌어안으면 바스러질 듯 작고 여린 몸. 이 작은 아이가 무엇이 두려워 여기까지 숨어들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영온을 안고 있는 박 숙의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깃들었다.

“영온아, 아가. 이 어미가 어찌해 주면 좋겠느냐?”어미의 물음에 영온이 박 숙의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이 밤은 여기서 머물다 가겠사옵니다.>“여기서?”“말도 안 되옵니다.”오 상궁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옹주마마께서 밤을 보내신단 말이옵니까? 말도 안 되옵니다. 숙의마마, 절대 윤허하시면 아니 되어요.”오 상궁을 말없이 올려다보던 영온이 박 숙의의 손에 한 자 한 자 새겨 넣듯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어마마마, 저는 이곳이 마음에 드옵니다. 이곳에 있으면 오늘 밤은 사나운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아요.>“그래? 그렇단 말이더냐?”자상한 어미의 물음에 영온 옹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러려무나.”어미의 품에서도 얻지 못할 안식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면…….

잠시 망설이던 박 숙의가 흔쾌히 허락했다.

뒤에 서 있던 오 상궁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소용없었다. 박 숙의는 단호한 얼굴로 오 상궁을 자선당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라온에게 당부했다.

“이 아이,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자게 해 주게. 여기 있으면 사나운 꿈을 꾸지 않을 것 같다 하니. 자네가 그 곁을 지켜주게나.”“성심을 다해 옹주마마의 곁을 지키겠사옵니다.”“내, 자네만 믿을 것이네.”잠시 라온과 영온을 번갈아 보던 박 숙의는 그대로 무거운 걸음을 집복헌으로 옮겼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 눈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멀리서 산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지방 앞을 지키고 있던 영온 옹주의 유모는 아까부터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더니 급기야 벽 한쪽에 기댄 채 낮게 코까지 골았다.

어느새 야심한 시각이라.

라온은 영온 옹주를 돌아보았다.

“옹주마마, 누추하지만 누우십시오. 주무시는 데 큰 불편은 없을 것입니다.”해사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영온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런 영온의 머리맡에 라온이 자리 잡고 앉았다.

“저는 이곳에서 옹주마마를 지키겠습니다.”누워 있던 영온 옹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리 와 함께 자세나.>“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영온 옹주는 라온의 팔을 꼭 잡았다.

<홍 내관이 옆에 있어야 사나운 꿈을 꾸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어린아이 같은 투정.

라온은 영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홍 내관이 말하지 않았는가? 애써 참고 억누르지 말라고.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는 거라네. 나는 홍 내관이 옆에 누웠으면 좋겠어.>조르는 영온 옹주의 얼굴 위로 여동생 단희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그 아이도 이리 조르고는 했다. 언니와 함께 눕고 싶다고, 함께 얘기하며 잠들고 싶다고 말이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라온은 방 한구석에 잠들어 있는 유모상궁을 돌아보았다.

저리 잠들어 계시니 괜찮겠지?

“그럼…… 옹주마마께서 잠들 때까지만 옆에 누워있겠습니다.”라온의 말에 영온 옹주는 활짝 웃으면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내 따뜻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흡사 사이좋은 자매처럼 보였다.

라온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누워 있는 영온 옹주를 바라보았다. 말똥말똥, 두 눈을 반짝거리는 영온 옹주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잠이 안 오십니까?”끄덕끄덕.

“밤이 늦었습니다. 어서 주무셔야지요.”‘…….’“제가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영온 옹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옹주의 귓가로 라온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파고들었다.

살랑, 살랑 흔들바람아.

우리 아가 머리맡에 머물러 다오.

어디든 갈 수 있는 흔들바람아.

우리 아가 잠이 들면 하늘 꽃밭으로 데려다 다오.

살랑, 살랑 흔들바람아.

내 님 곁에 머물러 다오.

서러운 붉은 돛, 외로운 노을 길, 홀로 떠나는 내님

아프지 마라, 서러워 마라 속삭여다오.

쉬이쉬이 흔들바람.

하늘 정원 맴을 도니.

우리 아가, 고운 아가, 잠이 드네, 꿈을 꾸네.

쉬이쉬이 흔들바람.

바람길, 구름길 따라 흐르니

어여쁜 내 님, 무정한 내 님, 웃음 짓네, 웃고 있네.

살랑, 살랑 흔들바람아.

내일이면 사라질 바람아.

우리 아가 머리맡에 머물러 다오.

내 님 곁에 머물러 다오.

***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귓가를 간질이던 라온의 노랫소리는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온 옹주를 위한 자장가였건만, 그 자장가에 라온마저 잠이 들었는가 보다.

조용한 방 안엔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행여 제 발걸음 소리에 깰까 조심하며 대들보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병연은 문득 잠든 라온을 돌아보았다.

하얀 달빛이 녹아내린 라온의 얼굴은 천상의 선녀인 양 아름답게 느껴졌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까닭일까? 문득 지금 바라보고 있는 라온이 하룻밤의 꿈인 듯 느껴졌다.

손대면 사라져버릴 신기루처럼 너무도 아름답고 아득하여 가슴이 뛰었다.

‘연모하는 마음을 수시로 말씀해 주십시오. 연모하는 그 마음을 자주 표현해 주셔야 합니다.’라온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맴 맴돌았다.

병연이 돌연 몸을 돌렸다. 그는 잠들어 있는 라온의 머리맡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이윽고 병연의 입술이 잠든 라온의 이마 위에 살포시 닿았다.

은빛 나비가 날아들 듯 가벼이 맞닿은 입술은 무형의 표식을 라온의 이마에 새겼다. 그리고 그것은 병연의 심장에 아로새겨졌다.

연모한다, 연모한다, 연모한다, 연모한다…….

소리 없는 외침이 전신을 가득 메웠다.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을 주술처럼 곱씹으며 병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새카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잠들지 않은 영온 옹주가 그를 향해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영온 옹주와 눈이 마주친 병연은 천천히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비밀.

굳이 말하지 않음에도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

영온 옹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병연은 입가에 긴 미소가 드리운 채 대들보 위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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