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66화 (66/131)

66. 세자저하께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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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 밝았다.

자선당 지붕 위로 황금빛 태양이 길게 드리워졌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초겨울의 차갑지만 청량한 기운을 품은 공기까지. 모든 것이 다른 날과 다름이 없었다.

단 하나.

갑자기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 성 내관 덕에 예전보다 여유를 갖게 된 것만 빼면 말이다.

라온이 느긋해진 아침을 만끽하며, 댓돌 위에 간잔지런하게 놓인 신을 신었다. 막 밖으로 나서려는데 자선당 마당 쪽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밖을 보니 엇갈려진 대문 틈 사이로 빼꼼하게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보였다.

검은 사슴처럼 순한 새카만 눈동자.

“누구십니까?”낯설지 않은 눈빛에 라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훔쳐보던 시선이 달아나듯 사라졌다. 가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작은 소녀가 두 손으로 끙끙 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영온 옹주님.”그녀의 부름에 영온이 배시시 수줍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영온 옹주는 지금의 주상전하와 숙의 박씨 사이에 태어난 옹주였다.

라온은 숙의전에서 주상전하와 숙의마마를 오가던 글월비자 노릇을 하던 것을 인연으로 영온 옹주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곳엔 어인 걸음이십니까?”느닷없는 영온 옹주의 방문에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자선당 담벼락 너머로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옹주마마, 옹주마마, 어디에 계시옵니까?”영온 옹주를 찾는 궁녀들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자 영온 옹주는 라온을 끌고 자선당 안쪽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

“옹주마마, 왜 그러시옵니까? 저이들, 옹주마마를 찾는 것이 아니옵니까? 저이들에게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심상치 않은 옹주의 모습에 라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영온 옹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때, 자선당 안쪽으로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궁녀들이 들어왔다.

“이보시게, 여기 혹시……. 아이고, 옹주마마. 여기 계셨사옵니까?”박 숙의 처소의 오 상궁은 한달음에 영온 옹주에게로 다가왔다.

“어찌 여기 계시는 것이옵니까? 숙의마마께서 얼마나 걱정하신 줄 아시어요?”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오 상궁은 손을 들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 잠시 심호흡을 하던 그녀는 영온의 팔을 잡았다.

“옹주마마, 어서 가시어요. 숙의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그러나 어쩐 일인지 영온 옹주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 팔을 잡고 있는 오 상궁의 손을 야멸치게 뿌리치며 라온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옹주마마. 왜 그러시어요.”오 상궁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영온 옹주는 라온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연신 체머리를 흔들며 제 의지를 온몸으로 피력했다.

“어찌 이러실까? 자꾸 이러시면 소인들이 숙의마마께 혼찌검이 난단 말이옵니다. 그러니 그만 가시어요.”오 상궁을 비롯한 궁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속상한 얼굴을 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온은 영온 옹주와 궁녀들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오 상궁에게 말했다.

“먼저 가 계십시오. 옹주마마는 소인이 모시고 가겠사옵니다.”“아니, 그럴 수는 없네.”“이리 아니 가시겠다는데. 억지로 끌고 가실 수는 없질 않겠습니까?”“그래도…….”오 상궁은 말끝을 흐리며 라온의 뒤에 숨어 있는 영온 옹주를 건너보았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함세.”그 말을 끝으로 오 상궁과 궁녀들은 자선당 밖으로 사라졌다.

왁자했던 마당에 금세 정적이 찾아들었다.

라온은 무릎을 굽혀 옹주와 시선을 맞췄다.

“왜 그러십니까? 혹여 경빈 마마께 야단이라도 들으신 것이옵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온 옹주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껏 아랫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옹주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라온은 바르르 떨고 있는 영온 옹주의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숙의마마께서 찾으신다 하시니, 가보셔야지요.”“…….”영온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애먼 발끝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어린 소녀를 향해 라온이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인이 함께 가겠습니다.”라온의 말에 영온 옹주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영온 옹주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박 숙의의 거처인 집복헌으로 가는 동안 영온 옹주는 단 한시도 라온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손에 땀이 차도록 잡고 또 잡았다.

라온은 그런 영온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부러 먼 길을 돌아 집복헌으로 향했다.

괜스레 농담을 늘어놓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린 옹주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집복헌의 진분홍빛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온은 영온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두려워하던 기색도 옅어졌고, 잔뜩 긴장하던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이제 다 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실 수 있으시지요?”라온의 물음에 영온 옹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인이 여기서 옹주마마 들어가시는 것을 지켜보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들어가시옵소서.”라온이 영온의 등을 떠밀었다.

고개를 끄덕인 영온이 말간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가벼운 걸음으로 몇 발짝 옮기기도 전.

영온 옹주의 몸짓이 우뚝 멈췄다. 걸음을 옮기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옹주는 놀란 눈으로 라온을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라온이 단박에 영온 옹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옹주의 시선을 좇아 눈을 돌렸다.

옹주의 눈길이 닿아 있는 그곳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부원군 김조순과 그를 쫓는 조정 대신들이었다.

일순, 영온 옹주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옹주마마.”놀란 라온은 영온 옹주의 손을 세게 잡쥐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세요?

그사이, 두 사람의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긴 수염을 길게 드리운 붉은 관복 차림의 김조순이었다.

“허허, 이게 뉘십니까? 영온 옹주님이 아니십니까? 오늘 두 번이나 뵙는군요. 아깐 제대로 얼굴을 뵙지 못해 섭섭하던 차였는데. 이리 만나다니. 잘 되었습니다. 허허허.”한껏 웃으며 반가워하는 김조순과는 달리 어린 옹주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동그란 이마 가득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애처로웠다.

그 모습을 꿰뚫어버리는 듯한 눈길로 응시하던 김조순이 이번에는 시선을 들어 라온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홍 내관이로군.”“네. 그렇습니다.”라온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라? 이 지체 높으신 분께서 나를 어찌 아실까?

“자네에 대해서는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지. 내 자네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네. 허허허.”의미심장한 눈길로 라온과 영온 옹주를 번갈아 보던 김조순의 입가에 예의 미소가 걸렸다.

“그럼 이 늙은이는 그만 가봐야겠군. 옹주마마, 일간 다시 찾아뵙지요.”말을 마친 김조순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대신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라? 저 미소, 낯설지가 않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라온은 서둘러 눈을 내려 영온 옹주의 상태를 살폈다.

옹주는 좀처럼 몸의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옹주마마, 왜 그러십니까? 뭐가 그리 두려운 것입니까?”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어린 옹주는 입술을 조가비처럼 딱 다문 채 라온을 끌어안았다. 라온의 품속 가득 어린 소녀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옹주마마…….”무엇이 이리 옹주마마를 두렵게 하는 것입니까? 대체 무엇이…….

라온은 영온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어린 옹주의 몸이 떨리지 않도록, 그 어떤 것도 감히 옹주에게 범접하지 못하도록 있는 힘껏 감싸 안았다.

***

“옹주마마,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집복헌의 솟을대문 앞에 선 라온은 영온 옹주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걸음을 옮기다 뒤돌아보니 영온 옹주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라온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어가시옵소서.”그리 서 계시면 마음이 쓰여 갈 수가 없질 않습니까. 안쓰러워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영온 옹주께서 원하시는 만큼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게다가 옹주마마를 집복헌까지 모시느라 이미 늦을 대로 늦은 터였다.

라온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옮겼다.

대체 영온 옹주께선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신 걸까?

문득, 영온 옹주가 조정 대신들을 보고 놀란 표정이 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혹, 관인들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낯선 사내? 부끄러움이 많으신 걸까?

그렇지만 좀 전의 그 표정은 분명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었다. 존귀하신 옹주마마께서 무에가 두려워서.

영온 옹주에 대한 생각으로 깊은 상념에 빠진 라온이 동궁전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이제 오는 게냐?”카랑한 목소리가 라온의 바쁜 걸음을 붙잡아 세웠다.

이 날카롭고 무람없이 기세 좋은 여인의 목소리는…….

“소양 공주님.”“그래, 나야.”소양 공주의 특유의 오만 도도한 표정을 한 채로 라온에게로 다가왔다.

“여긴 어인 일이신지요?”“어인 일이겠느냐? 당연히 널 만나러 온 것이지.”“아, 그러셨습니까?”“그보다 너, 내시 주제에 이리 늦어도 되는 것이야? 해가 중천에 떴질 않느냐.”라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진시말(辰時末:아침 9시). 햇살은 담벼락을 겨우 넘어가는 중이었다.

덩달아 하늘로 시선을 보내던 소양이 왈칵 미간을 찡그렸다.

“어찌 되었든, 네가 늦어서 내가 이곳에서 한참을 기다렸지 않느냐?”소양 공주의 억지스러운 말에도 라온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이하여 소인을 기다리셨는지요?”“몰라 물어? 내가 일을 시킨 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느냐?”그러고 보니 소양 공주께서 화초저하의 취향과 특이사항을 알아오라 했었다. 워낙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것이…….”말끝을 흐리는 라온을 향해 소양이 눈을 흘겼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네 하는 짓이 하도 답답해 내가 미리 준비하길 다행이지. 그대로 두었다간 해를 훌쩍 넘기겠구나. 자, 이거 받아라.”마뜩찮은 표정을 짓던 소양 공주가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라온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네게 해야 할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적힌 것을 조사해 내게 가져오너라.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내 처소로 가져와야 할 것이야.”말을 마친 소양 공주는 대답도 듣지 않고 예의 도도한 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를 향해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라온은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해야 할 일? 대체 그게 뭐야?”작게 중얼거리며 서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자저하께서 좋아하시는 색은 무엇인가?”팔랑 뒷장을 넘겼다.

“세자저하께서 특별히 즐겨 찾으시는 장소는 어디인가?”다음 장.

“세자저하께서 좋아하시는 계절은? 세자저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은? 세자저하께서 즐기시는 악기는 무엇이며 좋아하는 곡조는 또 무엇인가? 세자저하께서…….”맙소사, 이걸 한 권씩이나 쓰신 거야?

라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양 공주가 사라진 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군.

이제는 정말 존경스럽기까지 하네.

***

짙은 땅거미가 영의 처소 안으로 슬금슬금 파고들었다.

바쁜 일과를 마친 영은 하루 중 가장 한산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는 이제는 숫제 동궁전의 붙박이 환관이 되다시피 한 라온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온은 서안 앞에 앉아있는 영을 연신 곁눈질하며 소맷자락에 넣어둔 서책을 만지작거렸다.

온종일, 그녀는 언제쯤이면 서책 안의 질문을 할 수 있는가, 그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도와주겠다고 한 이상 모른 척 저버릴 수도 없었다.

사실 자신도 궁금했던 터였다.

지금까지 영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정작 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계절은 무엇인지. 평소 어떤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취향의 여인을 좋아하시는지…….

이상하게도 자꾸만 영에 대해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지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제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한 채 라온은 ‘이건 일이다, 이건 이이야.’를 되새김질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이 서책을 채워서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어찌 말머리를 꺼내 놓아야 하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흠흠 어색한 헛기침을 흘렸다.

“무엇이냐?”상소에 주석을 달던 영이 붓을 내려놓고 라온을 돌아보았다.

“왜 종일 사람을 곁눈질하는 것이냐?”“곁눈질은 누가 곁눈질을 했다고 그러십니까?”“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말해 봐.”빙글 눈동자를 돌리던 라온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앞으로 다가섰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도 되겠습니까?”“물어봐라.”드디어 내게 궁금한 것이 생겼단 말이지?

영이 팔짱을 낀 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었는데 말입니다.”“뭐냐?”라온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침 적당한 것을 발견하고는 눈빛을 빛냈다.

“이 책장 위에 놓인 이 화병,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이 화병을 평소 애지중지 아끼시는 것을 보니, 저하께선 푸른색을 좋아하시는가 봅니다.”“…….”“그리고 이 격자무늬 창, 이 격자무늬 창을 수시로 보시는 걸 보니, 이런 격자무늬를 좋아하십니까? 그리고…….”아, 또 무슨 질문이 있더라?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던 라온은 소맷자락에서 서책을 슬그머니 꺼냈다. 그러고는 영에게 들키지 않도록 외로 몸을 돌린 채 책장을 넘기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등 뒤로 바싹 다가온 영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소양 공주가 시킨 것이냐?”단박에 사태를 파악하고 묻는 그의 질문에 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옵니다.”무서우신 화초저하. 속을 꿰뚫어보고 계셔.

영은 순식간에 라온의 손에 들려있던 서책을 낚아채가 버렸다.

“어디 보자.”영의 손끝에서 책장이 팔랑거리며 빠르게 넘어갔다.

잠시 후.

순식간에 휘리릭 서책을 훑어 본 영이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푸른색보단 붉은색이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이 좋고, 아침 시간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꽃은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가을에 피는 국화를 좋아한다. 또한, 격자무늬 창을 좋아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광경을 좋아해 수시로 눈길을 주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헉, 그 짧은 사이에 그 질문을 다 외우신 겁니까? 아니, 그보다…….

“잠시만요! 그렇게 빨리 말씀하시면 제가 적을 수가 없질 않습니까?”라온은 허둥대며 휴대용 붓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영의 손에 그 붓을 빼앗기고 말았다.

“되었다.”“하오나…….”“이 서책의 질문들, 내 보기엔 하등 쓸모없는 질문들뿐이다. 다만, 마지막 질문은 마음에 들고, 제대로 답해주고 싶구나.”“마지막 질문이라시면?”서둘러 책장을 넘긴 라온이 서책에 쓰인 글귀를 읽어내려갔다.

“세자저하께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영은 라온을 자신을 향하도록 돌아 세웠다.

“왜, 왜 이러십니까?”라온의 얼굴 위로 영이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헛!”이것은 혹시 입맞춤의 자세?

라온은 거의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물러선 만큼 영이 다가왔다.

그렇게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나는 팽팽한 접점이 계속되는 가운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앗!”등 뒤에 차가운 벽이 닿는 순간, 라온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영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라.

어찌해야 한다?

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서둘러 양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이리하면 화초저하께서 입맞춤하지 못하시겠지.

그러나…….

“어디,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은근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던 영이 불현듯 라온의 팔을 잡쥐었다.

그러고는 한 손에 하나씩, 영은 라온의 손을 깍지 낀 채 차가운 벽에 못 박아 버리듯 바싹 붙여버렸다.

강제적으로 양팔을 활짝 벌리게 된 라온은 그야말로 만개한 꽃처럼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왜 이러십니까?”“내가 왜 이러는 것 같으냐?”“화초저하, 이러지 마십시오. 저하께선 군자가 아니십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란 무릇 도를 넘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된다 하셨습니다.”“네 할아버지께서 다른 것은 아니 가르쳐주셨는가 보구나. 군자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에 연모를 품었을 땐 그 누구라도 한낱 사내이길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영이 천천히 라온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 이리하는 것은 도를 넘는 행동이 아니라,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니라.”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은 그대로 라온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갰다.

“안 됩니……읍.”벌린 입 안으로 그의 혀끝이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왔다. 아릿하게 잇속을 두드리는 감촉에 라온의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둘러 나른하게 풀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연신 달콤한 날숨을 내뿜는 영의 숨결을 피해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말했다.

“세자저하…….”“아직도 할 말이 있느냐?”“이러시면 아니……읍.”그러나 말을 하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사납게 제 입 안을 희롱하는 붉은 불꽃에 머릿속이 아득했다.

부릅뜨고 있던 라온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팽팽하던 신경이 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봄눈처럼 녹아내리고 싶었다.

영의 날숨과 라온의 들숨이 한데로 뒤엉켰다. 그렇게 아득하고 아련한 시간이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람없이 라온의 입술을 범하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물러갔다. 그녀를 압박하던 숨결도 조금은 멀어졌다.

“이젠 할 말이 없느냐?”눈을 감고 있는 라온의 귓가에 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라온은 어린아이처럼 작게 도리질을 했다.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어찌하여?”“제가 입을 열 때마다 저하께서 그 입으로 제 입을 봉하시질 않으십니까?”“그래? 그럼 너도 더는 싫다는 것이 아니렷다?”“네?”그게 또 그렇게 해석됩니까?

영의 말에 라온이 두 눈을 반짝하고 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라온을 향한 영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

해시(亥時: 밤 9시) 무렵.

동궁전을 나서는 라온의 두 뺨에 붉은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처소 앞을 지키던 최 내관이 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며 라온을 애써 외면했다. 그 외면이 되레 부끄러워 라온은 발끝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에도 얼굴에 피어난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영의 입술이 닿았던 그녀의 입술에선 두근대는 맥이 잡혔다.

문풍지 위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책장을 넘기는 영의 그림자가 어룽거렸다.

마음에 품은 사람을 대하는 당연한 도리라는 이유로 영은 그녀에게 입맞춤하길 서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막상 그 숨결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앞에서는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좋았다.

이상하게 온몸이 느른해지고 심장이 미친 듯 날뛰었다.

대체 이게 무슨 감정일까?

가슴 아릿한 연모란 것이 이런 것이려나?

일평생을 사내처럼 살아왔기에 당연히 이런 일 앞에서도 사내처럼 대범해질 줄 알았다.

아니, 일평생 누구와 연모하는 일 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보고 싶어지고, 같은 공간에 함께 있고 싶어진다.

그의 입맞춤에 가슴이 설레고, 바라보는 눈빛에 손끝으로 발끝으로 저릿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이리 마음 포근해지는,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하루에도 열두 번 세상이 뒤바뀌어 보이는 것이 바로…… 연모라는 감정이구나.

또한, 이리 아릿한 감정이 되는 것 역시 연모로구나.

수줍은 미소가 피어오르던 라온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라온은 버릇처럼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문 닫힌 영의 처소를 돌아보았다. 저 안에서 일어난 일일랑은 하룻밤의 꿈인 듯 언제나 아련하고 아득했다.

행복하다. 화초저하의 짓궂은 장난에 자꾸만 잊어버리고 말았던 여인의 마음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 행복은 모래 위에 쌓아올린 것처럼 불안하기만 하였다.

손에 잡히지 않는 나비처럼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를 불안한 행복.

행복하지만 온전히 행복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화초저하께서 마음에 품은 것은 여인 홍라온이 아니라 환관 홍라온이기에 서글펐다.

아니, 어쩌면 그분께서는 내가 여인임을 알고도 받아주실지도 모른다. 예전에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내가 사내든 여인이든 상관없다고.

아니, 아니다. 그건 어쩌면 그저 날 탐하고 취하기 위해 그리 말씀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헛된 약속에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자꾸만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애초에 닿을 수 없는 인연.

그분께서 다가오셔도 나는 물러나야 하니, 그분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고, 연정을 품게 되었음에도 마음을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이 행복하고도 슬펐다.

차라리 이곳을 떠날까?

이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저분 곁을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리되면 우리 세 식구,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한다.

나 혼자의 몸이라면 도망자가 아니라 더한 것도 상관없다. 그러나 단희와 어머니까지 다시 그 신세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나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불쌍하신 어머니와 간신히 건강을 찾은 단희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이곳이 정말 좋아졌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즐겁고 행복해질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니.

아마도 못난 욕심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여인의 삶을 꿈꾸는 나의 헛된 욕심 때문에 자꾸만 가슴 한쪽이 아파왔다.

무거운 마음 때문일까?

옮기는 발끝에 천근의 추가 달린 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터벅터벅 힘없이 자선당을 향해 걷고 있노라니, 불을 환히 밝힌 궁인들이 궁궐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옹주마마. 옹주마마.”궁인들의 다급한 음성에 라온이 근처에 있는 궁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옹주마마께서 사라지셨어요. 오전까지 집복헌에 계셨는데, 낮것을 드신 이후로는 영 보이질 않으십니다.”“……!”라온의 뇌리로 영온 옹주의 커다란 두 눈이 떠올랐다.

두려움에 가득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그 떨림이 생각나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 자선당엔 가 보셨습니까? 아침에 그곳으로 걸음 하셨는데요.”때마침 곁을 지나던 오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이미 찾아보았다네. 그러나 없다네.”“그럼 대체 어딜 가신 걸까요? 옹주마마, 영온 옹주님.”불을 밝힌 궁인들과 함께 라온은 궁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진이 지났건만, 결국 영온 옹주를 찾을 수는 없었다.

***

“어딜 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것이냐?힘없이 처소 안으로 들어서니 대들보 위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마십시오. 지금 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왜?”“영온 옹주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영온 옹주?”“네. 어리신 옹주마마께서 대체 어디로 가신 것인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길게 한숨을 쉬는 라온의 정수리 위로 병연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영온 옹주라면…… 여기 계신다.”“네. 여기 계셨으면 좋겠습니……네? 옹주마마께서 어디에 계시다고요?”라온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병연과 나란히 앉아 있던 영온이 그녀를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일순, 라온의 표정이 멍해졌다.

“옹주마마…….”왜 거기 계시옵니까? 그런데 김 형과 아주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계시네요? 사내를 두려워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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