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이 행복이 영원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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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6
천장이 높아졌다가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한순간 몸이 덜렁 허공에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진다.
“으으…….”라온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술기운 때문인가? 일렁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
그때, 라온의 왼편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자꾸 이럴 거야?”동시에 붕 허공으로 다시 몸이 올라갔다.
“너야말로 이럴 것이냐?”오른편에서 들려오는 영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들려졌던 라온의 몸은 다시 바닥에 얌전히 눕혀졌다.
라온이 정신을 잃은 사이, 그녀를 사이에 두고 영과 병연 사이에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지루한 신경전의 원인이 자신인 줄은 까맣게 알지 못한 라온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양보하십시오. 두 분은 벗이 아닙니까. 벗에게 양보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술기운이 가득 배어 있는 혓소리를 내며 라온이 충고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영과 병연이 동시에 소리쳤다.
“절대 양보 못 해.”“넌 그냥 잠이나 계속 자.”귓전을 두드리는 소리에 라온은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감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들이란.
어쩜 이리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구는 것인지.
쯧쯧, 낮게 혀를 차던 그녀는 이내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지켜보던 영이 맞은편에 있는 병연을 향해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이냐? 이 녀석 말대로 네가 양보해라.”병연이 어림없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저하가 그만둔다면 나 역시 그만두지.”“고집불통 녀석.”“저하 역시 만만치 않아.”좀처럼 끝나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에 결국 두 사람이 선택한 방법은 그 자리에 라온을 눕히고 베개와 이불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공방전이 끝난 후.
두 사내는 이번엔 라온을 사이에 두고 장승처럼 버티고 앉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병연이 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이 녀석, 이대로 쭉 잘 것 같으니. 저하,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글쎄. 오늘 나도 술기운이 있고 하여. 예서 하룻밤 보낼까 하는데.”“저하께서 그리 계시면 내가 잘 수가 없어. 그러니 그만 가시지?”“나는 그냥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자도록 해라.”“그리 생각하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커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러니 저하의 처소로 그만 돌아가시지?”“싫다 하였다.”“저하! 여기 저하께서 잘 데가 어디에 있다고 그리 고집을 부리는 거야?”“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일랑은 하지 말고 저 대들보 위로 올라가. 난 여기서 자면 되니까.”“여기서?”“그래. 여기서 이러고 자면 돼.”앉은 채로 자겠다고 고집하는 영의 말에 병연은 어이가 없었다.
“몰랐군. 저하께서 앉아서 주무시는 요상한 버릇이 있는 줄은.”“네가 모르는 버릇이 몇 개 더 있다. 허니, 너는 아무 신경 쓰지 말고 올라가.”“아직 저하께서 모르시는가 보군. 요즘엔 나도 이따금 바닥에서 자기도 해.”병연의 말에 영의 한쪽 눈썹이 히끗, 위로 치켜 올라갔다.
“설마, 이 녀석과 함께 잔다는 거야?”“…….”영이 뚫어져라 병연을 노려보았다.
병연 역시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할 때였다.
“으으으으. 무우우울. 무우우울.”라온이 잠결에 마른입을 다시며 잠꼬대를 했다.
“물?”영이 재차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법 잰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이미 그 순간, 병연은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다시 나타난 병연의 손에 물그릇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영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심한 병연의 얼굴에 승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불끈, 주먹을 쥐며 영은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아, 추워.”덮고 있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라온이 말했다. 덮고 있는 이불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영은 라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 옷을 벗어 그녀를 덮어주었다.
“따뜻해.”고양이처럼 옷 속을 파고든 라온이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 모습에 영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이번에는 병연이 선수를 빼앗겨 분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말없이 서로 바라보던 둘의 얼굴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핏,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떤 신분이나 격식도 존재하는 순수한 표정.
그것은 어린 시절에나 지을 법했던 그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 * *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라온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한 시진이 흐른 뒤였다.
그때까지도 영과 병연은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라온은 비칠비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어찌 된 것입니까?”“정신을 잃었다. 술 한 잔에.”“아…… 제가 또 그랬습니까?”라온이 황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예전에 마셨던 벽향주는 제법 독한 술이라. 그래서 고작 한 잔에 의식을 잃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닌가 보다. 그냥 자신은 술이 약한 것이었다.
“다시는 술 마시지 마라.”영의 걱정 어린 지청구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송합니다.”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던 라온이 서안 위에 놓인 술병을 건너다보았다.
“술은 다 드신 것입니까? 아직 남았으면 다시 술잔을 나누는 것이…….”“되었다.”“네?”“오늘은 그만…….”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문득 문밖에 왁자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홍 내관! 홍 내관! 안에 있소?”다급한 부름과 함께 장 내관이 티끌 없이 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히끅!”별안간 나타난 영의 모습에 장 내관이 놀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홍 내관 없어?”주춤주춤 물러서는 장 내관을 제치고 당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 다름 아닌 명온 공주였다.
그녀가 자선당 안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 영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오라버니 저하. 여기서 뭐 하시는 것이옵니까?”“그러는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냐?”“궁금한 것이 있어서요.”“궁금한 것?”바로 그때.
“세자저하?”이번에는 명온의 등 뒤에서 소양 공주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의 난입에 영과 병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뭐가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밝은 날 다시 오려무나.”말과 함께 영은 처소 문을 야멸치게 닫았다.
저들과 엮이면 오랜만의 오붓한 만남이 어그러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리 오신 분들을 내쫓으시면 어찌합니까?”그러나 속내를 알지 못한 라온이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이윽고, 문을 활짝 열어젖힌 라온이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날이 춥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온이 제일 먼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라버니 저하.”명온이 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뒤를 소양 공주가 뒤따라 들어왔다.
“세자저하.”맨 끝으로 장 내관이 야무진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소인 장 내관, 세자저하를 뵙사옵니다.”
* * *
자선당이 간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좁은 실내에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은 어찌 된 이유에선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장 내관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라온이 장 내관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자선당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 말이오.”“네. 그것은 왜요?”“우연히 공주마마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내게 묻는 게 아니겠소? 자선당에 귀신이 나온다 하던데 홍 내관이 괜찮으냐 물으시더군요.”“그래서요?”“내가 걱정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아뢰었지요. 귀신도 천하의 홍 내관을 어찌할 수 없다고. 이미 홍 내관이 퇴치했노라고 말씀 올렸지요. 그리하였더니, 직접 보고 싶다 하시어…….”이제 보니 한밤중에 두 분의 공주마마들께서 몰려오게 된 사건의 원흉이 이 양반이었군.
“장 내관의 말이 사실이냐? 정말 네가 귀신을 본 것이야?”명온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라온을 돌아보며 물었다.
라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좌측에 앉은 영을 올려다보았다.
화초저하, 어찌 좀 해 보십시오.
라온의 좌측엔 영이, 그리고 우측엔 명온 공주가 바싹 붙어 있다. 두 남매의 사이에 앉은 라온은 차가운 날씨임에도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말해보아라. 너 정말 귀신을 본 것이야?”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명온이 물었다.
하지만 진실로 그녀가 궁금한 것은 귀신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실은 라온이 보고 싶고, 궁금하여 핑계를 대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 속내를 읽은 라온이 입가를 길게 늘였다.
지금 자신이 명온 공주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다정히 대해 주는 것뿐이었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사람? 하지만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글피 울었다던데.”“그것이…….”라온은 월희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영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명온은 눈빛을 빛내며 이야기를 하는 라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명온의 옆자리에 앉은 소양 공주는 연신 영을 힐끔대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세자저하께서는 그 표정에 어린 수줍은 기색마저도 읽어내지 못하셨다.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끝나지 않았다.
“정말이야? 그럼 이 자선당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은 다 거짓이야?”“네. 지금껏 자선당에 머물렀지만, 귀신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사옵니다.”라온의 대답에 명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 역시도 귀신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지.”“그래? 하지만 내게 자선당의 귀신 이야기를 들려준 건 다름 아닌 명온 공주, 바로 너였는걸.”소양 공주가 끼어들었다.
“내가? 언제?”“어머? 시치미 떼는 거야?”“시치미라니. 조선의 여인은 그런 거 할 줄 몰라.”“그럼 대국의 여인들은 그런 거 할 줄 안다는 말이야?”토닥거리는 명온 공주와 소양 공주의 모습이 친자매인 듯 다정해 보였다.
라온은 환한 얼굴로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영의 주위를 맴맴 맴돌며 연신 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는 장 내관도, 그림자처럼 라온의 뒤를 지키고 있는 병연도,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따뜻한 체온을 나눠주는 영도 모두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라온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행복해.
심장이 녹아내릴 듯한 행복함이었다.
하늘님, 이 행복이 영원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히 깨지지 않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리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 *
희붐한 새벽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김조순의 부름을 받은 윤성은 조부가 있는 사랑채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은은한 먹향이 가득했다.
밤을 지새웠는지, 할아버지의 앞에는 잉어를 그린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눈을 그려 넣지 않은 완성되지 못한 그림들이다.
스치는 듯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보던 윤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김조순을 불렀다.
“할아버님.”윤성이 들어왔음에도 김조순은 여전히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조부를 향해 윤성은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다시 고개를 드는 그의 정수리 위로 김조순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지난번에 보니 네게 무슨 계획이 있는 듯하던데.”앞뒤 부연설명이 붙지 않아도 무덕에게 납치되었던 일을 뜻함을 알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연루되어 일이 틀어졌습니다.”휙, 날렵한 붓놀림으로 잉어의 지느러미를 그리며 김조순이 말했다.
“그래? 참으로 이상하구나. 너답지 않게 실수를 다하는구나.”“사실 그 일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사옵니다.”“문제? 무슨 일이냐?”“일전에 찾았다고 말씀드렸던 사람이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일순, 붓이 멈췄다.
김조순이 고개를 들어 윤성을 응시했다.
영혼까지 속속들이 파헤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그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조부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채 윤성이 대답했다.
“네. 잘못 알았사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여, 다시 찾으라 명을 내렸습니다.”윤성의 얼굴에는 예의 가면 같은 미소가 가득했다.
물끄러미 그 미소를 바라보던 부원군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겠구나?”붓에 먹물을 묻히며 김조순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리 될 것 같습니다. 송구하옵니다.”“알았느니. 그만 물러가라.”그리던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김조순은 손자를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윤성이 허허로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탁!
방문이 닫혔다.
이내 문풍지 위로 그려지는 그림자가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김조순이 그림을 한옆으로 밀쳐냈다.
“아무래도 새 그림을 그려야겠군.”새하얀 종이를 다시 펼친 그는 조용하지만, 위험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엔 눈부터 그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