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홍라온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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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3
자선당 동쪽 누각의 지붕 위로 유백색의 달빛이 부서졌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분분히 흩어졌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듯 귀밑 자분치를 흔드는 바람은 부쩍 차가워졌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몸서리를 치며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갔으련만. 병연은 누각 마루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놓인 하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눈 한번 깜빡거리면 사라져버릴 듯한 신기루와 마주한 듯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새하얀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종이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붓을 집어 들었다.
붓두껍을 연 채로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던 그가 드디어 붓끝에 먹물을 묻혔다.
다시는 붓을 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시는 붓을 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붓을 들 용기도, 의지도, 면목도 없었다.
영원히 다시 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붓을 지금 다시 손에 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서먹해진 친구와 대면한 듯 붓을 잡은 손끝이 영 어색했다.
어느새 그의 손은 붓보다는 검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문득 병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표정을 말끔하게 지워버린 병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 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난히 웃는 얼굴이 고운 성가신 녀석.
이게 다 홍라온 덕이군.
녀석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았다.
훅하고 불면 꺼질 것처럼 작고 애처로운 녀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언제나 미소 짓는 씩씩한 녀석.
라온을 통해 병연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 작은 두 어깨에 걸려 있는 짐과 운명에 비한다면, 자신이 방황했던 이유는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는 것인가.
운명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당장에라도 절망의 발밑으로 나뒹굴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미소가 자신을 꾸짖는 것만 같았다. 고작 그 정도 일로 세상 전부를 잃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느냐며 나무라는 듯했다.
홍라온. 그녀의 미소가 그에게 다시 붓을 들게 하였다.
그녀라면 여전히 망설이는 자신에게 이리 말할 것이다.
‘힘내십시오, 김 형.’머릿속에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이끌린 듯 병연은 새하얀 종이 위로 붓을 가져갔다.
무엇을 쓸 것인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심장이 움직이는 대로 글을 써볼 작정이었다.
그리 쓰다 보면 무엇이든 다시 쓸 수 있겠지. 그러다 보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병연은 한 호흡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한 글자가 종이 위에 그려졌다.
戀
사모할 연.
일순간 병연의 얼굴에 당혹감과 숫된 사내의 부끄러움이 찰나처럼 지나갔다.
사모, 사모한다.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버린 그의 마음에 이런 느닷없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을 줄은 스스로도 미처 몰랐음이라.
병연은 꺼내놓은 마음을 다시 갈무리하기 위해 종이를 접었다. 아니, 접으려 했다.
“마음에 두신 분이라도 계신 것입니까?”오른쪽 어깨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병연의 눈동자에 잔 파문이 일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라온이 하얀 얼굴 가득 방싯거리는 웃음을 매단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김 형.”라온이 단박에 쪼르르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뭡니까? 정말 사모하는 여인이라도 생긴 것입니까?”“나 따위가 누굴 사모할 처지나 되겠느냐?”병연의 자조 섞인 말에 라온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 형이 얼마나 멋진 사내인데요. 같은 사내인 제가 봐도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누굽니까? 혹, 제가 아는 여인입니까?”“…….”라온의 물음에 병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 마디를 물었다.
“내가…… 괜찮아 보이더냐?”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듯 라온이 화사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서 최고로 멋진 분입니다.”“난 그리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병연의 얼굴에 아픈 표정이 떠올랐다.
라온은 서둘러 도리질을 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김 형이 사모하신다는 그분이 부러울 정도로 김 형은 멋진 분이십니다.”“내가 사모한다고 하여 부러울 것까지 있겠느냐?”“김 형 같은 분께서 곁에서 지켜주실 테니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 아닙니까.”“정말 그럴까?”낮게 중얼거리는 병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온이 문득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뭐가 또 아니라는 것이야?”라온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을 짚으며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딱 ‘나 심각하오.’ 라는 표정으로 계셔서는 절대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제법 여인에 대해 정통한 척 말하는구나.”“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바로 운종가 삼놈이었습니다. 여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던 그 운종가 삼놈이. 오죽하면 여인과 관련한 문제라면 해결 못 하는 게 없을 정도라는 소문이 돌았겠습니까. 그런 제가 장담합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 오던 여인도 도망갈 겁니다.”라온이 턱을 추켜세우며 자랑하듯 너스레를 떨었다.
문득 병연의 입가에 실금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여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홍라온이 바로 여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십시오. 그렇게 웃으시니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김 형께서 마음에 두신 그 여인께서도 분명 지금 모습을 보시면 많이 좋아하실 것이옵니다. 자, 이렇게 해보십시오.”라온이 따라 해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좌우로 길게 늘였다.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던 병연이 처음으로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웃으면…… 그녀가 좋아할까?”“김 형이 웃으시면 그 어떤 여인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겁니다. 그러니 어서 따라 해 보십시오.”라온은 다시 한 번 입가를 길게 늘였다.
라온의 해사한 웃음이 달빛 아래 하얗게 반짝거렸다. 달빛 속에 만개한 달맞이꽃 같은 그 모습이 병연의 심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주쳐오는 라온의 다사로운 눈빛에 눈이 시린 그는 기어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성가시다.”불퉁한 한 마디를 흘리며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하릴없이 어둠을 응시하는 그의 시야에 라온의 손목이 들어왔다. 자신이 준 월하노인의 팔찌를 곱게 차고 있는 그 하얀 손목이.
순간, 그의 입가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가 걸렸다.
“앗! 김 형. 지금 웃으셨습니까?”“…….”“그것 보십시오. 그리 웃으니 얼마나 좋습니까?”“성가신 녀석.”괜스레 불퉁한 한 마디를 흘리며 병연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라온에게 등을 보인 채 걷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한 줄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았다.
라온의 한 마디가, 그녀의 미소가, 그 따뜻한 체온이, 순식간에 공기를 바꿔버리는 향기가…… 자꾸만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 * *
“김 형, 식사는 하신 겁니까?”방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라온이 물었다. 그녀는 아침과 다름없는 모습의 소반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아침에 봐 둔 상이 그대롭니다. 안 드셨습니까?”“…….”“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번 놓친 끼니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요.”“그러는 넌? 어찌 한 끼도 못 먹은 얼굴이야?”“저야 뭐…….”라온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영과 함께 후원에 있느라 식사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부탁한다면야 간단한 요기라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리 번다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여 무얼 먹어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듯싶었다.
고스란히 속내를 드러내는 라온을 보며 병연이 낮게 혀를 찼다.
“한번 놓친 끼니는 돌아오지 않는다며? 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녀석이 어쩐 일이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그건 아닙니다.”“그럼 왜?”“그것이…… 화초저하께 꼼짝없이 붙잡혀 있느라…….”마지못해 대답하는 라온의 말에 일순, 병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화초저하께 붙잡혀 있었어?”“네.”짧게 대답하며 라온은 바닥에 깔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쌀쌀한 날씨와는 달리 이불 속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화초저하와 함께 후원에 누워 하늘을 올려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나니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어쩌면 바닥의 한기 때문이 아니리라. 마음의 한기 때문에 몸이 시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영을 볼 때마다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를 향해 가슴이 뛸 때마다, 동시에 불안감도 켜켜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자신이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될까 봐 불안했다.
내가 사내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면 화초저하께선 분명 실망하시겠지. 어쩌면 단박에 돌변하여 나를 다신 아니 본다 하실지도 몰라.
그 생각만 하면 이상하게도 명치끝이 아릿하게 저며 왔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목덜미를 움켜쥔 채 숨통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 살얼음판 같은 상황 속에서도 자꾸만 영을 돌아보는 자신이, 그에게 기울어가는 마음이 마뜩지가 않았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자니, 병연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어디 안 좋은 거냐? 안색이 안 좋다.”“찬 바닥에 오래 누워 있었더니 아무래도 한기가 들었나 봅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몸 좀 녹이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찬 바닥에 오래 누워 있었어?”“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병연의 미간에 그려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김 형이야말로 아까부터 표정이 영 좋질 않으십니다.”“아니다. 그보다 얘기나 계속해봐. 무슨 연유로 찬 바닥에 누워 있게 된 게냐?”“정말 별일 아닙니다. 아참, 그런데 김 형.”차마 영과의 일을 말할 수는 없음이었다. 라온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이 팔찌 말입니다. 정말 효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효험?”“이 팔찌 덕분인지 요즘 재수가 좋습니다.”“…….”라온의 말에 병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재수가 좋아졌다는 말에 다행이다 싶었지만, 애초에 그가 기대했던 말은 아니었다. 기대와는 사뭇 다른 말에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하는 수 없이 미소 지으며 맞장구를 치니 라온이 눈빛을 반짝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오늘도 말입니다, 불통 내시라면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성 내관님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선지 오늘은 쉬라 하시질 않겠습니까. 덕분에 오늘 하루 편히 보내다 왔습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예전과 달리 마음 복잡한 일도 안 생기니. 아무래도 이 팔찌 덕이 틀림없습니다.”“그렇다면 잘 됐구나.”“김 형, 이거 어디서 사신 겁니까?”“그건 왜?”“우리 단희랑 어머니께 하나씩 사 주고 싶어서요.”라온의 진지한 대답에 병연은 정색했다.
“그렇게 막 사서 줘도 되는 물건이 아니야.”월하노인의 팔찌란 말이다.
속내를 모르는 라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것도 뭔가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그런 물건인 겁니까?”“…….”병연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라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이라면…… 받을 수 없습니다.”“어째서?”“저는 김 형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귀한 것을 받습니까?”“뭘 바라고 준 것이 아니야.”“하지만…….”“네게 일이 생기면 내가 성가셔지니 준 것뿐이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김 형.”불퉁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말하는 속뜻은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라온의 눈동자에 병연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들어찼다.
바로 그때였다.
벌컥!
느닷없이 자선당 방문이 열렸다.
병연과 라온의 시선이 동시에 열린 문밖으로 돌아갔다.
“어?”라온의 입에서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린 달빛 아래,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깎아 만든 듯한 아름다운 사내가 서 있었다.
“화초저하!”라온의 부름과 동시에 영은 처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마주 앉아 있는 병연과 라온을 둘러보았다.
이내 영의 반듯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보란 듯 얼굴 가득 속내를 드러내며 그는 병연과 라온의 사이에 비집고 앉았다.
“저하께서 이 밤중에 무슨 볼일이야?”병연 역시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영에게 물었다.
영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가까운 서안 위에 내려놓았다.
탁!
“오랜만에 술 한 잔 하러 왔다.”“생각 없어.”병연이 단칼에 잘라 말했다.
“매정한 놈 같으니. 하지만 저 녀석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영의 말에 병연이 고개를 돌렸다.
라온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는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술이 마시고 싶었던 게냐?”병연의 물음에 라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그런데 어찌 그리 기쁜 표정이더냐?”“언제고 한번 예전처럼 셋이 모여 오붓한 자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 같아 기쁩니다.”
* * *
서로를 바라보는 영과 병연 사이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오갔다.
“저……김 형. 저기, 화초저하.”그사이에서 연신 눈치를 보던 라온이 조심스레 두 사람을 불렀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묘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어색한 분위기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
“그나저나 이리 있으니 정말 옛날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이리 모였으니 예전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라온은 기묘하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온의 말에 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전엔 우리 둘이서 술을 나누곤 했었는데.”병연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영이 말했다.
“그랬었지.”영이 권하는 술을 받으며 병연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셋이 있는데 익숙했군. 이제는 하나라도 비면 어색할 지경이야.”“그래? 나는 둘만 있어도 상관없는데.”라온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영이 은근한 목소리로 병연의 말을 맞받아쳤다.
순간, 병연의 눈에 팟 하고 불꽃이 튀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나도 이제는 셋보다 둘이 더 편하군. 항상 이곳에서 둘만 지내다 보니, 이리 셋이 모여 있으니 어색하군.”“항상 함께 있는 건 아니다. 낮 동안엔 나와 함께 있으니까.”“이곳 자선당에서 밤을 보낼 때는 나와 단둘이지.”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두 분이 언제부터 그리 붙어 다녔던 겁니까? 그리고 낮과 밤을 함께한다면 결국 온종일 붙어 있단 말씀 아닙니까?”영과 병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보니 이 녀석, 또 오해한 모양이다.
하기야 오해할 만했다. 지난번에도 함께 뒹구는 걸 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열심히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영 못 믿는 눈치였다.
“제가 무어…… 잘못하였습니까?”갑자기 쏟아지는 눈총에 라온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계면쩍은 얼굴로 연신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그녀는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홀짝거렸다.
“그런데 너…… 지금 마시는 것이 무엇이냐?”영의 물음에 라온이 배시시 웃었다.
“뭐긴 뭡니까? 술이지요.”당연하다는 라온의 말에 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병연은 빼앗듯 라온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챘다.
“이 성가신 녀석. 이걸 마시면 어찌해?”“아하하, 김 형 괜찮습니다. 하하하, 화초저하. 그리 불안한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는 끄떡없습니다. 고작 한 잔입니다. 고작 한 잔.”라온은 손을 흔들며 걱정하는 두 사내를 안심시켰다.
지난번에는 독한 화주였기에 그지 정신을 잃은 것이지, 이번에는 아닙니다. 이깟 술 한 잔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도…… 어라? 그런데 왜 이리 자꾸만 눈앞이 가물가물해지지? 어라? 어어라?
“하지만 이 술, 지난번에 마셨던 벽향주보다 더 독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쿵!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라온의 머리가 술상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이런.”영은 정신을 잃은 라온을 보며 입안에 맴돌던 한숨을 토해냈다.
“성가신 녀석.”불퉁한 한 마디와 함께 병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러느냐?”영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병연은 쓰러진 라온을 안아 일으켰다. 불편하게 엎드려 있는 그녀를 바로 눕히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병연의 앞으로 영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됐다, 물러나라. 그리 성가시면 내가 하마.”영은 수리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병연의 손아귀에서 라온을 낚아챘다.
한순간에 라온을 빼앗긴 병연이 영의 앞을 막았다.
“왜 앞을 막는 것이냐?”“그러는 저하야말로 뭐하는 거야?”“보면 모르느냐. 이 녀석을 자리에 제대로 누이려는 것이 아니냐.”“귀하신 국본께서 이런 일, 해도 되는 거야?” “내 백성을 위한 일이니. 이깟 일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영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병연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저하, 설마 백성이 쓰러질 때마다 이렇게 하지는 않겠지?”“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다만?”“이 녀석은 내 사람이니까.”뚫어져라 라온을 바라보며 영이 말했다.
무표정하던 병연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세자저하 이상한 행동.
자연스럽지 않았다. 내 사람이기에 챙기는 것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살뜰했다.
그 순간, 병연의 뇌리 속으로 라온이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화초저하께 이상한 취미가 있다고 했던가.
설마, 녀석의 말대로 정말로 저하께 그런 독특한 취향이 있었단 말인가? 예전엔 없었으니 새로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특별한 취향이 라온을 향한 것이 틀림없었다.
세자저하의 성정에 라온이 여인인 것을 알고도 저리 시치미 떼지는 않으리라.
문득, 병연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나 역시도 저하의 사람이니. 저하의 호의는 훗날 내가 받도록 하지. 대신, 이 녀석은 내가 알아서 할게.”“그럴 수는 없지.”그렇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홍라온 쟁탈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