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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63화 (63/131)

63. 그저 넌 홍라온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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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9

불통내시들이 사라진 너럭바위 위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낙엽이 파르르 몸통을 떨며 떨어졌다. 라온은 발치로 굴러들어온 낙엽을 주워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또 제게 짓궂은 농을 하러 오신 겁니까?”바싹 말라 파삭거리는 낙엽을 만지작거리며 라온은 윤성에게 물었다.

그의 곁에 있던 윤성이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홍 내관이 나를 찾아오지 않으니. 내가 이리 찾아올 수밖에요.”“따로 참의영감을 뵐 이유가 없었기에 찾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혹여, 제게 용무라도 있으십니까?”“네.”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윤성이 대답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대답이 듣고 싶습니다.”“무슨 대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나는 아직 홍 내관의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지요? 제가 홍 내관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홍 내관.”“…….”물끄러미 윤성을 바라보던 라온이 돌연 입가를 길게 늘였다. 그 돌연한 웃음에 윤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홍 내관, 왜 그러십니까?”“안 속습니다.”“안 속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그리 진지한 얼굴로 농담하시면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안 속아 넘어갑니다.”“지난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진심입니다.”“…….”정히 그렇게 나오신다면…….

라온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진심,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왜 안 된다는 겁니까? 혹여 연모하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윤성의 직설적인 물음에 라온은 한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뇌리로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차가운 얼음 가면을 뒤집어쓴 듯 언제나 냉정한 표정의 한 사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있지만,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영의 얼굴이 라온의 작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왜 이 순간, 화초저하가 생각나는 것일까?

느닷없는 잔상에 다소 놀랐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잠시 흐트러졌던 표정을 단단하게 갈무리한 라온은 윤성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연모하는 이가 있습니다.”“…….”윤성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본연의 안색을 되찾은 윤성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홍 내관에게만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저는 임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걸 더 좋아합니다.”“참의영감. 생각보다 끈질기신 분이십니다.”“사모하는 여인에겐 이 정도 노력을 보여야 하는 법이니까요. 이리하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쯤 돌아봐 주지 않겠습니까?”“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사람 일이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지요.”“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제 일이기에 장담하는 겁니다. 저는 절대 돌아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괜한 노력 기울이지 마십시오.”할 말을 마친 라온은 윤성을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고는 일말의 미련도 두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쉽지 않군. 정말 쉽지 않아.”어느새 작은 점만큼 작아진 라온을 보며 윤성은 아쉬운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홍라온.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 있었건만, 정작 간절히 원하는 지금은 볼 수는 있어도 취할 수는 없구나.

작은 아기 새처럼 손가락 틈새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이 묘한 욕망과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갖고 싶다.

내 울타리 안에 가둬두고 싶다.

“큰일이군. 점점 더 그녀를 가지고 싶어지니 이를 어쩐다? 강제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니…… 이를 어쩐다?”

***

얼마 후.

라온은 후원의 단풍나무 숲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영의 비밀공간인 폄우사가 나올 것이다.

윤성에게 발길이 잡혀 제법 지체했던 터라. 행여 늦었다며 지청구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라온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녀는 걷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화초저하.”회화나무 숲길 한쪽에서 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하, 여기 계셨습니까?”라온의 물음에도 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에 심기가 불편한지, 반듯한 미간이 한데로 모아져 있었다.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영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몰라 묻는 것이냐?”“말씀을 안 하시는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무엇이 그리 언짢고 불편하신지요?”“부른 지가 언제인데, 이제 오는 것이냐?”영이 이곳에서 라온을 기다린 지 꼬박 반시진이 지났다. 부르면 금방 달려올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긴 기다림에 영의 마음에 심술이 일었다.

“송구합니다. 때마침, 참의영감과 마주치는 바람에…….”“예조참의와?”영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그려졌다.

“지난번에 그 난리를 겪고도 참의 녀석과 어울리는 것이냐?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 궁에는 이유 없는 호의 따윈 없다고 말이다.”“어울린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다고 참의영감이 절 찾아오신 것입니다.”“할 말? 무슨 할 말?”“그러니까……조금 짓궂은 장난을 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장난이라…….”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라온.”뭔가 말을 하려던 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싫다! 네가 그 녀석과 함께 있는 것이 싫다. 그러니 어울리지 마라.’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다. 하지만 이 속엣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간 사람 꼴, 한순간에 우스워지리라.

“무엇입니까? 뭔데 말씀을 하시다 마시는 것입니까?”보여주고 싶지 않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영은 괜스레 라온을 향해 눈씨를 세웠다.

“감히!”라온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말씀 올리면 또 맹랑하다 하실지 모르겠으나…….”“그런 생각 했으면, 말씀 올리지 마라.”“그래도 군주께서 바르지 못한 길로 갈 때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환관의 도리라고 배웠습니다. 하여…….”“하여?”“한 말씀 올리겠습니다.”불끈 주먹을 쥐며 라온은 결의를 다졌다.

그 모습을 힐끗 지나치는 눈길로 바라보던 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체 무엇인데 그리 거창하게 말하는 것이냐?”“저하께서는 그 버릇은 고치셔야 합니다.”“버릇?”“툭하면 감히! 하시면서 이렇게 눈초리 세우시는 버릇 말입니다.”라온이 미간을 한데 모으며 영의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귀여운 모습이라.

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녀석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저런 모습을 할 때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

저런 눈빛으로 올려다보면 지켜보는 사내의 마음이 어찌 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잔인할 정도로 무딘 라온의 모습에 영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또한, 저 혼자만 마음이 달아오르는 듯하여 심술도 솟구쳤다. 하여, 내색하지 말아야지.

어여쁘다 말하지 말아야지, 참고 또 참아야지……하며 스스로를 한없이 다독였다.

그리 참는 영의 모습을 오해한 라온이 슬그머니 한발 물러섰다.

“화나셨습니까?”“안 났다.”“화나신 것 같습니다.”“안 났다니까.”“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내 표정이 뭘?”“꼭, 뭔가를 참는 것 같습니다.”라온의 말에 영이 걸음을 세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지금 많이 참고 있느니.”“그게 무슨……?”라온이 의아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 뒤엉켰다.

라온의 검은 눈동자에 사로잡힌 듯 영은 한동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일순, 영의 얼굴에 욕망이 떠올랐다. 어색한 표정을 들킬세라, 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시는 것입니까?”그 뒤를 잰걸음으로 뒤쫓으며 라온이 물었다.

“폄우사로 가는 길이다.”“폄우사에는 왜요?”“모처럼 짬이 생겨 차나 한잔 즐길 것이다. 명온이가 그러는데, 네 차 끓이는 솜씨가 일품이라지? 어디, 그 솜씨 한번 구경하자꾸나.”“그런 것이라면 저보다는 상다(尙茶)께서 더 잘 끓이실 것입니다.”“나는 네가 끓여주는 차가 마시고 싶구나.”오늘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라온과 호젓한 시간을 보내리라. 영은 입가를 길게 늘이며 라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가 폄우사로 향하는 걸음을 더욱 재촉하려는 찰나였다.

숲 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보랏빛 바탕에 소매와 치맛단에 제비꽃이 촘촘히 수 놓인 청나라 복색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목을 빼내어 지켜보던 라온이 말했다.

“소양공주십니다. 혹여 예서 만나기로 하신 것입니까?”라온은 뒤에 있는 영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곁에 있던 영이 보이지 않았다.

어? 갑자기 어디로 가신 것일까?

“화초저하, 어디 계십니까? 화초저……헉!”영을 부르던 라온의 입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강력한 완력이 그녀를 아름드리 참나무 뒤편으로 끌고 갔다.

이 익숙한 향기와 익숙한 감촉.

화초저하.

굳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지 않아도 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되었다.

라온은 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초저하, 왜 이러시는 겁……?”라온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영의 손이 라온의 입을 막았다. 이윽고 단단하고 너른 가슴이 라온을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모처럼 쉬는 것을 방해받고 싶진 않구나.”고개를 숙여 라온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 그는 그녀를 제 품속으로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덕분에 라온의 작은 몸은 영의 옷자락에 폭 파묻힌 채 두 눈만 빠끔히 내놓은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 그대로, 영은 숲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양공주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저하, 저하 어디 계시옵니까? 저하……. 너, 정말로 저하를 여기서 보았느냐?”소양공주의 물음에 뒤를 따르던 두 명의 궁녀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공주마마. 세자저하께서 여기 계시는 것을 쇤네들이 똑똑히 보았사옵니다.”“그래? 그런데 어찌 보이지 않으실까? 저하! 소양이옵니다. 소양이가 저하를 뵈러 왔사옵니다.”“아무래도 동궁전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요?”“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그럼 동궁전으로 가 봐야겠구나.”소양공주와 그녀의 일행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 동궁전으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번다했던 숲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자리를 떠난 소양공주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영은 라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하, 놓아주십시오.”“…….”“화초저하.”목덜미로 영의 숨결이 고스란히 떨어졌다.

두근두근.

귓전을 두드리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영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라온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일순, 자신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에 검푸른 열망이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위험해.

저런 눈빛을 할 때의 영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라온은 저도 모르게 영을 힘껏 밀쳐냈다.

쿵!

느닷없는 힘에 떠밀린 영은 그대로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헉! 나 미쳤나 봐. 세자저하를 밀쳐 넘어뜨린 환관은 조선 역사상 나밖에 없을 거야.

놀란 라온은 한달음에 영의 머리맡으로 달려갔다.

“화초저하, 괜찮으십니까? 그것 보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놔달라고 할 때 곱게 놓아주셨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요.”그런데…….

“저하.”어찌 이리 기척이 없으실까?

라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을 살며시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이 없었다.

“화초저하. 괜찮으십니까?”“…….”“저하. 화초저하!”왜 이러십니까? 설마…….

“저하! 괜찮으십니까?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니시죠? 어의,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어의영감을 불러…….”“쉿!”다급해진 라온이 후원 밖으로 어의를 부르러 달려나가려 할 때였다.

영이 누운 채로 라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괜찮으십니까?”“괜찮다.”일순간에 맥이 빠진 라온이 영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얼굴 가득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어찌 그러고 계십니까? 행여 어찌 되신 줄 알고, 간 떨어질 뻔하지 않았습니까.”“이렇게 누워서 보니, 하늘을 보는 맛이 제법 괜찮구나.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잠시 쉬어가자꾸나.”“저하.”“너도 이리 누워라.”영이 라온의 팔을 끌어당겼다.

손길을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이래선 안 돼.

서둘러 영의 팔을 뿌리친 라온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십시오.”자꾸만 제 마음을 흔들지 마십시오.

“이런 장난치지 마십시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저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사내가 아닌, 여인입니다.

괜스레 마음이 아릿해 그녀는 제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때 눈을 가늘게 뜬 영이 라온을 바라보았다.

“상관없다.”“…….”“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네가 사내든…… 여인이든…… 나는 상관없어. 그저 넌 홍라온이면 된다. 나만의 사람이면 족해.”말과 함께 영은 라온을 힘껏 끌어당겼다.

라온은 그대로 풀썩, 영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의 체취가, 그의 온기가 라온의 전신을 휘감았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자.”라온을 꼭 감싸 안은 채 영은 잦아드는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하늘이, 구름이, 바람이…… 이지러졌다.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공기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마치 그대로 굳어 화석이 된 듯, 두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바람을 느끼고, 시린 볕을 음미했다.

***

찰나 같은 영원이…… 영원할 것 같은 찰나의 시간이 빠르고, 더디게 흘러갔다.

“이제 가봐야겠습니다.”멀리서 술시(戌時:저녁 7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하늘 가득 검푸른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과 낙엽 위에 나란히 누워 있던 라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제되었던 시간이 깨지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갈 순간이었다.

“찬 바닥에 너무 누워 있었더니, 온몸이 으슬으슬합니다.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너스레를 떨며 라온은 옷에 묻은 낙엽을 떨어냈다. 그러다 여전히 누워 있는 영을 내려다보았다.

“저하, 일어나십시오. 정말 그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라온은 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참, 녀석.”그녀의 재촉에 마지못해 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라온의 손목에 머물렀다.

제 손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하얀 팔목에 언젠가 한번 보았던 물건이 걸려 있었다.

저건…… 병연이 갖고 있던 물건인데?

“이건 무엇이냐?”영의 물음에 라온이 자랑스레 팔목을 걷어 보였다.

“김 형께서 주신 부적입니다.”“부적?”“네. 수호부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저를 지켜준다고 하셨습니다. 이거 덕분인지 요즘 재수가 무척 좋습니다.”영의 눈 속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며들었다.

“그래?”그사이, 영의 곤룡포에 붙어 있는 낙엽을 말끔히 떼어낸 라온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가봐? 어딜?”“술시가 지났습니다. 돌아가야지요.”“오늘은 나와 함께 동궁전으로 가자꾸나.”“동궁전으로요? 청나라 사신들도 돌아갔는데 왜 동궁전으로 가야 하는 겁니까?”“모두 돌아간 것은 아니지 않느냐? 소양공주가 여전히 남아 있다.”“공주마마께서 이 늦은 시각에 저하의 처소를 찾아오겠습니까?”“소양공주라면……그리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에이, 농담도 과합니다. 아무리요.”“정말 갈 것이냐?”“가야지요.”“어디로? 자선당으로? 너의 김 형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 말이냐?”“네.”“가지 마라.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는 아예 동궁전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동궁전으로요? 그곳에서 머물면 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입니다. 감히 청하옵건대, 부디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저하.”장난스럽게 대답한 라온이 영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더는 라온을 잡을 타당한 이유가 없기에 영은 그대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라온이 자선당으로 돌아가고 얼마 후.

여전히 후원에 남은 영은 뒷짐을 진 채 참나무 아래를 맴돌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벅저벅저벅.

참나무 둥치를 몇 번이나 맴도는 그의 입에선 아까부터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자선당…… 자선당이라…….”영의 반듯한 얼굴이 찡그렸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안 되겠군.”영이 기어이 걸음을 옮겼다.

후원을 나선 그의 발길은 곧장 자선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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