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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62화 (62/131)

62. 나도 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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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6

퐁퐁퐁.

처마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습윤한 물기가 공기를 눅눅하게 적셨다. 라온은 고개를 들어 창호지로 스며드는 검은 밤을 응시했다.

차고 습윤한 밤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찌 잠을 못 자?”라온의 기척에 깬 것일까?

대들보 위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김 형. 제가 깨웠습니까? 죄송합니다.”“…….”“비님이 오시네요.”“비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건 아닐 테고.”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의 파장이 채 사라지기도 전, 사뿐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병연이 라온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탁!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 등잔에 불이 피어올랐다.

어두웠던 방 안이 내면을 드러내며 귤빛으로 달아올랐다.

“뭐야? 뭐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야?”“별일 아닙니다.”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라온이 대답했다.

“정말 별일 아니야? 그런데 왜 잠을 못 자고 뒤척거려?”“이제 막 자려고 했습니다.”라온은 속내를 꿰뚫어 보듯 까맣게 짓쳐들어오는 병연의 시선을 두려워하듯 피했다. 괜스레 애먼 방바닥만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닙니다.”뭐, 비록 저를 사내로 오해한 화초저하께서 자꾸만 야릇한 행동을 하시고, 예조참의마저 저를 마음에 품었다며 고백을 하시긴 했지만…….

별일 아닙니다. 다들 장난이 지나치신 것이겠지요. 그러니…… 정말 별일 아닐 겁니다.

“홍라온.”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아 있던 병연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너답지 않아.”뜬금없는 말에 라온이 물었다.

“저답지 않다니요?”“홍라온답지 않다는 말이야. 매사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풀어나가던 네가 아니냐? 덕분에 내가 많이 성가셔졌지만…….”“성가시게 해서 매번 죄송합니다. 앞으론 성가신 짓 안 할 겁니다.”“말만?”“무슨 말씀이신지?”“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날 성가시게 하는 일이야. 성가신 짓 안 할 거면 제대로 하지 마.”불퉁하게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의 온도는 따뜻했다.

“그렇습니까?”라온의 얼굴에 계면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뭐야? 말해 봐.”팔짱을 끼며 병연이 다시 말했다.

마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묘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그의 관심과 배려에 마음이 흔들렸다.

라온은 푹 한숨을 쉬며 무거운 마음 한 자락을 끄집어냈다.

“자꾸만 곤란한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곤란한 일?”“네. 자꾸만 제게 짓궂은 장난을 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짓궂은 장난?”문득 병연의 눈에 날 선 이채가 스며들었다.

‘대체 어떤 녀석들이 네게 짓궂은 장난을 쳐?’ 하고 묻는 눈빛.

마음 같아서는 쪼르르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화초저하와 예조참의였다. 또한, 그분들의 장난이 자신에게 해를 주기 위한 나쁜 의도인 것도 아니었다.

번민하게 되는 것도 스스로의 복잡한 개인 사정 때문이었다.

문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 꼭 밖에서 괴롭힘을 당한 동생이 오라비에게 낮의 일을 일러바치는 것 같구나.

“아무 일도 아닙니다.”라온은 그림자가 어룽거리는 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내내 팔짱을 낀 채 라온을 지켜만 보던 병연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눈을 맞췄다.

이리 가까이서 병연과 얼굴을 마주했던 적은 없었던 터라. 깜짝 놀란 라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 김 형.”여름 숲을 닮은 바람의 향기가 코끝을 스며들었다. 내리누르는 듯한 시린 눈동자가 라온의 시선을 옭아맸다.

꼼짝없이 눈길이 붙잡힌 그녀는 석상처럼 굳은 채로 병연을 응시했다.

짧은 시간이 흘렀다.

자꾸만 회피하는 라온의 시선을 제게로 돌린 병연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장난은 장난으로 생각하면 그뿐이다.”“네?”“장난이라면서? 그럼 너도 그냥 장난으로 넘겨 버리면 되잖아. 그런 것을 무에 고민하는 거야?”“하지만…….”“왜? 장난으로 넘겨버리기엔 고약한 것이야? 그런 것이라면…….”문득 병연의 눈 속에 시리고 섬뜩한 푸른 기운이 맺혔다.

그 칼날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에 라온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절대 그리 고약한 것은 아닙니다. 누굴 해코지하거나, 위해 하는 장난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부담스러워서 말입니다.”“그래?”라온의 말에 병연이 서늘한 기운을 거둬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장난을 멈추게 하면 되겠구나.”간단명료한 대답.

라온은 잠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장난을 멈추게 해요? 어떻게 말입니까?”“받아주지 않으면 되겠지.”“네?”“네가 일일이 받아주고 반응하니 장난하는 쪽도 재미가 있어 더 하는 것이니. 무심하면 된다. 장난치는 쪽에서 어찌 나오던 네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져 장난질도 그만두겠지.”병연의 말에 라온은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아, 그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참의영감의 고백. 그래, 그 고백일랑은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보아도 고약한 농담임이 틀림없었다.

농하길 좋아하는 참의께서 이번엔 작심하고 나를 골리는 것이 분명해.

그런 가벼운 장난에 지금껏 마음 쓴 것이 억울했다. 앞으로는 받아주지 말아야지.

그도 아니 되면 장난으로 가벼이 웃어넘겨야지. 절대로 놀라고 당황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라온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이내 불끈 쥐었던 주먹을 느슨하게 풀고 말았다.

그녀는 입술 언저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아련한 입맞춤의 흔적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영의 눈빛.

그 눈빛 역시도 장난이려나?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니, 장난이라면 장난일 터.

이것 역시도 받아주지 않으면 그만하시려나?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도 돼.”그때, 생각한 골몰한 라온의 귓가에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내가 생각만 한 게 아니고 입 밖으로 말을 꺼냈나?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병연이 톡 검지로 라온의 이마를 살짝 건드렸다.

“그렇게 속내가 빤히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찌 못 읽을 수 있겠어?”“그럴 리가요.”나름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퍽이나.”이번에도 라온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본 병연이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팔짱을 꼈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될까요? 정말 무시해도 될까요?”“돼. 안 되면 나한테 말해. 되게 해 줄 테니.”세상사에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는 그의 모습에 라온은 입가를 길게 늘였다.

내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던 머릿속이 병연 덕분에 개운해졌다.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이젠 잠을 잘 수 있겠습니다.”“…….”“그거 아십니까? 김 형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김 형, 사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라온이 눈빛을 반짝거리며 병연을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눈을 떴다.

“무슨 말?”“김 형이 제 형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형이 제 뒤를 든든히 지켜주시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김 형을 제 형님으로…….”그러나 라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연이 단호히 소리쳤다.

“싫다!”병연이 보기 드물게 정색하며 말했다.

“너 같은 아우, 두고 싶지 않아.”“김 형.”“난 네 형이 될 수 없어.”되고 싶지 않다. 난 네 등을 지키고 싶진 않다. 나는…… 네 등 뒤가 아니라 네 옆자리에 나란히 서고 싶단 말이다.

전에 없이 정색하는 병연의 모습에 라온은 힐끔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성가신 녀석을 입에 달고 사시더니.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가셨던 모양이시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저는 김 형이 좋습니다.”병연의 지청구에도 라온은 태연하게 말했다.

“뭐?”병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런 그의 귓전에 라온의 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형이 뭐라고 하시던 저는 김 형이 좋습니다. 정말 정말 좋습니다.”손나팔까지 만들어 소리치는 라온을 병연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쓱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성가신 녀석.”평상시처럼 불퉁하게 내뱉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리고 그 미소 끝에 작은 한 마디가 꼬리처럼 달라붙었다.

“……가.”갑자기 지붕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거세졌다. 굵은 빗방울 소리에 병연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묻히고 말았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미처 듣지 못한 뒷말이 궁금하여 라온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느새 병연은 대들보 위로 훌쩍 뛰어올라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김 형.”라온이 다시 한 번 병연을 불렀다. 그새 잠이 들었는지 그는 기척이 없었다.

“벌써 주무시나?”고개를 갸웃하던 라온 역시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묻었다.

퐁퐁퐁, 퐁퐁퐁퐁.

귓가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라온은 금세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내 미동도 하지 않던 병연이 고개를 들어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 잠든 라온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던 그가 아까 빗소리에 묻혔던 말을 다시 입에 올린다. 낮게, 오직 저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나도 좋다, 네가. 나도……네가 참으로 좋다.”심장이 터질 만큼. 하여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널 보는 것이 아플 만큼. 그래서 욕심이 생길 만큼.

다시 한 번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을 만큼…… 네가 좋다.

***

미틈달(11월) 초하루.

아직 검푸른 새벽빛이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내반원의 마당에는 백 명이 넘는 내시부의 환관들이 빽빽하게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성 내관은 내반원 대청마루에 놓인 의자에 앉아 환관들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윤성의 매타작에 앞니가 듬성듬성 빠진 탓인지, 십 년은 늙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루두루 에두르는 시선으로 환관들을 내려다보던 성 내관은 곁에 서 있는 환관에게 고갯짓을 해 보였다.

새로이 성 내관의 수족 노릇을 하게 된 대전의 우 내관이었다.

우 내관은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내반원 마당에 서 있는 환관들에게 일거리를 배당하기 시작했다.

“어제 청나라 사신들이 돌아갔소이다. 하여, 태평관의 소제와 정리를 하여야 할 것이외다. 중궁전의 허 내관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태평관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또한, 곧 날이 추워질 것이니.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하외다. 대전의 윤 내관께서는 각 처소로 아이들을 보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알아보세요. 그리고…….”우 내관에게 호명 받은 내관들은 저마다 할 일을 찾아 하나 둘, 내반원 마당을 떠났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내반원 마당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라온을 비롯한 불통내시들뿐이었다. 다섯 명의 불통내시들은 어미를 바라보는 병아리들처럼 우 내관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감을 주시려나.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우 내관은 두루마리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시부의 골칫덩이인 저 불통내시들을 위한 일거리는 두루마리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우 내관은 의아한 얼굴로 성 내관을 돌아보았다.

“저…… 성 내관님.”그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성 내관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돌아봤다.

“뭐냐?”앞니가 빠진 곳에서는 슝슝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불통내시들이 할 일이 누락되었사옵니다.”“불통내시들?”우 내관의 물음에 성 내관은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섯 명의 불통내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의 눈 속에 깔아보는 빛이 떠올랐다.

하등 쓸모없는 밥버러지……헉!

훑는 시선으로 불통내시들을 하나하나 응시하던 성 내관의 안색이 불현듯 파랗게 질렸다. 라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얼굴 위로 윤성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겨우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쩍 벌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도 모르게 잔뜩 목을 움츠린 성 내관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홍……홍 내관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네.”윤성에 대한 두려움에 성 내관은 턱을 덜덜 떨었다.

“성 내관님…… 왜 그러시옵니까?”놀란 우 내관이 주춤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불통내시들은 그냥 쉬라고 해라.”“네? 방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저 아이들은 그냥 쉬게 하라고.”“정말 저 아이들을 쉬게 하란 말씀이옵니까?”“이 사람이! 어찌 같은 말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야? 불통내시들은 그냥 쉬게 해. 절대 일 시키지 마!”버럭 고함을 지른 성 내관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으이.”후원으로 들어가는 초입.

볕살 좋은 너럭바위 위에 자리를 틀고 앉은 도기가 통통한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곁에 있던 불통내시들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기심을 느낀 라온이 물었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당연히 잘못되었네.”“뭐가요?”“천하의 성 내관이 우리더러 쉬라 하지 않았는가?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던 그 성 내관이 말일세. 이게 잘못된 일이 아니면 뭐가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듣자하니 성 내관님께서 얼마 전에 사고로 많이 다쳤다고 하더군요. 구사일생한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성 내관께서도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요.”라온의 말에 도기가 콧방귀를 뀌었다.

“성 내관이 개과천선? 차라리 올챙이가 용이 되길 기다리는 게 낫지. 자넨 정말로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진다는 말을 믿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성 내관이? 백번 양보해서 그렇게 변했다고 하세. 그럼, 오늘 아침에 내반원에서 보인 표정은 뭔가? 정말로 성품이 변했다면 표정이라도 인자해져야지. 정작 성 내관의 얼굴은 독 오른 뱀…….”상열이 도기의 입을 막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사람아, 자나 깨나 말조심.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는 말 모르는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도기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어험, 아무튼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성 내관이 개과천선하는 일은 없을 걸세.”“듣고 보니 도 내관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성 내관님은 대체 왜 그러셨을까요?”라온의 말에 불현듯 도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혹시……”도기가 불안한 표정으로 동료를 둘러보았다.

“혹시 말일세. 우리 버려진 건 아닐까?”“버려져?”“그렇다네. 성 내관이 보기에 우리는 구제불능, 아무리 교육을 해도 답이 안 나온다고 생각한 거지. 하여, 아무것도 안 시키고 그냥 놀게 하다가 그걸 빌미로 궁궐 밖으로 내쫓으려는 속셈이 틀림없어.”“에이, 설마요.”라온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기가 정색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사람 순진하긴. 홍 내관, 자넨 그 소문도 못 들었는가?”“소문이요?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그것이…… 내 자네들에게만 특별히 말해 줌세. 이건 비밀이니,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것이야.”도기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모두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귀를 세웠다.

“개종자가 감찰부로 끌려갔다는 소문일세.”“개종자가 감찰부에? 설마?”“이보게, 상열이. 목소리가 너무 크네.”“아, 미안허이. 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말일세. 개종자가 뉘인가. 성 내관이 수족처럼 쓰던 녀석이 아닌가. 개종자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그놈이 그리 끌려갈 때 성 내관이 그냥 두었을 리 없지 않나?”“상열이, 이 한심한 사람아. 자네, 세상 물정을 몰라도 어찌 이리 모르는가. 개종자가 감찰부로 끌려가고, 성 내관은 손을 쓰지 않았다. 이게 뭘 뜻하는 것이겠나?”“무슨 큰 뜻이라도 있는가?”“당연히 성 내관이 개종자를 버렸다는 뜻이지. 듣자하니 개종자는 감찰부에서 풀려나는 즉시 궁궐 밖으로 쫓겨날 거라더군.”“그, 그럼 뭔가. 정말 우리도 궁 밖으로 쫓겨날 수도 있단 말이잖아?”“수족처럼 부리던 놈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사람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불통내시들 쯤이야.”도기의 말에 상열을 비롯한 불통내시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네 신세가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로구먼.”상열의 입에서 풀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이거,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디디는 기분이니. 불안해서 어디 살 수가 있겠는가?”도기의 혼잣말에 불통내시들의 어깨가 일제히 아래로 축 떨어졌다.

그런 그들 사이로 어린 소환 내시 하나가 다가왔다.

“저기…….”“무슨 일인가?”도기가 탄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동궁전에서 심부름을 나왔사옵니다.”“동궁전!”불통내시들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반짝거렸다. 도기를 비롯한 불통내시들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어린 소환내시를 응시했다.

그 부담스러운 눈길에 꿀꺽 침을 삼킨 어린 환관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동궁전의 최 내관님께서 홍 내관님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세자저하께서 불러계시니, 홍 내관님은 서둘러 후원으로 가보라고 하시었사옵니다.”전할 말을 끝낸 어린 내시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불통내시들은 일제히 기운 빠진 얼굴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우리 중에 한 사람은 든든하겠군. 뒷배가 단단하니 쫓겨날 걱정 같은 건 없겠어.”도기의 목소리에 부러움이 깃들었다.

“이번에 세자저하를 보필하면서 그분의 굄을 단단히 받게 되었다지?”“굄이요?”문득 라온의 머릿속으로 영과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금세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오해해서 괴는 것이지, 절대! 결단코! 도 내관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분께선 사내를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이 있단 말입니다.

애초에 제가 여인인 걸 아셨으면, 지금처럼 관심을 주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 라온의 눈치를 살피던 도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그뿐인가? 명온 공주께서도 특별히 홍 내관, 자네를 불러 다과를 즐기신다지?”“…….”딱 한 번 그리하셨는데. 그것도 소문이 났단 말입니까?

“홍 내관님.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도기가 얼굴 가득 미소를 보이며 라온에게 은근슬쩍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라온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자니 상열도 그녀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우리의 유일한 동아줄이네.”“다들 왜 이러십니까?”“그리 숨길 것 없네. 자네가 세자저하와 공주마마, 두 분의 든든한 뒷배를 가졌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번지고 있다네.”도기의 은근한 눈빛에 라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제 뒷배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제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분들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이런! 여기 계시는 분들은 뜻밖에도 소문에 느리군요. 홍 내관의 든든한 뒷배에 최근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는 소문은 못 들으셨습니까?”“누구…….”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불통내시들은 뜻밖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윤성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윤성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던 도기가 자못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홍 내관의 뒷배에 한 명이 더 있다는 말씀이 사실이옵니까? 대체 누가……?”도기의 물음에 윤성은 곧게 편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바로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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