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지금, 저한테 고백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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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2
영은 배트작거리는 라온을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순, 아련한 능금향이 폐 속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사각거리는 능금을 한 입 베어 문 듯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동시에 나른하게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이상하게도 이 녀석이 곁에 있으면 편안했다. 언제나 가시처럼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신경이 느른해지며 졸음이 몰려오곤 했다.
라온이 옆에 있으면 언제나 따스했다.
그 작은 몸 어딘가에 온기를 몽실몽실 뽑아내는 샘이라도 있는 듯 주위가 포근하고 아늑해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예쁜 녀석.
이러니 자꾸만 곁에 두고 싶은 것이겠지.
이러니 안고 싶고…….
이러니 자꾸만 입맞춤하고 싶어지는 것이겠지.
입맞춤, 입맞춤이라.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던 영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그야말로 충동적이라 할 수 있는 입맞춤이었다.
어쩌면 달빛이 너무 고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몽혼한 밤의 자락에 현혹되어 그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작하지 못한 것이 후회될 만큼…… 달콤했다.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가 어떤 시선으로 라온을 보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으면 라온이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도 곱고 아름다워 밤의 신령이 그녀를 가로채 버릴 것만 같아 조급증이 일었다. 그 마음 알지 못한 라온은 자꾸만 그에게서 달아나려고만 하고 있었다.
영은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 연신 버둥대는 라온을 더욱 단단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속삭인다.
“아무 짓도 안 해.”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은 네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볼 것이다. 너의 말 못 할 속사정을 너무 많이 알려하면 네가 달아날 것 같으니……
지금은 이 이상 널 알려 하지 않으마. 네가 말할 때까진 나 역시도 모른 체하마.
그러니 달아나지 마라. 내게서 멀어지지 마.
영은 입속에 맴도는 말을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은 채 말을 이었다.
“그저 이리하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이러는 것이야.”“……저하.”“자자, 라온아. 잠시면 된다. 아주 잠시만 나와 함께 자자.”영의 목소리가 느른하게 바닥에 깔렸다.
그의 숨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곤하게 느껴졌다.
거대한 바위를 지고 있는 듯 곤한 숨소리에 라온은 몸짓을 멈췄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초저하께선 꽤 힘들어 보이셨다.
하긴, 저 어깨 위에 만백성의 근심을 모두 얹으셨으니, 어찌 곤하지 않겠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껏 지켜본 왕세자의 삶이란 것이 마냥 호사롭고 편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칼 위를 걷는 사람처럼 가끔은 위태로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 큰 짐을 지신 분께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위안이 되니 잠시만 곁에 있어 달라 하셨다.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해서 이분의 꿈자리가 편안해질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 곁에 머물겠습니다……라고 하기엔 내 코가 석자였다.
편편하지 못한 삶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라온이었다.
이러다 행여 자신이 여인인 것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라온은 으스스 몸을 떨며 미꾸라지처럼 영의 품을 벗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녀석…….”한순간에 작은 온기를 잃어버린 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지청구를 입에 올렸다.
그냥 모른 척 품에 안겨 있으면 얼마나 좋아.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영이 심술 난 표정으로 눈을 치떴다.
“뭐가 아니란 말이냐?”“그러니까…… 저는…… 음, 그러니까…….”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한 라온이 누워 있는 영의 맞은편에 정갈한 얼굴로 앉았다. 저리 정색하니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음이라. 영 역시도 몸을 일으켜 그녀와 마주 앉았다.
“긴 서두는 그만두고, 간단명료하게 말해 봐.”“네, 간단명료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이관데?”“그러니까…… 제 입으로 꼭 집어 말씀드릴 순 없지만, 어쨌든 저는 저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저는 여인입니다.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란 말입니다!
이건 뭐 임금님 귀는 당나귀! 하는 것도 아니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답답한 마음 한번 풀어내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라온은 길게 호흡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말들을 꿀꺽 삼켰다.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영이 느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맞다.”“아니라니까요.”“맞아.”“아, 그것참. 저하, 그러니까…… 제가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긴 한데, 저는 절대 세자저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나름 열심히 설명하는 라온을 영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를 향해 라온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알아들으셨죠?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아니, 너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필사적인 노력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전 그런 사람이…….”“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네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달콤한 말이 라온의 코끝을 간질거렸다. 뭔가 정체를 알 수없는 뭉클한 감정이 그녀의 명치를 뜨겁게 만들었다.
검은 눈동자에 잔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이내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은 라온은 단단히 입매를 여몄다.
“제가…… 상관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절대 저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갈라진 목소리가 라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감히!”속내를 꿰뚫는 듯한 심연의 눈동자가 문득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영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발쪽거리는 라온의 붉은 입술이 성난 눈동자에 맺혔다. 이윽고, 무슨 일인가 라온이 사정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입술과 입술이 겹쳐진다.
쪽.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한 감촉이 여린 입술을 머금었다 떨어졌다. 싱긋,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영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벌이다, 감히 왕세자에게 반항한 벌.” 잠시 멀어졌던 입술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영이 손을 들어 라온의 아래턱을 지그시 눌렀다.
이내, 능금향의 여린 숨결이, 아스라한 라온의 탄식이 그의 입속으로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
“미쳤지, 미쳤어. 정신이 나가도 한참이나 나갔어. 이런 바보를 보았나, 이런 멍충이를 보았나.”길을 걷는 라온은 제 머리를 연신 쥐어박았다.
벌써 두 번째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세 번째였다. 아주 오래전, 돌발적인 사고로 입맞춤한 것까지 합치면 무려 세 번씩이나 영과 입맞춤을 한 것이다.
어쩌다가 그리 되었을까?
어쩌면 그 눈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 심연의 눈동자가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뿌리치지도, 감히 거부할 수도 없는 영의 위엄에 매번 굳어지고는 했다.
“저하께선 대체 왜 저러실까? 아니, 어떻게 저리 고집을 부리시는 거냔 말이야. 내가 아니라는데, 뭐가 상관없으시다는 거야? 그리고 세상에 그런 벌이 어디에 있어?”입맞춤이 벌이라니?
동궁전을 나선 이후로 라온은 내내 투덜대고, 자책하며 제 머리통을 쥐어박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봐야 이미 한 입맞춤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건만. 이리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오늘은 이리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구만리다. 매일같이 얼굴 뵈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저리 하시면 어찌한다?
이번엔 입맞춤을 하셨으니 그 다음엔 무얼 하시려나……?
라온의 머릿속에 언젠가 보았던 춘화첩의 그림들이 펼쳐졌다. 사내 행세를 하다 보니 원치 않은 것들을 접하게 될 때가 더러 있었다.
일순, 라온은 불에 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저라고 어찌 설레지 않을 것인가. 저하처럼 잘난 사내와 입맞춤을 하고 그분의 너른 품에 안겼는데, 어찌 태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라온은 설렐 수가 없었다.
화초저하께서 좋아하시는 건 여인 홍라온이 아니라, 환관 홍라온이었다. 이 모든 하룻밤의 꿈같은 것이었다.
잠에서 깨면 모두 사라진 환영, 절대 손에 잡히지 않을 신기루였다.
그러니 더더욱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한다? 어찌해야 저하께서 내게서 마음 접으실까? 어찌해야……?
“비 맞은 중처럼 뭘 그리 혼자 중얼거리는 거야?”생각에 휩싸인 채 걷다 보니 어느새 자선당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퍼득 정신을 차린 라온의 눈에 대청마루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는 병연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잔뜩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탁 풀어지는 듯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든든한 아군을 만난 느낌, 잔뜩 억울한 일을 당할 때면 언제라도 달려가 쪼르르 고해 바칠 수 있는 큰 오라비를 만난 것만 같았다.
“김 형!”라온은 한달음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간밤에는 어디에 계셨던 것입니까? 몸은요?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뭐가 그리 급해? 숨은 쉬어가면서 물어.”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물어오는 라온을 향해 자상한 어조로 병연이 말했다.
그런데……어라?
“김 형, 이상합니다.”“뭐가?”“김 형이 친절하십니다.”“뭐?”“김 형이 제게 친절하다고요. 어디…… 혹시 머리를 다치신 겁니까? 그런 거예요?”라온이 병연의 이마를 짚으며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가신 녀석.”말은 거칠어도 얼굴에 드리운 온화한 빛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왜 이러실까?
김 형도, 화초저하도. 두 분 모두 하룻밤 사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넌? 넌 어때? 어디 다친 곳은 없어?”“네. 팔팔합니다.”“팔팔한 놈이 어찌 낯빛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간밤에 놀라서 그런 것이야?”“아, 이거 말입니까?”병연의 말에 제 얼굴을 쓸어내리던 라온은 황급히 고갯짓을 했다.
“놀라긴 놀랐는데…… 그놈들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화초저하 때문에 놀란 겁니다.”“화초저하 때문에?”“아, 그러고 보니 김 형,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김 형은 화초저하에 대해 저보다는 많이 알고 계시겠지요?”“그건 왜 묻는 거야?”“김 형, 화초저하께서는 언제부터 그리되신 것입니까?”“그리되다니? 무슨 뜻이야?”“그러니까…….”잠시 머뭇거리던 라온은 결심한 듯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화초저하 말입니다, 정말 큰일입니다.”“뭐가 큰일이야?”“그분의 병이 깊어지셨습니다.”“병?”“네. 사내를 좋아하는 병 말입니다.”“저하께서 사내를 좋아해?”“네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병이 더욱 깊어지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십니다. 그분께서 올곧게 자리를 지키셔야 이 나라가 바로 설 텐데 말입니다. 정말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저하께서 그러실 리가 없을 텐데.”“아닙니다. 저도 설마설마 했는데…… 저하께선 사내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꾸만 저한테…….”“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어?”지켜보는 병연의 눈매가 깊어졌다.
그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라온을 빤히 응시했다.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병연을 외면했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잠시 제 색을 찾아가던 얼굴이 다시 홍시처럼 붉어진다.
자동반사적인 반응.
병이다, 정말 병이다.
‘무슨 일이 있었군.’제 딴에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이 병연의 심증을 굳혔다.
병연의 입가에 피식, 마른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저하께서 알아차린 것일까?
병연은 제 앞에서 허둥대고 있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분이 묻어날 듯 새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새까만 까만 눈, 귀엽게 오물거리는 붉은 입술과 콧날.
아무리 볼품없는 환관복으로 가린다고 하여도 그녀에겐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래, 알아차리셨겠지. 그분도 보는 눈이 있을 터인데. 저리 고운 녀석을 못 알아볼 리 없겠지.
그렇다면…… 대체 어디까지 아신 것이지? 저 아이가 여인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까지 아신 것일까?
문득 병연의 눈 속에 푸른 이채가 스며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품속을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라온아.”“네, 김 형.”“손 좀 내밀어봐라.”“손이요?”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제 팔을 내밀자, 병연은 그 새하얗고 여린 팔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붉은 자수정이 달려 있는 월하노인의 팔찌였다.
“이게 무엇입니까?”오후 햇살을 받아 영롱한 붉은빛을 뿜어내는 자수정을 들여다보며 라온이 물었다.
“수호부(守護符)다.”“수호부요? 그럼 이게 부적이란 말입니까?”“앞으론 널 지켜줄 거야. 네게 워낙 일이 많아서, 하나 사봤다.”“김 형께서도 이런 걸 믿으십니까?”의외라는 듯한 라온의 물음에 병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는다. 그러니 너도 믿어라.”“김 형께서 믿으라시니, 믿겠습니다.”손목에 걸린 팔찌를 보며 라온은 헤에, 아이 같은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수호부라니. 정말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습니다.”“…….”병연은 차마 그것이 월하노인의 팔찌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좋으냐?”“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아이처럼 좋아하는 라온을 보며 병연은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앞으론 내가 너의 진짜 수호부가 될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라온은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소환내시 교육장으로 향했다. 푸른 새벽길을 따라 열심히 걷는 그녀의 등 뒤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험.”고개를 돌리니 윤성이 서 있었다.
온몸에 새하얀 천을 두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라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참의영감! 많이 다치셨나 봅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걱정했는데…… 이리 심하게 다치시다니.”“아닙니다, 아니에요.”윤성의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내의원에서 작은 상처에 이리 호들갑을 부렸지 뭡니까. 나는 괜찮다고 하는데도 구태여 이리해야 한다고…….”“정말 괜찮은 겁니까?”라온이 재차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네. 정말 괜찮습니다.”“이만하길 정말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그러는 홍 내관은 어떠십니까?”“저도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홍 내관이 괜찮다고 하니 저야말로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정말 우리 두 사람, 죽다 살아났습니다.”“네. 그러니 다음부터는 여인이 한 맺힐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이게 뭡니까? 정말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윤성이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래서 앞으로는 오직 한 여인만 연모하기로 하였습니다.”“정말로 잘 생각하셨습니다.”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라온이 말을 이었다.
“혹시 벌써 그런 분이 생긴 것입니까? 참의영감께서 연모하시는 단 한 분이 벌써 생겼군요. 그렇지요?”무에 큰 사실을 알아 챈 듯 눈빛을 반짝거리는 그녀를 보며 윤성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렇습니다.”“대체 그분이 뉘십니까? 혹시 저도 아는 분이십니까?”윤성이 내내 여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난생처음 여인의 옷까지 입어보지 않았던가.
대체 이 순박한 미소를 짓는 사내의 마음을 휘어잡은 여인이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런 라온에게 윤성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저와 함께 샀던 나비잠이 아닙니까?”파르르 몸통을 떠는 어여쁜 나비잠을 보며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나비잠은 좋아하는 분께 드릴 선물로 사신 것이 아닙니까?”“네. 그렇습니다.”“그럼 좋아하는 분께 드려야지요?”“그래서 드리는 겁니다.”“네?”라온의 눈이 휘둥그레 떴다.
설마…… 참의영감께서 좋아하는 분이 저란 말입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윤성을 빤히 쳐다보던 라온은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농담하지 마십시오.”“농이 아닙니다.”“아닙니다. 참의영감께선 지금 제게 농을 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전 이 나비잠, 받을 수 없습니다.”아니, 절대 받지 않을 겁니다.
정색하는 라온의 손에 윤성이 강제로 나비잠을 쥐어 주었다.
“받아주십시오. 제 진심입니다.”언제나 윤성의 얼굴 위에 그려지던 가면 같은 미소가 그 순간만은 사라지고 없었다.
“참의영감…….”지금, 저한테 고백하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