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60화 (60/131)

60. 이러지 마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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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9

“헉헉헉!”거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무덕은 분주히 움직이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젠장맞을. 하필 걸려도 재수 없게…….”무덕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러다 뒤를 힐끔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저놈들은 다 뭐야? 부원군의 손자는 둘째 치고 사내행세를 하는 그 계집은 대체 누군데 저렇게 벌떼처럼 달려드는 거야?”성난 짐승처럼 날뛰는 사내와 관군들을 구름처럼 끌고 온 사내 모두 부원군 대감의 손자보다는 사내행세를 하고 있는 계집을 찾아온 눈치였다.

“그 계집, 어디 공주라도 되는 거야, 뭐야?”뒤를 돌아보는 무덕의 눈에 잔인한 빛이 넘실거렸다.

“두고 봐라. 이 방무덕,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잊지 않는다. 오늘의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특히, 그 사내행세를 하던 그 계집, 그 년만은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요절을 내고 말 것…….”복수를 다짐하며 어두운 밤거리를 달리던 무덕이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어이쿠! 이런 썅! 어떤 씨부럴 종자가 어디 감히 이 방무덕이 앞을 가로막……헉!”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정면을 응시하던 무덕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너, 너는……!”무덕과 부딪힌 사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어떻게 네놈이…….”이 녀석이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뒤를 쫓아왔다.

저 온화한 미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 앞에서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섭고 두려웠다.

무덕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 놀랍게도 그는 윤성이었다.

“볼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급하게 가시는 듯하여 구경 삼아 쫓아왔습니다.”눈두덩에 잔 경련을 일으키던 무덕이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이게 누구십니까? 참의영감 아닙니까요. 귀하신 분께서 저 같은 놈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무덕이 힐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혼자 오셨습니까요?”윤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혼자 왔다면요?”“그러시면 진작 말씀을 하실 것이지.”무슨 이유에선지 무덕의 표정이 편하게 풀어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태연하게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여유가 넘쳐 보였다.

윤성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혼자라는 말에 여유를 되찾은 걸까?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다.

무덕에게서는 작은 경계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리 쫓아온 것입니까요?먼지를 툭툭 털어낸 무덕이 물었다.

“무슨 이유인 것 같습니까?”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윤성이 되물었다.

웃고 있는 입과는 전혀 반대로 차갑게 식은 두 눈에 뚜렷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 살기가 짙어지기 시작하는 찰나, 무덕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요? 같은 편끼리.”“같은 편?”뜬금없는 무덕의 말에 윤성이 잠시 살기를 거둬들였다.

숨통을 조이던 무서운 기운이 일순간 사라지자, 무덕이 마른 숨을 토해냈다. 그런 무덕의 앞으로 윤성이 바싹 다가섰다.

“무슨 소리냐? 네놈과 내가 같은 편이라니?”존대가 사라졌다. 봄볕 같았던 윤성의 목소리가 삭막하게 말라있었다.

“에이, 나으리도. 다 아시면서. 이걸 보고도 그리 시치미를 떼실 것입니까요?”무덕이 부원군에게서 받은 엽전꾸러미를 윤성에게 보였다.

“이것과 같은 편이라는 말이 무슨 상관이냐?”“나으리의 조부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그 누구보다 나으리께서 잘 아실 것이 아닙니까요. 그런 분께서 고작 서찰 한 장에 저 같은 놈에게 이 큰돈을 내어주셨겠습니까요?”“…….”윤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덕의 말이 옳았다. 놈의 말대로 할아버지께서는 절대 만만한 분이 아니셨다. 그런 분께서 어찌하여 저자에게 저리 많은 돈을 내어 주신 것일까?

상황에 휩싸여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다.

윤성이 무덕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허면 무엇이냐? 설마, 내 조부께서 네놈과 손을 잡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럼, 나를 납치하라 명을 내린 것도 그분인 것이냐?”“그, 그것은 아닙니다요. 송구한 말씀이시지만, 처음엔 정말로 수하들의 복수를 위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요. 그,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처음엔 나으리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저지른 실수입니다요.”“그런데?”“감히 나으리의 조부께 돈을 요구하러 갔다가…….”설득 당한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아니, 협박당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겠지.

윤성의 서찰 하나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가 수십 명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겠지. 두려움에 떠는 무덕에게 할아버지는 선택을 강요했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을 테냐? 아니면 죽을 테냐?

애초에 인질극 따윈, 통하지 않는 분이었다. 어설픈 수작에 말려들 바엔 차라리 손자를 버릴 것이다. 그런 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분과 어떤 거래를 한 것이냐?”윤성의 목소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쏘아보는 그의 눈빛에 질린 무덕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살을 보태 대답하기 시작했다.

“거래라뇨? 당치도 않습니다요. 저 같은 놈이 어찌 그분과 거래를 하겠습니까요? 그저 나으리께서 하시는 일을 도우라는 말씀을 받았습지요. 나으리께서 고분고분 잡혀 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그저 잡아두는 척하다 놓아주라 하셨습지요. 그렇게만 하면 살려도 주시고 심부름 값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요.”무덕이 엽전꾸러미를 흔들어보였다. 그가 받은 돈은 협상금이 아니라 심부름 값이었다.

“그뿐이냐?”“네. 그뿐이었습니다요.”윤성의 서늘한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게 된 일이군.”소란을 틈타 무덕이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자다. 절대로 무사히 보낼 수 없다 판단하고 뒤를 쫓았다.

잔인하게 복수해 주리라 다짐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라온의 몫까지.

그런데 알고 보니 사건의 배후에 할아버지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조종당한 느낌이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윤성은 꽉 움켜쥐었던 무덕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무덕이 실실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엽전을 주워 담았다.

그 모습을 맥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윤성이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라온이는…….”“네? 라온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요?”“나와 함께 있던 여인 말이다. 라온이를 죽이려 한 것도 할아버지께서 시켜서 한 일이냐?”무덕은 엽전을 줍느라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요.”“아니다?”“나으리의 조부께선 나으리만 무사하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요. 그 계집은 그저, 복수를 한다고 수하들 앞에서 맹세한 것도 있고 해서…….”“날 죽일 수는 없고, 수하들에겐 뭔가 보여주긴 해야겠고. 그래서 라온을 해치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도 네놈은 라온이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더구나.”“아우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니 그만 눈이 뒤집혀서……. 아끼던 분이셨습니까요? 그럼, 죄송하게 됐…… 컥!”잔뜩 말 타래를 늘어놓던 무덕의 입에서 별안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윤성이 돌연 그에게 발길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 나으리. 갑자기 왜…….”갑작스런 사태에 무덕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윤성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성의 눈가로 분노가 용암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굴 죽여?”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무덕의 몸을 타고 앉으며 윤성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해봐, 누굴 죽여? 누굴 죽이겠다고?”“컥……나, 나으리…… 살, 살려 주십시오, 잘, 잘못…….으아아아악!”퍽퍽!

윤성의 주먹이 무덕의 얼굴 위로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흡사 짓이기는 듯한 주먹질에 무덕의 얼굴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코뼈가 부러지고, 앞니가 빠졌다. 얼굴의 구멍 뚫린 곳에선 죄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윤성의 눈에는 그 피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라온이를 죽이려고 했다고? 그 아이를……, 네깟 놈이 감히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어?

라온의 죽음.

이상하게도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을 때보다 더한 한기가 등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아파해 준 사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누군가 자신을 위해 그리 몸 던져 보호해 주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소중했다. 그것이 비록 종이방패처럼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여도…… 좋았다. 심장이 두근댈 정도로 좋았단 말이다.

그런데 죽인다고? 라온이를 죽이겠다고?

윤성의 주먹이 무덕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흡사 광인처럼 휘두르는 윤성의 주먹에 기어이 무덕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무참하게 짓밟힌 무덕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윤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거치적거리는군.”그는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고, 헝클어진 의관을 바로 했다.

후, 마른 숨을 토해내는 윤성의 얼굴에는 조금 전의 광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예의 반듯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머금은 그가 몽혼한 눈빛으로 시린 달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도 네게 손대지 못하게 할 것이니. 너를 취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너를 부숴버릴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뿐이야.”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윤성의 어깨 위로 시린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쓸쓸함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

어떤 비밀과, 어떤 설렘을 간직한 밤이 물러갔다.

다음날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궁궐 지붕 사이로 황금빛 아침 햇살이 맺혔다.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은 제법 차가웠던지라. 전각 아래를 종종 걸음으로 걷는 궁인들은 잔뜩 몸을 움츠렸다.

시린 가을볕이 궁궐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시각.

“어이휴.”그늘진 담벼락 아래에서 탄식 같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쪼그려 앉은 채 연신 바닥에 무엇인가를 썼다 지웠다 하던 장 내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도리질을 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정수리로 떨어지는 느닷없는 목소리에 장 내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홍 내관!”반색하던 그는 힐끔 바닥에 써놓은 글씨를 곁눈질했다.

이내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장 내관은 한쪽 다리를 쭉 뻗어 바닥의 낙서를 쓱쓱 서둘러 지웠다.

“대체 뭘 그리 쓰신 겁니까?”“아하하하, 별거 아니요. 내 생각할 것이 있어서.”웃음으로 얼버무리던 장 내관이 돌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홍 내관이야말로 무슨 일 있었소?”“왜 그리 물으십니까?”“눈 밑의 그늘이 아주 턱까지 내려왔어요.”“사실, 저도 생각할 것이 많아 간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습니다.”휴, 한숨을 쉬며 라온은 장 내관과 나란히 쪼그리고 앉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게요?”“그것이…….”말을 하던 라온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녀는 손을 들어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벌써 몇 시진이나 지났건만.

미련한 그녀의 입술은 영과의 입맞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는 것은 입술만이 아니었다.

간밤의 일을 떠올릴 때며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새의 깃털로 목덜미를 간질이는 듯 목이 옴쳐들었고, 이상하게도 숨이 딱 멈춰지곤 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라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얼굴을 붉혔다.

“홍 내관, 왜 그러시오? 왜 숨을 못 쉬는 겁니까?”“후아, 후아.”장 내관의 호들갑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라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홍 내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 아니오? 낯빛이 많이 붉어요. 어이쿠, 이거 열도 있는 것 같습니다.”“아닙니다.”“아니긴요. 아까부터 아니라고만 하는데, 이거 아무래도 심각한 것 같아요. 고뿔이라도 걸린 게 아닌지……. 이럴 것이 아니라 약방이라도 찾아가 봐야겠소. 아니, 그보다 월희 의녀를 불러 진맥을 한번 짚어보게 하는 것이 좋으려나?”“그런 것이 아닙니다.”“그런 것이 아니라면……대체 왜 이러는 거요?”“제 병은 제가 잘 압니다.”“아는 병이오?”“네. 아는 병입니다.”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충격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나 할까요. 제 입술을 무람하게 침범했던 화초저하 때문에 생긴 병 아닌 병입니다.

그러나 차마 그런 말을 장 내관에게 할 수는 없었던지라.

라온은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무릎에 푹 파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장 내관이 짐작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더는 묻지 않은 채 아까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무언가를 바닥에 썼다 지웠다 하는 장 내관의 곁에서 라온 역시 나무 막대를 하나 들고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하릴없는 하는 단순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런데 장 내관님.”“말씀하시오.”“세자저하 말이옵니다.”“저하께서 왜요?”“어쩌다 그렇게 독특한 취향을 가지시게 된 걸까요?”“독특한 취향이라니요?”라온이 머뭇머뭇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내를 좋아하는…… 그 취향 말입니다.”“아하! 남색을 말씀하시는군요.”“네, 네. 바로 그거 말입니다.”“그게 무에 독특한 취향이겠습니까.”“독특한 게 아닙니까?”“독특하다 생각하시었소?”“당연히 그렇지요. 사내가 사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다른 분도 아닌 세자저께서. 저하께선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장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군주란 무치라 하였지요.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시는 분께 안 되는 일이 무에가 있겠습니까?”“아무리 그래도…….”“듣자하니 대국에서는 황제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내를 용양군이라 부르고 특별히 여긴다 하더군요. 사실, 말이 나와 얘기하는 건데…… 군왕께서 사내를 품는 일은 아주 드문 경우도 아닙니다. 어느 왕실에나 하나쯤 있는, 한 마디로 말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나 할까요.”“그, 그렇습니까?”군왕이 사내를 품는 일이 흔하다고?

역시, 화초저하께서 내게 입맞춤하신 건 날 사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야. 그럼 내 실체를 아신다면 실망하시겠……지가 아니잖아!

라온은 간밤에 자신을 바라보던 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느닷없는 입맞춤이 있고 난 직후.

혹시나 실수로 입맞춤하신 건 아닐까 하여 눈치를 살폈건만. 저하께선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아니, 되레 오랫동안 원하던 것을 취한 듯 흡족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그 눈빛, 마치 연모하는 이를 바라보는 듯 다정하기까지 한 그 눈빛에 가슴마저 설렜다.

혹시, 화초저하께서 날 알아보시고……. 여인으로 날 좋아하시는 건 아닐까?

아무렴, 아무리 독특한 취향을 지닌 화초저하라 하시지만, 사내와 입맞춤까지 할 리는 없지 않겠어?

하지만 장 내관을 통해 알아보니, 군왕이 사내를 품는 건 흔한 일이란다. 가슴 한구석에서 잔뜩 부풀었던 무언가가 픽 하고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괜한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게 아니었다.

라온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홍라온. 오히려 잘된 일이야. 만약, 그분께서 내가 여인인 것을 눈치챘어 봐. 무슨 일이 벌어졌겠어?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된 상황 자체가 잘못된 거잖아. 어쩌면 그 자리에서 의금부로 끌려가게 됐을지도 몰라.

그러니 오히려 들키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해. 그리고 앞으로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라온이 처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분과 거리를 두어야만 해.”그분께서 정말로 날 사내로 생각하고 다가오신 거라면…… 오히려 그분과 멀어져야만 한다.

내가 만약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실망하실 거야. 그리고 분노하시겠지.

그러니 화초저하와 더는 가까워지면 안 돼. 그것이 나와 화초저하, 모두를 위하는 길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안쪽으로 뻐근한 격통이 느껴진다.

“하아아.”라온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채 번민 가득한 마음을 바닥에 의미 없는 낙서로 풀어놓았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은 장 내관 역시, 연신 한숨을 쉬며 글자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아, 화초저하께선 대체 왜 그러셨을까?

그리고 앞으로 그분을 어떤 얼굴로 봬야 하는 걸까?

***

“대체 왜 저럴까?”상열이 담벼락 아래를 턱짓하며 도기에게 물었다.

“글쎄…….”손가락으로 통통한 볼을 두드리던 도기가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그는 제법 매서운 눈길로 담벼락 아래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는 라온과 장 내관을 응시했다.

상열을 비롯한 불통내시들이 숨죽여 도기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 후, 도기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내 보기엔 저 두 사람에게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긴 듯하이.”“그런 말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네.”상열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나저나 도기 자네, 태평관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찌 이리 느긋하게 궁을 돌아다니고 있는 겐가? 자네 하는 양을 보니 청나라 사신들이 돌아간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구먼.”“사실이라네. 아침부터 사신들 짐을 꾸리느라 태평관 곳곳이 난리통이라네.”“사신단의 수장이었던 목 태감이 야반도주하듯 청나라로 돌아가셨으니. 이리 서둘러 떠나는 것도 이해가 되네. 헌데, 듣자하니 사신들 중에 한 분께선 조선에 남는다고 하던데. 대체 뉘가, 무슨 연유로 남는다는 말인가?”“소양공주께서 남는다고 하시네.”“그분께서 왜?”“그 연유를 낸들 알겠는가? 높으신 분들 마음일랑은 도무지 짐작되질 않으니. 그나저나, 상열이. 대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고 하던데. 자네, 뭐 들은 거 없는가?”“나 같은 소환내시가 뭘 알겠는가.”“그래도 오다가다 주워들은 이야기라도 있을 것이 아닌가.”“잘은 모르겠네만, 주상전하께서 큰 결심을 하셨다고 하네.”“큰 결심? 그게 뭔가?”“그걸 내가 어찌 아는가?”“뭐 짐작되는 것도 없는가?”“내가 존귀하신 분의 마음을 어찌 알고 짐작을 하겠는가? 사실 나는 높으신 분들은 둘째 치고 저 두 사람 마음도 짐작이 되질 않네.”상열이 다시 장 내관과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기를 비롯한 다른 불통 내시들 역시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음이 틀림없어.’‘저 두 사람은 청나라 사신들을 대접했었으니, 소양공주께서 남은 이유가 궁금한 거겠지. 그 성격 고약한 공주마마를 어떻게 모셔야 하나 걱정이 태산일 게야.’‘혹시, 주상전하의 큰 결심을 알고 저리 고심하는 건 아닐까?’

***

어느덧 정오가 훌쩍 지났다.

라온은 털레털레 느린 걸음으로 동궁전으로 들어섰다.

오전 내내 최 내관의 심부름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사실, 심부름은 진작 끝났지만 차마 영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부러 늑장을 부렸던 것이다.

늦었다고 지청구 꽤나 듣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어찌 이리 늦은 겐가?”동궁전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최 내관이 빠른 걸음으로 라온에게 다가왔다.

“세자저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다네.”“세, 세자저하께서 왜요?”세자저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자저하께서 왜 날 찾으시는 것일까? 또 무슨 짓을…… 아니, 무슨 행각을 하시려고?

“어서 들어가 보게. 더 지체해서는 아니 되네.”안달 난 최 내관이 머뭇거리는 라온의 등을 떠밀었다.

“잠시만요. 잠시만……!”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최 내관은 영이 처소에 라온을 들여보낸 뒤 등 뒤에서 문을 탁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처소 앞을 지키고 선 궁녀들과 환관들에게 물러가라 손짓을 했다.

일순, 주위가 고요해졌다.

“저 양반이…….”닫힌 문을 뒤돌아보던 라온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얼떨결이긴 하지만 이미 방 안에 들인 발걸음이라. 다시 되돌아 나갈 수도 없었다.

“이제 오는 것이냐?”처소 깊은 곳에서 낮은 울림이 전해졌다.

영은 긴 장방형의 방 안쪽, 적어도 열 걸음은 걸어야 닿을 곳에 앉아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라온이 들어왔음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책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 모습에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라온은 문지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화초저하 때문에 번민하였던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저리도 태연하게 계시는 분인데, 괜히 설레고 가슴 아파하고 그랬구나. 내가 어리석었어.

아무렴, 저분께선 이 나라의 국본이신데…… 하늘만큼 까마득한 곳에 계신 분께 내 존재가 보이기나 할까.

문득 간밤의 일이 아득한 꿈인 듯 느껴졌다. 괜스레 혼자 고민하고 수줍어한 것 같아 심술마저 일었다.

“이러실 거면 왜 그리 찾으신 거람.”힐끔, 영을 곁눈질하던 라온은 들리지 않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영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슬슬 다리가 저려왔다. 버선발에 슬그머니 손을 가져가니 저릿저릿 찌르고 간질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으으으.”옴쳐드는 신음을 흘리던 라온은 서둘러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코에 발랐다. 저린 다리를 슬그머니 폈다 다시 접었다 하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라온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심연의 바다색을 닮은 아득한 영의 눈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어느새 서책 읽기를 끝낸 영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라온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그리 보십니까?”“그리 부산을 떤 거, 널 보아달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었느냐? 그래서 봐 주는 것이다.”크게 선심 쓴다는 말에 라온이 펄쩍 뛰었다.

“신호라뇨? 제가요?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그래?”“네. 절대! 결단코 그런 신호 보낸 적 없습니다.”“그래? 그럼 그렇겠지.”말과 함께 영은 라온을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와라. 어찌 그리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냐?”“하지만…….”가까이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던 라온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절대로 입맞춤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사내가 아닌 게 들킬 것 같아 두려워 그런 것입니다. 절대로.

“가까이 오라는 말, 못 들었느냐?”머뭇대는 라온을 향해 영이 눈빛을 세웠다.

라온은 마지못해 무릎걸음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되었습니까?”“아직 멀었다.”“이젠…… 되었지요?”“아직이다. 내가 되었다고 할 때까지 그 걸음, 멈춰서는 안 된다.”영의 강압에 결국 라온은 그가 앉아있는 서안(書案) 바로 맞은편까지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런데 너, 눈 밑이 왜 이리 검은 것이냐?”“…….”설마 몰라 묻는 것은 아니시지요? 이게 다 뉘 때문인데요? 다 화초저하 때문이 아닙니까? 간밤에 저한테 입……맞춤 하신 걸 잊으신 겁니까?

라온이 빤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다시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묻질 않느냐? 어찌하여 낯빛이 이런 것이냐?”할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에 올릴 수는 없었다. 하여, 라온은 서둘러 둘러댔다.

“간밤에 잠을 설치는 바람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이게 다 화초저하…… 아, 아닙니다.”저도 모르게 속내를 내비치던 라온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단 말이더냐?”영의 미려한 입술 한쪽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는 자신과 라온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작은 책상을 옆으로 밀어냈다.

“마침 잘되었다.”“잘되긴 뭐가 잘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보다 서안은 왜 치우시는 겁니까?”“자려고 치운 것이다.”“네?”성큼, 저를 향해 다가오는 영을 보며 라온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금세 영에게 뒷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나도 간밤에 한숨도 못 잤느니라.”“하, 하오면 주무십시오.”“그런데 막상 잠을 청하러 눈을 감으면 잠이 오질 않는단 말이지.”“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함께 자자.”“저랑 자자는…… 말씀입니까?”또 같이 자잔 말씀입니까?

라온이 잔뜩 울상이 되어 영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마주 내려 라온을 응시하던 영이 물었다.

“왜? 무에 할 말이라도 있느냐?”라온이 아랫배에 한껏 힘을 주었다. 불끈 주먹까지 말아 쥔 그녀가 목소리를 짜냈다.

“이건…… 옳지 않습니다.”“옳지 않아?”“네. 저하께서는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뭐라?”“저하께선 이 나라의 세자저하이시질 않습니까? 전에 제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하께선 제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시질 않으셨습니까? 하여, 저는 지금도 저하께서는 제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런 분?”“그러니까…… 사, 사내를 좋아하…… 그것 말입니다.”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사내를 좋아하게 되었구나.”“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저하께서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래, 그랬지.”“지금 행동은 그 말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나도 내가 이런 줄 몰랐다. 그런데 알고 보내 내가 이런 사람이더구나.”말이 끝남과 동시에 병아리를 낚아채는 수리 매처럼 한순간에 라온의 허리춤을 낚아챘다. 그 서슬에 라온의 관모가 바닥을 또르르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은 그대로 라온과 함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 그러니 좀 자야겠다.”등 뒤에서 라온을 끌어안은 영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졸지에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의 감옥에 감금당한 라온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화초저하…….”저는 사내가 아닙니다. 나중에 여인인 걸 알게 되시면 실망하실 겁니다. 그러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지 마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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