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달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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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무덕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의 눈동자엔 라온을 꼭 끌어안고 있는 병연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사내는 수십 명이나 되는 무덕의 수하들로 만든 둥근 포위망을 새처럼 뛰어넘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길 없는 사내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무덕에게 위협 받고 있던 라온을 구해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뒷골목을 수십 년 동안 전전했던 무덕이지만 저놈처럼 대단한 놈은 처음이었다.
이쪽의 수가 보이지도 않는 것인가?
우릴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겁을 상실한 거야?
무덕은 둘 모두라고 판단했다.
감히 이 방무덕이를 무시해?
무덕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살의를 품은 그가 병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이 죽으려고 아주 환장을 했구나. 어디서 이 어르신의 행사를 방해해? 좋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 오늘 적선하는 셈치고 네놈을 죽여주마. 뭣들하고 있는 거냐? 당장 저놈의 목을 따버리지 않고.”무덕은 제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제일 먼저 저 잡놈의 목을 가져오는 아우에겐 내가 한 몫 뚝 떼어 줄 것이다!”부원군 대감에게서 윤성의 몸값을 단단히 받아내고 온 길이라. 무덕의 인심이 보기 드물게 후했다.
“내 오늘 하룻강아지 같은 네놈에게 세상 무서움을 알려주마.”무덕이 병연을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사내의 기세가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쪽은 무려 쉰 명이 넘었다.
“쳐라!”와아아아, 거친 함성과 함께 수십 명의 거친 왈짜패들이 병연을 향해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병연을 찢어발겨 버릴 듯 그 기세가 흉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흐흐흐.”무덕이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놈, 머저리 같은 놈. 제 실력 하나만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덤벼들다니.”제깟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수하들에게 포위된 이상, 별수 없을 것이다.
무덕은 품 안에 있는 묵직한 엽전 꾸러미를 만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돈도 벌었고, 뒷정리만 끝내면 되겠구나. 그나저나 이 돈으로 뭘 한다?”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새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그 돈으로 관이나 여러 짝 주문하면 되겠구나.”낯선 목소리에 무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병연이었다.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무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네가 어떻게?”분명 수하들이 녀석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한창 수하 놈들에게 둘러싸여서 고전을 치루고 있어야 할 놈이 어떻게 내 앞에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의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무덕은 이내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병연을 향해 달려들었던 수십 명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들 목숨 줄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칼을 들고 싸울 형편도 안 돼 보였다.
“언제 이렇게?”병연을 바라보는 무덕의 눈에 문득 두려움이 들어찼다.
일평생을 몸으로 살아온 그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로 죽을 수도 있다.
무덕은 금세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아이고, 형님. 이 아우가 귀한 형님을 몰라 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요. 부디 이거 받으시고, 이 아우의 불찰을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진정으로 반성하는 듯 고개까지 숙인 무덕이 음충맞은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병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뇌물이라니. 과연, 뼛속까지 썩은 놈이구나.
그 순간.
“이거나 받아 처먹어라!”무덕이 꾸러미를 병연을 향해 집어던졌다.
퍽!
작은 소음과 함께 꾸러미가 열리고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콜록콜록.”“으아아아, 내 눈.”근처에 있는 무덕의 수하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꾸러미 안에 있었던 것은 하얀 밀가루와 매운 고춧가루, 그리고 그밖에 잡다한 것을 섞어 만든 기이한 가루였다.
매운 가루가 병연의 눈으로 쏟아졌다.
뜻밖의 공격에 병연은 서둘러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입자가 고운 매운 가루는 병연의 눈과 코로 스며들었다.
덕분에 아주 잠깐이었지만 병연의 시야가 봉쇄되었다.
“이런!”허점을 보였다는 사실에 병연의 입에서 불쾌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무덕이 이번에는 병연의 발치로 부원군 김조순에게서 받았던 엽전 중 절반을 흩뿌렸다.
“여기 돈이 있다. 이 돈은 먼저 집어가는 놈이 임자다!”이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수하들이 벌떼들처럼 일어섰다. 서로 먼저 돈을 갖겠다며 달려드는 수하들을 방패막이 삼아 무덕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
“이런 망할! 큰 형님이라는 새끼가 제일 먼저 도망질을 쳐?”무덕이 저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는 모습에 섬돌은 이를 아득 갈았다. 병연의 칼끝에 다리를 베인 섬돌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끙끙 대던 참이었다.
병연은 섬돌을 비롯한 왈짜패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언제, 어디서 당했는지 자각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고 정확한,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였다.
그런 고수를 눈앞에 세워둔 채 돈에 눈이 멀어 개떼처럼 아우성거리는 동료들을 보며 섬돌은 눈에 불을 켰다.
“이게 다 안방샌님 같은 미친놈 때문이야. 그놈이 우리 덕칠이 형님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덕칠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힘없는 놈들의 등을 쳐서 배를 불리고 있었으리라.
이렇듯 살 떨리는 싸움의 한복판이 아니라 어느 기생 년의 품속에서 노닥거리고 있었을 거란 말이다.
분한 생각에 섬돌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윤성을 찾았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라온의 곁에 서 있던 윤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은 그새 어디로 샌 거야?”서둘러 시선을 돌리던 섬돌이 문득 분주하게 움직이던 시선을 멈췄다.
그의 눈에 무덕이 뿌린 매운 가루 때문에 연신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라온이 들어왔던 것이다.
섬돌은 이번에는 병연에게로 눈을 돌렸다.
사나운 맹수처럼 거칠게 날뛰던 병연 역시 매운 가루와 돈을 차지하기위해 아귀처럼 달려든 무덕의 수하들로 인해 발이 묶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두 다리가 성했다면 자신도 무덕을 따라 당장이라도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병연의 칼에 종아리를 베인 섬돌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줄행랑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씨벌, 그렇다면 이판사판이야!”섬돌은 절룩거리며 라온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라온은 매운 가루 때문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섬돌은 살금살금 라온의 곁으로 다가가 와락 그녀의 목덜미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병연을 향해 소리쳤다.
“들고 있는 칼 내려놔. 안 그럼 이 새끼 목숨은 없어!”
***
또 이렇게 되었구나.
라온은 목덜미에 닿아있는 날카로운 칼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위협을 받다니. 두 번째라 그런지 이번엔 겁도 안 나네.
그때 라온의 목에 칼을 겨눈 섬돌이 다시 한 번 위협했다.
“이 새끼야! 칼 버리라고! 내 말 안 들려?”치열하던 싸움판에 갑작스런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병연이 섬돌과 라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분노와 번민, 그리고 갈등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섬돌이 이를 갈아 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육시랄 놈아! 칼 버려! 안 버려? 내가 못 할 거 같아? 이 새끼 목 따고 나도 콱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왜? 한번 보여줘?”철그렁.
병연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던졌다.
검을 버리면 어찌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놈의 눈빛에 서린 독기와 광기.
번들거리는 놈의 눈빛은 지금의 상황이 단지 협박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구석으로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도 하지 않던가. 놈은 정말로 라온을 죽일 생각이었다.
라온이 잘못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제 눈앞에서 라온이 죽는 걸 볼 바엔 차라리…….
‘안 돼!’병연이 검을 버리는 것을 보며 라온은 속으로 소리쳤다.
김 형이 검을 버리다니. 그것도 나 때문에.
병연의 주위로 슬금슬금 다가가는 왈짜패들의 모습이 보였다.
검을 버린 병연은 그들에겐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먹이였던 승냥이가 이젠 역으로 호랑이를 먹이로 생각하고 덤빌 심산인 것이다.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나 때문에 김 형을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잠시 생각하던 라온이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으아아악!”섬돌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라온이 제 목을 휘감고 있던 섬돌의 팔뚝을 힘껏 물어 버렸던 까닭이다.
“이 개자식이! 지금 누굴 물어? 내가 우습게 보이냐? 이 개자식아! 네가 인질이라고 내가 널 못 죽일 거 같아? 이런 염병! 보여줘? 보여줄까? 내가 정말 죽이는지, 못 죽이는지, 보여줘?”공포로 반쯤 미쳐버린 섬돌이 들고 있던 칼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라온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섬돌의 팔을 물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다. 아니, 김 형이 자신을 위해 검을 버리는 순간,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을 예감하며 라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피리리릿! 퍽!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라온을 향해 내달리던 섬돌의 칼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쨍그랑,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섬돌이 지르는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으아아악!”손목을 쥐어 잡은 채 소리를 지르는 섬돌의 팔목에는 화살 한 대가 박혀 있었다.
“이런 젠장할! 이런 염병! 이런 육시랄! 이게 대체 어디서 날아온 화살이야? 어떤 미친 새끼가 사람한테 화살을 쏴?”섬돌의 눈에 푸른 광채가 피어올랐다.
“죽인다! 다 죽인다! 다 죽여 버릴 거야!”섬돌이 광폭한 외침과 함께 라온을 향해 달려드는 찰나.
퍽! 퍽! 퍽!
연달아 날아온 세 발의 화살이 섬돌의 양 허벅지와 화살이 박히지 않은 다른 편 손목까지 뚫어버렸다.
“헉!”눈 깜짝할 사이, 자위(刺蝟:고슴도치)가 되어버린 섬돌을 보며 라온은 마른 비명을 안으로 삼켰다.
그녀는 놀란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이윽고 라온의 시야 끝에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말 위에 앉아 있는 한 사내가 들어왔다.
푸른 달빛을 닮은 차가운 사내, 다름 아닌 영이었다.
“내가 벌써 죽었나?”이건 죽어서 꾸는 꿈이려나?
라온은 손등으로 연신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보아도 영의 모습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비면 비빌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라온과 시선을 마주한 채 영은 들고 있던 활에 또 한 대의 화살을 걸었다.
푸른 달빛 때문인가? 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게 얼어있었다.
영의 서늘한 냉기를 고스란히 품은 활은 시위를 떠나 곧장 섬돌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퍽!
“……왜?”피를 토하는 섬돌의 입에서 외마디 의문이 튀어나왔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그의 앞으로 영이 다가왔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린 죄다.”“내 사람……?”영의 말에 섬돌은 영과 라온을 번갈아보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결국, 섬돌은 생의 마지막을 후회와 동행하게 되었다.
***
말 위에 앉아 섬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영이 이번에는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냐?”걱정스레 물으며 영은 훌쩍 말 위에서 뛰어 내렸다.
“네, 괜찮습니다.”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목숨을 위협 받았던 터라. 양 어깨가 떨리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반듯하던 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고집불통 같으니라고.”그는 입고 있던 도포자락을 벗어 라온을 감싸 주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지켜보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아 이러는 것이다. 그러니 걸치고 있어라.”“하지만 날이 춥습니다.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시면…….”“입어라. 명이다.”단 한 마디로 라온의 반항을 일축한 영이 시선을 돌렸다.
수십 명을 상대하고 있는 병연이 들어왔다.
“도와주랴?”그가 병연에게 소리쳤다.
“되었습니다. 저하의 뒤를 따라 다니는 호위 무사 정도만 빌려주시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니, 저하께서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정히, 도와주고 싶으시다면…….”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끊임없이 달려드는 왈짜패를 상대하며 병연은 말을 이었다.
“그 성가신 녀석 좀 데리고 사라져 주십시오. 그 녀석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라온에게는 손에 피 묻히고 있는 모습일랑은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성난 짐승처럼 날뛰고 싶지 않았다.
하여, 평소라면 진작 처리하고도 남았을 뒷골목 왈짜패를 상대로 이리 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싸움을 끝내고 싶다는 병연의 의지가 영에게로 전해졌다.
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들었느냐?”“하지만 어찌 김 형 혼자만 남겨 둔단 말입니까?”“내 호위무사들이 남아 도와줄 것이야.”“그래도…….”말이 채 끝나기도 전.
라온을 가볍게 안아든 영이 말 위로 올라탔다. 그녀를 제 앞에 바로 앉힌 그는 그대로 발을 굴렸다.
잠시 후, 잘 조련된 영의 흑마가 빠르게 들판을 가로질렀다.
이 두 사람이 사라지고 얼마 후, 너른 풀숲에 피안개가 피어올랐다.
***
달빛 아래.
두 남녀를 태운 흑마가 호젓하게 걷고 있었다.
말없이 한참을 걷던 영이 진정된 듯 보이는 라온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어찌 된 일인지 연유를 물어보는 영의 물음에 라온이 지금까지의 사연을 늘어놓았다.
“그래, 그렇게 된 일이구나.” 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안도의 한숨도 함께 새어나왔다.
정말로 큰일을 겪었구나. 라온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이 녀석이 잘못 되었더라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라온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참의영감님은 어디로 가신 거지?”윤성의 이름이 거론되자 영이 버릇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윤성, 그 녀석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녀석의 속셈은 대체 무엇일까? 무슨 마음으로 라온의 곁을 맴도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앞으론 라온의 곁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포를 놔야겠군.
생각을 굳히며 영은 앞에 앉아있는 라온을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흑마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라온의 하얀 목덜미가 하늘 은하수처럼 그의 눈동자에 부서졌다.
일렁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향긋한 향내가 코끝으로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발밑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마치 한 몸인 듯 보였다.
그 오붓한 그림자를 보며 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라온이 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꼭 그날 같습니다.”뭔가를 떠올린 라온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함께 잠행 나왔던 날, 기억하십니까? 제가 명온 공주마마께 잡혀갔던 그날 말입니다.”“기억난다.”“그때도 꼭 이랬습니다. 그때도 저하께서 구해주셨고, 이렇게 함께 궁으로 돌아갔습니다.”“그러고 보니 그랬구나.”하지만 그때는 네가 여인인 걸 몰랐었지.
그때 여인인 줄 알았으면 내 고심도 덜 했을 것을.
라온이 사내인 줄로만 알던 그때, 자꾸만 라온에게 마음이 기울던 스스로를 얼마나 질책했던가.
한때는 라온을 보지 않으려 자선당으로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날들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리 마음고생 하였건만.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라온이 조금은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불퉁한 마음도 잠시잠깐뿐.
이내 라온이 무사히 돌아왔음에 감사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사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라온이 참으로 장해보였다.
자칫했으면 이 녀석을 잃을 뻔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새삼 품안에 안겨 있는 라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늘 일로 결심했느니.”영이 고삐를 단단히 말아 쥐며 말했다.
“무얼 말입니까?”“다시는 너를 내 눈밖에 두지 않기로 말이다.”의미심장한 말을 너무도 태연히 하는 영을 라온은 열없는 눈길로 응시했다.
“화초저하, 요즘 부쩍 농이 느신 것 같습니다.”“맹랑한 녀석, 감히 왕세자의 말을 농이라 치부해 버려?”“하지만 방금 하신 말씀이 농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눈을 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 내 어찌 너를 밖에 내놓고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내 시야 닿는 곳에 항상 있어라. 내가 눈길 돌리며 바로 그곳에 네가 있어야 한다.”“…….”화초저하, 그거 아십니까?
방금 전의 그 말이 얼마나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인지 아십니까?
마치 연정을 품은 사내가 여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듯한 말이라.
라온의 두 뺨이 저도 모르게 발그레 달아올랐다.
화초저하께선 분명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붉어진 라온의 얼굴을 보며 영이 빙긋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싫다 않는 것을 보니, 너도 내심 그리 하고 싶었던 건 아니냐?”“그, 그럴 리가 없질 않겠습니까?”“그런 것이 아니었어? 그럼 무엇이냐? 어찌 이리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냐?”“얼굴이 붉다니요. 누가 붉다고 그러십니까?”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라온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부정했다.
순간!
휘이이이이이잉!
높아진 목소리에 놀란 듯, 흑마가 갑자기 앞발을 들고 더운 콧김을 뿜어냈다.
“아앗!”그 서슬에 놀란 라온은 행여 말에서 떨어질까 영의 가슴팍에 바짝 매달렸다.
영이 흑마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놀란 말을 진정시켰다.
“이제 되었다. 안심해.”말이 진정되자 영은 이번엔 라온을 안심시켰다.
어린 짐승처럼 제 가슴에 한껏 안겨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입가를 길게 늘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의 뇌리에 들어찼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라온이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송구합니다, 저하.”놀라 벌어진 라온의 눈동자엔 유백색의 달빛이 그대로 수놓아져 있었다. 붉은 입술이 열릴 때마다 전해지는 아릿한 숨결이 그의 턱을 간질였다.
일순, 영의 심장이 뛰었다. 느닷없는 욕망이 그를 잠식해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 영의 눈에는 오직 라온만이 보였다.
제 턱을 여리게 간질이는 그녀의 숨결을 죄 자신의 입 안에 가두고 싶은 열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송구합니다. 정말 송구합니다.”영의 굳어진 표정을 오해한 라온은 당황했다.
화난 것일까? 귀한 말을 놀라게 해 노여움 타신 것일까?
“화초저하,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라…….”문득 라온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왜?
라온은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영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
왜? 왜?
머릿속의 의문을 채 풀기도 전에, 영의 입술이 라온의 입술 위로 맞닿았다.
봄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영의 입술은 라온의 입술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다 떨어졌다.
느닷없는 입맞춤.
“왜? 왜 이러십니까?”라온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놓아주십시오, 저하.”라온은 불에 덴 사람처럼 황급히 도리질을 치며 영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영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욱 단단히 결박했다.
한 손으로는 작게 저항하는 라온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은 도리질하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저, 저하…….”라온의 입술 위로 영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영을 부르는 라온의 목소리는 그대로 그의 입 안에 봉인되었다.
이촉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감촉, 혀끝에 매달린 달콤한 향내.
날카롭게 날을 세운 그의 혀가 무람없이 라온의 입속을 침범했다. 놀라 벌어진 그녀의 붉은 입속을 그는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휘젓기 시작했다.
순간, 라온은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천상의 세상에 발을 디딘 듯, 온몸이 나른해졌다.
손끝으로, 발끝으로 전신의 모든 기운이 새어나가는 것만 같았다.
저항하던 라온의 몸짓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놀라 부릅떠져 있던 그녀의 눈이 살며시 감겨졌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하얀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구름에 달빛 저무니
여윈잠 서러워라.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리니.
그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