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너…… 괜찮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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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
돌아보면 행복한 시절도 있었다.
아스라이 멀어진 기억 속엔 소리 내어 웃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내 할아버지의 면전에 침을 뱉는 글로 장원 급제한 그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역적의 무리에 동조한 배신자의 손자였고, 조부를 향해 날 선 조소를 날린 세상에 둘도 없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
나의 근원에 대해 철저히 부정한 내가 어찌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인가. 한때는 나를 가리켜 어린 신동이라 칭송하던 세 치 혀들이 나를 조롱했다.
당연한 비난이었고, 당연한 조롱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더러운 오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 역한 기분을 견뎌 낼 수가 없었다.
하여, 나는 나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듯 그렇게 하나씩 나와 닿았던 인연들과 이별하였다.
귀 막고, 눈 막고, 입마저 닫아버린 세상엔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외롭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그런 감정마저도 내게는 사치였다.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야 했다.
외롭지 않고 외로워야 했다.
한 줌 바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을 부유하는 구름이 되고 싶었고, 티끌 같은 먼지가 되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기에 마음 둘 곳도, 기댈 곳도 두지 않았다. 세상에 미련 두지 않은 채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내 삶에 그 녀석이 뛰어들었다.
홍라온.
사내의 모습을 했으나 사내가 아닌 녀석.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내 곁을 맴돌던 녀석이 귀찮았다. 성가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쫓아낼 수가 없었다.
내 곁에서 떨어져라 소리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내게 건넸던 죽 한 그릇 때문이었을까?
녀석의 온기가 조금씩 나를 침범해왔다.
무채색이었던 삶이 조금씩 색을 띠기 시작했고, 죽은 듯 고요하던 일상에 생기가 깃들었다.
세상에 아무런 미련 없던 내게 미련이 생겨났고, 이 지리멸렬한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차갑게 굳어있던 심장이 거칠게 날뛰는 것도 모두 녀석 때문이었다.
작고 조그마하여 손에 쥐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녀석.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의 여유와 사치도 허락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 살아내는 녀석을 위해 나도 살아가고 싶어졌다.
그런 녀석이 사라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내 심장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한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공허였다.
또 다시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너를 잃을 수는 없다.
이대로 허무하게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홍라온, 라온아! 너 어디에 있는 것이냐? 대체 어디에……?
“이곳입니다.”앞서 달리던 박만충의 허름한 헛간을 가리켰다.
순간, 병연의 눈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너, 거기 있는 거야? 홍라온, 너 거기 있어?
병연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허공을 날아올랐다.
이윽고 단단하게 잠겨 있던 나무문이 그의 발끝에 산산조각 나 무너졌다.
***
쾅!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헛간 문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놀란 라온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떨어져나간 문짝 너머로 긴 그림자가 보였다.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무덕과 그 수하들이 험악한 인상을 드러냈다.
“이런 썅!”심기가 불편했는지 무덕의 입에서는 다짜고짜 욕지거리부터 터져 나왔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켠 그가 라온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이 쥐방울만 한 놈의 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수작질이라뇨?”“수작질이 아니면? 네놈 때문에 우리가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알아?”“설마, 부원군 대감께서 나 몰라라 하신 겁니까?”라온의 물음에 무덕이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이 망할 자식아. 만나 보지도 못했다.”“그건 또 무슨 말씀인지……?”묻는 라온의 목소리 사이로 윤성이 끼어들었다.
“그것이 어찌 그 사람 잘못이라고 그럽니까?”“뭐야?”무덕이 미련한 눈망울을 윤성에게로 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윤성이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부원군 대감을 찾아가 내가 이 댁의 손자를 납치했다고 한 당신들이 멍청한 것이지, 어찌 애먼 사람에게 행패를 떠는 겁니까?”“이런 쳐 죽일 놈의 자식이. 어디다 대고 입을 놀리는 거야? 앙?”뜻밖의 도발에 무덕은 라온의 멱살을 놓고 대신 윤성의 목덜미를 힘껏 낚아 쥐었다.
“어디 다시 한 번 주둥이 놀려봐라. 뭐가 어찌 되었다고?”“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내 집안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다섯 살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이지요. 내 집안과 연줄을 대려는 자들이 조선 팔도에 차고 넘칩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도 수십 명의 객들이 찾아오고, 그 중에는 당신들처럼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도 더러 끼어 있지요.”“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을 해도 모자를 판에. 어디다 대고 미친놈이라는 거야?”“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면 살려 줄 겁니까?”“뭐?”그때 윤성이 무덕의 귓가에 바싹 입을 가져갔다.
“애걸복걸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네놈이야.”윤성은 무덕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헛소리야?”“내 할아버지께서는 생각보다 집념이 강한 분이시지. 그런 분께서 귀이 여기는 손자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말겠느냐? 아마도 어떻게든 네놈들을 찾아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살고 싶다면 나와 저 사람을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윤성의 겁박에 일순간 무덕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분명 눈앞에 있는 윤성은 안방샌님처럼 순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무덕을 엄습해왔다. 일평생을 칼 밥을 먹고 살아온 그가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에 무덕은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수하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정색하며 윤성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아직까지 무슨 상황인 줄 파악이 안 된 거야? 내가 누군 줄이나 알아? 나 장무덕이야. 내가 너희 같은 양반 놈을 무서워했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나를 협박해? 지금 당장 사지를 갈가리 찢어 죽여줄까?”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덕의 손에 잡혀있던 윤성이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제 성화를 이겨내지 못한 무덕이 윤성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으윽!”구겨진 종이처럼 바닥을 뒹구는 윤성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무덕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윤성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이렇게라도 분을 풀 심산이었다.
“이 망할 놈의 안동 김가의 종자! 죽어라! 죽어!”퍼퍽!
거친 발길질에 윤성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저리 두었다간 사람 죽겠다 싶었다.
다급해진 라온은 구르다시피 하여 윤성의 곁으로 기어갔다.
“그만 하십시오. 이러다 진짜 죽겠습니다.”“이건 또 뭐야?”온몸으로 윤성을 끌어안은 라온의 등 뒤로 무덕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사정을 두지 않는 무덕의 매질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 모습을 본 윤성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만해!”“이런 개종자 같은 놈이. 그만하라면 내가 그만둘 것 같으냐?”라온에게 가해지는 발길질이 더 거칠어졌다.
윤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온이 당하는 모습을 보자, 오래전에 잊었던 감정 하나가 불쑥 목구멍으로 튀어나왔다.
으드득. 이를 갈아붙인 윤성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내 할아버님께 서찰을 쓰겠습니다.”“뭐야?”“내가 쓴 서찰만 있으면 할아버님과 독대할 수 있을 것이고, 돈도 원하는 만큼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윤성의 말에 무덕이 발길질을 멈췄다.
“이번에도 헛걸음치게 하면 알지?”잔뜩 윽박지른 무덕은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짓을 받은 수하가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다가 이내 지필묵을 챙겨 들고 나타났다.
“우리 쪽에도 글 줄 좀 읽는 놈들이 있단 말이지. 허튼 짓거리 하면 당장에 죽을 줄 알아.”무덕은 윤성의 손을 묶어놓은 밧줄을 풀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윤성은 헛간 구석에서 낮게 신음을 흘리고 있는 라온을 돌아보며 서둘러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나 웃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하셨습니까?”서찰을 받아낸 무덕이 수하들이 사라지자 윤성은 황급히 라온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홍 내관.”윤성은 대답 대신 라온의 안부를 물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 듯 길게 날숨을 내쉬며 라온이 대답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신 겁니까? 그러다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그러는 참의영감께서는 왜 부러 놈을 도발하신 겁니까?”무덕이 라온의 멱살을 잡고 있을 때, 윤성이 의도적으로 그를 도발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온에게 향했던 무덕의 성화를 윤성은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그리하였던 것이다.
“아셨습니까?”“모르면 바보지요.”“바보처럼 모른 척 좀 해주시지. 홍 내관 덕에 제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네?”“모처럼 홍 내관을 위해 뭣 좀 해보려 했는데. 이렇게 저를 감싸다 매를 맞으셨으니. 제 노력이 헛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닙니까.”사뭇 토라진 사람처럼 입을 삐죽거리는 윤성을 보며 라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농이 나오십니까?”“하하, 이번에도 눈치챈 겁니까? 홍 내관이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 제가 농 한번 해 보았습니다.”“그 얼굴을 하고 잘도 웃으십니다.”무덕의 발길질에 찢어진 윤성의 눈가에선 연신 피가 흘렀다.
“아프지 않습니까?”라온의 물음에 윤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픕니다. 정말 죽을 만큼 아픕니다.”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아픔을 호소하는 윤성을 보며 라온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그치고 그를 응시했다.
윤성의 얼굴은 말 그대로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죽을 만큼 아프다는 그의 농담이 그저 라온을 웃기기 위한 말만은 아닌 듯했다.
“어떡합니까? 눈가의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손이라도 자유로워야 어찌 살펴드리기라도 할 텐데.”뒤로 묶여 있는 손을 돌아보며 라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입니까?”윤성이 느닷없이 물어왔다.
“네?”“손이 자유로우면 절 살펴주신다는 그 말,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윤성이 양손을 반짝 들어 보였다.
“어? 어떻게 푼 겁니까?”아무리 애를 써도 꼼짝도 않던 밧줄을 대체 어떻게 푼 것일까?
“좀 전에 서찰을 쓰고 다시 손을 묶을 때 조금 느슨하게 묶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맷자락에 있던 단도를 꺼낼 수가 있었습니다.”“단도요? 원래 그런 걸 들고 다니셨던 겁니까?”“세상이 너무 험해서요. 예조참의쯤 되면 가슴에 칼 한두 개는 기본으로 품고 다녀야 하지요.”“아, 그런 겁니까?”예조참의가 칼 한두 개를 품고 다니면, 우리 화초저하께서는 몇 개나 품고 다니셔야 하나? 열 개? 아님 스무 개?
라온이 스무 개의 칼을 차고 다니는 영을 상상하는 동안, 윤성은 제 발목을 묶고 있는 밧줄은 물론이고 라온을 묶고 있던 밧줄까지 모두 잘라냈다.
손발이 자유로워진 라온은 제일 먼저 윤성의 상처부터 살폈다.
“생각보다 많이 찢어졌습니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흉터가 남겠습니다.”라온은 소맷자락으로 윤성의 이마에 흐르는 핏물을 연신 닦아냈다. 그녀의 손이 닿을 때마다 윤성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프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대로 두면 큰일 날 것 같단 말입니다.”“아픈 것이 아니라…….”윤성이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게 되는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안 되겠습니다. 피가 멎지 않으니, 일단 상처를 감싸야겠습니다.”아쉬운 대로 라온은 길게 찢은 옷자락으로 윤성의 이마를 질끈 동여맸다. 이 일련의 행동들을 하는 동안 윤성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라온의 손길이 이마에 닿을 때마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이마가 뜨거워졌다. 라온이 그의 이마를 지혈하기 위해 바싹 다가왔을 땐, 심장이 멈춘 듯했다.
순수하게 걱정하는 눈빛. 그의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라온의 표정.
일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온정에 윤성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굳어 있던 윤성은 체머리를 흔들어 주위를 환기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뭘 하시려고요?”뒤따라 일어선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은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겠습니다. 마침 헛간 문이 부서졌으니, 생각보다 일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하지만…….”반쯤 무너져 내린 헛간 문밖을 빠끔히 내다보던 라온이 윤성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밖에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녀의 옴쳐드는 목소리에 윤성이 덩달아 헛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 졸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리 보이는 것도 같은데. 그러다 졸지 않으면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그 전에 놈들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그렇지만…….”“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꽤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하였습니다. 행여, 들키게 된다면 제가 다 해치우겠습니다.”“정말입니까? 정말 무술을 연마하신 겁니까?”혹시 참의영감도 김 형처럼 숨은 고수?
라온은 은근히 기대하며 윤성을 바라보았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윤성이 얍, 얍, 작게 입소리를 내며 몇 가지 자세를 취해 보였다.
“어릴 적부터 호신용으로 배운 것이라 딱히 써먹은 적은 없지만…….”“아, 호신용이었군요.”어쩐지 어설프더라니.
라온의 눈에 가득했던 기대감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대신 그 자리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참의영감께서 그냥 여기에 계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나가서…….”“어허! 이런 궂은일은 본래 사내가 하는 겁니다. 연약한 홍 소저께선 뒤로 물러나십시오. 제가 순식간에 해치우고 돌아오겠습니다.”라온이 말릴 새도 없이 윤성은 헛간 밖으로 나섰다.
그는 곧장 헛간을 지키는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어? 네놈이 어찌?”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헛간을 지키던 사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쉿! 그렇게 크게 떠들면 안 자는 게 들통 나지 않습니까.”낮게 속삭이던 윤성이 사내의 뒷덜미를 가볍게 내리쳤다.
사내는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윤성이 다시 라온이 기다리고 있는 헛간 안으로 돌아왔다.
“어찌 되었습니까?”헛간을 지키던 자가 서 있던 자리가 하필이면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라. 궁금했던 라온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정말로 자고 있습니다. 조용히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아, 정말 잘 되었습니다.”“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네.”라온은 윤성의 뒤를 바싹 뒤쫓았다. 행여 등 뒤에서 무덕과 그의 수하들이 따라붙지는 않을까 하여 내딛는 걸음이 다급하기만 하였다.
잡초밭 한가운데 있는 헛간을 나와, 웃자란 잡초들을 방패삼아 얼마나 걸었을까?
라온과 윤성이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걸어왔다.
부원군 대감댁에서 돌아오는 무덕 일행이었다. 이번에는 일이 잘 풀린 듯, 히히덕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순, 라온은 숨을 멈췄다. 행여 들킬세라, 라온과 윤성은 숨을 죽인 채로 그들이 헛간 쪽으로 사라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무덕 일행이 보이지 않게 되자 라온은 윤성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좀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우리가 사라진 걸 아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급히 걸음을 옮기며 라온은 윤성을 재촉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윤성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홍 내관, 먼저 가십시오.”“무슨 말씀입니까?”“이제 알았는데. 중요한 것을 헛간에 흘린 것 같습니다.”“네? 하지만 지금 되돌아갔다간 다시 잡힐지도 모릅니다.”“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겐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 이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나중에…… 나중에 찾으면 안 되겠습니까? 잘못하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릴 적부터 호신용으로 무술을 배웠다고요.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홍 내관, 먼저 이곳을 피하십시오.”제 소맷자락을 잡고 있는 라온을 떼어낸 채 윤성은 헛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라온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라온의 앞에서는 마냥 해맑게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서늘하게 돌변했다. 무덕이 라온을 거칠게 발길질하던 기억이 그의 뇌리에 가득했다.
감히, 내 먹이를 건드려?
그러나 헛간 근처에 다다랐을 때, 윤성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뒤를 꼬박연의 꼬리처럼 따라붙은 작은 그림자 때문이었다.
라온이었다.
“아니, 왜 따라오신 겁니까?”라온을 돌아보는 윤성의 눈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어,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네? 설마, 제가 걱정돼서 쫓아왔단 말입니까?”“당연하지요.”제법 대차게 말하고는 있지만 윤성의 옷자락을 잡은 라온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겁을 내고 있으면서.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따라오다니.
일순, 윤성의 미간이 왈칵 일그러졌다.
“홍 내관은 바보입니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이런 사지를 따라온 겁니까?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납치도 같이 당했으니, 빠져나가는 것도 당연히 함께 해야지요. 제가 설마 참의영감을 버리고 갈 정도로 무심한 사람인 줄 아셨습니까?”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라온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뭔가 가슴에 켜지지 말아야 할 빛이 켜졌다.
알큰한 기운이 코끝에 맺히는가 싶더니 어이없게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느닷없는 감정에 윤성은 당황했다.
“하지만 홍 내관은…… 당신은 여인이질 않습니까?”그의 말에 라온이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윤성을 올려보며 말했다.
“목숨에 여인과 사내가 무슨 상관입니까?”“…….”“여인인 저의 목숨이 귀하면 사내인 참의영감의 목숨 또한 귀한 것입니다.”“그런 뜻이 아니라…….”“혹여 참의영감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저는 일평생을 웃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웃으며 살고 싶어 따라온 것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웃고 싶어서요.”“홍 내관…….”“아무리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함께 잡혀 왔으니, 함께 돌아갈 겁니다.”다짐하는 라온의 어깨에 윤성이 손을 내릴 때였다.
“이거, 정말 눈물 없이는 못 볼 광경이군.”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느 틈엔가 무덕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윤성과 라온의 주위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
“언제?”“그리 소란을 떨고도 모를 정도로 바보천치인 줄 알았더냐?”무덕이 입가를 뒤틀며 말했다.
윤성이 라온의 앞을 가리며 물었다.
“몸값은 받아냈습니까?”“몸값? 주더군. 부원군 대감, 과연 통이 크더군.”무덕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윤성이 그를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몸값도 받았으니 다 끝난 일 아닙니까?”“음, 그렇긴 한데 말이야.”무덕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돌연 윤성의 아랫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큭!”윤성은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참의영감!”라온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윤성을 살펴봐야 했다.
그러나 라온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무덕이 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그녀의 턱밑에 바싹 들이댔기 까닭이다.
그가 역한 입 냄새를 풍기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뜯어낸 건 좋은데 말이야. 한 가지 걱정이 들더란 말이지. 과연, 부원군 대감이 순순히 돈만 뜯기고 말까? 아닐 것 같더라고. 내가 뒷골목을 오래 전전하면서 대충 사람 볼 줄은 아는데, 그 양반 독해. 솜털이 죄 곤두설 정도로 차갑고 비정한 양반이야. 그런 사람이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지.”“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쉽게 설명하면 이런 거지. 돈은 받아서 좋은데, 뒤끝이 두렵다. 그런데 너희 두 녀석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네? 우리 대화를 들었으니 이름도 알 테고. 그냥 풀어주었다간 볼일 보고 뒤 안 닦은 것처럼 영 찝찝할 것 같단 말이지.”“설마…….”무덕이 씩 웃었다.
“매사 깔끔한 게 좋은 법이야.”쿵, 심장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듯했다.
잔뜩 얼어붙은 라온의 얼굴 위로 유백색의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꿀꺽,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라온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어떻게든 살아야 해.
도와주세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줘요.
화초저하, 김 형. 저 여기 있어요.
제발, 절 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하늘님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라온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악!”“커억!”라온을 둘러싸고 있던 둥근 포위망 뒤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냐?”당황한 무덕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푸른 달빛 사이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상하는 새처럼 검은 밤하늘 위로 높게 솟구친 사내는 눈빛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그런 사내의 눈에 라온의 모습이 맺혔다.
이윽고, 사내는 오직 달을 향해 내달리는 하얀 늑대처럼 오직 라온만을 향해 짓쳐 달렸다.
“김 형?”혹여 달밤이 그려내는 환상은 아닌가 하여, 차마 숨도 크게 내 쉴 수 없었다.
눈 한번 깜빡하면 사라지는 신기루인가 싶어 눈도 깜박하지 못하는 라온의 귓전으로 병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대들보 위를 올라갈 때도, 궁의 높은 담벼락을 넘을 때도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그가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질주한 경주마처럼 위태로운 숨결 사이로 바람을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괜찮은 거야?”정말 김 형이십니까?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자니, 병연이 라온의 앞으로 한 발짝 더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홍라온, 라온아. 너 정말 괜찮은 거야?”걱정스럽게 묻는 모습에 라온의 눈에 어룽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잡혀 온 내내 애써 태연한 척했던 마음이 병연을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기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 처연한 모습이 병연의 심장에 박혔다. 차마 소리 내지 못한 채 끅끅, 속울음을 우는 라온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프게 다가왔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리고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물끄러미 라온을 내려다보던 병연의 입에서 익숙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성가신 녀석.”불퉁한 말과 함께 병연은 라온을 힘껏 끌어안았다.
여린 몸이 그대로 그의 품 안에 오롯이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