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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57화 (57/131)

57.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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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가장 먼저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낮게 신음을 흘리는 그녀의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홍 내관, 괜찮습니까?”윤성이었다.

“네.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미간을 찡그린 채 라온은 겨우겨우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이 눈동자를 잠식했다.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눈을 감고 있으나, 뜨나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

“그런데 여긴 어딥니까?”바닥에서 차고 습한 냉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킁킁 냄새를 맡자 마른 짚 냄새와 함께 윤성의 것으로 짐작되는 사향 냄새가 떠올랐다.

“서대문 밖에 있는 낡은 헛간이라고 저희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저희들끼리 떠드는 소리라…….

윤성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두건을 쓴 괴한들, 그들 앞에 쓰러져 있던 윤성의 모습.

아마도 윤성이 말하는 저희들이란 자신들을 끌고 온 괴한들을 뜻하는 말인 모양이다.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라온의 눈에 윤성의 얼굴이 들어왔다.

예의 미소를 짓는 그를 보자 조금은 안심이…… 될 리가 없잖아! 지금 이 순간에 웃음이 나오십니까?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애써 억눌렀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라온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제 손과 발을 내려다보며 윤성에게 물었다. 묶여 있는 사정은 윤성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모습에 지금의 상황이 혹시 윤성의 짓궂은 장난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윤성의 대답에 티끌처럼 작은 희망마저도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홍 내관, 아무래도 우리, 납치된 것 같습니다.”“납치요? 왜요?”‘납치’라는 말에 라온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글쎄요.”“납치라는 것은 보통 이유가 있는 법이 아닙니까? 돈을 노린 납치라던가, 원한에 의한 납치 등등이 있지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치될 만한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혹시…….”사람을 잘못 보고 납치한 것은 아닐까요? 하고 물으려는 찰나.

허름한 헛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윽고 횃불을 앞세운 사내 서너 명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일행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거한이었다.

7척은 족히 넘어 보이는 장신의 거한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라운과 윤성에게로 다가왔다.

휙, 손에 들고 있던 횃불로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춰보던 거한이 돌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이놈들이 확실해?”라온과 윤성. 두 사람 모두 하나같이 곱상한 얼굴이라. 아무래도 자신들이 찾던 자가 아닌 듯싶었던 까닭이다.

거한의 물음에 뒤따라 헛간에 들어온 젊은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합니다요, 큰 형님. 저놈, 저놈이 그때 분명히 덕칠이 형님을…….”윤성을 손가락질하던 사내는 문득 윤성과 눈빛이 마주치자 찔끔 놀란 얼굴로 거한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사내는 며칠 전, 윤성과 라온에게 수작을 걸었던 덕칠의 부하였다.

그는 라온의 앞에서는 순순히 돈을 내어주며 안방샌님 흉내를 내던 윤성이 조금 후에 돌아와 덕칠을 해치우던 모습을 목격했다.

그때 때마침 소피가 마려워 자리를 피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덕칠과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 지금쯤 구천을 헤매고 있었으리라.

뒤늦게 볼일을 보고 돌아온 사내의 눈에 피를 흘리는 덕칠과 그런 그를 버려둔 채 떠나는 윤성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겁에 질린 사내는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한 채 골목에 숨어 윤성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

복수를 다짐한 그는 윤성을 찾아 시전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윤성을 발견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운성은 물론 라온까지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덕칠과 동료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윤성이 두려웠지만 사내에게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지난 몇십 년간 한양 뒷골목을 한 손아귀에 넣고 휘어잡았던 무덕.

사람 죽이는 일쯤이야, 필요하다면 아침 숭늉 마시듯 손쉽게 해대던 큰 형님이 있었던 탓에 사내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사내의 고자질에 무덕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런 머리를 쪼개도 시원찮을 놈이 내 아우를 건드렸단 말이지? 그것도 감히 내 구역에서?”으르렁 거리며 이를 드러내는 무덕의 모습은 사나운 날짐승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윤성을 찢어발길 듯 그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그런 무덕을 향해 윤성이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오해?”무덕이 콧방귀를 뀌며 몸을 일으켰다.

“오해든 육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휙,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린 무덕은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죽여서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둬라. 감히, 이 무덕이를 건드리면 양반이고 뭐고 성치 못 한다는 걸 이참에 단단히 알려줄 것이야.”“네! 큰 형님!”무덕의 명에 승냥이 같은 표정의 수하들이 천천히 라온과 윤성에게로 다가왔다.

“대체 덕칠이라는 사람이 누군데 저 사람들이 저러는 겁니까?”다가오는 무덕의 수하들을 보며 라온이 옴쳐드는 목소리로 윤성에게 물었다.

“글쎄요.”“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그것도 잘……?”정말 모르겠다는 윤성의 표정에 라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미치겠네.”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어찌한다? 어찌해?

뭔가 살아날 방도를 궁리해야 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잠깐!”위협적으로 단도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사내들과 무덕을 향해 라온이 소리쳤다.

“뭐냐?”퉷! 바닥에 침을 뱉은 무덕이 귀찮은 파리 보듯 라온을 바라보았다.

“지금 댁들이 누굴 납치했는 줄 아십니까?”“뭐?”“여기 있는 이분이 누군지 아시냐 물었습니다.”“그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곧 피를 토하고 뒈질 놈이라는 건 알고 있다.”라온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하듯 말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이분은 건드렸다간.”자신만만한 그녀의 태도에 사내들은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대체 저놈의 정체가 뭔데 저리도 당당한 걸까?

그때, 무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후비며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하듯 건성으로 툭툭 이야기를 던졌다.

“이봐, 어여쁘게 생긴 귀한 댁 도련님. 후! 도련님이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놈이 누구건 간에 우리는 손톱만큼도 두렵지 않아. 왜냐하면…….”“부원군 대감의 손자입니다.”무덕의 말허리를 자르며 라온이 소리쳤다.

“뭐?”“지금 당신들이 납치한 이분, 다름 아닌 중전마마의 조카 되시는 분입니다.”“그게…… 사실이냐?”무덕이 눈을 부라리며 협박하듯 물었지만, 라온은 그의 험악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부원군 대감댁의 일입니다. 조사하면 금방 들통 날 거짓을 왜 하겠습니까?”잠시 뒤룩, 눈동자를 굴리던 무덕이 등 뒤에 서 있는 사내의 정강이를 냅다 후려 갈겼다.

“이 썩을 놈아. 그런 걸 왜 말 안 해?”“저, 저도 몰랐습니다, 큰 형님.”“이런 썅! 하필 건드려도…….”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무덕과 그 수하들을 보며 라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참의영감, 본의 아니게 집안을 들먹여 죄송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살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리 살아났으니…….

“넌 아무 죄도 없는 것 같아 살려주려 했더니. 안 되겠다. 살려뒀다간 후환이 생길 것이 틀림없으니. 저놈도 같이 죽여서 사람들 안 보는 곳에 던져버려라.”“네. 큰 형님.”어라? 이게 아닌데…….

***

긴 장방형의 방안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밀조직인 백운회의 임시회의. 영을 비롯한 병연과 백운회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회의였다.

상석에 앉아 있던 영은 어두워지는 밖을 응시했다. 금세 끝나리라 생각했던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간단하게 차려진 저녁 식사가 영을 비롯한 사람들의 앞에 각기 놓였다.

별로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수저를 들지 않으면 다른 이들도 먹지 못하기에, 영은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그때였다.

회의 내내 좀처럼 열리는 법이 없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세자익위사 한율이 빠른 걸음으로 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궁까지 잘 데려다 주었느냐?”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영이 물었다.

늦어진 회의 탓에 라온과의 약조한 시간을 지킬 수 없었음이라. 율을 대신 내보내 궁까지 라온을 데려다주라고 명을 내렸던 것이다.

왕세자의 물음에 한율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더냐?”영이 고개를 돌려 대답을 주저하는 제 호위무사를 응시했다. 소리없는 재촉에 한율이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약조한 곳엔 아무도 없었사옵니다.”“그게 무슨 말이더냐? 분명 술시까지는 약조한 장소로 나오라 하였단 말이다. 약조를 어길 녀석이 아니다.”“하오나 아무리 기다려도…….”“뭐라?”“혹시나 하여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여전히 찾을 수가 없었나이다.”“……!”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영과 한율, 두 사람 간의 소리 없는 동요에 병연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녀석이 사라졌다.”영의 낮은 목소리에 병연이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녀석이라면…… 설마 홍라온, 그 녀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영이 이처럼 흔들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더더구나 ‘그 녀석’이라 칭할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병연은 라온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 그 녀석.”

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연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오늘 잠행에 녀석을 대동했다. 회의가 이리 길어질 줄 모르고 녀석과 헤어져 술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는데…… 아니 나왔다고 하는구나. 행여 지난번 명온에게 당했던 것처럼 무슨 험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닌지…….”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병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초지종을 묻는 사람들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문을 열고 사라졌다.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대체 회주께서 왜 저러는 것이옵니까?”당황한 사람들이 영에게 연유를 물어왔다.

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정을 설명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그 단호한 거절에 사람들은 감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연이 사라진 자리를 무거운 침묵으로 바라보던 영이 백운회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회의는 이만 끝마쳐야겠소.”“네?”“하오나.”사람들이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아직 많았다.

일과 연관되어서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영이 오늘 처음으로 관례를 깼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회를 끝마치기에 앞서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소.”영이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즉시 백운회의 모든 힘을 투입하여 한 사람을 찾으시오. 다른 무엇보다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특별한 사안이오.”조급함마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분분히 고개를 조아렸다.

“명 받들겠나이다.”그들을 내려다보며 영이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라 하였소.”말을 마친 영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방을 나섰다. 남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직접 찾을 생각이었다.

‘라온아.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 맹랑한 녀석, 감히 나를 걱정시키다니, 찾으면 혼쭐이 날 줄 알아라. 그러니 내가 찾을 때까지 무사히만 있어라. 제발 무사히만…….’

***

“잠, 잠깐만요.”라온은 자신을 윤성과 같이 죽이라는 무덕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살 떨리게 긴장되었던 삶이 조금은 편해지는가 싶었는데. 여기서 죽으라고? 어림도 없지. 억울해서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라온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는 무덕을 올려다보았다.

“왜? 또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지금 우리를 죽이면 장담컨대 후회하실 겁니다.”“후환이 두렵지 않느냔 말을 할 셈이냐? 그래, 두렵다. 그래서 증거를 남기지 않을 작정이다.”저까지 죽여서 말이지요?

느닷없는 죽음의 위기에 입안이 바싹 바싹 말라왔다.

안 돼.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떨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 저들에게 들키면 안 돼.

라온은 애써 목을 가다듬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후회할 겁니다. 인생에 몇 없는 큰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니까요.”“기회?”무덕이 아둔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내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부원군 대감의 손자를 죽이려고 드는 일이 왜 일생일대의 기회란 말인 거지? 오히려 일생일대의 위기가 아닌가?

라온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답답들 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천하의 부원군 대감의 손자를 납치했습니다. 세도가의 손자를 납치했단 말입니다. 뭐 떠오르는 게 없습니까?”“뭐가 떠오른다는 게냐?”“저라면 이대로 죽이진 않을 겁니다.”“죽이지 않으면?”“부원군 대감께서 손자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찌할까요? 아마 원하는 대로 몸값을 지불하고서라도 손자를 살리실 겁니다.”“몸값이라…….”무덕이 덥수룩한 턱수염을 긁으며 흥미를 보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미끼를 물었다.

라온은 은근한 목소리로 무덕을 부추겼다.

“아무렴요. 애지중지하는 손자인걸요. 아마 천금을 주고라도 살리려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죽이는 것보다 이참에 한 몫 단단히 챙기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호오. 과연 그렇겠군.”무덕이 탐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수하들도 입맛을 다시며 관심을 보였다. 천금이라는 말에 냉정한 이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원군 대감에게서 천금을 받아내고 호의호식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이대로 우리 둘을 죽이고 평생 도망자가 되겠습니까?”“으흐흐. 당연히 천금이 좋겠지.”무덕이 크크, 괴이한 웃음을 흘렸고, 전염되듯 수하들도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계획을 변경한다. 지금 당장 부원군 대감한테 가서 저놈의 몸값을 요구해야겠다. 아니, 아니다. 내가 직접 가야겠군.”갑자기 흥이 난 듯 무덕이 헛간을 나섰다.

그의 등 뒤에 대고 라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값을 받으면 저희는 풀어주시는 겁니까?”무덕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글쎄, 일단 몸값부터 받아내고 생각해보자.”“네?”보란 듯이 씨익 웃어 보인 무덕과 그의 수하들이 헛간을 나갔다. 이윽고 헛간 문은 밖에서 단단히 잠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온은 긴 한숨을 흘렸다.

“틀렸습니다. 저들은 아무래도 우릴 끝내 살려줄 생각이 없나 봅니다.”무덕이 마지막에 보인 태도는 결코 몸값으로 끝낼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몸값은 몸값대로 받고, 복수는 복수대로 할 생각이 분명했다.

그런데 대체 뭘 복수하겠다는 거야?

무거운 침묵을 깨고 윤성이 입을 열었다.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홍 내관.”“죄송합니다. 어떻게라도 시간을 벌면 살 수 있는 방도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본의 아니게 참의영감의 집안을 입에 올렸…….”“그런 묘책을 생각해내다니요.”“묘책이라 하셨습니까?”“저는 겁이 나서 아무 생각도 안 났는데. 그 와중에 어찌 그런 훌륭한 묘안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까?”“그게……”윤성의 칭찬에 라온은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착한 얼굴로 칭찬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제가 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그나저나…….

“저자들, 정말 우리를 죽일까요?”불안 섞인 라온의 물음에 윤성이 확신하듯 대답했다.

“네. 기세를 봐서는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 같습니다.”“…….”그런 잔인한 얘기, 그렇게 웃으며 하지 마세요.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죽다니.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자들은 참의영감께서 자신들의 아우를 해쳤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참의영감께서 그런 일을 했을 리 없질 않습니까?”“…….”“아무래도 뭔가 오해를…….”“오해가 아닌 듯합니다. 정말 저 때문에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윤성의 느닷없는 고백에 라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래도 최 대감댁의 셋째 따님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최 대감댁의 셋째 따님이요?”“그것도 아니면 윤 대감 댁의 막내 때문인가?”“…….”뭡니까? 이거 치정극이었던 겁니까?

라온은 의심의 눈초리로 윤성을 바라보았다. 윤성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홍 내관. 저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시게 되다니.”“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습니다.”그러고 보니 이렇게 납치된 것이 모두 두 번인데, 두 번 모두 여인의 한 때문에 일어난 일이군. 역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여인의 한이야.

라온의 두 눈에 침통한 빛이 깃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건 주고 싶었는데.”라온은 제 근처에 있는 보퉁이를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화초저하께서 주신 선물, 어머니와 단희에게 주고 싶었는데. 그분께서 주신 저 어여쁜 옷도 입어보고 싶었건만.

“저게 무엇인데요?”“우리 어머니와 동생에게 줄 선물이지요.”“아,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습니까?”라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사항은 진작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윤성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문득 라온의 얼굴에 행복한 기운이 꽃봉오리처럼 피어올랐다.

“네.”“홍 내관의 가족이라면…… 홍 내관처럼 재미있는 분들이겠군요?”“네. 함께 있으면 즐겁습니다. 우리 단희는 우스갯소리를 참 잘하는 아이에요. 어릴 적부터 아팠던 탓에 바깥나들이를 못했지만, 대신 소일 삼아 책을 많이 읽었지요. 제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꼭 그날 읽었던 책의 내용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게 들려주는지, 딱히 책을 보지 않아도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곤 했지요.”헛간의 낡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보며 라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그분은 정말 따뜻하세요.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어머니 품에만 안겨 있으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따뜻했습니다.”그리움이 한껏 묻어난 목소리에 물기가 들어찼다.

윤성은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절반은 부럽다는 시선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족을 떠올리며 저리도 밝게 웃을 수 있다니.

서둘러 우울함을 씻어낸 라온이 윤성에게 물었다.

“참의영감의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부모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형제는요? 참의영감 역시 따뜻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나셨겠지요?”“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웃을 수가 없질 않겠습니까. 참의영감처럼 이리 따뜻하게 웃는 분이시라면, 필시 자라온 환경이나 곁을 지키는 사람들 모두 따뜻할 겁니다.”“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아닙니까?”“글쎄요.”문득 윤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어릴 적, 저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였지요. 세 살에 천자문을 떼고 다섯 살엔 시를 지었지요.”“대단하군요.”“다들 그리 말하더군요.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그 정도 재주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스스로 열을 깨우치길 바라셨고, 열을 깨우치면 백을 터득하길 바라셨습니다.”“…….”“또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언제였더라? 아마도 아홉 살 되던 해였을 겁니다. 왕세자 저하와 시문을 겨루는 자리에서 지고 말았지요. 그 일로 꼬박 열흘을 광에 갇혀 있었지요. 하필이면 해오름달(1월)에 일어난 일인지라 갇혀 있는 동안 추위 때문에 배고픔도 잊을 지경이었습니다.”가슴 아픈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덤덤히 읊조리는 윤성의 모습에 라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마, 아마도 어른들께서는 참의영감을 귀이 여기셔서 그리 하셨을 겁니다. 왜 이런 말도 있질 않습니까?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은 매 한 대 더 친다는 말, 말입니다.”“그런가요? 그런 모양입니다.”윤성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라온이 가족을 떠올리며 짓던 그 꾸밈없는 웃음과는 달랐다.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꽃은 꽃이되 향기가 없는 조화(造花) 같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왠지 평소와 다르게 아프고 슬퍼 보였다.

“하지만 참의영감께서도 항상 웃고 계시질 않습니까? 행복해서 웃으시는 것이 아닙니까?”“사람이 웃는다고 해서 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 때론 자기 마음을 감추기 위해 웃는 사람도 있습니다.”“그러나…….”황급히 도리질을 하며 라온이 덧붙여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거라고 말입니다. 참의영감께선 언제나 웃으시니. 곧 행복해지실 겁니다.”확신하는 라온을 보며 윤성은 잠시 굳어졌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라온의 얼굴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보다 더 큰 행복이 보였다.

라온의 말처럼 되고 싶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진정으로 그리 되고 싶었다. 아니, 그리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사람과 함께라면…… 홍라온, 저 여인이 곁에 있으면 자신도 진심으로 우러나온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 갖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홍라온, 그녀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졌다.

잠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라온을 응시하던 윤성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홍 내관의 말이 옳습니다. 이리 웃다보면 정말 행복해지겠지요.”

***

같은 시각.

백운회의 정보통 박만충의 발길이 분주했다. 백운회에 몸을 담은 이후로 이토록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엔 좀처럼 서둘러 걷는 일조차 없던 박만충은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렸다. 이윽고 그가 도착한 곳은 남촌의 은밀한 초가였다.

“회주님, 소인 박 가이옵니다.”“들라.”짧은 한 마디에 박만충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삿갓을 깊게 눌러쓴 병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나?”“오늘 백운회의 크고 작은 정보망을 모두 가동시켰습니다. 그 와중에 기이한 사건 두 가지를 추려낼 수 있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무덕이라는 파락호가 벌인 납치사건인데…….”“납치사건?”“네. 그 첫 번째가 목멱산 자락에 있는 임가 소유의 허름한 헛간으로 두 명의 사내가 납치된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서대문 밖의 헛간으로 역시나 두 사내가 납치된 일입니다.”“각기 어떤 자들이 납치된 줄은 모르고?”“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서둘러야겠군.”말의 파장이 허공으로 채 번지기 전에, 병연은 어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심한 표정과는 달리 그의 심장은 라온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부터 무섭게 날뛰고 있었다.

홍라온, 너 괜찮은 거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괜찮아야 한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염원을 담은 그의 신형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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